알아야할한국사

의롭고 자애로운 군주, 백제 의자왕

영지니 2007. 12. 30. 18:31

현군 의자왕(義慈王)

 

우리가 의자왕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것이 있다. 모두들 생각하듯이 삼천궁녀..그리고 사치스러운 왕이었다는것..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을것이라 생각한다.우선 의자왕(義慈王)의 이름을 보자.의로울 의()자혜로울 자() 분명 이 이름은 의자왕 사후에 붙혀진 시호이다. 과연 나라를 말아먹은 사치스런 왕에게 이런 칭호가 어울리기나 하였을까?

 

부여에 유왕산이라는 산이 하나 있다. 의자천황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 포로로 끌려갈때 마지막으로 백성들과 이별을 나누었다는 곳이다.

이 이야기에 관해서 부여의 한 향토 사학자가 역사스페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자왕이 끌려갈 당시 백제 유민들이 이산에 올라와 많이 울고 통곡하고 임금을 부르고 그러니까 엄청난 통곡의 현장이었죠 임금님이 백제 유민들한테 위로도 해 주고 잘 갔다돌아 오겠다는 돌아오겠다는 기약은 없지만그런 슬픈 전설이 있는 산입니다'

 

백제 유민들은 유왕산에서 부터 구드래 나룻터까지 임금을 따라 대성 통곡을 했다는 것이다.

 

과연 백제를 망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까지 물리며 자신은 사치생활을 했다는 왕에게 이런 반응을 보일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의자왕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도록 하자.

의자왕의 즉위 시기는 641년이라 적고있다. 태자 융을 20살에 낳았으니 적어도 왕위에 오른 나이는 40대.. 인생의 완숙기에 접어든 왕이 그것도 태자 시절에 해동증자라 불렸던 왕이 그렇게 일순간 망가질수 있었을까? 이 내용에 관해서 역사스페셜 인터뷰를 인용하겠다.

 

'사십세라고 하면 불혹의 나이 인생의 완숙기이기때문에 의자왕이 지니고 있던 평소의 태자로서 준비 기간을 거쳤던 몸소 쌓아 왔던 여러가지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나이였기 때문에자신이 정치를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도 의자왕을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의자)왕은 성격이 호방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의자왕은 심성도 곧았고 과단성 있는 군주였다.아울러 효심도 깊었고 우애도 깊었고 아주 지혜로웠다 태자 기간 10년을 거치며 여러가지 검증도 받아 왔다 어느 왕 못지 않은 군주였다. 그럼에도 불구 의자왕이 부정적인 시각 잘못알고 있는 건 아닐까 의자왕의 또다른 실체가 있지 않을까 이부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 의자왕조를 보게되면 유달리 의자왕의 신라공격 기사가 많이 나온다.

재위 20년동안 어림잡아 10차례의 공격을 한것이니 2년의 1번꼴로 신라를 공격하게 된것이다.

 

의자왕은 정복군주!?

 

백제의 대야성 공격.. 이것은 신라 백제 양국관계에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 된다. 백제는 대야성 공격을 통해 낙동강 서쪽 영남지방을 확보하게 된다. 백제의 대야성 함락에 관해서 김주성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역사스페셜.)

 

'대야성이 함락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신라 입장에서는 대단히 큰 손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즉 백제의 입장에서는 거꾸로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이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신라의 입장으로선 이제 백제군을 코 앞에두었다는 얘기가 되게 됩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뿐만 아니라 그해 의자왕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신라의 사십여성을 일거에 함락시켰다.'

 

의자왕의 신라에 대한 총 공세가 시작된것이다. 이 내용에 관해 이도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역사스페셜)

'왕이 몸소 전장에 나가서 작전을 지휘하고 그리고 전쟁을 치루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전쟁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려주는 동시에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국왕의 권위랄까 왕권이라고 하는것이 크게 강화되게 마련이다. 이러한 것을 노리고 의자왕은 몸소 대신라 전쟁에 친정을 단행했다, 라고 볼수가 있다. 그리고 40여개 성을 일거에 장악을 함으로써 의자왕의 권위랄까, 왕권의 위상은 크게 증대됐다,이렇게 볼 수 있다'

 

의자왕은 지속적으로 신라에 압박을 들어간다. 집권 20년동안 무려 10차례나 신라를 공격하였다. 백제의 신라 공격에 대해서는 백제의 오랜 아픔이 있었다.

