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추적 - 金日成 사망 그 비밀을 찾아서
金正日은 왜 神과 같은 아버지를 剖檢하게 했는가?
남북 頂上회담을 앞두고 金日成은 아들에 대한 不信이 깊어지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런 父子 갈등이 金日成의 죽음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아직도 金正日에 의한 謀殺說을 버리지 않는 對北 전문가도 있다
● 중국 공안요원: 『아버지 金日成이 제안한 남북 정상회담을 아들 金正日이 반발, 회의석상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金日成에게 심장발작이 발생했다』
● 조총련 의장 한덕수: 『金日成은 회장실에서 죽었다』
● 金日成의 중국 은사 가족: 『金日成은 집무실 책상에서 숨을 거뒀다』
● 金日成 사망 당시 주치의는 현장에 없었고, 경호책임자는 판문점에 있었다
● 1993년 북한 NPT 탈퇴 후 권력 일선에 재등장한 金日成은 아들 金正日을 질책하고, 金正日 측근인 김달현·김용순을 좌천시켰다
● 金日成 급사 4일 전부터 국가보위부와 사회안전부는 「黨중앙」(金正日)을 믿고 따르라고 방송했다
禹鍾昌 月刊朝鮮 부장대우 편집위원 (woojc@chosun.com)
사망 장소 발표 안 해
6·25 전쟁의 戰犯이자 북한의 독재자인 金日成은 1994년 7월8일 오전 2시에 죽었다. 북한 당국이 金日成 사망을 공식 발표한 것은 1994년 7월9일 낮 12시로, 사망 후 34시간이 지나서였다.
북한 당국의 최초 발표 내용은 「金日成주석이 심장혈관의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 오다 겹 쌓이는 과로로 인해 7월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되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었다. 즉시에 모든 치료를 한 후에도 심장쇼크가 증악되어 7월8일 오전 2시에 사망했다. 7월9일에 진행된 병리 해부검사에서 질병의 진단이 완전히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심장이 좋지 않은 金日成이 과로로 인해 「自然死」했다는 설명이다. 당시 金日成의 나이는 82세였다.
이 발표에서 북한 당국은 金日成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죽었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金日成 사망 당시 그의 아내 金聖愛, 그의 아들 金正日 등이 임종을 지켜보았는지, 유족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도 거론하지 않았다. 訃音(부음)의 가장 기초 사실인 사망 장소를 북한 당국은 숨겼다. 金日成 사망시 金正日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79년 朴正熙 대통령 有故시 대한민국 정부가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全軍에 특별경계령을 내린 것이다. 북한은 金日成 사망에도 불구하고 軍에 아무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金日成 사망은, 그가 대한민국 金泳三 대통령에게 제안한 남북 정상회담을 불과 보름 남짓 앞두고 발생해 더욱 충격을 주었다.
金正日 전처 成蕙琳 일가,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黃長燁을 비롯한 수많은 북한 주민들의 탈북 사태는 金日成 死後에 이뤄졌고, 북한 주민 300만 명이 굶어 죽는 대규모 餓死(아사) 사태도 金日成 死後에 발생했다. 金日成 사망은 동구권 몰락과 소련 붕괴의 여파로 흔들리는 북한 사회를 붕괴로 몰아가는 대사건이었다.
金正日은 왜 국가주석에 취임 못 하나
金日成 死後 북한을 대표하는 최고 권력인 국가주석 자리는 한동안 공석이었다. 金正日은 金日成의 「遺訓 교시」에 따른 遺訓 통치를 했다. 1998년 헌법개정으로 국가 주석직으로 폐지됐다.
遺訓 통치는 金日成이 사망 이틀 전인 1994년 7월6일, 정무원 총리와 부총리, 黨비서, 국가계획위원장 등 경제부문 핵심 간부들을 묘향산 별장에 불러 직접 지시했다는 「遺訓 교시」에 따른 통치다. 遺訓 교시는 金日成의 유언을 모은 것인데, 경제개방과 합작사업을 통해 낙후한 북한의 전력·화학·시멘트·선박·금속공업 등을 살리라고 강조한 내용이다.
아들 金正日은 아버지 金日成의 권력 중 「인민군 최고사령관」과 「국방위원장」, 「총비서」 자리만 물려받았다. 金正日 1人 독재체제의 북한에서 자리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국방위원장은 「북한의 일체의 무력을 지휘 통솔」할 뿐 국가 수반이 아니다. 對外 관계에서 북한을 대표하는 기관은 최고인민회의다. 따라서 북한을 대표하는 얼굴은 현재 권력 서열 2위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金永南(76)이다.
金正日이 2000년 6월15일 金大中 대통령과 남북 頂上회담을 할 때, 우리 측의 답방 요구를 거절하며 대신 金永南 위원장을 보내겠다고 제의한 것은 金永南 위원장이 외교관계에서 북한 당국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金正日 체제의 안정성 여부는 한국의 對北정책에서 중요한 요소다. 金正日이 북한의 실질적인 권력자라면 金正日과 대화를 해야 하겠지만, 만일 金正日을 조종하는 세력이 따로 있다면 우리의 대화 상대는 바뀌어야 할 것이다. 對北정책의 목표와 방향, 내용, 추진 강도 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다.
이런 관점에서 북한전문가들은 『金正日이 국가주석직을 승계하지 못하고 결국 폐지한 것은 그가 金日成 사망에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기 때문이며, 金正日 권력의 안정성과 관련해 제일 먼저 염두에 둬야 할 것은 金日成 사망의 정확한 원인 규명』이라고 말했다.
북한전문가들은 『북한과 같이 통제된 사회에서 金日成의 정확한 사망 원인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으나 金日成 사망과 관련한 북한 당국의 발표가 의문투성이기 때문에 그 허구성을 추적하면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으로 출장 가다
북한 당국이 金日成 사망을 공식 발표한 지 닷새 후인 1994년 7월14일, 기자는 중국 延吉에 있었다. 당시 기자는 朝鮮日報 출판국 주간조선부 소속으로 金日成 死後 북한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취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延吉은 두만강을 경계로 북한과 맞닿은 중국의 국경 도시다. 이곳은 북한의 TV와 라디오 방송을 시청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북한에 들어가 보따리 장사를 하는 중국 조선족의 본거지여서 북한 사정에 밝은 곳이다.
全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金日成 사망 사건에 대해 북한 당국이 일부 外信 기자들에게만 평양 취재를 허용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벌어진 사건을 당사자인 한국 기자들은 국외자의 눈으로 外信을 인용, 보도하거나 먼발치의 중국 땅에서 북한을 훔쳐보는 방법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기자는 연변 조선족자치주 정부 관계자, 연길市와 도문市 관리, 중국 공안 관계자들을 만나고, 북한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을 보고 들으며 북한 사정을 간접적으로 취재했다. 오전엔 中朝(중조: 중국과 북조선) 국경인 圖門(도문)에 나가 조선족 보따리 장사들을 만나고, 오후에는 연길시내로 돌아와 이곳에 살고 있는 북한 국적의 조선족 동포들과 중국에 출장 나왔다가 金日成 사망과 동시에 단행된 中朝 국경폐쇄로 인해 발이 묶인 북한 사람들을 접촉하는 것이 일과였다.
1994년 7월의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 찌는 듯한 더위에 머리는 지끈거리고 온 몸은 땀으로 범벅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 당시 延吉에는 북한이 일본의 朝總聯(조총련) 자금을 끌어들여 1992년에 건립한 두만강 호텔을 비롯해 북한의 「능라 88회사」와 중국 동북아회사가 공동 투자한 목단식당, 북한의 「오륜회사」와 중국 기업이 합작한 평양식당, 북한의 청진市와 중국 선호기업이 합자한 청진식당, 북한의 外貨벌이 기관인 대성무역공사 연길支社 등 親北 업체들이 많이 진출해 있었다.
중국에 출장 나왔다가 국경 봉쇄로 발이 묶인 북한의 외화벌이 일군들은 매일 오전 10시쯤 대성무역공사 연길지사에 모여 평양방송을 들으며 추모회를 갖고 있었다. 연길에 파견된 북한인들은 서울에서 온 기자를 경계하는 분위기였으나, 졸지에 발이 묶인 북한 외화벌이 일군들은 서울에서 온 기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기자가 이들에게 질문한 내용은 金日成이 과연 어떻게 죽었나 하는 점과 金日成 사후 북한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기자는 많은 북한인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들 역시 그 점을 궁금해했으나 명쾌한 대답은 하지 못했다.
목단식당과 미모의 女주인
金日成 장례 기간 중 延吉시내에서 유일하게 金日成 빈소가 마련된 곳은 목단식당이었다.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운영하는 이 식당은 쫄깃쫄깃한 면발과 칼칼한 肉水(육수)의 평양식 냉면이 일품이었다. 빼어난 음식 맛 때문에 백두산 관광을 간 한국 사람들이 들르는 관광명소 중의 한 곳이다.
목단식당은 문상객을 맞기 위해 문은 열어 놓았지만 장사는 하지 않고 있었다. 목단식당의 주인은 미모의 북한 여자였다. 직업상 호기심 때문에 기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목단식당 안에 들어가기로 했다. 검은 양복에 흰 와이셔츠, 검은색 넥타이를 매고 문상객처럼 위장했다.
기자가 목단식당에 가보겠다고 하자 연길市 관리들은 극구 만류했다. 연길市 관리들은 목단식당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탈북자들을 잡기 위해 北에서 파견된 「조교」들이기 때문에 목단식당을 북한 공작원들의 아지트로 추정하고 있었다. 金日成의 죽음으로 흥분해 있는 북한인들이 서울에서 온 朝鮮日報 기자에게 횡포를 부릴 게 뻔하다며 우려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조선족 한 사람이 동행했다. 식당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기자가 한 시간 내에 나오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목단식당에 들어가니 1층은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는 전형적인 식당이었고, 2층은 사각형의 복도를 따라 밀폐된 방이 마련돼 있었다. 金日成 빈소는 2층에 있었다. 2층 복도에는 대형 弔花들이 즐비했다. 1층에 아무도 없어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주방 쪽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그는 기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커먼 얼굴에 건장한 체격의 이 남자는 한국말을 사용했다.
『무슨 일로 왔어요?』
『빈소를 보러 왔습니다』
그는 기자의 위아래를 훑어보고 난 뒤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서울에서 출장 온 朝鮮日報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자, 그의 표정이 일순 어그러졌다. 그는 『당장 나가라』며 언성을 높였다.
기자가 『빈소만 둘러보고 바로 나가겠다』고 하자, 그는 기자의 양손을 붙들더니 가슴으로 밀쳐 냈다. 밀려나지 않기 위해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하얀색 소복을 입은 미모의 여자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왔다.
달걀형의 갸름한 얼굴에 오똑한 코와 짙고 검은색 눈동자가 하얀 소복과 더불어 黑白의 조화를 이루었다. 키는 165cm 가량,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녀는 기자에게 방문 목적을 물었다. 다시 한 번 신분을 밝히고 『빈소 주변을 스케치한 뒤 나가겠다』고 하자,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喪主(상주)가 원치 않는다』며 돌아가라고 말했다.
『서울에서 중국까지 출장 와서 그냥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빈소 구경만 하고 가겠다』고 하자, 그녀는 『한국 기자는 들여놓지 않는다』고 말하며 손짓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잠깐이면 된다』고 말하며 양해를 구하고 있는데, 갑자기 2층의 이 방 저 방에서 건장한 체격의 북한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겁이 났다. 얼른 식당 밖으로 나가자 그들은 식당 밖까지는 쫓아오지 않았다.
화가 잔뜩 난 중국 공안요원
목단식당을 찾아간 그 다음날, 그날도 평소처럼 오전에 圖門에 갔다가 오후에 숙소 백산호텔에 들어서는데 안면이 있는 중국인이 호텔 1층 로비에 앉아 있었다.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 그는 기자를 보자마자 눈짓으로 따라오라고 신호했다.
그는 중국 공안 당국에 근무하는 현역 군인으로 영관급 장교다. 抗日 빨치산 시절의 金日成이 생명의 위협에 처했을 때 金日成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이 공안요원의 먼 친척이었다. 이 친척의 도움으로 그는 수시로 북한을 드나들었고 북한 고위층에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기자는 정보기관 관계자를 통해 그를 처음 소개받고, 한국과 중국에서 수시로 그와 접촉했다.
그를 통해 기자는 북한 고위층의 신상 정보와 북한 경제 동향에 관한 자료를 많이 입수했다. 그가 제공한 정보와 자료들은 한국의 對北 정보기관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중국 국적의 그는 중국과 북한, 그리고 한국 등 3개國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
소속과 직책을 밝히지 않는 것이 정보맨 세계의 룰이지만 서울에 온 그와 술을 먹는 자리에서 기자는 그에게 『당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북한의 권력기관은 어디요』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는 빙긋이 웃기만 하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나 기자는 그가 중국에서 보낸 사진 몇 장을 받았다. 평양에서 독일제 승용차 벤츠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인데, 그의 얼굴과 차 번호판만 크게 나와 있을 뿐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對北 정보기관 관계자에게 이 사진을 보여 주고 차량 번호판의 판독을 부탁했다. 북한의 차량들은 黨·軍·정무원 등 소속 기관에 따라 번호판이 다르다. 판독 결과, 그 차는 국가보위부 산하 對外정보조사국 소속이었다. 해외 정보를 다루는 북한의 최고 정보기관이다. 중국 공안요원은 기자의 질문에 사진을 통해 간접적으로 대답한 것이다. 이 사진 사건을 계기로 기자는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延吉 도착 후 기자는 즉시 그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金日成 사후 중국 공안기관도 비상사태여서 그를 만날 수 없었는데, 그가 느닷없이 화난 표정으로 기자가 묵고 있는 호텔에 나타난 것이었다.
『金日成은 묘향산 별장에서 죽었다』
기자는 묵고 있는 호텔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자신의 손가락으로 기자의 입을 막은 뒤, 제일 먼저 텔레비전을 켜더니 볼륨을 높이고는 창문에 커튼을 쳤다. 그리고는 창문과 객실 문 사이의 중간에 서서 기자보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기자의 귀에 그의 입을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 기자가 투숙 중인 호텔 방에는 중국 공안 당국에서 도청기를 설치해 놓습니다. 중국 정부나 북한을 비방하는 말을 하면 추방당하는 수가 있으므로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는 긴장한 모습이었다. 중국에서 그를 숱하게 만났지만 이토록 긴장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어제, 왜 목단식당에 가서 북한 사람들과 싸움을 하였습니까? 여기는 중국입니다. 한국과는 다릅니다. 중국 공안기관에서도 金日成 주석이 어떻게 사망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이곳에 와서 金日成 주석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묻고 다니는 바람에 중국 공안기관도 당신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말을 조심하십시오. 북한 사람들이 당신을 해코지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난 그는 기자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金日成 주석이 사망하고 나서 오늘 처음으로 평양과 전화 통화가 이뤄졌습니다. 金日成 주석이 自然死했다는 북한 당국의 발표는 사실이 아닙니다. 당신이 가장 궁금해하는 金日成 주석의 사망에 대해 말을 해 드릴 테니 이 사실을 바깥 세상에 널리 알려 주십시오. 한 가지 조건은 당신이 작성한 기사를 내게 먼저 보여 준다고 약속해야 합니다』
아버지 金日成에게 대든 아들 金正日
그는 金日成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데 대해 굉장히 분노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는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는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수령님은 향산 별장에서 서거하셨습니다』
『향산이 어딥니까?』
『기자 선생이 향산도 몰라요. 백두산, 금강산과 함께 북한의 3大 절경인데요』
『묘향산 말입니까?』
『그래요. 향산郡 안에 있는 묘향산 별장입니다. 이 별장은 평양에서 가깝기 때문에 수령님은 매년 6월이면 이 별장에서 손자들과 함께 여름 휴가를 보냅니다. 사망하기 바로 직전까지 수령님은 아들 金正日을 비롯한 북한 권력자들을 향산 별장에 불러 7월25일로 예정된 남북 頂上회담 준비사항을 점검하였답니다.
남북 頂上회담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과정에서 수령님 사망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북한 당국이 金日成 사망 장소에 대해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집무실인 평양 주석궁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하고 있던 기자에게 사망 장소가 묘향산 별장이라는 것은 뜻밖의 사실이었다.
중국 공안요원은 평양의 고위층 인사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하면서 金日成 사망 순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수령님은 「남북통일은 평화적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하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金泳三 대통령의 북한 방문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답니다. 수령님의 지시는 「수령의 교시」라 하여 북한에서는 절대적입니다. 사망 사건이 발생한 그날, 아들 金正日이 느닷없이 수령님의 지시에 정면으로 반박했다고 합니다. 전쟁에 의한 무력적화 통일을 지론으로 삼고 있는 金正日은 남북 頂上회담 자체를 반대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아들 金正日이 자기 지시에 반발하자 수령님은 크게 노했다고 합니다.
회의장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자 수령님 경호원이 수령에 불순한 태도를 보이는 金正日을 향해 권총을 꺼내 쏘았다고 합니다. 총알은 金正日을 바로 맞히지 않고 金正日 앞에 놓인 컵을 깨뜨려 회의석상에 大혼란이 발생했고, 수령님 경호원과 金正日 경호원 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이 총격전 와중에 심장이 나쁜 수령님에게 심장발작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응급처치를 하지 않으면 사망하는데, 수령님은 응급치료를 받지 못하고 아들 金正日이 방치한 상태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심장발작에 인한 심장마비이지만 심장발작을 일으킨 원인 제공자는 金正日입니다. 총격전 과정에서 金正日도 가벼운 총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사태가 수습된 후 수령님에 대한 총상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剖檢(부검)이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金日成 주석 사망 당시의 현장 사정을 가장 정확히 아는 사람이 金永南 외교부장이라고 합니다. 인민무력부장 吳振宇는 현장에 없었고, 나중에 보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보고를 받은 吳振宇 등 軍部 인사들이 金正日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보이자 軍을 설득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金日成 주석 사망 발표를 34시간 늦추었다고 합니다.
