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한·미·일 동맹 짰다
닉슨 정부 비밀 외교문서 최초 공개… 박정희 - 닉슨 통신, 미일 안보회담의 기록 상세 분석
편집자: 미국의 대아시아 군사·외교정책을 연구하고 있는 프리랜스 언론인 팀 셔록이 최근 비밀 해제된 닉슨 정부 외교문서에 관한 글을 보내왔다. 한국, 일본과 관련된 주요 문서들을 요약한 이 글은 베트남전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일본의 공조체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문서에 따르면 베트남전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은 남한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며 한-미-일의 동맹을 구축했다. <한겨레21>은 박정희가 닉슨에게 보낸 서한 등 주요 문서들의 전문을 입수하여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는 대로 후속기사를 실을 계획이다.
1972년 3월30일 북베트남군 3만명 병사들은 남베트남군을 격퇴하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베트남의 비무장지대를 건넜다. 파리평화회담에서 미국보다 협상의 우위에 서려는 목적이었다. 북베트남군은 인민해방전선에 충성을 바치는 15만명의 게릴라들의 도움을 받아 쿠앤 짱을 쉽게 함락시킨 뒤 베트남군을 분산시켰다. 5월 말 북베트남군은 플레이쿠와 콘툼 두 전략적 도시 사이의 도로를 점령했다. 당시 베트남에는 미군병력이 6천명밖에 잔류하지 않았으며 11월선거 이전에 전쟁을 종식시키려고 애쓰던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에서 유일한 아시아 우방인 남한의 대통령 박정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972년 6월3일 닉슨은 서울주재 미국대사관을 통해 박정희에게 보낸 비밀전문에서 남한병력을 미국 크레이튼 에이브람스 장군(한국전 당시 탱크부대 사령관이었으며 1968년부터 미국과 남베트남군을 통합지휘하고 있었다)의 통수권하에 둘 수 있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닉슨은 한국의 도움없이 미군이 북베트남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남베트남의 영토를 다시 탈환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한국군은 남베트남 최후의 의지처
이 전문에서 닉슨은 다음과 같이 썼다. “에이브람스 장군은 이 작전이 미군과 한국군의 공동작전으로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제한된 시기 동안 작전이 수행될 것이다. 장군은 한국군이 현재 작전중인 장소로부터 일시적으로 물러나도 될 것이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우리가 남베트남군을 돕기 위해서 이 특별한 작전을 같이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이 전문은 한국의 베트남 파병에서 그간 간과되었던 몇 가지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한국군은 나약하고 사기가 저하되었던 남베트남군에 최후의 의지처로서 중요했다는 점이다. 특히 일부 미군이 철수한 다음 그러했다. 둘째는 한국군의 배치에서 고위급 논의가 수반되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한국군을 미군 편제 속에 통합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는 점이다.
박정희-닉슨 통신은 2001년 4월 미국 정부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비밀 해제되어 일반에 공개된 10만쪽에 달하는 닉슨시대의 비밀 기록자료 중에서 발견됐다. 공개된 대부분의 문서는 국가보안위원회의 각서와 정책문서였다. 이 문서들은 주로 닉슨과 중국의 수교, 그리고 1973년 파리협정에 이르는 북베트남군과의 교섭을 다루고 있다.
이 자료는 또한 닉슨과 마오쩌둥 및 다른 세계 지도자들 사이의 회담 속기록, 그리고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작성한 노트와 메모, 그리고 당시 비밀협정이었던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 사이의 협정을 다루고 있다.
한국 입장에서 비밀 해제된 문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박정희가 닉슨에게 보낸 몇통의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박정희는 베트남전 종전 이후 아시아에서 미군이 철수하게 되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 또한 남한에서 일본의 역할과 미-일안보틀 내에서 한국의 위치에 관해 논의한 일본과 미국 지도자간의 자세한 회담내용들도 있다.
