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역사 관련 사이트에 가면 신라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필자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었다. 하지만 신라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과연 신라가 욕을 먹어야 하는지에 의문이 들었다.
신라가 비난받는 큰 이유는 외세인 당을 끌여들여 동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신라로서는 당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을 맺은 상태에서 끊임없이 신라의 영토를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자구책으로 당과 손 잡음으로써 동족의 국가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켜 부분적이나마 통일을 이루었다.
물론 신라의 통일 방식은 잘못된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비판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신라의 통일은 앞으로 우리민족의 통일 방식에 대해 많은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본다. 신라의 과오를 거울 삼아 우리는 고려처럼 자주적, 민족적으로 통일을 강구할 수 있으리라 본다.
신라의 통일로 만주와 대륙을 내달리던 고구려와 해양을 누빈 백제의 멸망으로 우리의 무대가 축소되었기 때문에 신라를 욕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고구려, 백제 못지 않게 신라 역시 우리의 역사이다. 일부 사람들은 신라라는 존재를 부정하지만, 왜 우리 조상들이 세운 국가를 부정하는지 필자는 도통 모르겠다. 신라는 우리 선조들이 세운 자랑스러운 국가였다.
신라에게 배울 점은 무엇인가?
첫째,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해 우리의 전통을 강하게 유지하였다.
삼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구려가 372년에 불교를 수용하고 백제는 384년에 수용한다. 하지만 신라는 그보다 2백여 년 늦은 527년에서야 불교를 받아들인다. 왜 신라는 불교를 늦게 받아들였을까? 그것은 당시 신라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우리의 전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시다시피, 신라는 골품제라는 특유의 신분제를 가지고 있었다. 골품제는 신분에 따라 관직 진출, 혼인·의복·가옥 등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규제를 한 신분제도로서 왕족인 성골, 귀족인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신라의 골품제가 신라의 발전에 장애였다고 하지만, 필자는 신라의 골품제야 말로 우리민족 고유의 전통을 유지하는 데 큰 힘을 발휘했다고 보여진다.
신라는 골품제로 당시 왕족인 성골의 혈통을 강하게 유지하였다. 게다가 신라에서 여왕이 3명이 등장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즉, 당시 신라는 혈통을 중시했는데, 본래 우리민족은 혈통을 중시한 민족이었다. 그렇기에 신라는 우리의 전통을 중시했을 것이고, 골품제를 통해 유지했을 것이다.
신라의 법흥왕이 불교를 받아들이려고 할 때 많은 국인들이 반대하였다. 이는 우리의 전통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게다가 신라의 화랑도 역시 이러한 전통에서 유래했다.(단군세기에 따르면 고조선 시대 때 화랑제도가 있었다고 함). 그리고 신라 말 대학자인 최치원 역시 신라에 현묘한 도가 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해 우리 선조들의 전통을 강하게 유지했을 것이라 본다.
신라의 정치제도로 화백제도가 있다. 이 제도는 귀족들의 만장합일정책으로, 고조선의 풍습이었다고 한다.
화백회의 중에 견해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 각자 옆방으로 가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이 어떠한 일인가를 재삼 생각하고 다시 회의에 임하여 모든 사람이 만장일치가 될 때까지 회의를 하여 국사(國事)를 결정했다고 한다.
이러한 화백제도는 소수의 의견도 존중하여 진정 나라와 민족에 도움이 되는 결정을 하고자 만든 훌륭한 제도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제도를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사사로운 욕심과 개인의 감정을 앞세우지 않을 정도로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 정치인들한테 이런 화백제도를 통해 의사결정을 하라고 하면 아마도 한 건도 결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화백제도가 민주주의의 다수결의 원칙보다도 훨씬 앞선 제도임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신라에 화백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신라가 우리 조상들의 풍습과 전통을 강하게 유지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라 할 수 있다.
둘째, 신라는 당과의 동맹에서 많은 이득을 챙겼다.
현재 대한민국의 외교를 보면 참 한숨만 나옵니다. 이득을 챙기기는 커녕 주변 강대국들에게 손해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라가 당에게 엄청난 이득을 안겨주었다고 보는데, 사실 가장 큰 이득을 얻은 쪽은 당이 아닌 신라입니다. 당과의 동맹을 통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는 한반도에서 당을 몰아냈습니다. 더군다나 만주 지방에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가 들어섰죠. 결국 당은 아무런 소득 없이 신라를 위해 싸워준 꼴입니다.
셋째, 신라는 저력이 있는 국가였다.
당나라와 동맹을 체결한 신라가 어떻게 당을 몰아내었을까요? 당과 신라는 우선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국력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신라는 평양 이남의 고구려 영토와 백제 영토를 주겠다는 약속을 위반한 당나라를 응징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굴욕을 참아가면서 당에게 머리를 굽신거렸습니다. 나라가 망할 위기상황에서 신라는 당에게 아부를 해야 했습니다. 살아야 하니까요. 그렇다고 그것이 진정한 사대였을까요.
신라는 669년 토번이 강성해져서 당이 동쪽을 공격할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미 고구려 정벌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아부운 당나라가 과대팽창으로 인해 국력이 쇄잔해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때를 기다려온 신라는 마침내 당나라를 공격합니다. 당나라는 예상대로 주력군을 토번전선에 투입했다가 대비천 전투에서 주력군이 괴멸을 당하지요. 그 바람에 신라와의 전투에서는 전투의지가 약한 거란족과 말갈족을 동원했다가 그냥 신라에게 깨지고 맙니다.
신라는 당나라가 다시 전력을 기울여 공격해오면 불리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양보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실리를 찾지요. 저들의 명분을 세워주고 영토를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
신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문무왕은 정말 탁월한 군주입니다. 문무왕의 그러한 능력이야 말로 신라가 천년을 갈 수 있었던 힘입니다.