 

'한강유역은 백제의 발상지가 되겠습니다. 하안성 백제가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고요, 76년만에 나제동맹을 적절히 활용하여 한강유역을 회복하기까지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신라의 배신행위로 한강유역을 상실했기 때문에 이 곳을 회복해야 되겠다는 그런 열망과 이상, 이것이 백제사람들은 뜩겁게 가지고 있었고 그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 의자왕은 한강유역  탈환을 박차를 가하게된 것입니다'(이도학교수/역사스페셜)

 

그렇기 때문에 의자왕의 제일의 목표는 빼앗긴 땅을 되찾는 것이었다. 의자왕은 낙동강 동쪽으로 신라를 몰아내고 소백산 넘어까지 영역을 넓혔다.

 

'고대 국가에서의 전쟁이라는 것은 왕의 통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의자왕이 신라에 대한 공격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결국 내부적으로 의자왕의 정치가 내부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기반으로 신라에 대한 공격이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황교수/역사스페셜)

 

끊임없는 정복 전쟁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기반으로 한  강한 국력이 있었다 .

 

삼천궁녀의 진실

 

주서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수도 사비의 인구수는 1만호이다.』

 

라고 나와있다.

 

1호당 5명씩 친다해도 5만명. 당시 사비에는 5만명 이상의 인구가 살았다는 것이된다.(당시 생산력에 비한다면 굉장한 수치이다.)그중 2만 5천명이 여성이었다고 한다. 여성중에 어린아이 노약자를 뺀 젊은 여성은 1만 5천명. 그렇다면 사비도성의 젊은 여성 20%가 궁녀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먹는 양을 보도록 하자. 성인 한끼 식사량이 250~350그램 삼천명이 하루에 먹는 양을 보아도 약 9백 킬로그램이나 된다. 쌀 한가마가 약 50킬로그램 정도이니 삼천궁녀에게 하루 들어가는 시량만 해도 한달에 쌀이 500가마가 넘어가게 된다. 식량 문제가 해결된다해도 사비도성 황궁 안에는 삼천명이라는 궁녀를 수용할만한 시설이 없었다고 한다.(역사스페셜)

 

역사적볼 때 궁녀의 수는 시대가 흐를수록 증가 추세라고 볼 수 있는데 조선왕조 26대 고종.대체로 19세기 후반 별궁까지 합치면 총합 6백명 이상 궁궐에 거주 확인된다 그런 것 비춰서 백제가 멸망할 때는 7세기 중엽인데 그때 관원의 숫자나 당시 인구 농업 생산력 왕실의 규모에 비춰 볼 때 삼천궁녀가 궁궐에 거주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름대로 백제의 역사가 기록되어있는 일본서기 어느곳에서도 의자왕의 주색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수가 없었다. 그리고 삼천궁녀에 대한 기록은 더더욱 찾아볼수가 없었다.(필자가 못 찾았을수도 있으므로 있으시면 말씀 주세요.)

 

삼국사기의 이변기사!?

백제 패망 이전 백제에는 많은 이변이 있었다고 삼국사기에서는 적고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여우떼가 궁중에 들어 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 앉았다.』

『두꺼비 수만마리가 나무위에 모여 들었다.』

『어떤 여자의 시신이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18척이었다.』

『태자 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교미를 하였다.』

 

이런 이변이 백제의 멸망한다는 징조였던 걸까?

물론 이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백제 내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한 것일테다, 그렇더라도 백제 멸망의 징조로는 너무 황당스러운 이해가 안되는 것들이다.마지막까지도 강성했던 백제는 왜 망할 수 밖에 없었을것인가?

백제 멸망의 진실을 밝히자.

 

백제의 패망

 

백제 패망 당시를 엿볼수 있는 유물이 있다.