일본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고심하던 중 1972년 닉슨이 베이징을 방문하고 미국의 대중국정책에 극적인 변화를 발표할 때까지 일본 정부에 상의하지 않은 점 때문에 크게 모욕감을 느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전에 닉슨과 함께 개입해왔음에도 닉슨이 대만과의 관계를 끊고 한반도에서 미군병력을 일부 철수하기로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 직후 박정희는 북한의 김일성에게 자신의 밀사를 파견했다.
한국 경제성장과 일본
박정희는 1970년대 초 이미 한국에서의 미국의 의도에 관해 염려했다. 당시 닉슨은 1971년 말까지 미군병력 일부를 철수하기로 승인했다고 발표했다. 키신저는 1970년 6월28일 닉슨에게 보낸 메모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남한군대의 대규모 현대화 없이, 그리고 남한에 상당한 미군병력을 지속적으로 주둔시키는 데 대한 확약없이는 미군철수를 받아들이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박정희는 또한 닉슨이 모스크바회담에서 한국에 관해 협상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이 때문에 1972년 5월19일 닉슨은 박정희에게 다른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안심시켰다. “미국은 그 우방과 동맹의 이익을 계속해서 중시할 것이다. 모스크바회담은 베이징회담과 마찬가지로 주로 양자간 이슈를 다룰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우방들을 희생시키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우방들의 미래를 훼손할 수 있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닉슨의 편지는, 당시 미국이 남한이 북한에 대해 가진 인식과는 전혀 다른 대북한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북한이 긴장을 고조시키는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당신(박정희 대통령)의 염려에 공감하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북한이 가까운 장래에 어떤 적대적 행동을 하기 위한 계획을 하고 있다고 믿을 만한 어떠한 정보도 없음을 알리고자 한다.”
남한에 관한 미국과 다나카 및 여타 일본 지도자와의 회담을 기록한 자료들은 냉전당시 발전한 한국-미국-일본관계 틀 속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1960년대 초부터 박정희가 일단 통일을 유보하고 수출제일주의의 경제발전 프로그램을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 남한-일본-미국의 군사적·전략적 정책은 재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 관계는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 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미국은 식민지배기간 동안 한국에 많은 경험을 쌓은 일본기업의 지원 아래 남한에 압력을 가하여 1965년 일본과 국교정상화협정을 맺도록 했다. 그뒤 5년간 일본 자본이 1945년 이후 처음으로 남한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한국 수출성장의 첫 번째 단계의 기초가 되었다. 이 당시 가장 강건한 상징 중 하나가 포항제철이다. 이 회사는 일본의 기술로 지어졌고 수년간 박정희의 동지이자 2차대전중 일본군으로부터 산업경영을 훈련받은 박태준에 의해 경영되었다. 1960년대 말 남한과 일본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너무 밀접하게 되어서 1969년 닉슨과 일본 총리 사토가 미-일안보조약을 개정할 때 한-일관계가 정식으로 언급되었다. 이 안보조약 개정을 위한 공동성명서에서 미·일 양국은 남한의 안보가 일본의 안보에 필수적이라고 합의했다.
주일미군보다 주한미군이 더 중요?
이 조항은 일본에서는 단지 일본경제에서의 남한경제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는 것으로만 해석돼왔지만 새로운 자료들에 의하면 실상은 다르다. 일본 지도자들, 특히 다나카는 1972년 사토 이후 총리가 되고나서 일본이 한국에서 미국과 함께 전략적인 동반자라고 생각해왔으며 남한주둔 미군을 일본의 방위에 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베트남전이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심화하면서 일본 정부는 미국에 아시아에서 미국의 공산화 억제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경제지원을 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사토와 다나카는 공시적으로는 일본이 아시아 내에서 평화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천명했지만 닉슨과 키신저에겐 일본이 경제적 수단으로서 미국의 군사적 전략을 지원할 용의가 있음을 비밀리에 밝혔다. 수천명의 병사를 파견해서 베트남에서 미국과 함께 싸우던 남한에 이러한 지원약속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이었다.