앞으로 북한의 권력구도는 金日成 사망 내막을 알고 있는 金永南 외교부장과 軍部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국 정부도 이제 비로소 金日成 주석 사망 全貌(전모)를 파악했는데, 북한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모른 척할 것입니다』
증언을 마친 그는 『지금 북한 주민들 사이에는 「수령님이 분해서 죽었다」는 말이 퍼지고 있다』면서 『金日成 주석의 사망 원인 제공자는 아들 金正日』이라고 말했다.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북한 주민들에게 이밥(쌀밥)과 고기 국을 먹여 주는 게 소원이었던 수령님이 아들로 인해 사망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야 한다』면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선에서 기사화해 달라고 말했다.
기자는 그를 옆에 앉혀 놓고 기사 작성에 들어갔다. 컴퓨터가 보편화되기 전이어서 편지지에 볼펜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약속대로 작성된 기사를 보여 주자 그는 기사의 골격은 건드리지 않고, 金日成이란 이름 뒤에 주석이나 수령 식의 경칭어를 넣어 주고, 「죽었다」는 표현은 「사망했다」라는 식으로 정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金日成은 6·25 전쟁을 일으킨 戰犯이기 때문에 朝鮮日報에서는 관행상 주석이나 수령 식의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해 주자 그는 납득했다. 「죽었다」는 표현은 그의 요구대로 「사망했다」라고 정정해 주었다. 그는 기자가 작성한 기사에 만족감을 표시하고는 돌아갔다.
연변 急電
확인은 할 수 없지만 그의 傳言이 사실이라면 驚天動地(경천동지)할 내용이었다. 서울의 데스크에 바로 보고했다. 그 시각 서울은 물론, 全세계에서도 金日成 사망 장소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기자가 중국 출장을 떠난 후, 서울에서 확인된 새로운 사실은 金日成이 사망했다는 시간을 전후하여 평양에서 헬기 3대가 이륙해 묘향산 방면으로 비행했다가 악천후로 인해 1대는 추락하고 1대만 평양으로 귀환했다는 내용이다. 묘향산 일대는 韓美 양국의 비행 감시 구역이다. 이 정보는 경기도 오산에 있는 美 공군 레이더 기지에서 체크되었다.
당시 국내 언론 보도에 따르면 「북한의 要人用 헬기인 MI-17기 3대가 1994년 7월7일 밤 평양 시내 모처에서 時差를 두고 차례로 이륙, 묘향산 별장 지역으로 비행했다. 이 헬기들 중 1대만이 9일 오전 평양에 되돌아오고 1대는 추락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날 묘향산 일대는 구름이 끼고 비가 와, 헬기가 비행하기에는 어려운 악천후 상황이었다. 이 헬기들은 비행장 관제소의 통제를 받지 않고 북한 공군사령부의 직접 관제 아래 低空비행했다. 묘향산 지역에서 평양으로 『의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다급히 연락하는 내용이 駐韓미군 안테나에 감지되었다」는 것이다.
이 정보를 근거로 金日成이 묘향산 별장에서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있었지만 이를 뒷받침할 추가 정보가 없어서 서울에서는 해석이 분분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金日成 사망 장소가 묘향산 별장이라는 기자의 보고에 데스크 역시 놀라워했다. 데스크는 기자가 입수한 정보가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즉각 기사를 송고하라고 지시했다.
이 기사는 1994년 7월28일자 週刊朝鮮 표지에 「연변=急電」이란 제목으로 크게 보도되었다. 金日成 사망 장소가 묘향산 별장이며, 金日成의 진짜 死因이 총격전 와중의 심장발작이며, 金日成은 아들 金正日 때문에 죽었다는 週刊朝鮮 기사는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를 정면으로 부인했다. 이 기사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日本 언론은 週刊朝鮮 기사를 인용 보도하기도 했다. 북한은 週刊朝鮮 기사에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자는 이 기사가 보도되기 전에 중국을 빠져나왔다. 나중에 기자는 이 기사로 인해 중국 공안기관에 근무하는 조선족 관계자들이 조사를 받고 고초를 치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총련 의장 韓德洙 증언
金日成 사망의 비밀을 추적하겠다고 기자가 결심한 것은 10년 전, 그때부터다.
金日成이 사망하고 6개월이 지난 1995년 1월, 在日 朝總聯 의장 韓德洙(한덕수)가 일본에서 조총련 간부들을 상대로 북한 방문 보고대회를 가졌다. 韓德洙 의장은 金日成이 사망하기 몇 년 전부터 북한에 머물러 있다가 金日成 장례식이 끝난 몇 달 후 일본으로 돌아왔다. 韓德洙 의장은 보고대회에서 金日成 사망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그의 보고 내용은 1995년 1월에 발간된 일본 월간지 「東亞」에 게재되었다. 기사 작성자는 일본 每日新聞의 당시 논설위원 시게무라(重村智計)씨였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金日成은 화장실에서 죽었다』
<金日成은 죽기 이틀 전인 1994년 7월6일 평양에서 조선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정치국원 후보를 포함, 軍 간부와 黨 간부 등 100명이 참석했다. 당시 북한 지도부의 최대 관심사는 남북 頂上회담에서 金泳三 대통령이 제안할 내용이었다. 이 회의에서 북측은 金대통령이 남북 경제교류와 高齡(고령)의 이산가족 재회 문제, 남북 非核化 문제의 재확인 등을 제안할 것으로 예측하고 대응 방안을 협의했다.
軍 간부와 사상 담당자들은 남북 경제교류 확대와 개방정책은 북한 내부에 불순분자를 낳고 그 결과 망명자가 늘어날 것이라 지적하고 강한 우려를 표시했다. 경제 관계자들도 북한에서는 팔 만한 제품이 없기 때문에 한국 기업이 北에 진출하면 북한 경제가 지배당할 우려가 많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했다. 또 문화 관계자들도 남한의 불순한 사상이 들어와 북한 청소년들의 사회주의 사상이 오염될 것에 대해 불안감을 표명했다.
약 4시간에 걸친 토론 끝에 金日成은 남북 경제교류를 진행시키겠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金日成은 『경제교류의 결과로 망명자가 늘어도 좋다. 통제와 사상교육을 강화한다면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金日成은 『베트남과 쿠바에서 망명자가 속출했지만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회의가 끝난 후 이날(7월6일) 저녁부터 金日成은 묘향산 별장에 갔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金日成이 이동할 때면 보통 8명의 의사가 동행하는데, 이날에 한해 의사가 두 명밖에 동행하지 않았고 특히 심장 담당 의사가 빠졌다. 카터 前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 이래 金日成이 아주 건강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측근과 의료진도 방심했던 것이다.
金日成은 그 다음날인 7월7일에도 이 별장에서 지냈는데 오후가 되어 가슴의 통증을 호소했다. 그러나 담당의사가 없어 진찰을 받을 수 없었다. 이날 밤, 화장실에 들어간 金日成은 돌연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큰 소리를 내고 쓰러졌다.
곧 평양에 연락이 되어 의사와 간호부, 간호장비를 실은 헬기가 별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나쁠 때는 나쁜 것이 겹치는 것으로, 당시 별장 부근에 집중 호우가 내려 헬기가 착륙할 수 없었다. 묘향산에 착륙하지 못한 의료진은 어쩔 수 없이 평양으로 다시 돌아가 차로 갈아타고 별장으로 출발했다.
두 시간 안에 도착하도록 명령을 받은 운전사가 과속으로 운전하는 바람에 차가 미끄러져 계곡 밑으로 추락, 의료진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의료진을 태운 차의 추락사고로 金日成은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이 때문에 아들인 金正日 서기는 자기가 의사를 확실히 옆에 붙여 놓았더라면 아버지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책하며 한때는 상당히 초췌한 상태였다>
韓德洙 의장의 보고 내용은 金日成 사망을 마치 옆에서 지켜본 것처럼 상세했다. 평양에 있던 金日成 의료진이 급히 묘향산 별장으로 가다가 교통사고로 전원 사망했다는 내용은 韓德洙 보고에서 드러난 새로운 사실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북한은 지금까지 공식 언급하지 않고 있다.
金正日은 왜 自責했나
金日成 사망과 같이 민감한 사안을 朝總聯 의장 韓德洙가 제 마음대로 발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은 金日成 사망에 따른 대내·외의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韓德洙를 등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韓德洙의 보고 내용 가운데 「金日成이 치료도 못 받고 죽었고, 아들 金正日이 이 점을 자책했다」는 내용은 북한 당국의 최초 공식 발표와 정면 배치된다. 북한 당국은 「7월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되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어 즉시에 모든 치료를 한 후에도 심장쇼크가 증악되어 7월8일 오전 2시에 사망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金日成이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큰소리를 내고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金日成 옆에 심장 담당 주치의가 없었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金日成이 고령인 데다 심장이 좋지 않아 24시간 主治醫가 따라 다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金日成 심장 담당 의사가 그날 따라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은 갑작스런 사망과 관련, 매우 의아스런 구석이다.
만일 金日成 주치의가 어떤 이유로 자리를 비웠다면, 主治醫에게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북한에선 金日成과 金正日밖에 없다. 결국 金正日의 命에 따라 자리를 비운 셈이 된다. 韓德洙 의장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金正日이 아버지 金日成을 죽음의 함정에 빠지도록 모종의 「음모」를 꾸민 것으로 의심할 수도 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북한의 軍과 黨 관계자들이 남북 경제교류 확대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金日成이 이를 강행토록 지시했다는 보고 내용이다. 이는 金日成과 金正日 세력 간에 갈등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金日成 사망에 「음모」가 있다면 그 음모의 동기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金日成의 중국인 은사 가족 증언: 『金日成은 집무실에서 죽었다』
朝總聯 의장 韓德洙 보고 내용이 공개되고 1년 후, 북한 당국은 金日成 사망 순간과 관련한 또 하나의 공식 입장을 제3국을 통해 표명했다. 이번에는 중국을 통해서 나왔다. 대변자는 金日成의 중국인 은사 가족이었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 중국 길림성의 육문중학에 다녔던 金日成은 상씨라는 선생에게서 중국어를 배웠다. 金日成은 상씨 선생이 생존해 있을 때는 물론, 그가 1982년에 사망한 후에는 그 가족들을 다섯 차례나 북한에 초청했다.
상씨 선생 가족들은 金日成 사망 후 金正日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귀국 후 이들은 중국 「무한만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金日成 사망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그 내용은 무한만보를 인용, 보도한 일본 아사히 신문 1996년 3월13일자에 실렸다.
이에 따르면 「金日成은 사망 전날인 1994년 7월7일 묘향산 별장에서 열린 농촌 공작회의에 참석, 심야까지 업무를 보았다. 업무보고를 받던 중 갑자기 『피곤하다. 좀 쉬자』고 말한 뒤 쓰러져 7월8일 오전 1시쯤 집무실 책상에서 숨을 거두었다. 金日成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은 사망 전날 쓴 「조국통일」 네 글자였다. 金日成은 사망 전 한 달 동안 20개 이상의 외국 대표단을 만났으며, 核개발 의혹 문제를 둘러싸고 카터 前 미국 대통령과 8시간 동안 회담하는 등 극히 바쁜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들의 傳言은 북한 당국이 주장하는 「金日成 과로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는 하나 음미할 구석이 없는 게 아니다. 우선, 북한에서 살아 있는 神과 다름없는 金日成이 별장의 집무실 책상에서 쓰러져 그 길로 사망했다는 것은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었다는 朝總聯 의장 韓德洙 보고와 맥락이 같다.
그러나 사망 직전의 상황묘사에서는 차이가 있다. 韓德洙는 「金日成이 7월7일 오후부터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다 밤에 화장실에서 돌연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큰 소리를 내고 쓰러졌다」고 했는 데 반해, 이들은 「정상적으로 심야 업무보고를 받던 중 피곤하다」며 쓰러졌다고 했다. 쓰러진 장소도 화장실이 아닌 집무실 책상이었다고 밝혔다.
金日成이 深夜에 업무보고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高齡의 金日成을 상대로, 심야에 경호원의 장벽을 뚫고 업무보고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점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金正日뿐이다. 金日成 사망 현장에 金正日이 있었던 것으로 의심되는 대목이다.
또 金日成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 「조국통일」이라는 점이다. 韓德洙 보고에도 나타나지만 金日成은 軍과 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북 頂上회담을 통해 경제교류 확대를 기대했다. 반면 金正日은 전쟁을 통한 武力 통일론자여서 통일문제 접근방식에서 金日成과 아들 金正日 사이에 갈등의 소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전문가들은 『북한이 일본 조총련과 중국內 親北 조선족을 설득하기 위해 朝總聯 의장 韓德洙와 金日成의 중국인 은사 가족을 통해 金日成 사망 당시 상황을 알리게 된 것』이라며 『이 두 개의 증언은 金日成 사망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단서로서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
북한 고위 군관이 작성한 文件
金日成이 죽은 지 5년이 지난 1999년 10월에 기자는 金日成 사망이 언급된 중요한 文件 하나를 입수했다. 편지지로 약 50장 분량이었다. 작성자는 자신의 신분을 북한 현역 고위 군관이라고 밝혔다. 文件을 분석한 對北 정보기관 관계자는 『내용을 종합할 때 북한의 무기체계에 밝은 장령급(대한민국의 장군에 해당) 군관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작성자는 그의 신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우리 집안은 위대한 수령님을 따라서 항일 혈전만리를 헤쳐온 抗日투사 가정이다. 동학들과 이웃들의 부러움과 칭찬 속에서 자라온 나는 항일투사 가정들한테 베풀어진 배려로 金日成 종합대학 4년 공부를 마치고 조선민주주의공화국 국가보위원으로 공직을 시작하였다. 조선인민군 여단 보위 일군, 여단 보위부 부부장과 부장, 군단 보위부 부장 등을 겸직하다가 승급한 조선인민군 고위급 군관이다.
나는 나라의 파견을 받고 여러 차례나 출국하여 나라에서 맡겨 준 임무를 수행하였다. ○○○(중동 모 국가. 신분 보호를 위하여 나라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국가에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어 갔으며, 소련·중국·쿠바 등에 파견되어 비밀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기간 나는 공화국 영웅, 공화국 1급 국기 훈장 등 국가 훈장을 몇 차례 받았다>
그는 이 文件 작성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黨과 조국을 위하여서는 자신의 목숨도 서슴없이 바칠 각오를 하여야 한다고 수없이 외쳐대고, 세상이 열백 번 변한다하여도 우리는 수령님(김일성)과 장군님(김정일)을 따라야 된다는 확고한 신념만은 변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외쳐대던 나의 가슴에 언제부터 혁명에 대한 동요가 생기었는지….
솔직히 말하면 나의 가슴에 우리 식 사회주의에 대한 동요가 생긴 것은 위대한 수령님이 세상을 뜨신 직후였다. 그때 무슨 영문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그때를 전후하여 25명의 고위급 군관들이 직무를 해임당하고 심사를 받았는데, 그 속에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존경하던 투사들도 있고, 나의 상급자도 있었다.
『金正日에게 의심을 품게 되었다』
처음에 나는 아주 놀랐다. 그 후 나는 몇 달을 고민 끝에 보내었으며, 나의 운명에 대하여 처음으로 동요가 생겼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우리 장군님(김정일)께 의심을 품게 되었으며, 지나온 인생을 곰곰이 분석하게 되었다. 분석하면 할수록 마음이 허전하고 앞날에 대하여 우유부단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속말을 그 누구와 감히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믿는 처지라 하여도 누가 감히 이런 말을 내놓고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혼자 속으로 앓다가 마침 적당한 기회가 주어져 이렇게 글로라도 써서 속시원히 속말을 할 수 있게 되니 정말 기쁘다.
이 글에서 여러분들은 고난의 강행군을 하고 있는 우리나라(북한)의 기본 실정과 우리나라의 목전 형세와 우리 인민군의 전략 배치 정황 등을 료해(이해)하는 데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면 기쁘다.
내가 지금 적는 아래의 글이 우리 민족의 조속한 통일과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거나 영문도 모른 채 철칙(계급이 강등되고 쫓겨나는 것)당한 조선인민군 고위급 군관들 심령에 조그마한 위안이라도 된다면 더 이상 기쁜 일이 없겠다>
그는 金日成 사망 무렵의 정황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수령님께서는 휴식하려고 묘향산에 있는 별장을 찾아갔다. 거기서 그는 사업일군 회보(보고)를 청취하다가 뜻밖에도 조명선 고위급 장령(편집자 注-조명선은 1923년생으로 金日成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빨치산 세대다. 민족보위성 부상, 인민군 사단장, 사회안전부 부부장, 강건종합군관학교 교장을 지냈다. 조명선은 혁명열사릉에 안장돼 있다)이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을 들은 후, 『무슨 병으로 세상을 뜨셨는가』라고 상세히 물어보았다.
사업일군들이 『어제 뇌일혈로 돌아가셨다』고 하자, 수령님께서는 『그래 수술은 하였는가』라고 물었다. 사업일군이 수술을 하지 못하였다고 하자, 성을 벌컥 내면서 『빨리 협화병원 원장을 부르오. 어째서 수술을 하지 않았는가를 내가 직접 그 한테 묻겠소』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가슴을 부둥켜안고 천천히 쓰러지셨는데 그때 신변의 의사들한테는 심장병 구급약이 없었다. 수령님께서는 그때까지 심장병이 발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장도 좋았다.