넷째, 신라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문화강국이었다.
통일 이후 신라는 외국과의 교역으로 경제적 부를 쌓았을 뿐 아니라 찬란한 문화를 남겼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불국사, 석굴암,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황룡사입니다. 특히 석굴암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뛰어난 문화재입니다. 이런 뛰어난 문화를 낳은 신라가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게다가 당시 신라는 당과, 일본, 발해 뿐만 아니라 멀리 아라비아와도 교역을 했습니다. 당시 아랍 상인들은 신라를 '황금의 나라'라 칭송했습니다. 당시 신라에서는 지붕에 금을 입힌 금입택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신라의 경제적 부가 엄청났음을 뜻합니다. (이는 신라의 청해진에서 확인할 수 있죠) 신라는 울산항을 국제항으로 하여 저 멀리 아라비아와도 교역을 한 것입니다.
한 때 신라의 수도 금성은 17만 8000여 호라는 대인구가 거주했습니다. 1360방 55리, 35 금입택, 사절유택 등이 있었고, 성중에는 초가집도 없고 지붕과 담이 연하였으며 노랫소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달았다고 합니다.
아래는 펌 글
8세기 전세계 4대도시 는 콘스탄티노플, 장안, 바그다드, 그리고 신라 서라벌 이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한양 인구가 20만인것을 볼 때, 그로부터 1000년 전의 도시 인구가 100만이란것은 정말 대단한 수치인것입니다. 하지만 신라는 단지 인구만 많은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위의 [왕경도]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는 대단한 계획도시 였습니다.우선 천년 전 신라인이 걸었을 길은 집과 집 사이로 반듯하게 나 있습니다. 또한 골목마나 출입문이 있어 치안상태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서라벌은 몇번째 골목, 몇번째 집 하는 식으로 주소만 알면 집찾기도 매우 쉽게 되어있습니다.
집터에서는 아궁이 시설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기록에 의하면, 신라인들은 숯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미 신라시대의 풍로가 출토된 바로 미루어 실내에선 온돌 대신 풍로를 놓고 숯을 피워 난방을 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숯을 때면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고 그을음도 생기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의 주거환경은 상당히 쾌적했던 것 같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서라벌에는 집에 금을 입힌 금입택이 30채나 되었다고 합니다.배수시설도 완벽 히 되어있었고 일정한 간격으로 수십개의 우물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또 당시 신라의 도로는 인도와 마차가 다니는 차도로 나뉘어있었습니다.그 도로는 규격별 로 나뉘어 있었고, 길을 지나다니는 마차의 폭도 고구려의 예를 들어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서라벌은 도시 전체가 바둑판 모양 으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고구려도 마찬가지로서 우리나라 계획도시의 역사는 이미 1500년이 넘은것입니다.많은 분들께서 '역사' 하면 조선을 떠올리며 그 이전의 시대는 조선보다 못했을거라고 넘겨짚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조선보다 훨씬 번영했고 자유로웠던 모습이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가 수십장이 작성 되었습니다.
신라와의 무역내역을 적은 문서인데, 오사카대학의 도노 하루유키 교수의 문서 분석 결과 신라 물건을 살 수 있었던 사람은 5위 이상의 고위 귀족들 이라고 합니다.또 이 [매신라물해]에 나타나는 물품에는 신라 물품 말고도 동남아산 향료와 약초, 중국산 비단, 페르시아산 물품까지 적혀있습니다.
즉, 세계 각지의 물품들을 신라를 통해 들여왔던 것입니다.또한 당시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물건들은 단순한 수입품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일본 귀족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상층 귀족문화의 상징 이 된것입니다.
당시 아랍쪽의 신라 관련 기록.
중국의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떠나려 하지 않는다
-창세와 역사서<마크디시(al-Maqdi shi>,966년(신라가 망한 직후)-
그 곳(신라)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하여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 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이드리시(이슬람 지리학자)-1154년에 신라가 포함된 지도를 만듬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대단히 좋은 나라다.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 - 아주 좋은 향기)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에 걸린 사람이 그곳에 오면 곧 치유된다.
-무슬림이 남긴 것이라고만 전합니다-
중국 저쪽에 산이 많은 ‘신라(Shila)’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고 물 맑고 공기가 좋아
한번 간 무슬림은 돌아오지 않는다
-후르다드베(Ibn Khurdadbeh)의 '제 도로와 왕국 총람' (이슬람) -
위 기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라는 개목걸이에도 금을 쓸 정도로 금이 풍부한 나라였고 화려한 나라였습니다.
신라의 지리적 위치와 관련된 기록을 종합해 보면
첫째, 신라가 중국의 동편, 지구의 동단(동쪽 끝)에 자리하고 있으며,
둘째, 바다(태평양)에 에워싸여 있다는 것으로서 아주 정확하다.
‘사막의 아들’로부터 일약 ‘바다의 아들’로 변신한 아랍-무슬림들에게 산 좋고 물 좋고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는 신라는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쾌적한 자연환경 속에서 넉넉한 부의 혜택을 누리는 이상향적인 곳이었다.
중세 아랍 문헌에는 신라의 역사에 관한 기술도 있다.
그 중 신라와 중국(당) 간에 선물이 교환되지 않으면 천벌로 가뭄이 든다는 ‘하늘의 뜻’을 빌려 양국 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 점과, 특히 양국 간에 상호성에 기초한 선물 교환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 대목이 주목된다
이래도 신라가 부끄러운 역사입니까?
신라는 아랍인들이 황금의 나라라고 칭송하고, 부러워한 우리의 선조 국가입니다.
신라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입니다.
출처 : | 이선생의 블로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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