“당신들이 남한을 돌보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키는 한 우리는 남한의 경제발전에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리고 남한에 대한 투자도 증가시킬 것이다.” 다나카는 1972년 8월17일 도쿄에서 키신저에게 말했다. 키신저는 이에 대해 환영한다고 말했고 다나카는 “우리는 오키나와나 일본주둔 미군보다 남한주둔 미군에 더 큰 중요성을 둔다”고 말했다.
역사가이자 정치가였던 키신저는 이런 협정이 한국에 주는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다나카와 만난 직후 작성된 한반도에 관한 미·일정책이라는 비밀메모에서 키신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남북한은 둘 다 일본에 대해 아주 조심하고 있다. 남한 국민들은 아직도 일본을 정서적으로 불신하고 있다. 일본은 1905∼45년까지 한반도를 지배하는 동안 한국 국민과 문화를 파괴하려고 했다. 남한 국민들 다수가 일본의 한국경제 개입 정도에 대해 우려하며 일본의 경제적 지배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보수적인 남한인사들과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밀접한 유대관계를 지니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키신저는 1969년 미-일안보조약 개정 때의 공동성명, 즉 한국이 일본의 안보에 필수적이라는 지적의 의미를 상기시켰다.
“일본 정부는 만일 북한이 남한에 대해 무장공격을 감행할 경우 미국과 사전협의하에 미-일안보조약에 의거한 미군의 일본기지 사용허가(오키나와를 포함한)를 부여할 수 있다고 암시했다.” 키신저는 이렇게 닉슨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키신저는 일본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전혀 확실치 않으며 한국이 또 그러한 일본의 역할을 인정할지조차도 확실치 않다고 덧붙였다.
베트남전 이후를 준비한 닉슨과 다나카
이 메모는 1972년 8월31일부터 9월1일 사이에 있었던 닉슨-다나카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키신저가 도쿄에서 다나카를 만난 직후 작성되었다. 닉슨과 다나카는 정상회담에서 무역 관련 이견을 제쳐두고 베트남전 이후의 새로운 관계에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르면 일본은 동북아시아의 미국 군사안보체제 뒤에서 경제적 지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로 되어 있다.
이 정상회담은 하와이에서 열렸는데 첫 번째 회담에서는 일본의 경제적 역할에 초점을 두었다. 닉슨은 다나카에게 일본이 아태지역에서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특별한 문제가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닉슨은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이 여러 면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나카는 이 점에 동의하고 일본이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남한과 협력해서 지원과 투자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닉슨은 한국 관련 논의를 시작했다. 닉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과 일본은 강력하고 독립적이며 외세로부터 자유로운 한국을 지원해야 하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또한 미국의 대일방위 약속에서 필수불가결하다.”
닉슨은 남한에서 미군병력을 감축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러한 압력에 저항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의 주장은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남한의 안보는 일본의 안보에 필수적이다.”
이런 식으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이해관계가 중요함을 명백하게 주장하는 것은 그간 미국의 군사관계자들이 말해온 바대로 미국의 대남한안보전략과 대일본안보전략이 분리되어 있다는 주장이 틀렸음을 말해준다.
회담은 남북한간의 주제로 옮겨갔다. 닉슨과 다나카는 둘 다 남북한대화가 안보상황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 닉슨은 남북대화가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고 다나카는 그것이 현재 남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라고 응답했다. 다나카는 남북대화가 기대하는 것만큼 그렇게 긴장을 완화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다나카의 다음 언급은 일본이 한국 정세에 얼마나 깊이 개입되어 있는지에 관해 의미심장한 점을 드러낸다. 그는 남한내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일본의 식민지배 유산인 남한의 농업발전과 북한의 공업발전 현황도 잘 알고 있었다.
다나카는 닉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한은 북한과 전적으로 교류하기 전에 농업지역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남한의 농업지역 개발이 비교적 낙후되어 있어 남한 정부는 농민들의 불만사항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남한의 농업과 어업발전을 위해, 남한의 생활수준을 북한보다 높게 유지할 수 있도록 원조할 용의가 있다.”