그리하여 의사들은 바삐 구급하는 한편, 무전으로 속히 직승비행기(헬기)를 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첫 번째 뜬 직승비행기는 그만 날씨 탓으로(구름이 꽉 끼고 비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산에 부딪히면서 추락하였다. 이것은 후에 안 사실이지만 비행기가 도착하지 않자 사고가 난 것을 알고 해당 부문에서 두 번째 비행기를 파견하였을 때는 이미 늦었다. 수령님은 병원에 가 치료를 받지 못하고 급작스레 세상을 뜨시었던 것이다>
金日成 사망시 경호 책임자는 개성에 있었다
국가원수의 신변 보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호」와 「주치의」다. 金日成의 신변 이상을 제일 먼저 감지할 수 있는 위치에 경호실장과 주치의가 있다. 조총련 의장 韓德洙와 金日成의 중국인 은사 가족 증언에 나타났듯이 金日成 사망 당시 주치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현장에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다음은 경호문제인데, 金日成의 경호책임자도 金日成 사망 사실을 사망 후 34시간이나 지나서 알았다는 사실이다. 金日成 경호는 「호위총국」(총국장·이을설 차수)에서 담당했다. 1960년대 후반에 설립된 「호위총국」은 金日成과 金正日의 경호전담 부대다. 金日成 경호는 「호위총국 1호위부」에서, 金正日 경호는 「호위총국 2호위부」가 전담한다. 金日成 사망 당시 「호위총국 1호위부」 부장은 최춘은이다.
최춘은은 북한 당국이 金日成 사망을 공식 발표하기 2시간 전인 1994년 7월9일 오전 10시경, 판문점에 있었다. 최춘은은 7월25일로 예정된 남북 頂上회담 경호와 관련, 金光洲 청와대 경호실 경호국장을 상대로 실무회의를 갖고 있었다. 남북 경호책임자 간의 회의였다.
북측 경호 대표단이 판문점에 도착한 것은 1994년 7월8일 아침이었다. 이들은 7월7일 오후 평양을 출발했다. 이때는 金日成이 사망하기 전이다. 金日成이 7월8일 새벽 2시에 사망했지만, 이들은 이 사실을 모른 채 개성에서 1박을 하고, 7월8일 오전 10시부터 남북 頂上의 경호와 관련해 첫 실무접촉회의를 가졌다. 金日成이 사망하고 8시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남북 대표들은 이 사실도 모른 채 경호문제를 협의하는 넌센스가 벌어진 것이다.
북측의 경호 대표단은 밝은 표정 속에 회의에 임했다고 한다. 합의는 오전 중에 쉽게 타결되었다. 그 당시 한국 측 관계자들은 『얘기가 아주 잘 되었다』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하루 뒤인 7월9일 오전 10시에 두 번째 실무접촉이 열렸다. 그 시각 북한의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전국의 청취자, 시청자에게 알린다. 오늘 낮 12시에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특별방송을 내보내드리겠다』고 두 차례나 되풀이해서 예고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이에 아랑곳없이 남북 경호 대표단은 실무회의에 들어가 전날 합의사항을 이행했다. 한국 측은 7월13일부터 평양에 파견할 대한민국 경호 점검반 명단을 북측에 넘겨주었고, 북측으로부터 신변안전 보장 각서를 받았다.
金日成이 죽었다면 그가 제의한 남북 頂上회담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북한이 한국 측 경호원들에게 신변안전 보장각서를 줄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북측 경호대표 최춘은은 웃고 농담하며 실무접촉에 임했다고 한다.
두 시간 후면 金日成 사망이 공식 발표되는데도 金日成의 경호책임자가 이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金日成의 경호책임자에게도 알려주지 못할 모종의 사연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金正日 언급: 『수령님은 집무실에서 순직했다』
金日成 사망 원인에 대한 金正日의 공식 언급은 金日成 사망 100일째 되던 1994년 10월16일에 처음 있었다. 金正日은 금수산의사당에 모인 黨 중앙委 책임일군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령님께서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黨과 혁명,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정열적으로 사업하시다가 집무실에서 돌아가시었습니다. 수령님의 서거는 순직입니다. 세상에 우리 수령님처럼 모든 사업을 깨끗이 마무리하고 돌아가신 영도자는 없습니다』
金正日 말대로 金日成이 집무실에서 순직했다면 왜 북한 당국은 金日成 사체를 부검했을까. 의문은 끝이 없다.
金日成의 사망 순간과 관련하여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북한의 최고 권력자 金正日이 金日成 사망에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최고 지도자의 사망을 늦게 알리는 이유는 첫째, 후계자 선출의 시간을 벌기 위해서며, 둘째는 敵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게 정설이다. 북한의 경우, 후계자 문제는 1974년에 이미 金正日로 정해졌기 때문에 발표를 미룰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敵의 공격에 대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인데 金日成 사망 직후 휴전선 일대는 조용했다.
만일 金正日이 全 軍에 특별 경계령을 내렸으면 휴전선 일대의 북한군에 無線이 빗발치는데 金日成이 심장쇼크로 쓰러진 7월8일 오전 2시부터 북한이 金日成 사망을 공식 발표한 7월9일 낮 12시 사이에 한국 측 첨단 전자·통신장비에 포착된 북한군 이상 징후는 없었다고 국방부는 발표했다.
金日成 사망 때 북한은 軍에 특별경계령을 내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金日成 경호부대인 호위총국에도 경계 강화 조치가 떨어지지 않았다.
중국의 鄧小平(등소평)이 高齡으로 사망했을 때 중국 정부는 이 사실을 즉각 공개했다. 高齡으로 自然死했기 때문에 숨길 게 없었다. 북한이 金日成 사망을 34시간이나 숨긴 것은 사망 원인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단정했다.
사망 직전 金日成의 왕성한 활동
사망 당시 金日成의 나이는 82세였다. 노동신문 보도에 따르면 그는 죽기 직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1994년 7월7일자 노동신문 1면 중간에는 전날(7월6일) 있었던 金日成의 행적과 현지 지도 내용이 소개돼 있다.
이에 따르면 金日成은 수흥, 동봉, 련포 협동농장과 주서, 동암 등 함주군 일대에서 논밭 곡식의 생육상태를 현지 지도하고 대단히 좋다는 만족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함주군은 함경남도 함흥市를 에워싼 郡이다. 묘향산 별장과는 가깝지만 평양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金日成은 현지 지도에서 『협동 농민들과 전체 농업 근로자들은 나라의 쌀독을 책임진 주인다운 입장에서 모든 농사 일을 알뜰하고 깐지게 하여 올해에 黨이 제시한 알곡 생산의 높은 목표를 반드시 실현하여야 하겠습니다』는 지도를 했다고 노동신문은 보도했다.
이날(7월7일) 저녁, 평양 TV방송에도 건강한 모습의 金日成이 姜成山 총리, 李鍾玉 부주석, 金永南 외교부장 등 20~30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함경남도 지방의 농촌을 현지 시찰하는 장면이 보도되었다.
7월8일자 노동신문에는 金日成 동정이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 대신 노동신문 7월8일자에는 눈여겨볼 곳이 두 군데 있다. 노동신문 1면 맨 왼쪽 상단에는 매일 「金日成이 누구로부터 축전을 받았다, 金日成이 누구에게 축전을 보냈다」는 기사가 실리는데, 이날은 金日成이 축전을 보냈다는 기사는 없고, 축전을 받았다는 기사 2개만 실렸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노동신문 1면 중간 부분에 「청진시 수남구역 黨위원회」 명의로 실린 「숭고한 뜻 충성으로 받들어」라는 기사다. 내용은 「우리는 수령을 언제나 마음의 기둥으로 굳게 믿고, 수령이 내세운 혁명과업을 충실히 수행하는 데 가장 값 높고 보람찬 삶이 있다는 것을 체득하고 수령의 사상과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혁명 실천 정신을 통하여 수령에게 끝없이 충성하여야 하겠습니다」이다.
이 기사는 북한 문제 전문가들로부터 金日成의 「부재」를 암시하는 내용이라는 분석을 낳았다.
사망 직전의 金日成 행적은 일본의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에도 보도되었다. 조선신보는 金日成 사망 2주기를 맞은 1996년 7월부터 「영원한 추억」이란 연재물을 실었다. 이 연재물에는 金日成의 1994년 7월6일과 7일 행적이 分단위로 소개되었다.
이에 따르면 7월6일에 열린 경제일군 협의회에서 金日成은 안색이 좋지 않았으며, 지시 도중 『가슴이 답답하다』며 손으로 왼쪽 가슴을 두드리다가 잘 피우지 않던 담배를 한 대 피웠다고 한다.
7월7일에는 金日成이 오후 4시9분, 5시25분, 5시37분 등 3차례에 걸쳐 자신의 비서실장(책임서기)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오후 4시9분 전화에서 金日成은 전날(7월6일) 경제일군협의회에서 지시한 사항들의 집행 준비 상황을 점검한 뒤, 『어제 金正日 동지가 重油발전소 설비 구입에 드는 外貨를 黨에서 보장하겠다고 했는데 관련 보고서를 金正日 동지에게 올렸느냐』고 확인했다는 것이다.
이어 金日成은 『정무원 일을 金正日 동지에게 부탁하니 참 안됐다. 동무들이 金正日 동지를 잘 받들어야 한다. 金正日 동지가 부담이 무척 많고 휴식도 없이 일하는 것이 제일 큰 근심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5시25분 전화에서는 한 간부 부인이 사망한 사실을 아는지를 확인했으며, 10여분 뒤인 5시37분에는 비서실 간부에게 공개할 수 없는 「중요한 교시」를 주었다고 한다. 조선신보는 金日成 비서실장의 말을 인용, 『수령님의 음성은 유달리 맑고 청정했으며, 정력에 넘쳐 있었다』고 소개했다.
노동신문과 조선신보 보도 내용을 종합하면 고령의 金日成은 1994년 7월6일 평양에서 장장 4시간에 걸친 정치국원 회의를 주재한 다음, 평양에서 함주로 이동해 함주군 현지지도를 했다. 현지지도를 마치고 이날 오후 묘향산 별장으로 이동한 金日成은 경제부문 간부들에게 「유훈교시」를 남겼다.
金日成-金正日 부자간 권력암투
金日成이 권력의 일선에서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하는 것은 아들 金正日이 그의 후계자로 추대된 1974년부터다. 金正日은 1980년 10월, 6차 黨대회에서 金日成의 후계자로 공식 선포되었지만 후계자로 추대된 1974년부터 실권을 행사해 왔다.
黃長燁 前 비서는 1999년에 발간한 그의 저서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이란 책에서, 金日成이 살아 있을 때 黨 비서실은 金日成 用 보고서와 金正日 用 보고서를 별도로 작성했는데, 金日成에게 올리는 각종 보고서와 진정서는 金正日의 검열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金日成 用 보고서는 북한의 실상과 전혀 무관한 장밋빛 내용을 담아 金日成은 북한의 실정을 제대로 보고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앞에서 거론한 북한군 장령도 그가 작성한 文件에서 이렇게 썼다.
<金日成의 동생 金英柱가 金正日의 견제를 받아 권력 일선에서 사라진 후(1974년) 金日成보다 金正日에게 충성하는 아첨쟁이들이 늘었다. 고령의 金日成은 일상 사무를 金正日에게 맡겼다. 金日成에게 직접 회보하고 보고를 올리는 중요한 일들을 金正日이 직접 처리했다. 金日成에게 올라가는 보고서는 모두가 「全 조선은 생기로 차 넘치고 농업생산이 상승하고 공업생산에서는 인민들의 필수품이 폭포처럼 쏟아진다」는 허위보고였다. 金日成은 이런 허위 보고에 迷惑(미혹)되어 金正日이 타고난 領導(영도) 재능이 있으며 모든 사업을 이끌어 가고 있다고 사뭇 흡족해 했다>
망명한 金正日 처조카 李韓永(이한영·1997년 북한 공작원에 의해 피살됨)씨는 『金日成은 남자 성우 3명과 여자 성우 3명이 번갈아 낭독하는 보고서를 들으며 말년을 보냈다』고 말했다.
1993년 NPT 탈퇴 후 재등장한 金日成
金日成이 권력 前面에 다시 나타날 수 있게끔 빌미를 제공한 사람은 아들 金正日이다. 사건은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해 3월12일, 북한은 核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공식 발표했다. 북한이 NPT에 가입한 것은 1985년 12월12일인데, NPT에 가입하면 의무 조항인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고, 核 안전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북한은 駐韓미군에 核무기가 배치돼 있다는 점을 이유로 협정 체결을 미루다가 1992년 1월에 안전협정에 서명하긴 했으나, 국제원자력기구가 의심하는 지역에 대한 특별사찰 요구를 거부해 왔다.
북한이 완전무결한 核폭탄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核무기 개발을 위해 국제적으로 안간힘을 써 오던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가 제시한 특별사찰 마감시한에 NPT 탈퇴를 공식 발표하자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테러국인 북한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1993년의 NPT 탈퇴 발표가 은퇴생활을 하고 있던 金日成이 권력 前面에 다시 나설 수 있는 계기가 될 줄은 金正日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NPT 탈퇴 발표 후 북한은 미국과 직접 대화하는 통로를 갖기는 했지만 유엔의 對北제재 결의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다. 북한과 전통적 우호관계인 중국과 러시아도 북한의 核무장을 원치 않았다.
고립상태에 빠진 북한을 구하기 위한 해결사로 화려하게 등장한 사람이 金日成이다. 북한이 NPT 탈퇴를 공식 발표한 1993년 3월12일부터 1994년 7월8일 사망할 때까지 金日成은 카터 前 미국 대통령,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 개리 애커먼 美 하원 亞太소위원장, 샐리그 해리슨 미국 카네기財團 연구위원, 윌리엄 테일러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 부소장, 피터 헤이스 미국 노틸러스 퍼시픽 연구소 소장, 빌리 그레이엄 목사 등을 평양에서 만나 核개발을 중단하겠다는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전달했다.
1994년 6월15일부터 평양을 방문한 카터 前 미국 대통령은 金日成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金日成은 카터의 도움으로 美·北 직접 협상 통로를 열고 북한 核개발로 인한 對北제재 분위기를 일시에 반전시켰다. 카터와의 회담에서 金日成은 核개발 포기 대가로 경수로 건설과 重油 지원이란 선물을 미국으로부터 받아낼 수 있었다.
金日成이 金正日을 질책하다
20년간 권력 前面에서 사라진 金日成의 화려한 재등장은 아들 金正日 입장에선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이는 金日成·金正日 父子간의 권력 암투로 이어졌을 것이다.
1993년 6월22일 러시아 이타르타스 통신에서 발행하는 「아시아 회보」는 평양發 기사에서 북한의 金日成이 최근 일련의 國政 운영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아들이자 공식 후계자인 金正日 비서를 심하게 질책했으며, 金正日은 질책에 따른 신경과민증으로 두 달간이나 집무를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보도했다. 「아시아 회보」는 민감한 국제 문제를 다루는 권위 있는 매체로 주로 러시아 정부기관과 연구소 등에 배포된다.
보도에 따르면 북한 지도부內에서는 金正日 지지자와 金日成의 나이든 붉은 근위대 간에 은밀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金正日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면 金日成 지지자들은 축출될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 회보」는 6월24일자 후속 기사에서 金日成이 NPT 탈퇴 결정 등 중요 문제 처리와 관련, 金正日을 견책했으며 이 때문에 金正日의 위상이 다소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 무렵 일본 교도통신은 북한 金正日이(1993년) 4월 말 예술 관계자들과의 좌담회에 출석한 후 2개월 반이나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춰 평양의 서방 측 외교소식통들과 주민들 사이에서는 아버지 金日成과의 불화說, 교통사고說 등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北京 외교 소식통의 말을 인용, 「金正日의 장기적인 소재 불명이 평양 시민들 사이에 커다란 화제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유에 관해 여러 가지 소문이 난무하고 있다」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음주광에다 흡연광인 金正日이 위암에 걸려 입원해 있다는 說, 金正日이 독단적으로 核확산금지조약의 탈퇴를 결정함으로써 金日成의 노여움을 샀다는 父子 불화說을 꼽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권력 일선에 再등장한 金日成은 국정 운영의 잘못을 물어 金正日 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1993년 12월8일에 개최된 黨중앙위원회 제6기 제21차 전원회의에서 金日成은 3차 7개년 경제계획(1987년에서 1993년) 수행 총화보고를 통해, 이 계획의 실패를 공식 시인하고 향후 2, 3년간을 완충기로 설정한다고 선언했다.
북한 역사상 정책 실패를 공식 시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실패의 공식 시인은 자아비판이며 문책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3차 7개년 계획의 입안과 집행상의 실질적 최고 책임자는 金正日이었다.
국가경제위원장이며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었던 金達鉉이 물러나고, 金正日의 술친구이자 그의 최측근인 黨비서 金容淳은 黨정치국 후보위원에서 탈락되어 권력 서열 15위에서 26위로 떨어졌다. 黨 경제비서 박남기는 평양시 행정경제위원장으로 좌천되었다.
金正日의 잦은 失政
前통일원 정보분석실장 정대규씨는 1997년에 발표한 「金正日 정권의 특징과 위기 요인」이란 보고서에서 金正日 정권의 등장 배경과 그 이후 벌어진 金日成·金正日 父子간의 갈등, 그리고 金正日의 파행적 국정운영을 연도별·사안별로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金正日은 1974년 2월12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제14차 전원회의에서 金日成 후계자로 추대되고, 1980년 10월 黨 제6차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겸 黨총괄비서, 黨중앙군사위원에 선출되면서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사실상 공인받았는데, 그 이후 계속해서 失政을 범하는 바람에 결국 金日成이 親政체제로 복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보고서의 관련 내용이다.
<金正日의 통치는 우리 식 사회주의의 폐쇄성을 더욱 굳혀 가면서 북한의 경제 사정과 국제 환경, 그리고 남북관계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하였다. 버마 아웅산 폭탄 테러사건(1983년 10월9일 발생)과 KAL機 폭파사건(1987년 11월29일 발생) 등을 자행함으로써 남북관계를 경색시키고 북한을 국제 테러국가로 지정받게 했다.
