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대전자령 전투(大甸子嶺戰鬪)는 1920년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과 더불어 무장(武裝) 항일투쟁(抗日鬪爭) 최고의 승전(勝戰)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1930년대 무력(武力) 독립운동(獨立運動) 최대의 성과로 손꼽히고 있는 전적(戰績)이다.
1920년대 말기 30년대 초반에 걸쳐 중국 동북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 진영은 남만주지역을 주요 활동무대로 한 국민부(國民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등과 동북만주를 활동기반으로 하는 혁신의회(革新議會),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으로 통합 흡수되었다. 이들 양대 세력이 한 조직체로 통합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점진적으로 비교적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당(黨).정(政).군(軍)체제를 갖추었다는 사실은 민족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방향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1920년대 후반에 재만한인(在滿韓人)들은 중국 관헌의 압박, 중국인 지주와의 대립, 일제와의 충돌, 그리고 한국교민사회 내부의 소작농 증가 등 계급분화와 사상적 대립이라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혔다. 1920년대 초반에는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유력한 근거지였던 중국 동북의 한국교민사회는 공산주의 사상이 전파.확산되어 사상적 분열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말∼1930년대 초에는 공산주의 운동 세력이 크게 증대하여 이 지역에서의 민족운동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공산주의 세력이 팽창하고 국민부(國民府)가 수립되자 북만주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혁신의회(革新議會)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 계열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이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민족진영을 재정비하여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고 대일항전(對日抗戰)과 반공운동(反共運動)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마침내 재만(在滿)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홍진(洪震), 신숙(申肅), 지청천(池靑天), 이장녕(李章寧) 등을 중심으로 구성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1931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을 개시하자 그해 10월 북만주지방을 중심한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려 재향군인의 소집과 청장년의 징모를 실시하여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반만항일전(反滿抗日戰)을 준비하였다.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 수뇌부는 중동철도호로군(中東鐵道護路軍),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사령부 측과 협의하여 대일연합작전(對日聯合作戰)을 추진하기로 합의하고, 30명을 1소대, 3개 소대를 1중대, 3개 중대를 1대대, 3개 대대를 1연대, 3개 연대를 1사단으로 편성하는 군사편제 방침을 결정하고 각 군구에서 병력을 징집하였으며 총기(銃器)와 탄약(彈藥)은 중국군의 보급을 받고 작전에 임하기로 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은 중동철도호로군(中東鐵道護路軍),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등 중국 의용군과의 교섭을 진행시키는 한편, 모병활동 및 군사훈련에 매진하며 대일항전(對日抗戰)에 대비한 결과 상당한 실력을 쌓게 되었다.
재만(在滿)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당군(黨軍)으로서 1931년 10월경에 창설된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은 만주사변(滿洲事變) 이후 일제의 중국 동북지역 침략에 맞서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 등 중국의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과 한중연합전선(韓中聯合戰線)을 형성하여 서란현 전투(舒蘭縣戰鬪), 쌍성보 전투(雙城堡戰鬪), 경박호 전투(鏡泊湖戰鬪), 사도하자 전투(四道河子戰鬪), 동경성 전투(東京城戰鬪), 대전자령 전투(大甸子嶺戰鬪), 동녕현성 전투(東寧縣城戰鬪) 등을 수행하면서 만주국군 및 일본군에 잇달아 타격을 가했다.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의 대일항전(對日抗戰)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전과를 올린 승전(勝戰)이 바로 대전자령 전투(大甸子嶺戰鬪)였다. 동경성 전투(東京城戰鬪) 이후 그곳에서 철수하여 왕청현(汪淸縣) 동북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은 시세영(柴世榮)이 이끄는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과 함께 1933년 6월 하순 노송령을 넘어 동서검자(東西儉子)에 이르렀다. 이때 한,중 연합군은 나자구(羅子溝)에 주둔하고 있던 이케다 신이치[池田信吉] 대좌가 총지휘하는 일본군 제19사단 소속 간도파견대가 연길현으로 철수하리라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러한 일본군 철수의 정보에 접한 한,중 연합군은 일간 100여km를 강행군하여 6월 28일경 대전자 북방 4km지점인 노모저하(老母猪河)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이 나자구 근처의 주민들로부터 많은 우마차를 강제로 징발, 군수물자를 싣고 오전 8시에 출발해 대전자에서 왕청-백초구(百草溝)-연길 등을 경유하는 도로를 택하여 행군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은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은 적군을 유리한 지점에서 무난하게 매복, 기습할 수 있는 지점을 지점을 선정하여 부대를 배치하고자 6월 28∼29일경 대전자 서쪽 화개산(華蓋山)을 우회하여 적의 통과 예상지점인 대전자령의 양편 산허리에 매복하였다. 대전자령은 태평령이라고도 하는데, 일본군이 왕청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지점이었다. 이곳의 지형은 약 1km정도 되는 길다란 협곡으로서 마치 乙자 모양으로 굽어졌는데, 양쪽은 높이가 800∼1000미터나 되는 험준한 절벽과 울창한 산림지대로 되어있어 적을 공격하기에는 매우 알맞은 곳이었다.
이 작전에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은 약 5백여명,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은 약 2천여명의 병사가 참전하였는데,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은 주공부대로써 약 300명이 고개의 가운데 즉 제일 높은 곳에 배치되고, 고개의 입구와 출구에는 한국 독립군 100여명씩과 중국 의용군이 혼합 배치되었다. 이리하여 한중 연합군은 계곡 양편 산기슭에 구축되어 있는 참호속에 매복,대기하여 일본군에 대한 습격 준비를 완료하였다.
마침내 오후 1시경 일본군의 전초부대가 지나간 뒤 화물차량을 앞세우고 본대가 계곡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후미부대가 연합군이 매복한 골짜기 안으로 완전히 들어온 이후 총공격을 개시하자고 약속이 되어 있었지만,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의 일부 병력이 적군의 후미부대가 미처 들어서기도 전에 사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 측에서도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독립군은 소총과 기관총으로 맹렬한 사격을 하면서 바위를 굴려내려 적병들을 압사시키고 자동차와 우마차를 파괴하거나 운송불능의 상태에 빠뜨리며 적군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한,중 연합군의 매복작전에 걸려든 일본군은 총기(銃器)와 군량 및 많은 군수물자를 버리고 도주하다가 궤멸되었다.
한,중 연합군은 4~5시간 동안 전개된 이 전투에서 일본군 1천여명을 살상하고 총기(銃器) 1500여정, 박격포(迫擊砲) 10여문, 담요 3천여장, 군량을 실은 우마차 2백여대의 군용장비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대전자령 전투(大甸子嶺戰鬪)는 비록 한중합작(韓中合作)으로 전개되어 승리를 거둔 전투였지만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이 이 전투의 주공부대로 활약하여 일본이 세운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붕괴시키고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중국 동북지방에서 일어난 반만항일전(反滿抗日戰)에서 일익을 담당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출처 : | 이선생의 블로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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