일본 제철과 일본 정부의 지원하에 건설된 포항제철을 언급하면서 다나카는 남한에서의 제철공장 건설을 위해 일본이 남한 정부와 협의중이라고 말했다. 이 공장이 건설되면 남한은 북한보다 더 우월한 철강생산능력을 보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나카는 일본의 1차적 의도는 남한 내의 저항세력이 북한의 이익에 따르지 않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남한으로부터 주한미군병력을 철수시키지 말라고 요청했다.
닉슨은 다나카의 말에 감사를 표했고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경험이 베트남전쟁 이후 아시아의 안보정책을 형성하는 데 미국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닉슨은 “다나카 총리가 오랜 유대를 통해 한국인들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일본은 미국보다 더욱더 한반도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지금까지 이어져온 미국 군사정책
닉슨은 만일 다나카와 여타 일본 지도자들이 대남한정책에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사적으로 그런 문제를 제기해도 좋다고 시사했다. “문제는 미래에 아시아의 자유를 어떻게 보장하느냐에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우리는 단지 미국의 정책이 아니라 아시아에서의 미·일정책이 발전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자료들을 읽으면서 다음과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일본과 남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전략이 냉전이 종식되고 남북한 긴장완화가 시작된 이후에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과 미국은 한반도에 분쟁이 일어나면 일본병력과 기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지침에 합의했다. 동시에 일본과 한국 정부는 부시 대통령의 미사일 방어망 시스템에 참여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다. 그리고 올해 말 발표될 미국의 새로운 군사 독트린에 따르면 일본, 오키나와 그리고 한국의 통합된 미 군사력은 중국을 겨냥해서 새롭게 발전되고 있는 신포위정책의 핵심적인 부분을 형성할 것이다.
일본과 남한이 진정한 독립국가로 서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주둔군지휘협정 내용을 바꿔야 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군사안보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 냉전 당시 비밀리에 형성된 삼각군사동맹에 대해서 공개적이고 완전한 토론이 지금이라도 개시돼야 한다.
필자설명: 팀 셔록은 미국 메릴랜드주 실버스프링에서 프리랜스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일본과 남한에서 성장했으며 1961년부터 63년 사이에 서울에 거주했다.
닉슨 정부 비밀 외교문서 최초 공개… 박정희 - 닉슨 통신, 미일 안보회담의 기록 상세 분석
편집자: 미국의 대아시아 군사·외교정책을 연구하고 있는 프리랜스 언론인 팀 셔록이 최근 비밀 해제된 닉슨 정부 외교문서에 관한 글을 보내왔다. 한국, 일본과 관련된 주요 문서들을 요약한 이 글은 베트남전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일본의 공조체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문서에 따르면 베트남전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은 남한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며 한-미-일의 동맹을 구축했다. <한겨레21>은 박정희가 닉슨에게 보낸 서한 등 주요 문서들의 전문을 입수하여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는 대로 후속기사를 실을 계획이다.
1972년 3월30일 북베트남군 3만명 병사들은 남베트남군을 격퇴하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베트남의 비무장지대를 건넜다. 파리평화회담에서 미국보다 협상의 우위에 서려는 목적이었다. 북베트남군은 인민해방전선에 충성을 바치는 15만명의 게릴라들의 도움을 받아 쿠앤 짱을 쉽게 함락시킨 뒤 베트남군을 분산시켰다. 5월 말 북베트남군은 플레이쿠와 콘툼 두 전략적 도시 사이의 도로를 점령했다. 당시 베트남에는 미군병력이 6천명밖에 잔류하지 않았으며 11월선거 이전에 전쟁을 종식시키려고 애쓰던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에서 유일한 아시아 우방인 남한의 대통령 박정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972년 6월3일 닉슨은 서울주재 미국대사관을 통해 박정희에게 보낸 비밀전문에서 남한병력을 미국 크레이튼 에이브람스 장군(한국전 당시 탱크부대 사령관이었으며 1968년부터 미국과 남베트남군을 통합지휘하고 있었다)의 통수권하에 둘 수 있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닉슨은 한국의 도움없이 미군이 북베트남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남베트남의 영토를 다시 탈환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한국군은 남베트남 최후의 의지처
이 전문에서 닉슨은 다음과 같이 썼다. “에이브람스 장군은 이 작전이 미군과 한국군의 공동작전으로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제한된 시기 동안 작전이 수행될 것이다. 장군은 한국군이 현재 작전중인 장소로부터 일시적으로 물러나도 될 것이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우리가 남베트남군을 돕기 위해서 이 특별한 작전을 같이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이 전문은 한국의 베트남 파병에서 그간 간과되었던 몇 가지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한국군은 나약하고 사기가 저하되었던 남베트남군에 최후의 의지처로서 중요했다는 점이다. 특히 일부 미군이 철수한 다음 그러했다. 둘째는 한국군의 배치에서 고위급 논의가 수반되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한국군을 미군 편제 속에 통합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는 점이다.