1984년 9월의 對南 수재물자 지원, 1989년 10월의 세계 청년학생 평양축전과 같은 오직 對南 경쟁심리에서 北의 경제사정을 전혀 고려치 않은 무모한 정치적 결정을 함으로써 북한의 경제사정 악화를 가속화시켰다. 더욱이 1980년대 말의 서해 남포갑문 건설, 동양 최대라는 103층 유경호텔 건축 등 소위 기념비적 건조물 축조공사는 민간 경제의 고갈을 초래했으며, 주체농법 강화는 식량난을 가중케 했다.
특히 核문제를 둘러싸고 NPT 탈퇴 선언을 하는 등 핵무기 개발 방향으로의 거듭되는 강경 자세 고수는 북한 對 全세계라는 극히 불리한 대결구도를 한때 형성하기도 했다. 金正日의 통치는 마침내 북한 체제를 심각한 경제난, 국제적 고립, 金正日 통치에 대한 회의감 조성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 증대라는 3重苦에 직면케했다.
金正日은 자신의 失政으로 인한 정치적 취약성을 오로지 군부 지지로써 만회, 북한 체제를 군사 병영 사회화하였다. 그는 1990년부터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1990년 5월), 인민군 최고사령관(1991년 12월), 인민군 원수(1992년 4월), 국방위원장(1993년 4월)으로 취임, 軍 요직을 하나하나 차지해 나갔다.
金正日의 失政 누적과 軍權 강화가 진행되던 1993년 후반 들어 金日成은 마침내 金正日의 통치 능력상의 한계와 문제점을 인식하고 親政체제로 복귀하는 조치들을 연이어 취하기 시작했다>
『북한이 망할 징조다』며 탄식한 金日成
親政체제 복귀 후 金日成의 왕성한 활동과, 國政 운영을 잘못한 아들 金正日에 대한 金日成의 불만은 북한 장령의 文件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인용하면 이렇다.
<바로 이즈음(편집자 注-金日成이 金正日의 허위보고에 속고 있을 무렵) 미국 前 대통령 카터가 조선을 방문하게 되었다. 조선의 철천지 원수 미국의 前 대통령의 방문은 획기적 사변이 아닐 수 없다. 金日成은 카터 방문에 따른 준비 공작을 손수 지도하였으며 카터 前 대통령과 몇 차례 회담을 진행하였다. 이때 우리들은 金日成의 완성한 정력에 감탄한 나머지 수령님의 실제 연령을 잊었다.
金日成은 정력적으로 사업하다가 휴식도 취하지 않고 기층(밑바닥 층)으로 사업검사를 내려갔다. 한 農家를 들러 보았는데 주인의 누르끼한 얼굴과 잘 먹지 못하여 여윌대로 여윈 어린 자식들을 보며 金日成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金日成이 집주인에게 『저를 많이 욕하여 주십시오. 제가 잘 영도하지 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고 말하자, 시찰을 따라온 道 행정위원회 위원장이 황급히 무릎을 꿇고 『수령님, 저를 처리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金日成은 『아니오. 내가 잘 영도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잘 먹지 못하고 잘 입지 못한 것이니 당신하고는 상관없소』라며 말을 막았다. 계속해서 金日成은 『우리가 혁명을 시작할 때도 이렇게 백성들이 곤란하지 않았는데 혁명에서 승리한 지 어언 50여 년이 되어 오는데 아직도 인민들이 잘 먹고 잘 입지 못하고 있는데 텔레비와 신문 따위에서는 날마다 인민들이 이밥(쌀밥)에 돼지고기를 먹고 있다고 허튼 소리를 하고 있으니 망태기(망할 징조)요, 정말 망태기요』하면서 눈물을 훔치셨다>
金日成이 죽는 그날까지 북한의 식량난을 걱정했다는 것은 金日成 장례 기간 중 평양방송에 보도된 한 주부의 절규에서도 나온다. 이 주부는 1994년 7월16일 오후 5시20분쯤 평양방송에 출연했다. 기자는 延吉에서 이 방송을 들었는데, 주부 이름은 받아 적지 못했다. 내용은 이렇다.
<최근 현지 지도를 나온 수령님께 식량사정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며 몸둘 바를 몰라 하니까 수령님은 『그런 말을 하는 게 뭐가 죄가 되느냐. 동무는 정책을 바로 세우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며 칭찬을 했다>
金日成을 애도하는 장례식 기간 중에 북한의 어려운 식량 사정이 거론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식량난을 거론하는 것은 金正日 통치를 정면 비판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金日成 장례기간 내내 기자는 중국 延吉에서 북한 라디오 방송을 청취했지만 식량난에 대한 비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金日成이 묘향산 별장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기자에게 알려 준 중국 공안관계자는 『북한 주민들이 3개월째 식량배급을 못 받고 있다는 것을 金日成이 알게 된 것은 1994년 6월 초였다. 그전까지 金日成은 허위보고를 받고 있었다. 金日成이 현지지도를 나갈 경우, 金正日 측근들이 먼저 나가 해당 주민들의 집 쌀독에 쌀을 채워 놓았다가 金日成이 가고 나면 압수해 金日成은 진짜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인민 영웅 정순실이가 金日成에게 直報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식량난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을 안 金日成은 남북 頂上회담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 했고, 金正日은 이를 반대했다』고 말했다.
金正日 세력에 결정타 가한 남북 頂上회담 제의
남북 頂上회담 제안자는 金日成이며 金日成의 뜻을 한국에 전달한 사람은 지미 카터 前 미국 대통령이다.
북한을 방문하고 서울에 들른 카터 前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金日成이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金泳三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金泳三 대통령이 1994년 6월18일 『金日成과의 頂上회담을 언제 어디서든 빠른 시일 안에 조건 없이 갖겠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남북 頂上회담은 공론화했다.
한 북한문제 전문가는 『카터는 金日成에게 북한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과의 관계 개선이 선결 과제라는 점을 부각시켰고, 金日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남북 頂上회담이란 大카드가 나왔다』며 『金日成은 남북 頂上회담을 통해 북한의 경제위기 극복과 아들 金正日 세력 제거 등 두 가지를 일시에 해결하려고 한 것 같다』고 말했다.
1994년 6월28일, 남북 頂上회담 개최를 위한 남북 부총리급 예비접촉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이 접촉에서 「남북 頂上회담을 1994년 7월25일부터 7월27일까지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한다. 체류 일정은 필요에 따라 더 연장할 수 있다」는 합의서가 작성되었다. 남북 頂上회담은 金日成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런 金日成이 남북 頂上회담을 보름 앞두고 1994년 7월8일 急死했다. 정대규씨는 『남북 頂上회담을 앞두고 궁지에 몰린 金正日과 그 지지세력이 어떤 식으로든 저항했을 것이며, 金日成 急死의 원인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고 말했다.
金日成이 카터와의 회담에서 『남북 頂上회담이 잘 되면 내가 앞으로 10년 더 통치하겠다』고 한 발언도 金正日에게는 신경쓰이는 일이었다. 金日成의 남북 頂上회담 발표가 식량난에 굶주려 있던 북한 주민들에게 「희망」으로 비쳐진 것도 사실이다.
金正日 失政으로 탈북자가 늘었다
북한군 장령은 그가 작성한 文件에서 金正日 통치 이후 북한의 경제사정은 나날이 나빠졌다고 지적했다. 인용하면 이렇다.
<金正日은 집권하면서부터 군대 점점을 늘렸으며 국방비 지출은 작년(1998년)에 최고 기록을 돌파했다. 지난해까지 조선인민군 총수는 105만 정도였다. 국방비 지출은 25억 달러를 초과했다. 국방비가 국민 경제의 4분의 1을 넘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뿐일 것이다.
경공업 분야는 전반이 마비되었고, 全 조선 사회가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으며 인민들의 생활은 조국 해방 후 제일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다. 이러한 나쁜 일은 신문에 싣지 못하여 누구도 감히 조선의 나쁜 일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제반 사회가 점차 쇠퇴의 길로 나갈 때 金正日은 마땅히 군대를 줄이고 인민들의 먹고 입는 문제를 생각해야 하는데, 군대를 더욱 늘리고 미사일 연구를 다그쳐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발사하여 인민들로 하여금 나라에 대하여 신심을 가지게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金日成 死後 북한의 변화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수령님께서 조선을 領導할 때는 다른 나라로 도망치는 일이 크게 일어나지 않았는데, 인민들 속에서 金正日 찬양 소리가 높아지고 있을 때 黃長燁 사건이 터져 全조선 인민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몇만 명의 사람들이 중국으로 달아났으며 중국을 통해 남조선에 넘어간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해당 부서 분석에 따르면 최근 몇 년 내 중국으로 도망쳤다가 돌아온 조선 사람이 대략 200만 명으로 조선 전체 인구의 13%를 점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정치 감옥인 정치범 관리소에 갇혔으며,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다. 우리 나라가 창건되어서부터 정치적 문제로 감옥에 갇혔거나 감옥에서 죽은 사람이 50만 명 정도이며, 이런 저런 운동에서 피해를 받았거나 추방받은 사람이 대략 500만 명 정도이고, 지금까지 각종 재판을 받은 범죄분자가 약 280만 정도다. 지난해에는 각종 범죄분자 670명을 총살하였다.
군대의 중요 부서 책임자는 金正日이 직접 임명했다. 무기제조 공장 지배인 임명도 손수 지휘하여 시름을 놓았다. 25명 내지 30명쯤 되는 소부대에도 정치지도원과 보위지도원을 두었다.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은 金正日은 누구의 말도 그대로 듣는 일이 없으며 외국 방문을 꺼려했다. 방문 기간 중에 반란이 날까 봐 근심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金正日에게 외국 방문을 건의 못 한다>
국가정보원의 한 전직 간부는 『북한 당국이 金日成 사망을 공식 발표할 때까지 안기부는 그와 관련된 아무런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며 『金日成 사망이 공식 발표된 후 안기부 간부들은 金泳三 대통령에게 불려가 질책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상한 징후들
이 간부는 『金日成 死後에 관련 기관들의 각종 정보와 첩보들을 再분석한 결과, 金日成 有故를 암시하는 징후들을 발견하게 되었다』며 『金正日은 아버지 金日成을 제거하기 위해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한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이다.
『金正日이 아버지 金日成을 제거하기 위한 거사를 결심한 시점은 1994년 7월4일, 월요일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부지역에 위치한 한국군 감청부대인 「○○기지」에서 처음 포착했다.
미국의 첨단 통신·전자장비를 갖춘 이 기지의 주 임무는 북한 내의 각종 방송과 통신내용을 감청하는 일이다. 이날부터 이 기지의 안테나에 북한의 국가보위부와 사회안전부가 방송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같은 내용의 지침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하달하는 이상한 현상이 포착되었다.
「남조선의 金泳三 대통령이 공화국을 방문할 예정이고, 제네바에서 朝美 회담이 열릴 예정이지만 黨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므로 黨과 軍, 주민들은 黨중앙을 믿고 조금도 동요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감청부대에서는 처음엔 남북 頂上회담과 美北 3단계 고위급 회담을 앞둔 일상적인 방송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7월4일부터 시작된 이 방송이 7월5일, 7월6일에도 계속되자 유심히 체크하기 시작했다. 남북 頂上회담이 있다는 사실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아니라 「黨중앙」을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내용이 수상쩍었고, 동요하지 말라고 하면서 유독 「黨중앙」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예사롭지 않았다. 「黨중앙」은 金正日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국가보위부는 인민군을 상대로, 사회안전부는 경찰과 주민을 상대로 이러한 설득 방송을 계속하고 있는 점도 예전엔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인민무력부는 金日成 산하에 있었지만 국가보위부와 사회안전부는 金正日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감청부대에서는 이를 「특이 사항」으로 분류해 상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이 보고는 북한 내부에 흔히 있는, 그래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정보로 취급되었다. 지미 카터 前 미국 대통령을 만났을 때 金日成이 팔순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워낙 건강했기 때문에 우리는 남북 頂上회담이 무산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감청기지에서 획득한 정보를 놓쳐 버린 것이 우리의 실수였다』
인민무력부장 吳振宇의 의문의 죽음
1994년 7월11일 오후 11시40분, 금수산의사당에 안치된 金日成의 시신이 북한 중앙방송을 통해 全세계에 처음 공개되었다. 金正日을 중심으로 인민무력부장 吳振宇, 정무원 총리 姜成山 등이 金日成 시신을 참배하던 중, 「묘한」 장면이 TV에 잡혔다. 金正日이 吳振宇 귀에 대고 속삭이고 있는 장면인데, 두 사람의 태도가 묘했다.
金正日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데, 吳振宇는 못 들은 척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吳振宇가 金正日 지시를 거역하는 듯한 장면이었다. 인민무력부장 吳振宇가 金日成과 같은 빨치산 세대의 元老이긴 하지만 金正日의 말을 못 들은 척하는 것은 북한 사회에선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이 장면에 대해 한 북한문제 전문가는 『金正日이 金日成 사망에 관련돼 있음을 알고 있는 吳振宇가 金正日에 대해 그런 식으로 불쾌한 심정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했다.
吳振宇는 金日成 장례가 끝난 그해 10월, 프랑스에서 폐암 치료를 받고 이듬해 2월25일 평양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시 吳振宇의 나이는 78세였다.
金正日이 1974년 金日成 후계자로 추대된 데 대해 『후계체제를 서둘러선 곤란하다』며 반대했던 정무원 부총리 南日은 1976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 사건도 金正日에 의한 암살로 추정되고 있다. 金日成 사망 후 金正日은 軍 고위 간부 30여 명을 철직한 바 있다.
金日成 急死는 金正日 통치에 장애물이었다. 金正日의 통치 능력 한계를 인식한 金日成이 은퇴생활을 접고 親政체제를 부활시켜 金正日과 그 세력들을 견제하는 와중에서 急死함에 따라 金正日은 통치권을 되물려 받긴 했지만 金日成에게 충성하는 세력들의 지지는 기대할 수 없는 약점을 안고 있었다.
金正日은 金日成 사망 후 몇 년간은 黨에 힘을 실어 줘, 金日成 急死의 내막을 알고 있으면서 자신에게 부담되는 존재인 軍 원로들이 黨의 통제를 받도록 했다. 이 시기 인민군대는 「黨을 결사 옹위하며 목숨으로 지키는 총폭탄」에 불과했다.
金正日은 「金日成 사람」으로 평가되는 吳振宇, 崔光(인민군 원수. 吳振宇 사망 후 인민무력부장. 1997년 2월21일 사망), 김광진(인민군 차수.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1997년 2월27일 사망) 등 軍 원로들이 잇달아 사망한 이후인 1997년 2월부터는 거꾸로 軍이 黨을 통제토록 했다.
1994년 7월에 발표된 金日成 사망 당시 국가장의위원회 서열과 1997년 4월에 발표된 북한 권력서열을 비교하면, 金日成 생전에 권력서열 70∼80위에 머물렀던 군부 인사들이 10위권 안팎에 진입했음을 볼 수 있다.
호위총국장 李乙雪이 77위에서 8위로, 인민무력부 총정치국장 趙明祿 차수가 90위에서 14위로, 사회안전부장 白鶴林 차수는 53위에서 15위로 뛰어올랐다. 이보다 상위 서열인 李鍾玉·朴成哲·金炳植 부주석과 정치국원들이 고령의 원로인 점을 감안하면 군부 실세가 북한 권력체의 최상층부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金正日의 잦은 軍부대 방문
북한 노동신문은 1997년 5월19일자 사설에서 『인민군대는 우리 식 사회주의의 기둥이며, 혁명의 대학이며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인민군대처럼 해 나가는 것은 당원들의 의무다. 黨 조직은 모든 사업을 인민 군대가 창조한 사상과 도덕·문화를 따라 배우라』고 주장, 軍이 黨을 지배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이 무렵부터 『金正日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수뇌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는 충성의 결의가 구호로 제창되기 시작했다. 「혁명의 수뇌부」는 軍이며, 그 수반이 국방위원장 金正日이다.
黨과 정무원, 최고인민회의 등이 軍의 통제下에 놓이면서 노동당 정치국과 黨 중앙위원회, 黨 중앙군사위원회는 소집되지 못하고 金正日은 군부 실세들에 둘러싸여 軍 부대 방문을 계속했다.
金日成 사후부터 1997년 12월 초까지 金正日의 공개 활동은 총 158회인데 이 중 軍 부대 방문 등 軍 관련 행사가 95회를 차지했다. 金日成이 사망한 1994년에는 金正日의 14회 공개 활동 중 軍 관련 행사가 하나도 없었으나 1995년에는 35회 공개 활동 중 20회, 1996년에는 52회 중 35회, 1997년에는 57회 중 40회로 급증했다. 1996년부터 軍 관련 행사가 급격히 증가한 것은 金正日의 통치력이 군부에 의존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金正日의 「총비서」 승계도 파행적으로 이뤄졌다. 노동당 규약에 따르면 「총비서」는 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선거토록 돼 있다. 통상적으로 黨 중앙위원회는 黨 대회나 黨 대표자 대회를 먼저 연 다음, 마지막 날에 열린다. 金正日은 이런 절차를 밟지 않고 黨 중앙위원회와 黨 중앙군사위원회 공동 명의의 「특별보도」 형식을 통해 1997년 10월8일 「총비서」에 추대되었다.
金日成 사망 10주년이던 지난 7월8일 평양에는 비가 내렸다. 金日成이 죽은 1994년 7월8일에는 천둥 번개가 쳤다. 金日成 시신은 「주석궁」이라 불리는 금수산의사당 안에 있다.
金正日은 지난 7월8일 밤 자정에 軍 고위 간부들과 함께 금수산의사당을 참배했다. 권력 서열 2위인 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이날 추모사에서 『金日成 동지의 사상과 위업은 金正日 동지에 의해 전면 계승되고 있다』면서 『金正日 동지를 중심으로 일심단결하자』고 말했다.
올해 초 평양을 다녀온 영국 인디펜던트紙 기자 스티브 블룸필드는 이날 「죽은 주석의 사회」라는 기사에서, 오늘 평양의 금수산 기념궁전 앞 광장은 弔花와 조용한 흐느낌으로 가득찰 것이라며 북한에서 차지하는 金日成의 위상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고 썼다.