백제 황실의 상징 금동 대향로. 이 향로 발견을 통해 백제 최후의 날을 엿볼수있다. 대향로가 발견된곳은 부여시 외곽 능산리 고분지. 향로는 이곳에서 공사중에 발견되었다. 대향로는 발견 당시 웅덩이의 안쪽 바닥에는 나무 판자를 깔고 그위에는 잘게 부순 토기 조각이 깔려 있다.  일부러 묻었다는 흔적이 엿보인다.

백제의 최후의 날에 누군가가 이 향로를 황급히 묻었던 것이다

'백제 금동 대향로는 왕실의 최고의 물건이 됩니다. 그런 최고의 물건이 누군가에 의해서 땅속에 묻혀진 채로 발견이 됐습니다. 이런 위급한 상황, 제대로 잘 보관되지도 못하고 땅 속에 묻힐 정도로 그렇게 위급한 상황은 바로 백제가 마지막 망할 때 얼마나 다급했는지 그런 상황을 잘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부여박물관장/역사스페셜)


백제 패망에 직접적인 타격을 날린 세력은 이었다.

백제는 무왕때부터 당에 조공사신을 보내며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의자왕 즉위때도 당은 의자왕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교서를 내렸다고 한다.

반면 신라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었다. 백제의 지속적인 공격에 신라는 당과의 관계에 국운을 걸게된다.

신라는 당의 원조를 얻기위해 제도와 복식,연호를 당나라의 것으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당시 최고 통치자였던 진덕여왕이 직접 당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바칠 정도였다.

 

 '신라측에서 사생결단식으로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돈독하게 맺기 위해서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의자왕이 당나라와의 우호적인 외교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세력이 대동방제국 일환으로 당나라 편, 또하나는 당나라 입장에서 볼때는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고, 이러한 전략적인 차원에서 효과적인 후방에 병참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봤던 것이다 백제를 소멸시켜서 남북으로 협공해서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신라의편을 들어 줬다고 볼 수 있다'(이도학교수/역사스페셜)

 

'그동안 지속시켜왔던 신라로부터 빼앗긴 땅을 되찾는 작업을 계속해 나가느냐, 아니면 중국 당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신라로부터의 실지회복을 포기를 하고 동북아 질서에 편입되느냐 둘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의자왕의 입장에서는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는 문제가 중요한 것으로 받아졌기 때문에 결국 중국 중심의 질서로부터 벗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양교수/역사스페셜)

 

당의 노골적인 신라 편들기는 의자왕으로써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의자왕 12년, 결국 의자왕은 당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제관계를 모색하게 된다.

백제는 고구려와 손을 잡고 해외영토인 왜를 통해 당과 신라를 견제하는 십자외교 관계이다.

이러한 국제관계를 토대로 의자왕은 패망 직전까지도 신라에 대한 정복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660년 당이 13만의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면서 파국의 길을 맞게 된다.

그리고 신라군이 황산벌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를 돌파하고 18만의 나당 연합군에 의해 사비가 함락되게 된다.

그리고 660년 여름.. 백제라는 이름은 역사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해서 백제를 공격, 결국망하게 되는데 당나라는 세계 최강의 군대, 대제국과의 충돌이라는 것은 백제의 멸망을 자초하는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 의자왕 아니라 걸출한 임금이 나왔다 하더라도 당나라와의 싸움은 승산이없었다'(이도학교수/역사스페셜)

 

그리고 사비성에서는 백제의 항복식이 치러진다.

 

『(의자)왕이 단 아래서 소정방과 김춘추에게 술을 따르자 울지않는이가 없었다.』

 

그리고 백제국 마지막 왕 의자왕은 포로로써 당나라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1300년이 지난후까지 돌아올수 없었다..

 

'의자왕 최고 통치자 분명 백제 멸망 책임 벗어날 수 없다 의자왕 개인 자질 연결 평가하는 것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황교수/역사스페셜)

지금까지 필자가 많은 자료를 통해 올린 글이다.

필자가 옳다는것이 아니다. 필자의 생각일 뿐이니 말이다.

 

 

 

출처:

이선생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