박정희-닉슨 통신은 2001년 4월 미국 정부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비밀 해제되어 일반에 공개된 10만쪽에 달하는 닉슨시대의 비밀 기록자료 중에서 발견됐다. 공개된 대부분의 문서는 국가보안위원회의 각서와 정책문서였다. 이 문서들은 주로 닉슨과 중국의 수교, 그리고 1973년 파리협정에 이르는 북베트남군과의 교섭을 다루고 있다.
이 자료는 또한 닉슨과 마오쩌둥 및 다른 세계 지도자들 사이의 회담 속기록, 그리고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작성한 노트와 메모, 그리고 당시 비밀협정이었던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 사이의 협정을 다루고 있다.
한국 입장에서 비밀 해제된 문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박정희가 닉슨에게 보낸 몇통의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박정희는 베트남전 종전 이후 아시아에서 미군이 철수하게 되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 또한 남한에서 일본의 역할과 미-일안보틀 내에서 한국의 위치에 관해 논의한 일본과 미국 지도자간의 자세한 회담내용들도 있다.
일본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고심하던 중 1972년 닉슨이 베이징을 방문하고 미국의 대중국정책에 극적인 변화를 발표할 때까지 일본 정부에 상의하지 않은 점 때문에 크게 모욕감을 느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전에 닉슨과 함께 개입해왔음에도 닉슨이 대만과의 관계를 끊고 한반도에서 미군병력을 일부 철수하기로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 직후 박정희는 북한의 김일성에게 자신의 밀사를 파견했다.
한국 경제성장과 일본
박정희는 1970년대 초 이미 한국에서의 미국의 의도에 관해 염려했다. 당시 닉슨은 1971년 말까지 미군병력 일부를 철수하기로 승인했다고 발표했다. 키신저는 1970년 6월28일 닉슨에게 보낸 메모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남한군대의 대규모 현대화 없이, 그리고 남한에 상당한 미군병력을 지속적으로 주둔시키는 데 대한 확약없이는 미군철수를 받아들이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박정희는 또한 닉슨이 모스크바회담에서 한국에 관해 협상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이 때문에 1972년 5월19일 닉슨은 박정희에게 다른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안심시켰다. “미국은 그 우방과 동맹의 이익을 계속해서 중시할 것이다. 모스크바회담은 베이징회담과 마찬가지로 주로 양자간 이슈를 다룰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우방들을 희생시키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우방들의 미래를 훼손할 수 있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닉슨의 편지는, 당시 미국이 남한이 북한에 대해 가진 인식과는 전혀 다른 대북한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북한이 긴장을 고조시키는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당신(박정희 대통령)의 염려에 공감하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북한이 가까운 장래에 어떤 적대적 행동을 하기 위한 계획을 하고 있다고 믿을 만한 어떠한 정보도 없음을 알리고자 한다.”