金正日은 왜 神과 같은 아버지를 剖檢하게 했는가?
남북 頂上회담을 앞두고 金日成은 아들에 대한 不信이 깊어지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런 父子 갈등이 金日成의 죽음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아직도 金正日에 의한 謀殺說을 버리지 않는 對北 전문가도 있다
● 중국 공안요원: 『아버지 金日成이 제안한 남북 정상회담을 아들 金正日이 반발, 회의석상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金日成에게 심장발작이 발생했다』
● 조총련 의장 한덕수: 『金日成은 회장실에서 죽었다』
● 金日成의 중국 은사 가족: 『金日成은 집무실 책상에서 숨을 거뒀다』
● 金日成 사망 당시 주치의는 현장에 없었고, 경호책임자는 판문점에 있었다
● 1993년 북한 NPT 탈퇴 후 권력 일선에 재등장한 金日成은 아들 金正日을 질책하고, 金正日 측근인 김달현·김용순을 좌천시켰다
● 金日成 급사 4일 전부터 국가보위부와 사회안전부는 「黨중앙」(金正日)을 믿고 따르라고 방송했다
禹鍾昌 月刊朝鮮 부장대우 편집위원 (woojc@chosun.com)
사망 장소 발표 안 해
6·25 전쟁의 戰犯이자 북한의 독재자인 金日成은 1994년 7월8일 오전 2시에 죽었다. 북한 당국이 金日成 사망을 공식 발표한 것은 1994년 7월9일 낮 12시로, 사망 후 34시간이 지나서였다.
북한 당국의 최초 발표 내용은 「金日成주석이 심장혈관의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 오다 겹 쌓이는 과로로 인해 7월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되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었다. 즉시에 모든 치료를 한 후에도 심장쇼크가 증악되어 7월8일 오전 2시에 사망했다. 7월9일에 진행된 병리 해부검사에서 질병의 진단이 완전히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심장이 좋지 않은 金日成이 과로로 인해 「自然死」했다는 설명이다. 당시 金日成의 나이는 82세였다.
이 발표에서 북한 당국은 金日成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죽었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金日成 사망 당시 그의 아내 金聖愛, 그의 아들 金正日 등이 임종을 지켜보았는지, 유족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도 거론하지 않았다. 訃音(부음)의 가장 기초 사실인 사망 장소를 북한 당국은 숨겼다. 金日成 사망시 金正日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79년 朴正熙 대통령 有故시 대한민국 정부가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全軍에 특별경계령을 내린 것이다. 북한은 金日成 사망에도 불구하고 軍에 아무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金日成 사망은, 그가 대한민국 金泳三 대통령에게 제안한 남북 정상회담을 불과 보름 남짓 앞두고 발생해 더욱 충격을 주었다.
金正日 전처 成蕙琳 일가,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黃長燁을 비롯한 수많은 북한 주민들의 탈북 사태는 金日成 死後에 이뤄졌고, 북한 주민 300만 명이 굶어 죽는 대규모 餓死(아사) 사태도 金日成 死後에 발생했다. 金日成 사망은 동구권 몰락과 소련 붕괴의 여파로 흔들리는 북한 사회를 붕괴로 몰아가는 대사건이었다.
金正日은 왜 국가주석에 취임 못 하나
金日成 死後 북한을 대표하는 최고 권력인 국가주석 자리는 한동안 공석이었다. 金正日은 金日成의 「遺訓 교시」에 따른 遺訓 통치를 했다. 1998년 헌법개정으로 국가 주석직으로 폐지됐다.
遺訓 통치는 金日成이 사망 이틀 전인 1994년 7월6일, 정무원 총리와 부총리, 黨비서, 국가계획위원장 등 경제부문 핵심 간부들을 묘향산 별장에 불러 직접 지시했다는 「遺訓 교시」에 따른 통치다. 遺訓 교시는 金日成의 유언을 모은 것인데, 경제개방과 합작사업을 통해 낙후한 북한의 전력·화학·시멘트·선박·금속공업 등을 살리라고 강조한 내용이다.
아들 金正日은 아버지 金日成의 권력 중 「인민군 최고사령관」과 「국방위원장」, 「총비서」 자리만 물려받았다. 金正日 1人 독재체제의 북한에서 자리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국방위원장은 「북한의 일체의 무력을 지휘 통솔」할 뿐 국가 수반이 아니다. 對外 관계에서 북한을 대표하는 기관은 최고인민회의다. 따라서 북한을 대표하는 얼굴은 현재 권력 서열 2위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金永南(76)이다.
金正日이 2000년 6월15일 金大中 대통령과 남북 頂上회담을 할 때, 우리 측의 답방 요구를 거절하며 대신 金永南 위원장을 보내겠다고 제의한 것은 金永南 위원장이 외교관계에서 북한 당국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金正日 체제의 안정성 여부는 한국의 對北정책에서 중요한 요소다. 金正日이 북한의 실질적인 권력자라면 金正日과 대화를 해야 하겠지만, 만일 金正日을 조종하는 세력이 따로 있다면 우리의 대화 상대는 바뀌어야 할 것이다. 對北정책의 목표와 방향, 내용, 추진 강도 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다.
이런 관점에서 북한전문가들은 『金正日이 국가주석직을 승계하지 못하고 결국 폐지한 것은 그가 金日成 사망에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기 때문이며, 金正日 권력의 안정성과 관련해 제일 먼저 염두에 둬야 할 것은 金日成 사망의 정확한 원인 규명』이라고 말했다.
북한전문가들은 『북한과 같이 통제된 사회에서 金日成의 정확한 사망 원인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으나 金日成 사망과 관련한 북한 당국의 발표가 의문투성이기 때문에 그 허구성을 추적하면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으로 출장 가다
북한 당국이 金日成 사망을 공식 발표한 지 닷새 후인 1994년 7월14일, 기자는 중국 延吉에 있었다. 당시 기자는 朝鮮日報 출판국 주간조선부 소속으로 金日成 死後 북한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취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延吉은 두만강을 경계로 북한과 맞닿은 중국의 국경 도시다. 이곳은 북한의 TV와 라디오 방송을 시청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북한에 들어가 보따리 장사를 하는 중국 조선족의 본거지여서 북한 사정에 밝은 곳이다.
全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金日成 사망 사건에 대해 북한 당국이 일부 外信 기자들에게만 평양 취재를 허용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벌어진 사건을 당사자인 한국 기자들은 국외자의 눈으로 外信을 인용, 보도하거나 먼발치의 중국 땅에서 북한을 훔쳐보는 방법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기자는 연변 조선족자치주 정부 관계자, 연길市와 도문市 관리, 중국 공안 관계자들을 만나고, 북한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을 보고 들으며 북한 사정을 간접적으로 취재했다. 오전엔 中朝(중조: 중국과 북조선) 국경인 圖門(도문)에 나가 조선족 보따리 장사들을 만나고, 오후에는 연길시내로 돌아와 이곳에 살고 있는 북한 국적의 조선족 동포들과 중국에 출장 나왔다가 金日成 사망과 동시에 단행된 中朝 국경폐쇄로 인해 발이 묶인 북한 사람들을 접촉하는 것이 일과였다.
1994년 7월의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 찌는 듯한 더위에 머리는 지끈거리고 온 몸은 땀으로 범벅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 당시 延吉에는 북한이 일본의 朝總聯(조총련) 자금을 끌어들여 1992년에 건립한 두만강 호텔을 비롯해 북한의 「능라 88회사」와 중국 동북아회사가 공동 투자한 목단식당, 북한의 「오륜회사」와 중국 기업이 합작한 평양식당, 북한의 청진市와 중국 선호기업이 합자한 청진식당, 북한의 外貨벌이 기관인 대성무역공사 연길支社 등 親北 업체들이 많이 진출해 있었다.
중국에 출장 나왔다가 국경 봉쇄로 발이 묶인 북한의 외화벌이 일군들은 매일 오전 10시쯤 대성무역공사 연길지사에 모여 평양방송을 들으며 추모회를 갖고 있었다. 연길에 파견된 북한인들은 서울에서 온 기자를 경계하는 분위기였으나, 졸지에 발이 묶인 북한 외화벌이 일군들은 서울에서 온 기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기자가 이들에게 질문한 내용은 金日成이 과연 어떻게 죽었나 하는 점과 金日成 사후 북한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기자는 많은 북한인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들 역시 그 점을 궁금해했으나 명쾌한 대답은 하지 못했다.
목단식당과 미모의 女주인
金日成 장례 기간 중 延吉시내에서 유일하게 金日成 빈소가 마련된 곳은 목단식당이었다.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운영하는 이 식당은 쫄깃쫄깃한 면발과 칼칼한 肉水(육수)의 평양식 냉면이 일품이었다. 빼어난 음식 맛 때문에 백두산 관광을 간 한국 사람들이 들르는 관광명소 중의 한 곳이다.
목단식당은 문상객을 맞기 위해 문은 열어 놓았지만 장사는 하지 않고 있었다. 목단식당의 주인은 미모의 북한 여자였다. 직업상 호기심 때문에 기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목단식당 안에 들어가기로 했다. 검은 양복에 흰 와이셔츠, 검은색 넥타이를 매고 문상객처럼 위장했다.
기자가 목단식당에 가보겠다고 하자 연길市 관리들은 극구 만류했다. 연길市 관리들은 목단식당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탈북자들을 잡기 위해 北에서 파견된 「조교」들이기 때문에 목단식당을 북한 공작원들의 아지트로 추정하고 있었다. 金日成의 죽음으로 흥분해 있는 북한인들이 서울에서 온 朝鮮日報 기자에게 횡포를 부릴 게 뻔하다며 우려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조선족 한 사람이 동행했다. 식당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기자가 한 시간 내에 나오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목단식당에 들어가니 1층은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는 전형적인 식당이었고, 2층은 사각형의 복도를 따라 밀폐된 방이 마련돼 있었다. 金日成 빈소는 2층에 있었다. 2층 복도에는 대형 弔花들이 즐비했다. 1층에 아무도 없어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주방 쪽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그는 기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커먼 얼굴에 건장한 체격의 이 남자는 한국말을 사용했다.
『무슨 일로 왔어요?』
『빈소를 보러 왔습니다』
그는 기자의 위아래를 훑어보고 난 뒤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서울에서 출장 온 朝鮮日報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자, 그의 표정이 일순 어그러졌다. 그는 『당장 나가라』며 언성을 높였다.
기자가 『빈소만 둘러보고 바로 나가겠다』고 하자, 그는 기자의 양손을 붙들더니 가슴으로 밀쳐 냈다. 밀려나지 않기 위해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하얀색 소복을 입은 미모의 여자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왔다.
달걀형의 갸름한 얼굴에 오똑한 코와 짙고 검은색 눈동자가 하얀 소복과 더불어 黑白의 조화를 이루었다. 키는 165cm 가량,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녀는 기자에게 방문 목적을 물었다. 다시 한 번 신분을 밝히고 『빈소 주변을 스케치한 뒤 나가겠다』고 하자,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喪主(상주)가 원치 않는다』며 돌아가라고 말했다.
『서울에서 중국까지 출장 와서 그냥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빈소 구경만 하고 가겠다』고 하자, 그녀는 『한국 기자는 들여놓지 않는다』고 말하며 손짓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잠깐이면 된다』고 말하며 양해를 구하고 있는데, 갑자기 2층의 이 방 저 방에서 건장한 체격의 북한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겁이 났다. 얼른 식당 밖으로 나가자 그들은 식당 밖까지는 쫓아오지 않았다.
화가 잔뜩 난 중국 공안요원
목단식당을 찾아간 그 다음날, 그날도 평소처럼 오전에 圖門에 갔다가 오후에 숙소 백산호텔에 들어서는데 안면이 있는 중국인이 호텔 1층 로비에 앉아 있었다.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 그는 기자를 보자마자 눈짓으로 따라오라고 신호했다.
그는 중국 공안 당국에 근무하는 현역 군인으로 영관급 장교다. 抗日 빨치산 시절의 金日成이 생명의 위협에 처했을 때 金日成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이 공안요원의 먼 친척이었다. 이 친척의 도움으로 그는 수시로 북한을 드나들었고 북한 고위층에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기자는 정보기관 관계자를 통해 그를 처음 소개받고, 한국과 중국에서 수시로 그와 접촉했다.
그를 통해 기자는 북한 고위층의 신상 정보와 북한 경제 동향에 관한 자료를 많이 입수했다. 그가 제공한 정보와 자료들은 한국의 對北 정보기관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중국 국적의 그는 중국과 북한, 그리고 한국 등 3개國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
소속과 직책을 밝히지 않는 것이 정보맨 세계의 룰이지만 서울에 온 그와 술을 먹는 자리에서 기자는 그에게 『당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북한의 권력기관은 어디요』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는 빙긋이 웃기만 하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나 기자는 그가 중국에서 보낸 사진 몇 장을 받았다. 평양에서 독일제 승용차 벤츠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인데, 그의 얼굴과 차 번호판만 크게 나와 있을 뿐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對北 정보기관 관계자에게 이 사진을 보여 주고 차량 번호판의 판독을 부탁했다. 북한의 차량들은 黨·軍·정무원 등 소속 기관에 따라 번호판이 다르다. 판독 결과, 그 차는 국가보위부 산하 對外정보조사국 소속이었다. 해외 정보를 다루는 북한의 최고 정보기관이다. 중국 공안요원은 기자의 질문에 사진을 통해 간접적으로 대답한 것이다. 이 사진 사건을 계기로 기자는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延吉 도착 후 기자는 즉시 그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金日成 사후 중국 공안기관도 비상사태여서 그를 만날 수 없었는데, 그가 느닷없이 화난 표정으로 기자가 묵고 있는 호텔에 나타난 것이었다.
『金日成은 묘향산 별장에서 죽었다』
기자는 묵고 있는 호텔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자신의 손가락으로 기자의 입을 막은 뒤, 제일 먼저 텔레비전을 켜더니 볼륨을 높이고는 창문에 커튼을 쳤다. 그리고는 창문과 객실 문 사이의 중간에 서서 기자보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기자의 귀에 그의 입을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 기자가 투숙 중인 호텔 방에는 중국 공안 당국에서 도청기를 설치해 놓습니다. 중국 정부나 북한을 비방하는 말을 하면 추방당하는 수가 있으므로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는 긴장한 모습이었다. 중국에서 그를 숱하게 만났지만 이토록 긴장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어제, 왜 목단식당에 가서 북한 사람들과 싸움을 하였습니까? 여기는 중국입니다. 한국과는 다릅니다. 중국 공안기관에서도 金日成 주석이 어떻게 사망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이곳에 와서 金日成 주석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묻고 다니는 바람에 중국 공안기관도 당신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말을 조심하십시오. 북한 사람들이 당신을 해코지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난 그는 기자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金日成 주석이 사망하고 나서 오늘 처음으로 평양과 전화 통화가 이뤄졌습니다. 金日成 주석이 自然死했다는 북한 당국의 발표는 사실이 아닙니다. 당신이 가장 궁금해하는 金日成 주석의 사망에 대해 말을 해 드릴 테니 이 사실을 바깥 세상에 널리 알려 주십시오. 한 가지 조건은 당신이 작성한 기사를 내게 먼저 보여 준다고 약속해야 합니다』
아버지 金日成에게 대든 아들 金正日
그는 金日成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데 대해 굉장히 분노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는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는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수령님은 향산 별장에서 서거하셨습니다』
『향산이 어딥니까?』
『기자 선생이 향산도 몰라요. 백두산, 금강산과 함께 북한의 3大 절경인데요』
『묘향산 말입니까?』
『그래요. 향산郡 안에 있는 묘향산 별장입니다. 이 별장은 평양에서 가깝기 때문에 수령님은 매년 6월이면 이 별장에서 손자들과 함께 여름 휴가를 보냅니다. 사망하기 바로 직전까지 수령님은 아들 金正日을 비롯한 북한 권력자들을 향산 별장에 불러 7월25일로 예정된 남북 頂上회담 준비사항을 점검하였답니다.
남북 頂上회담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과정에서 수령님 사망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북한 당국이 金日成 사망 장소에 대해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집무실인 평양 주석궁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하고 있던 기자에게 사망 장소가 묘향산 별장이라는 것은 뜻밖의 사실이었다.
중국 공안요원은 평양의 고위층 인사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하면서 金日成 사망 순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수령님은 「남북통일은 평화적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하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金泳三 대통령의 북한 방문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답니다. 수령님의 지시는 「수령의 교시」라 하여 북한에서는 절대적입니다. 사망 사건이 발생한 그날, 아들 金正日이 느닷없이 수령님의 지시에 정면으로 반박했다고 합니다. 전쟁에 의한 무력적화 통일을 지론으로 삼고 있는 金正日은 남북 頂上회담 자체를 반대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아들 金正日이 자기 지시에 반발하자 수령님은 크게 노했다고 합니다.
회의장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자 수령님 경호원이 수령에 불순한 태도를 보이는 金正日을 향해 권총을 꺼내 쏘았다고 합니다. 총알은 金正日을 바로 맞히지 않고 金正日 앞에 놓인 컵을 깨뜨려 회의석상에 大혼란이 발생했고, 수령님 경호원과 金正日 경호원 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이 총격전 와중에 심장이 나쁜 수령님에게 심장발작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응급처치를 하지 않으면 사망하는데, 수령님은 응급치료를 받지 못하고 아들 金正日이 방치한 상태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심장발작에 인한 심장마비이지만 심장발작을 일으킨 원인 제공자는 金正日입니다. 총격전 과정에서 金正日도 가벼운 총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사태가 수습된 후 수령님에 대한 총상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剖檢(부검)이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金日成 주석 사망 당시의 현장 사정을 가장 정확히 아는 사람이 金永南 외교부장이라고 합니다. 인민무력부장 吳振宇는 현장에 없었고, 나중에 보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보고를 받은 吳振宇 등 軍部 인사들이 金正日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보이자 軍을 설득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金日成 주석 사망 발표를 34시간 늦추었다고 합니다.
앞으로 북한의 권력구도는 金日成 사망 내막을 알고 있는 金永南 외교부장과 軍部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국 정부도 이제 비로소 金日成 주석 사망 全貌(전모)를 파악했는데, 북한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모른 척할 것입니다』
증언을 마친 그는 『지금 북한 주민들 사이에는 「수령님이 분해서 죽었다」는 말이 퍼지고 있다』면서 『金日成 주석의 사망 원인 제공자는 아들 金正日』이라고 말했다.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북한 주민들에게 이밥(쌀밥)과 고기 국을 먹여 주는 게 소원이었던 수령님이 아들로 인해 사망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야 한다』면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선에서 기사화해 달라고 말했다.
기자는 그를 옆에 앉혀 놓고 기사 작성에 들어갔다. 컴퓨터가 보편화되기 전이어서 편지지에 볼펜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약속대로 작성된 기사를 보여 주자 그는 기사의 골격은 건드리지 않고, 金日成이란 이름 뒤에 주석이나 수령 식의 경칭어를 넣어 주고, 「죽었다」는 표현은 「사망했다」라는 식으로 정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金日成은 6·25 전쟁을 일으킨 戰犯이기 때문에 朝鮮日報에서는 관행상 주석이나 수령 식의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해 주자 그는 납득했다. 「죽었다」는 표현은 그의 요구대로 「사망했다」라고 정정해 주었다. 그는 기자가 작성한 기사에 만족감을 표시하고는 돌아갔다.
연변 急電
확인은 할 수 없지만 그의 傳言이 사실이라면 驚天動地(경천동지)할 내용이었다. 서울의 데스크에 바로 보고했다. 그 시각 서울은 물론, 全세계에서도 金日成 사망 장소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기자가 중국 출장을 떠난 후, 서울에서 확인된 새로운 사실은 金日成이 사망했다는 시간을 전후하여 평양에서 헬기 3대가 이륙해 묘향산 방면으로 비행했다가 악천후로 인해 1대는 추락하고 1대만 평양으로 귀환했다는 내용이다. 묘향산 일대는 韓美 양국의 비행 감시 구역이다. 이 정보는 경기도 오산에 있는 美 공군 레이더 기지에서 체크되었다.
당시 국내 언론 보도에 따르면 「북한의 要人用 헬기인 MI-17기 3대가 1994년 7월7일 밤 평양 시내 모처에서 時差를 두고 차례로 이륙, 묘향산 별장 지역으로 비행했다. 이 헬기들 중 1대만이 9일 오전 평양에 되돌아오고 1대는 추락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날 묘향산 일대는 구름이 끼고 비가 와, 헬기가 비행하기에는 어려운 악천후 상황이었다. 이 헬기들은 비행장 관제소의 통제를 받지 않고 북한 공군사령부의 직접 관제 아래 低空비행했다. 묘향산 지역에서 평양으로 『의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다급히 연락하는 내용이 駐韓미군 안테나에 감지되었다」는 것이다.
이 정보를 근거로 金日成이 묘향산 별장에서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있었지만 이를 뒷받침할 추가 정보가 없어서 서울에서는 해석이 분분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金日成 사망 장소가 묘향산 별장이라는 기자의 보고에 데스크 역시 놀라워했다. 데스크는 기자가 입수한 정보가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즉각 기사를 송고하라고 지시했다.
이 기사는 1994년 7월28일자 週刊朝鮮 표지에 「연변=急電」이란 제목으로 크게 보도되었다. 金日成 사망 장소가 묘향산 별장이며, 金日成의 진짜 死因이 총격전 와중의 심장발작이며, 金日成은 아들 金正日 때문에 죽었다는 週刊朝鮮 기사는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를 정면으로 부인했다. 이 기사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日本 언론은 週刊朝鮮 기사를 인용 보도하기도 했다. 북한은 週刊朝鮮 기사에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자는 이 기사가 보도되기 전에 중국을 빠져나왔다. 나중에 기자는 이 기사로 인해 중국 공안기관에 근무하는 조선족 관계자들이 조사를 받고 고초를 치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총련 의장 韓德洙 증언
金日成 사망의 비밀을 추적하겠다고 기자가 결심한 것은 10년 전, 그때부터다.
金日成이 사망하고 6개월이 지난 1995년 1월, 在日 朝總聯 의장 韓德洙(한덕수)가 일본에서 조총련 간부들을 상대로 북한 방문 보고대회를 가졌다. 韓德洙 의장은 金日成이 사망하기 몇 년 전부터 북한에 머물러 있다가 金日成 장례식이 끝난 몇 달 후 일본으로 돌아왔다. 韓德洙 의장은 보고대회에서 金日成 사망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그의 보고 내용은 1995년 1월에 발간된 일본 월간지 「東亞」에 게재되었다. 기사 작성자는 일본 每日新聞의 당시 논설위원 시게무라(重村智計)씨였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金日成은 화장실에서 죽었다』
<金日成은 죽기 이틀 전인 1994년 7월6일 평양에서 조선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정치국원 후보를 포함, 軍 간부와 黨 간부 등 100명이 참석했다. 당시 북한 지도부의 최대 관심사는 남북 頂上회담에서 金泳三 대통령이 제안할 내용이었다. 이 회의에서 북측은 金대통령이 남북 경제교류와 高齡(고령)의 이산가족 재회 문제, 남북 非核化 문제의 재확인 등을 제안할 것으로 예측하고 대응 방안을 협의했다.
軍 간부와 사상 담당자들은 남북 경제교류 확대와 개방정책은 북한 내부에 불순분자를 낳고 그 결과 망명자가 늘어날 것이라 지적하고 강한 우려를 표시했다. 경제 관계자들도 북한에서는 팔 만한 제품이 없기 때문에 한국 기업이 北에 진출하면 북한 경제가 지배당할 우려가 많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했다. 또 문화 관계자들도 남한의 불순한 사상이 들어와 북한 청소년들의 사회주의 사상이 오염될 것에 대해 불안감을 표명했다.
약 4시간에 걸친 토론 끝에 金日成은 남북 경제교류를 진행시키겠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金日成은 『경제교류의 결과로 망명자가 늘어도 좋다. 통제와 사상교육을 강화한다면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金日成은 『베트남과 쿠바에서 망명자가 속출했지만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회의가 끝난 후 이날(7월6일) 저녁부터 金日成은 묘향산 별장에 갔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金日成이 이동할 때면 보통 8명의 의사가 동행하는데, 이날에 한해 의사가 두 명밖에 동행하지 않았고 특히 심장 담당 의사가 빠졌다. 카터 前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 이래 金日成이 아주 건강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측근과 의료진도 방심했던 것이다.
金日成은 그 다음날인 7월7일에도 이 별장에서 지냈는데 오후가 되어 가슴의 통증을 호소했다. 그러나 담당의사가 없어 진찰을 받을 수 없었다. 이날 밤, 화장실에 들어간 金日成은 돌연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큰 소리를 내고 쓰러졌다.
곧 평양에 연락이 되어 의사와 간호부, 간호장비를 실은 헬기가 별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나쁠 때는 나쁜 것이 겹치는 것으로, 당시 별장 부근에 집중 호우가 내려 헬기가 착륙할 수 없었다. 묘향산에 착륙하지 못한 의료진은 어쩔 수 없이 평양으로 다시 돌아가 차로 갈아타고 별장으로 출발했다.
두 시간 안에 도착하도록 명령을 받은 운전사가 과속으로 운전하는 바람에 차가 미끄러져 계곡 밑으로 추락, 의료진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의료진을 태운 차의 추락사고로 金日成은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이 때문에 아들인 金正日 서기는 자기가 의사를 확실히 옆에 붙여 놓았더라면 아버지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책하며 한때는 상당히 초췌한 상태였다>
韓德洙 의장의 보고 내용은 金日成 사망을 마치 옆에서 지켜본 것처럼 상세했다. 평양에 있던 金日成 의료진이 급히 묘향산 별장으로 가다가 교통사고로 전원 사망했다는 내용은 韓德洙 보고에서 드러난 새로운 사실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북한은 지금까지 공식 언급하지 않고 있다.
金正日은 왜 自責했나
金日成 사망과 같이 민감한 사안을 朝總聯 의장 韓德洙가 제 마음대로 발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은 金日成 사망에 따른 대내·외의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韓德洙를 등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韓德洙의 보고 내용 가운데 「金日成이 치료도 못 받고 죽었고, 아들 金正日이 이 점을 자책했다」는 내용은 북한 당국의 최초 공식 발표와 정면 배치된다. 북한 당국은 「7월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되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어 즉시에 모든 치료를 한 후에도 심장쇼크가 증악되어 7월8일 오전 2시에 사망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金日成이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큰소리를 내고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金日成 옆에 심장 담당 주치의가 없었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金日成이 고령인 데다 심장이 좋지 않아 24시간 主治醫가 따라 다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金日成 심장 담당 의사가 그날 따라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은 갑작스런 사망과 관련, 매우 의아스런 구석이다.
만일 金日成 주치의가 어떤 이유로 자리를 비웠다면, 主治醫에게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북한에선 金日成과 金正日밖에 없다. 결국 金正日의 命에 따라 자리를 비운 셈이 된다. 韓德洙 의장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金正日이 아버지 金日成을 죽음의 함정에 빠지도록 모종의 「음모」를 꾸민 것으로 의심할 수도 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북한의 軍과 黨 관계자들이 남북 경제교류 확대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金日成이 이를 강행토록 지시했다는 보고 내용이다. 이는 金日成과 金正日 세력 간에 갈등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金日成 사망에 「음모」가 있다면 그 음모의 동기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金日成의 중국인 은사 가족 증언: 『金日成은 집무실에서 죽었다』
朝總聯 의장 韓德洙 보고 내용이 공개되고 1년 후, 북한 당국은 金日成 사망 순간과 관련한 또 하나의 공식 입장을 제3국을 통해 표명했다. 이번에는 중국을 통해서 나왔다. 대변자는 金日成의 중국인 은사 가족이었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 중국 길림성의 육문중학에 다녔던 金日成은 상씨라는 선생에게서 중국어를 배웠다. 金日成은 상씨 선생이 생존해 있을 때는 물론, 그가 1982년에 사망한 후에는 그 가족들을 다섯 차례나 북한에 초청했다.
상씨 선생 가족들은 金日成 사망 후 金正日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귀국 후 이들은 중국 「무한만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金日成 사망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그 내용은 무한만보를 인용, 보도한 일본 아사히 신문 1996년 3월13일자에 실렸다.
이에 따르면 「金日成은 사망 전날인 1994년 7월7일 묘향산 별장에서 열린 농촌 공작회의에 참석, 심야까지 업무를 보았다. 업무보고를 받던 중 갑자기 『피곤하다. 좀 쉬자』고 말한 뒤 쓰러져 7월8일 오전 1시쯤 집무실 책상에서 숨을 거두었다. 金日成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은 사망 전날 쓴 「조국통일」 네 글자였다. 金日成은 사망 전 한 달 동안 20개 이상의 외국 대표단을 만났으며, 核개발 의혹 문제를 둘러싸고 카터 前 미국 대통령과 8시간 동안 회담하는 등 극히 바쁜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들의 傳言은 북한 당국이 주장하는 「金日成 과로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는 하나 음미할 구석이 없는 게 아니다. 우선, 북한에서 살아 있는 神과 다름없는 金日成이 별장의 집무실 책상에서 쓰러져 그 길로 사망했다는 것은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었다는 朝總聯 의장 韓德洙 보고와 맥락이 같다.
그러나 사망 직전의 상황묘사에서는 차이가 있다. 韓德洙는 「金日成이 7월7일 오후부터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다 밤에 화장실에서 돌연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큰 소리를 내고 쓰러졌다」고 했는 데 반해, 이들은 「정상적으로 심야 업무보고를 받던 중 피곤하다」며 쓰러졌다고 했다. 쓰러진 장소도 화장실이 아닌 집무실 책상이었다고 밝혔다.
金日成이 深夜에 업무보고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高齡의 金日成을 상대로, 심야에 경호원의 장벽을 뚫고 업무보고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점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金正日뿐이다. 金日成 사망 현장에 金正日이 있었던 것으로 의심되는 대목이다.
또 金日成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 「조국통일」이라는 점이다. 韓德洙 보고에도 나타나지만 金日成은 軍과 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북 頂上회담을 통해 경제교류 확대를 기대했다. 반면 金正日은 전쟁을 통한 武力 통일론자여서 통일문제 접근방식에서 金日成과 아들 金正日 사이에 갈등의 소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전문가들은 『북한이 일본 조총련과 중국內 親北 조선족을 설득하기 위해 朝總聯 의장 韓德洙와 金日成의 중국인 은사 가족을 통해 金日成 사망 당시 상황을 알리게 된 것』이라며 『이 두 개의 증언은 金日成 사망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단서로서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
북한 고위 군관이 작성한 文件
金日成이 죽은 지 5년이 지난 1999년 10월에 기자는 金日成 사망이 언급된 중요한 文件 하나를 입수했다. 편지지로 약 50장 분량이었다. 작성자는 자신의 신분을 북한 현역 고위 군관이라고 밝혔다. 文件을 분석한 對北 정보기관 관계자는 『내용을 종합할 때 북한의 무기체계에 밝은 장령급(대한민국의 장군에 해당) 군관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작성자는 그의 신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우리 집안은 위대한 수령님을 따라서 항일 혈전만리를 헤쳐온 抗日투사 가정이다. 동학들과 이웃들의 부러움과 칭찬 속에서 자라온 나는 항일투사 가정들한테 베풀어진 배려로 金日成 종합대학 4년 공부를 마치고 조선민주주의공화국 국가보위원으로 공직을 시작하였다. 조선인민군 여단 보위 일군, 여단 보위부 부부장과 부장, 군단 보위부 부장 등을 겸직하다가 승급한 조선인민군 고위급 군관이다.
나는 나라의 파견을 받고 여러 차례나 출국하여 나라에서 맡겨 준 임무를 수행하였다. ○○○(중동 모 국가. 신분 보호를 위하여 나라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국가에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어 갔으며, 소련·중국·쿠바 등에 파견되어 비밀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기간 나는 공화국 영웅, 공화국 1급 국기 훈장 등 국가 훈장을 몇 차례 받았다>
그는 이 文件 작성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黨과 조국을 위하여서는 자신의 목숨도 서슴없이 바칠 각오를 하여야 한다고 수없이 외쳐대고, 세상이 열백 번 변한다하여도 우리는 수령님(김일성)과 장군님(김정일)을 따라야 된다는 확고한 신념만은 변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외쳐대던 나의 가슴에 언제부터 혁명에 대한 동요가 생기었는지….
솔직히 말하면 나의 가슴에 우리 식 사회주의에 대한 동요가 생긴 것은 위대한 수령님이 세상을 뜨신 직후였다. 그때 무슨 영문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그때를 전후하여 25명의 고위급 군관들이 직무를 해임당하고 심사를 받았는데, 그 속에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존경하던 투사들도 있고, 나의 상급자도 있었다.
『金正日에게 의심을 품게 되었다』
처음에 나는 아주 놀랐다. 그 후 나는 몇 달을 고민 끝에 보내었으며, 나의 운명에 대하여 처음으로 동요가 생겼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우리 장군님(김정일)께 의심을 품게 되었으며, 지나온 인생을 곰곰이 분석하게 되었다. 분석하면 할수록 마음이 허전하고 앞날에 대하여 우유부단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속말을 그 누구와 감히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믿는 처지라 하여도 누가 감히 이런 말을 내놓고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혼자 속으로 앓다가 마침 적당한 기회가 주어져 이렇게 글로라도 써서 속시원히 속말을 할 수 있게 되니 정말 기쁘다.
이 글에서 여러분들은 고난의 강행군을 하고 있는 우리나라(북한)의 기본 실정과 우리나라의 목전 형세와 우리 인민군의 전략 배치 정황 등을 료해(이해)하는 데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면 기쁘다.
내가 지금 적는 아래의 글이 우리 민족의 조속한 통일과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거나 영문도 모른 채 철칙(계급이 강등되고 쫓겨나는 것)당한 조선인민군 고위급 군관들 심령에 조그마한 위안이라도 된다면 더 이상 기쁜 일이 없겠다>
그는 金日成 사망 무렵의 정황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수령님께서는 휴식하려고 묘향산에 있는 별장을 찾아갔다. 거기서 그는 사업일군 회보(보고)를 청취하다가 뜻밖에도 조명선 고위급 장령(편집자 注-조명선은 1923년생으로 金日成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빨치산 세대다. 민족보위성 부상, 인민군 사단장, 사회안전부 부부장, 강건종합군관학교 교장을 지냈다. 조명선은 혁명열사릉에 안장돼 있다)이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을 들은 후, 『무슨 병으로 세상을 뜨셨는가』라고 상세히 물어보았다.
사업일군들이 『어제 뇌일혈로 돌아가셨다』고 하자, 수령님께서는 『그래 수술은 하였는가』라고 물었다. 사업일군이 수술을 하지 못하였다고 하자, 성을 벌컥 내면서 『빨리 협화병원 원장을 부르오. 어째서 수술을 하지 않았는가를 내가 직접 그 한테 묻겠소』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가슴을 부둥켜안고 천천히 쓰러지셨는데 그때 신변의 의사들한테는 심장병 구급약이 없었다. 수령님께서는 그때까지 심장병이 발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장도 좋았다.