남한에 관한 미국과 다나카 및 여타 일본 지도자와의 회담을 기록한 자료들은 냉전당시 발전한 한국-미국-일본관계 틀 속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1960년대 초부터 박정희가 일단 통일을 유보하고 수출제일주의의 경제발전 프로그램을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 남한-일본-미국의 군사적·전략적 정책은 재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 관계는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 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미국은 식민지배기간 동안 한국에 많은 경험을 쌓은 일본기업의 지원 아래 남한에 압력을 가하여 1965년 일본과 국교정상화협정을 맺도록 했다. 그뒤 5년간 일본 자본이 1945년 이후 처음으로 남한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한국 수출성장의 첫 번째 단계의 기초가 되었다. 이 당시 가장 강건한 상징 중 하나가 포항제철이다. 이 회사는 일본의 기술로 지어졌고 수년간 박정희의 동지이자 2차대전중 일본군으로부터 산업경영을 훈련받은 박태준에 의해 경영되었다. 1960년대 말 남한과 일본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너무 밀접하게 되어서 1969년 닉슨과 일본 총리 사토가 미-일안보조약을 개정할 때 한-일관계가 정식으로 언급되었다. 이 안보조약 개정을 위한 공동성명서에서 미·일 양국은 남한의 안보가 일본의 안보에 필수적이라고 합의했다.
주일미군보다 주한미군이 더 중요?
이 조항은 일본에서는 단지 일본경제에서의 남한경제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는 것으로만 해석돼왔지만 새로운 자료들에 의하면 실상은 다르다. 일본 지도자들, 특히 다나카는 1972년 사토 이후 총리가 되고나서 일본이 한국에서 미국과 함께 전략적인 동반자라고 생각해왔으며 남한주둔 미군을 일본의 방위에 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베트남전이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심화하면서 일본 정부는 미국에 아시아에서 미국의 공산화 억제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경제지원을 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사토와 다나카는 공시적으로는 일본이 아시아 내에서 평화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천명했지만 닉슨과 키신저에겐 일본이 경제적 수단으로서 미국의 군사적 전략을 지원할 용의가 있음을 비밀리에 밝혔다. 수천명의 병사를 파견해서 베트남에서 미국과 함께 싸우던 남한에 이러한 지원약속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이었다.
“당신들이 남한을 돌보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키는 한 우리는 남한의 경제발전에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리고 남한에 대한 투자도 증가시킬 것이다.” 다나카는 1972년 8월17일 도쿄에서 키신저에게 말했다. 키신저는 이에 대해 환영한다고 말했고 다나카는 “우리는 오키나와나 일본주둔 미군보다 남한주둔 미군에 더 큰 중요성을 둔다”고 말했다.
역사가이자 정치가였던 키신저는 이런 협정이 한국에 주는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다나카와 만난 직후 작성된 한반도에 관한 미·일정책이라는 비밀메모에서 키신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남북한은 둘 다 일본에 대해 아주 조심하고 있다. 남한 국민들은 아직도 일본을 정서적으로 불신하고 있다. 일본은 1905∼45년까지 한반도를 지배하는 동안 한국 국민과 문화를 파괴하려고 했다. 남한 국민들 다수가 일본의 한국경제 개입 정도에 대해 우려하며 일본의 경제적 지배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보수적인 남한인사들과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밀접한 유대관계를 지니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키신저는 1969년 미-일안보조약 개정 때의 공동성명, 즉 한국이 일본의 안보에 필수적이라는 지적의 의미를 상기시켰다.
“일본 정부는 만일 북한이 남한에 대해 무장공격을 감행할 경우 미국과 사전협의하에 미-일안보조약에 의거한 미군의 일본기지 사용허가(오키나와를 포함한)를 부여할 수 있다고 암시했다.” 키신저는 이렇게 닉슨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키신저는 일본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전혀 확실치 않으며 한국이 또 그러한 일본의 역할을 인정할지조차도 확실치 않다고 덧붙였다.
베트남전 이후를 준비한 닉슨과 다나카
이 메모는 1972년 8월31일부터 9월1일 사이에 있었던 닉슨-다나카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키신저가 도쿄에서 다나카를 만난 직후 작성되었다. 닉슨과 다나카는 정상회담에서 무역 관련 이견을 제쳐두고 베트남전 이후의 새로운 관계에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르면 일본은 동북아시아의 미국 군사안보체제 뒤에서 경제적 지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로 되어 있다.