그리하여 의사들은 바삐 구급하는 한편, 무전으로 속히 직승비행기(헬기)를 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첫 번째 뜬 직승비행기는 그만 날씨 탓으로(구름이 꽉 끼고 비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산에 부딪히면서 추락하였다. 이것은 후에 안 사실이지만 비행기가 도착하지 않자 사고가 난 것을 알고 해당 부문에서 두 번째 비행기를 파견하였을 때는 이미 늦었다. 수령님은 병원에 가 치료를 받지 못하고 급작스레 세상을 뜨시었던 것이다>
金日成 사망시 경호 책임자는 개성에 있었다
국가원수의 신변 보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호」와 「주치의」다. 金日成의 신변 이상을 제일 먼저 감지할 수 있는 위치에 경호실장과 주치의가 있다. 조총련 의장 韓德洙와 金日成의 중국인 은사 가족 증언에 나타났듯이 金日成 사망 당시 주치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현장에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다음은 경호문제인데, 金日成의 경호책임자도 金日成 사망 사실을 사망 후 34시간이나 지나서 알았다는 사실이다. 金日成 경호는 「호위총국」(총국장·이을설 차수)에서 담당했다. 1960년대 후반에 설립된 「호위총국」은 金日成과 金正日의 경호전담 부대다. 金日成 경호는 「호위총국 1호위부」에서, 金正日 경호는 「호위총국 2호위부」가 전담한다. 金日成 사망 당시 「호위총국 1호위부」 부장은 최춘은이다.
최춘은은 북한 당국이 金日成 사망을 공식 발표하기 2시간 전인 1994년 7월9일 오전 10시경, 판문점에 있었다. 최춘은은 7월25일로 예정된 남북 頂上회담 경호와 관련, 金光洲 청와대 경호실 경호국장을 상대로 실무회의를 갖고 있었다. 남북 경호책임자 간의 회의였다.
북측 경호 대표단이 판문점에 도착한 것은 1994년 7월8일 아침이었다. 이들은 7월7일 오후 평양을 출발했다. 이때는 金日成이 사망하기 전이다. 金日成이 7월8일 새벽 2시에 사망했지만, 이들은 이 사실을 모른 채 개성에서 1박을 하고, 7월8일 오전 10시부터 남북 頂上의 경호와 관련해 첫 실무접촉회의를 가졌다. 金日成이 사망하고 8시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남북 대표들은 이 사실도 모른 채 경호문제를 협의하는 넌센스가 벌어진 것이다.
북측의 경호 대표단은 밝은 표정 속에 회의에 임했다고 한다. 합의는 오전 중에 쉽게 타결되었다. 그 당시 한국 측 관계자들은 『얘기가 아주 잘 되었다』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하루 뒤인 7월9일 오전 10시에 두 번째 실무접촉이 열렸다. 그 시각 북한의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전국의 청취자, 시청자에게 알린다. 오늘 낮 12시에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특별방송을 내보내드리겠다』고 두 차례나 되풀이해서 예고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이에 아랑곳없이 남북 경호 대표단은 실무회의에 들어가 전날 합의사항을 이행했다. 한국 측은 7월13일부터 평양에 파견할 대한민국 경호 점검반 명단을 북측에 넘겨주었고, 북측으로부터 신변안전 보장 각서를 받았다.
金日成이 죽었다면 그가 제의한 남북 頂上회담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북한이 한국 측 경호원들에게 신변안전 보장각서를 줄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북측 경호대표 최춘은은 웃고 농담하며 실무접촉에 임했다고 한다.
두 시간 후면 金日成 사망이 공식 발표되는데도 金日成의 경호책임자가 이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金日成의 경호책임자에게도 알려주지 못할 모종의 사연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金正日 언급: 『수령님은 집무실에서 순직했다』
金日成 사망 원인에 대한 金正日의 공식 언급은 金日成 사망 100일째 되던 1994년 10월16일에 처음 있었다. 金正日은 금수산의사당에 모인 黨 중앙委 책임일군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령님께서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黨과 혁명,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정열적으로 사업하시다가 집무실에서 돌아가시었습니다. 수령님의 서거는 순직입니다. 세상에 우리 수령님처럼 모든 사업을 깨끗이 마무리하고 돌아가신 영도자는 없습니다』
金正日 말대로 金日成이 집무실에서 순직했다면 왜 북한 당국은 金日成 사체를 부검했을까. 의문은 끝이 없다.
金日成의 사망 순간과 관련하여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북한의 최고 권력자 金正日이 金日成 사망에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최고 지도자의 사망을 늦게 알리는 이유는 첫째, 후계자 선출의 시간을 벌기 위해서며, 둘째는 敵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게 정설이다. 북한의 경우, 후계자 문제는 1974년에 이미 金正日로 정해졌기 때문에 발표를 미룰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敵의 공격에 대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인데 金日成 사망 직후 휴전선 일대는 조용했다.
만일 金正日이 全 軍에 특별 경계령을 내렸으면 휴전선 일대의 북한군에 無線이 빗발치는데 金日成이 심장쇼크로 쓰러진 7월8일 오전 2시부터 북한이 金日成 사망을 공식 발표한 7월9일 낮 12시 사이에 한국 측 첨단 전자·통신장비에 포착된 북한군 이상 징후는 없었다고 국방부는 발표했다.
金日成 사망 때 북한은 軍에 특별경계령을 내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金日成 경호부대인 호위총국에도 경계 강화 조치가 떨어지지 않았다.
중국의 鄧小平(등소평)이 高齡으로 사망했을 때 중국 정부는 이 사실을 즉각 공개했다. 高齡으로 自然死했기 때문에 숨길 게 없었다. 북한이 金日成 사망을 34시간이나 숨긴 것은 사망 원인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단정했다.
사망 직전 金日成의 왕성한 활동
사망 당시 金日成의 나이는 82세였다. 노동신문 보도에 따르면 그는 죽기 직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1994년 7월7일자 노동신문 1면 중간에는 전날(7월6일) 있었던 金日成의 행적과 현지 지도 내용이 소개돼 있다.
이에 따르면 金日成은 수흥, 동봉, 련포 협동농장과 주서, 동암 등 함주군 일대에서 논밭 곡식의 생육상태를 현지 지도하고 대단히 좋다는 만족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함주군은 함경남도 함흥市를 에워싼 郡이다. 묘향산 별장과는 가깝지만 평양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金日成은 현지 지도에서 『협동 농민들과 전체 농업 근로자들은 나라의 쌀독을 책임진 주인다운 입장에서 모든 농사 일을 알뜰하고 깐지게 하여 올해에 黨이 제시한 알곡 생산의 높은 목표를 반드시 실현하여야 하겠습니다』는 지도를 했다고 노동신문은 보도했다.
이날(7월7일) 저녁, 평양 TV방송에도 건강한 모습의 金日成이 姜成山 총리, 李鍾玉 부주석, 金永南 외교부장 등 20~30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함경남도 지방의 농촌을 현지 시찰하는 장면이 보도되었다.
7월8일자 노동신문에는 金日成 동정이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 대신 노동신문 7월8일자에는 눈여겨볼 곳이 두 군데 있다. 노동신문 1면 맨 왼쪽 상단에는 매일 「金日成이 누구로부터 축전을 받았다, 金日成이 누구에게 축전을 보냈다」는 기사가 실리는데, 이날은 金日成이 축전을 보냈다는 기사는 없고, 축전을 받았다는 기사 2개만 실렸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노동신문 1면 중간 부분에 「청진시 수남구역 黨위원회」 명의로 실린 「숭고한 뜻 충성으로 받들어」라는 기사다. 내용은 「우리는 수령을 언제나 마음의 기둥으로 굳게 믿고, 수령이 내세운 혁명과업을 충실히 수행하는 데 가장 값 높고 보람찬 삶이 있다는 것을 체득하고 수령의 사상과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혁명 실천 정신을 통하여 수령에게 끝없이 충성하여야 하겠습니다」이다.
이 기사는 북한 문제 전문가들로부터 金日成의 「부재」를 암시하는 내용이라는 분석을 낳았다.
사망 직전의 金日成 행적은 일본의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에도 보도되었다. 조선신보는 金日成 사망 2주기를 맞은 1996년 7월부터 「영원한 추억」이란 연재물을 실었다. 이 연재물에는 金日成의 1994년 7월6일과 7일 행적이 分단위로 소개되었다.
이에 따르면 7월6일에 열린 경제일군 협의회에서 金日成은 안색이 좋지 않았으며, 지시 도중 『가슴이 답답하다』며 손으로 왼쪽 가슴을 두드리다가 잘 피우지 않던 담배를 한 대 피웠다고 한다.
7월7일에는 金日成이 오후 4시9분, 5시25분, 5시37분 등 3차례에 걸쳐 자신의 비서실장(책임서기)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오후 4시9분 전화에서 金日成은 전날(7월6일) 경제일군협의회에서 지시한 사항들의 집행 준비 상황을 점검한 뒤, 『어제 金正日 동지가 重油발전소 설비 구입에 드는 外貨를 黨에서 보장하겠다고 했는데 관련 보고서를 金正日 동지에게 올렸느냐』고 확인했다는 것이다.
이어 金日成은 『정무원 일을 金正日 동지에게 부탁하니 참 안됐다. 동무들이 金正日 동지를 잘 받들어야 한다. 金正日 동지가 부담이 무척 많고 휴식도 없이 일하는 것이 제일 큰 근심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5시25분 전화에서는 한 간부 부인이 사망한 사실을 아는지를 확인했으며, 10여분 뒤인 5시37분에는 비서실 간부에게 공개할 수 없는 「중요한 교시」를 주었다고 한다. 조선신보는 金日成 비서실장의 말을 인용, 『수령님의 음성은 유달리 맑고 청정했으며, 정력에 넘쳐 있었다』고 소개했다.
노동신문과 조선신보 보도 내용을 종합하면 고령의 金日成은 1994년 7월6일 평양에서 장장 4시간에 걸친 정치국원 회의를 주재한 다음, 평양에서 함주로 이동해 함주군 현지지도를 했다. 현지지도를 마치고 이날 오후 묘향산 별장으로 이동한 金日成은 경제부문 간부들에게 「유훈교시」를 남겼다.
金日成-金正日 부자간 권력암투
金日成이 권력의 일선에서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하는 것은 아들 金正日이 그의 후계자로 추대된 1974년부터다. 金正日은 1980년 10월, 6차 黨대회에서 金日成의 후계자로 공식 선포되었지만 후계자로 추대된 1974년부터 실권을 행사해 왔다.
黃長燁 前 비서는 1999년에 발간한 그의 저서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이란 책에서, 金日成이 살아 있을 때 黨 비서실은 金日成 用 보고서와 金正日 用 보고서를 별도로 작성했는데, 金日成에게 올리는 각종 보고서와 진정서는 金正日의 검열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金日成 用 보고서는 북한의 실상과 전혀 무관한 장밋빛 내용을 담아 金日成은 북한의 실정을 제대로 보고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앞에서 거론한 북한군 장령도 그가 작성한 文件에서 이렇게 썼다.
<金日成의 동생 金英柱가 金正日의 견제를 받아 권력 일선에서 사라진 후(1974년) 金日成보다 金正日에게 충성하는 아첨쟁이들이 늘었다. 고령의 金日成은 일상 사무를 金正日에게 맡겼다. 金日成에게 직접 회보하고 보고를 올리는 중요한 일들을 金正日이 직접 처리했다. 金日成에게 올라가는 보고서는 모두가 「全 조선은 생기로 차 넘치고 농업생산이 상승하고 공업생산에서는 인민들의 필수품이 폭포처럼 쏟아진다」는 허위보고였다. 金日成은 이런 허위 보고에 迷惑(미혹)되어 金正日이 타고난 領導(영도) 재능이 있으며 모든 사업을 이끌어 가고 있다고 사뭇 흡족해 했다>
망명한 金正日 처조카 李韓永(이한영·1997년 북한 공작원에 의해 피살됨)씨는 『金日成은 남자 성우 3명과 여자 성우 3명이 번갈아 낭독하는 보고서를 들으며 말년을 보냈다』고 말했다.
1993년 NPT 탈퇴 후 재등장한 金日成
金日成이 권력 前面에 다시 나타날 수 있게끔 빌미를 제공한 사람은 아들 金正日이다. 사건은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해 3월12일, 북한은 核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공식 발표했다. 북한이 NPT에 가입한 것은 1985년 12월12일인데, NPT에 가입하면 의무 조항인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고, 核 안전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북한은 駐韓미군에 核무기가 배치돼 있다는 점을 이유로 협정 체결을 미루다가 1992년 1월에 안전협정에 서명하긴 했으나, 국제원자력기구가 의심하는 지역에 대한 특별사찰 요구를 거부해 왔다.
북한이 완전무결한 核폭탄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核무기 개발을 위해 국제적으로 안간힘을 써 오던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가 제시한 특별사찰 마감시한에 NPT 탈퇴를 공식 발표하자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테러국인 북한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1993년의 NPT 탈퇴 발표가 은퇴생활을 하고 있던 金日成이 권력 前面에 다시 나설 수 있는 계기가 될 줄은 金正日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NPT 탈퇴 발표 후 북한은 미국과 직접 대화하는 통로를 갖기는 했지만 유엔의 對北제재 결의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다. 북한과 전통적 우호관계인 중국과 러시아도 북한의 核무장을 원치 않았다.
고립상태에 빠진 북한을 구하기 위한 해결사로 화려하게 등장한 사람이 金日成이다. 북한이 NPT 탈퇴를 공식 발표한 1993년 3월12일부터 1994년 7월8일 사망할 때까지 金日成은 카터 前 미국 대통령,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 개리 애커먼 美 하원 亞太소위원장, 샐리그 해리슨 미국 카네기財團 연구위원, 윌리엄 테일러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 부소장, 피터 헤이스 미국 노틸러스 퍼시픽 연구소 소장, 빌리 그레이엄 목사 등을 평양에서 만나 核개발을 중단하겠다는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전달했다.
1994년 6월15일부터 평양을 방문한 카터 前 미국 대통령은 金日成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金日成은 카터의 도움으로 美·北 직접 협상 통로를 열고 북한 核개발로 인한 對北제재 분위기를 일시에 반전시켰다. 카터와의 회담에서 金日成은 核개발 포기 대가로 경수로 건설과 重油 지원이란 선물을 미국으로부터 받아낼 수 있었다.
金日成이 金正日을 질책하다
20년간 권력 前面에서 사라진 金日成의 화려한 재등장은 아들 金正日 입장에선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이는 金日成·金正日 父子간의 권력 암투로 이어졌을 것이다.
1993년 6월22일 러시아 이타르타스 통신에서 발행하는 「아시아 회보」는 평양發 기사에서 북한의 金日成이 최근 일련의 國政 운영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아들이자 공식 후계자인 金正日 비서를 심하게 질책했으며, 金正日은 질책에 따른 신경과민증으로 두 달간이나 집무를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보도했다. 「아시아 회보」는 민감한 국제 문제를 다루는 권위 있는 매체로 주로 러시아 정부기관과 연구소 등에 배포된다.
보도에 따르면 북한 지도부內에서는 金正日 지지자와 金日成의 나이든 붉은 근위대 간에 은밀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金正日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면 金日成 지지자들은 축출될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 회보」는 6월24일자 후속 기사에서 金日成이 NPT 탈퇴 결정 등 중요 문제 처리와 관련, 金正日을 견책했으며 이 때문에 金正日의 위상이 다소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 무렵 일본 교도통신은 북한 金正日이(1993년) 4월 말 예술 관계자들과의 좌담회에 출석한 후 2개월 반이나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춰 평양의 서방 측 외교소식통들과 주민들 사이에서는 아버지 金日成과의 불화說, 교통사고說 등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北京 외교 소식통의 말을 인용, 「金正日의 장기적인 소재 불명이 평양 시민들 사이에 커다란 화제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유에 관해 여러 가지 소문이 난무하고 있다」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음주광에다 흡연광인 金正日이 위암에 걸려 입원해 있다는 說, 金正日이 독단적으로 核확산금지조약의 탈퇴를 결정함으로써 金日成의 노여움을 샀다는 父子 불화說을 꼽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권력 일선에 再등장한 金日成은 국정 운영의 잘못을 물어 金正日 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1993년 12월8일에 개최된 黨중앙위원회 제6기 제21차 전원회의에서 金日成은 3차 7개년 경제계획(1987년에서 1993년) 수행 총화보고를 통해, 이 계획의 실패를 공식 시인하고 향후 2, 3년간을 완충기로 설정한다고 선언했다.
북한 역사상 정책 실패를 공식 시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실패의 공식 시인은 자아비판이며 문책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3차 7개년 계획의 입안과 집행상의 실질적 최고 책임자는 金正日이었다.
국가경제위원장이며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었던 金達鉉이 물러나고, 金正日의 술친구이자 그의 최측근인 黨비서 金容淳은 黨정치국 후보위원에서 탈락되어 권력 서열 15위에서 26위로 떨어졌다. 黨 경제비서 박남기는 평양시 행정경제위원장으로 좌천되었다.
金正日의 잦은 失政
前통일원 정보분석실장 정대규씨는 1997년에 발표한 「金正日 정권의 특징과 위기 요인」이란 보고서에서 金正日 정권의 등장 배경과 그 이후 벌어진 金日成·金正日 父子간의 갈등, 그리고 金正日의 파행적 국정운영을 연도별·사안별로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金正日은 1974년 2월12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제14차 전원회의에서 金日成 후계자로 추대되고, 1980년 10월 黨 제6차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겸 黨총괄비서, 黨중앙군사위원에 선출되면서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사실상 공인받았는데, 그 이후 계속해서 失政을 범하는 바람에 결국 金日成이 親政체제로 복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보고서의 관련 내용이다.
<金正日의 통치는 우리 식 사회주의의 폐쇄성을 더욱 굳혀 가면서 북한의 경제 사정과 국제 환경, 그리고 남북관계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하였다. 버마 아웅산 폭탄 테러사건(1983년 10월9일 발생)과 KAL機 폭파사건(1987년 11월29일 발생) 등을 자행함으로써 남북관계를 경색시키고 북한을 국제 테러국가로 지정받게 했다.
1984년 9월의 對南 수재물자 지원, 1989년 10월의 세계 청년학생 평양축전과 같은 오직 對南 경쟁심리에서 北의 경제사정을 전혀 고려치 않은 무모한 정치적 결정을 함으로써 북한의 경제사정 악화를 가속화시켰다. 더욱이 1980년대 말의 서해 남포갑문 건설, 동양 최대라는 103층 유경호텔 건축 등 소위 기념비적 건조물 축조공사는 민간 경제의 고갈을 초래했으며, 주체농법 강화는 식량난을 가중케 했다.
특히 核문제를 둘러싸고 NPT 탈퇴 선언을 하는 등 핵무기 개발 방향으로의 거듭되는 강경 자세 고수는 북한 對 全세계라는 극히 불리한 대결구도를 한때 형성하기도 했다. 金正日의 통치는 마침내 북한 체제를 심각한 경제난, 국제적 고립, 金正日 통치에 대한 회의감 조성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 증대라는 3重苦에 직면케했다.
金正日은 자신의 失政으로 인한 정치적 취약성을 오로지 군부 지지로써 만회, 북한 체제를 군사 병영 사회화하였다. 그는 1990년부터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1990년 5월), 인민군 최고사령관(1991년 12월), 인민군 원수(1992년 4월), 국방위원장(1993년 4월)으로 취임, 軍 요직을 하나하나 차지해 나갔다.
金正日의 失政 누적과 軍權 강화가 진행되던 1993년 후반 들어 金日成은 마침내 金正日의 통치 능력상의 한계와 문제점을 인식하고 親政체제로 복귀하는 조치들을 연이어 취하기 시작했다>
『북한이 망할 징조다』며 탄식한 金日成
親政체제 복귀 후 金日成의 왕성한 활동과, 國政 운영을 잘못한 아들 金正日에 대한 金日成의 불만은 북한 장령의 文件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인용하면 이렇다.
<바로 이즈음(편집자 注-金日成이 金正日의 허위보고에 속고 있을 무렵) 미국 前 대통령 카터가 조선을 방문하게 되었다. 조선의 철천지 원수 미국의 前 대통령의 방문은 획기적 사변이 아닐 수 없다. 金日成은 카터 방문에 따른 준비 공작을 손수 지도하였으며 카터 前 대통령과 몇 차례 회담을 진행하였다. 이때 우리들은 金日成의 완성한 정력에 감탄한 나머지 수령님의 실제 연령을 잊었다.
金日成은 정력적으로 사업하다가 휴식도 취하지 않고 기층(밑바닥 층)으로 사업검사를 내려갔다. 한 農家를 들러 보았는데 주인의 누르끼한 얼굴과 잘 먹지 못하여 여윌대로 여윈 어린 자식들을 보며 金日成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金日成이 집주인에게 『저를 많이 욕하여 주십시오. 제가 잘 영도하지 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고 말하자, 시찰을 따라온 道 행정위원회 위원장이 황급히 무릎을 꿇고 『수령님, 저를 처리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金日成은 『아니오. 내가 잘 영도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잘 먹지 못하고 잘 입지 못한 것이니 당신하고는 상관없소』라며 말을 막았다. 계속해서 金日成은 『우리가 혁명을 시작할 때도 이렇게 백성들이 곤란하지 않았는데 혁명에서 승리한 지 어언 50여 년이 되어 오는데 아직도 인민들이 잘 먹고 잘 입지 못하고 있는데 텔레비와 신문 따위에서는 날마다 인민들이 이밥(쌀밥)에 돼지고기를 먹고 있다고 허튼 소리를 하고 있으니 망태기(망할 징조)요, 정말 망태기요』하면서 눈물을 훔치셨다>
金日成이 죽는 그날까지 북한의 식량난을 걱정했다는 것은 金日成 장례 기간 중 평양방송에 보도된 한 주부의 절규에서도 나온다. 이 주부는 1994년 7월16일 오후 5시20분쯤 평양방송에 출연했다. 기자는 延吉에서 이 방송을 들었는데, 주부 이름은 받아 적지 못했다. 내용은 이렇다.
<최근 현지 지도를 나온 수령님께 식량사정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며 몸둘 바를 몰라 하니까 수령님은 『그런 말을 하는 게 뭐가 죄가 되느냐. 동무는 정책을 바로 세우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며 칭찬을 했다>
金日成을 애도하는 장례식 기간 중에 북한의 어려운 식량 사정이 거론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식량난을 거론하는 것은 金正日 통치를 정면 비판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金日成 장례기간 내내 기자는 중국 延吉에서 북한 라디오 방송을 청취했지만 식량난에 대한 비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金日成이 묘향산 별장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기자에게 알려 준 중국 공안관계자는 『북한 주민들이 3개월째 식량배급을 못 받고 있다는 것을 金日成이 알게 된 것은 1994년 6월 초였다. 그전까지 金日成은 허위보고를 받고 있었다. 金日成이 현지지도를 나갈 경우, 金正日 측근들이 먼저 나가 해당 주민들의 집 쌀독에 쌀을 채워 놓았다가 金日成이 가고 나면 압수해 金日成은 진짜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인민 영웅 정순실이가 金日成에게 直報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식량난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을 안 金日成은 남북 頂上회담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 했고, 金正日은 이를 반대했다』고 말했다.
金正日 세력에 결정타 가한 남북 頂上회담 제의
남북 頂上회담 제안자는 金日成이며 金日成의 뜻을 한국에 전달한 사람은 지미 카터 前 미국 대통령이다.
북한을 방문하고 서울에 들른 카터 前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金日成이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金泳三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金泳三 대통령이 1994년 6월18일 『金日成과의 頂上회담을 언제 어디서든 빠른 시일 안에 조건 없이 갖겠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남북 頂上회담은 공론화했다.
한 북한문제 전문가는 『카터는 金日成에게 북한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과의 관계 개선이 선결 과제라는 점을 부각시켰고, 金日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남북 頂上회담이란 大카드가 나왔다』며 『金日成은 남북 頂上회담을 통해 북한의 경제위기 극복과 아들 金正日 세력 제거 등 두 가지를 일시에 해결하려고 한 것 같다』고 말했다.
1994년 6월28일, 남북 頂上회담 개최를 위한 남북 부총리급 예비접촉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이 접촉에서 「남북 頂上회담을 1994년 7월25일부터 7월27일까지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한다. 체류 일정은 필요에 따라 더 연장할 수 있다」는 합의서가 작성되었다. 남북 頂上회담은 金日成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런 金日成이 남북 頂上회담을 보름 앞두고 1994년 7월8일 急死했다. 정대규씨는 『남북 頂上회담을 앞두고 궁지에 몰린 金正日과 그 지지세력이 어떤 식으로든 저항했을 것이며, 金日成 急死의 원인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고 말했다.
金日成이 카터와의 회담에서 『남북 頂上회담이 잘 되면 내가 앞으로 10년 더 통치하겠다』고 한 발언도 金正日에게는 신경쓰이는 일이었다. 金日成의 남북 頂上회담 발표가 식량난에 굶주려 있던 북한 주민들에게 「희망」으로 비쳐진 것도 사실이다.
金正日 失政으로 탈북자가 늘었다
북한군 장령은 그가 작성한 文件에서 金正日 통치 이후 북한의 경제사정은 나날이 나빠졌다고 지적했다. 인용하면 이렇다.
<金正日은 집권하면서부터 군대 점점을 늘렸으며 국방비 지출은 작년(1998년)에 최고 기록을 돌파했다. 지난해까지 조선인민군 총수는 105만 정도였다. 국방비 지출은 25억 달러를 초과했다. 국방비가 국민 경제의 4분의 1을 넘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뿐일 것이다.
경공업 분야는 전반이 마비되었고, 全 조선 사회가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으며 인민들의 생활은 조국 해방 후 제일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다. 이러한 나쁜 일은 신문에 싣지 못하여 누구도 감히 조선의 나쁜 일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제반 사회가 점차 쇠퇴의 길로 나갈 때 金正日은 마땅히 군대를 줄이고 인민들의 먹고 입는 문제를 생각해야 하는데, 군대를 더욱 늘리고 미사일 연구를 다그쳐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발사하여 인민들로 하여금 나라에 대하여 신심을 가지게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金日成 死後 북한의 변화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수령님께서 조선을 領導할 때는 다른 나라로 도망치는 일이 크게 일어나지 않았는데, 인민들 속에서 金正日 찬양 소리가 높아지고 있을 때 黃長燁 사건이 터져 全조선 인민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몇만 명의 사람들이 중국으로 달아났으며 중국을 통해 남조선에 넘어간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해당 부서 분석에 따르면 최근 몇 년 내 중국으로 도망쳤다가 돌아온 조선 사람이 대략 200만 명으로 조선 전체 인구의 13%를 점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정치 감옥인 정치범 관리소에 갇혔으며,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다. 우리 나라가 창건되어서부터 정치적 문제로 감옥에 갇혔거나 감옥에서 죽은 사람이 50만 명 정도이며, 이런 저런 운동에서 피해를 받았거나 추방받은 사람이 대략 500만 명 정도이고, 지금까지 각종 재판을 받은 범죄분자가 약 280만 정도다. 지난해에는 각종 범죄분자 670명을 총살하였다.
군대의 중요 부서 책임자는 金正日이 직접 임명했다. 무기제조 공장 지배인 임명도 손수 지휘하여 시름을 놓았다. 25명 내지 30명쯤 되는 소부대에도 정치지도원과 보위지도원을 두었다.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은 金正日은 누구의 말도 그대로 듣는 일이 없으며 외국 방문을 꺼려했다. 방문 기간 중에 반란이 날까 봐 근심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金正日에게 외국 방문을 건의 못 한다>
국가정보원의 한 전직 간부는 『북한 당국이 金日成 사망을 공식 발표할 때까지 안기부는 그와 관련된 아무런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며 『金日成 사망이 공식 발표된 후 안기부 간부들은 金泳三 대통령에게 불려가 질책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상한 징후들
이 간부는 『金日成 死後에 관련 기관들의 각종 정보와 첩보들을 再분석한 결과, 金日成 有故를 암시하는 징후들을 발견하게 되었다』며 『金正日은 아버지 金日成을 제거하기 위해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한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이다.
『金正日이 아버지 金日成을 제거하기 위한 거사를 결심한 시점은 1994년 7월4일, 월요일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부지역에 위치한 한국군 감청부대인 「○○기지」에서 처음 포착했다.
미국의 첨단 통신·전자장비를 갖춘 이 기지의 주 임무는 북한 내의 각종 방송과 통신내용을 감청하는 일이다. 이날부터 이 기지의 안테나에 북한의 국가보위부와 사회안전부가 방송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같은 내용의 지침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하달하는 이상한 현상이 포착되었다.
「남조선의 金泳三 대통령이 공화국을 방문할 예정이고, 제네바에서 朝美 회담이 열릴 예정이지만 黨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므로 黨과 軍, 주민들은 黨중앙을 믿고 조금도 동요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감청부대에서는 처음엔 남북 頂上회담과 美北 3단계 고위급 회담을 앞둔 일상적인 방송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7월4일부터 시작된 이 방송이 7월5일, 7월6일에도 계속되자 유심히 체크하기 시작했다. 남북 頂上회담이 있다는 사실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아니라 「黨중앙」을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내용이 수상쩍었고, 동요하지 말라고 하면서 유독 「黨중앙」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예사롭지 않았다. 「黨중앙」은 金正日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국가보위부는 인민군을 상대로, 사회안전부는 경찰과 주민을 상대로 이러한 설득 방송을 계속하고 있는 점도 예전엔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인민무력부는 金日成 산하에 있었지만 국가보위부와 사회안전부는 金正日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감청부대에서는 이를 「특이 사항」으로 분류해 상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이 보고는 북한 내부에 흔히 있는, 그래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정보로 취급되었다. 지미 카터 前 미국 대통령을 만났을 때 金日成이 팔순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워낙 건강했기 때문에 우리는 남북 頂上회담이 무산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감청기지에서 획득한 정보를 놓쳐 버린 것이 우리의 실수였다』
인민무력부장 吳振宇의 의문의 죽음
1994년 7월11일 오후 11시40분, 금수산의사당에 안치된 金日成의 시신이 북한 중앙방송을 통해 全세계에 처음 공개되었다. 金正日을 중심으로 인민무력부장 吳振宇, 정무원 총리 姜成山 등이 金日成 시신을 참배하던 중, 「묘한」 장면이 TV에 잡혔다. 金正日이 吳振宇 귀에 대고 속삭이고 있는 장면인데, 두 사람의 태도가 묘했다.
金正日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데, 吳振宇는 못 들은 척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吳振宇가 金正日 지시를 거역하는 듯한 장면이었다. 인민무력부장 吳振宇가 金日成과 같은 빨치산 세대의 元老이긴 하지만 金正日의 말을 못 들은 척하는 것은 북한 사회에선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이 장면에 대해 한 북한문제 전문가는 『金正日이 金日成 사망에 관련돼 있음을 알고 있는 吳振宇가 金正日에 대해 그런 식으로 불쾌한 심정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했다.
吳振宇는 金日成 장례가 끝난 그해 10월, 프랑스에서 폐암 치료를 받고 이듬해 2월25일 평양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시 吳振宇의 나이는 78세였다.
金正日이 1974년 金日成 후계자로 추대된 데 대해 『후계체제를 서둘러선 곤란하다』며 반대했던 정무원 부총리 南日은 1976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 사건도 金正日에 의한 암살로 추정되고 있다. 金日成 사망 후 金正日은 軍 고위 간부 30여 명을 철직한 바 있다.
金日成 急死는 金正日 통치에 장애물이었다. 金正日의 통치 능력 한계를 인식한 金日成이 은퇴생활을 접고 親政체제를 부활시켜 金正日과 그 세력들을 견제하는 와중에서 急死함에 따라 金正日은 통치권을 되물려 받긴 했지만 金日成에게 충성하는 세력들의 지지는 기대할 수 없는 약점을 안고 있었다.
金正日은 金日成 사망 후 몇 년간은 黨에 힘을 실어 줘, 金日成 急死의 내막을 알고 있으면서 자신에게 부담되는 존재인 軍 원로들이 黨의 통제를 받도록 했다. 이 시기 인민군대는 「黨을 결사 옹위하며 목숨으로 지키는 총폭탄」에 불과했다.
金正日은 「金日成 사람」으로 평가되는 吳振宇, 崔光(인민군 원수. 吳振宇 사망 후 인민무력부장. 1997년 2월21일 사망), 김광진(인민군 차수.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1997년 2월27일 사망) 등 軍 원로들이 잇달아 사망한 이후인 1997년 2월부터는 거꾸로 軍이 黨을 통제토록 했다.
1994년 7월에 발표된 金日成 사망 당시 국가장의위원회 서열과 1997년 4월에 발표된 북한 권력서열을 비교하면, 金日成 생전에 권력서열 70∼80위에 머물렀던 군부 인사들이 10위권 안팎에 진입했음을 볼 수 있다.
호위총국장 李乙雪이 77위에서 8위로, 인민무력부 총정치국장 趙明祿 차수가 90위에서 14위로, 사회안전부장 白鶴林 차수는 53위에서 15위로 뛰어올랐다. 이보다 상위 서열인 李鍾玉·朴成哲·金炳植 부주석과 정치국원들이 고령의 원로인 점을 감안하면 군부 실세가 북한 권력체의 최상층부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金正日의 잦은 軍부대 방문
북한 노동신문은 1997년 5월19일자 사설에서 『인민군대는 우리 식 사회주의의 기둥이며, 혁명의 대학이며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인민군대처럼 해 나가는 것은 당원들의 의무다. 黨 조직은 모든 사업을 인민 군대가 창조한 사상과 도덕·문화를 따라 배우라』고 주장, 軍이 黨을 지배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이 무렵부터 『金正日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수뇌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는 충성의 결의가 구호로 제창되기 시작했다. 「혁명의 수뇌부」는 軍이며, 그 수반이 국방위원장 金正日이다.
黨과 정무원, 최고인민회의 등이 軍의 통제下에 놓이면서 노동당 정치국과 黨 중앙위원회, 黨 중앙군사위원회는 소집되지 못하고 金正日은 군부 실세들에 둘러싸여 軍 부대 방문을 계속했다.
金日成 사후부터 1997년 12월 초까지 金正日의 공개 활동은 총 158회인데 이 중 軍 부대 방문 등 軍 관련 행사가 95회를 차지했다. 金日成이 사망한 1994년에는 金正日의 14회 공개 활동 중 軍 관련 행사가 하나도 없었으나 1995년에는 35회 공개 활동 중 20회, 1996년에는 52회 중 35회, 1997년에는 57회 중 40회로 급증했다. 1996년부터 軍 관련 행사가 급격히 증가한 것은 金正日의 통치력이 군부에 의존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金正日의 「총비서」 승계도 파행적으로 이뤄졌다. 노동당 규약에 따르면 「총비서」는 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선거토록 돼 있다. 통상적으로 黨 중앙위원회는 黨 대회나 黨 대표자 대회를 먼저 연 다음, 마지막 날에 열린다. 金正日은 이런 절차를 밟지 않고 黨 중앙위원회와 黨 중앙군사위원회 공동 명의의 「특별보도」 형식을 통해 1997년 10월8일 「총비서」에 추대되었다.
金日成 사망 10주년이던 지난 7월8일 평양에는 비가 내렸다. 金日成이 죽은 1994년 7월8일에는 천둥 번개가 쳤다. 金日成 시신은 「주석궁」이라 불리는 금수산의사당 안에 있다.
金正日은 지난 7월8일 밤 자정에 軍 고위 간부들과 함께 금수산의사당을 참배했다. 권력 서열 2위인 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이날 추모사에서 『金日成 동지의 사상과 위업은 金正日 동지에 의해 전면 계승되고 있다』면서 『金正日 동지를 중심으로 일심단결하자』고 말했다.
올해 초 평양을 다녀온 영국 인디펜던트紙 기자 스티브 블룸필드는 이날 「죽은 주석의 사회」라는 기사에서, 오늘 평양의 금수산 기념궁전 앞 광장은 弔花와 조용한 흐느낌으로 가득찰 것이라며 북한에서 차지하는 金日成의 위상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고 썼다.
출처 : | 이선생의 블로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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