이 정상회담은 하와이에서 열렸는데 첫 번째 회담에서는 일본의 경제적 역할에 초점을 두었다. 닉슨은 다나카에게 일본이 아태지역에서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특별한 문제가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닉슨은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이 여러 면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나카는 이 점에 동의하고 일본이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남한과 협력해서 지원과 투자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닉슨은 한국 관련 논의를 시작했다. 닉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과 일본은 강력하고 독립적이며 외세로부터 자유로운 한국을 지원해야 하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또한 미국의 대일방위 약속에서 필수불가결하다.”
닉슨은 남한에서 미군병력을 감축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러한 압력에 저항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의 주장은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남한의 안보는 일본의 안보에 필수적이다.”
이런 식으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이해관계가 중요함을 명백하게 주장하는 것은 그간 미국의 군사관계자들이 말해온 바대로 미국의 대남한안보전략과 대일본안보전략이 분리되어 있다는 주장이 틀렸음을 말해준다.
회담은 남북한간의 주제로 옮겨갔다. 닉슨과 다나카는 둘 다 남북한대화가 안보상황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 닉슨은 남북대화가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고 다나카는 그것이 현재 남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라고 응답했다. 다나카는 남북대화가 기대하는 것만큼 그렇게 긴장을 완화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다나카의 다음 언급은 일본이 한국 정세에 얼마나 깊이 개입되어 있는지에 관해 의미심장한 점을 드러낸다. 그는 남한내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일본의 식민지배 유산인 남한의 농업발전과 북한의 공업발전 현황도 잘 알고 있었다.
다나카는 닉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한은 북한과 전적으로 교류하기 전에 농업지역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남한의 농업지역 개발이 비교적 낙후되어 있어 남한 정부는 농민들의 불만사항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남한의 농업과 어업발전을 위해, 남한의 생활수준을 북한보다 높게 유지할 수 있도록 원조할 용의가 있다.”
일본 제철과 일본 정부의 지원하에 건설된 포항제철을 언급하면서 다나카는 남한에서의 제철공장 건설을 위해 일본이 남한 정부와 협의중이라고 말했다. 이 공장이 건설되면 남한은 북한보다 더 우월한 철강생산능력을 보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나카는 일본의 1차적 의도는 남한 내의 저항세력이 북한의 이익에 따르지 않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남한으로부터 주한미군병력을 철수시키지 말라고 요청했다.
닉슨은 다나카의 말에 감사를 표했고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경험이 베트남전쟁 이후 아시아의 안보정책을 형성하는 데 미국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닉슨은 “다나카 총리가 오랜 유대를 통해 한국인들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일본은 미국보다 더욱더 한반도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지금까지 이어져온 미국 군사정책
닉슨은 만일 다나카와 여타 일본 지도자들이 대남한정책에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사적으로 그런 문제를 제기해도 좋다고 시사했다. “문제는 미래에 아시아의 자유를 어떻게 보장하느냐에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우리는 단지 미국의 정책이 아니라 아시아에서의 미·일정책이 발전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자료들을 읽으면서 다음과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일본과 남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전략이 냉전이 종식되고 남북한 긴장완화가 시작된 이후에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과 미국은 한반도에 분쟁이 일어나면 일본병력과 기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지침에 합의했다. 동시에 일본과 한국 정부는 부시 대통령의 미사일 방어망 시스템에 참여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다. 그리고 올해 말 발표될 미국의 새로운 군사 독트린에 따르면 일본, 오키나와 그리고 한국의 통합된 미 군사력은 중국을 겨냥해서 새롭게 발전되고 있는 신포위정책의 핵심적인 부분을 형성할 것이다.
일본과 남한이 진정한 독립국가로 서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주둔군지휘협정 내용을 바꿔야 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군사안보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 냉전 당시 비밀리에 형성된 삼각군사동맹에 대해서 공개적이고 완전한 토론이 지금이라도 개시돼야 한다.
필자설명: 팀 셔록은 미국 메릴랜드주 실버스프링에서 프리랜스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일본과 남한에서 성장했으며 1961년부터 63년 사이에 서울에 거주했다.
출처 : | 이선생의 블로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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