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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금오산(金烏山;976m) 산행기

영지니 2010. 9. 20. 17:42

        

 구미 금오산(金烏山;976m) 산행기


  금오산은 경상북도 구미시(龜尾市), 김천시(金泉市), 칠곡군(漆谷郡)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세 시, 군에 걸쳐 있지만 산문이 구미 쪽으로 열려 있고, 등산로 또한 주로 구미 쪽으로 개발이 되어 있어서 흔히 구미의 산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엔 금오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여럿 있다. 한자로는 다르지만 하동 금오산(849m)과 밀양 금오산(730m)이 있는가 하면, 여수(323m)에도 있고, 경주에도 남산(468m)을 일명 금오산이라 한다. 그러나 산행을 전제로 해서 금오산이라 하면 우리나라 100대 명산에 포함되어 있는 구미 금오산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산의 기품이 기골 찬 해발 976m의 금오산은 1970년도에 우리나라 최초의 도립공원으로서 경상북도 도립공원이 되었고, 1977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로 자연보호운동이 시작된 발상지이기도 하며, 따라서 1978년 10월 5일 자연보호헌장을 처음으로 공포한 곳이기도 하다.

 

  한편 금오산은 전형적인 암산으로 경관이 수려하며, 정상 일대는 분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곳곳이 절벽이어서 산세가 가파른데, 정상은 현월봉(976m), 약사봉(958m), 보봉(925m)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정상 봉우리인 현월봉(懸月峰)은 돌을 깎아지른 듯 고추 서 있다.

  그리고 금오산에는 계곡과 샘이 많이 있어 사면이 이끼 낀 벼랑으로 되어 있고, 북쪽엔 명금폭포(대혜폭포)가 있어서 한여름에도 찬 기운이 돈다.

 

  이처럼 금오산은 경관이 수려하고, 여러 역사적 사연이 많이 쌓인 의미 깊은 산이며, 금오산(金烏山)이라는 이름은 ‘태양 속에 산다는 세 발 달린 황금빛 까마귀(금오)가 저녁노을 속에 금빛 날개를 펼치며 비상하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는데,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고, 고려시대에는 남숭산(南嵩山)이라 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황하강 유역인 하남성에 있는 중국 오악(五嶽) 중의 하나인 유명한 숭산(嵩山)과 그 생김새가 비슷하다고 하여 황해도 해주에 북숭산을 두고, 이곳 금오산을 남숭산이라 명명하여 남북으로 대칭되게 했단다. 

 

  그리하여 고려시대 문종(文宗)은 왕자를 출가시켜 이 남숭산에서 수도하게 하였는데, 그가 바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으로서 그에 따라 남숭산의 품격과 위상이 높아졌고, 이후 금오산이라 개칭됐다. 현재 금오산 남쪽 자락인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엔 보물 제251호인 ‘선봉사대각국사비(僊鳳寺大覺國師碑)’가 남아 있다.

  그리고 고려 말의 충신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이곳에 숨어 살았으므로 더욱 이름이 나게 됐으며, 금오산 북쪽 산행 들머리 큰 주차장 길 건너편에는 그를 기리는 채미정(採薇亭)이 있다.

 

  또한 금오산은 골짜기마다 기암괴석의 절경이 있고, 산 전체가 남성적인 기상과 기백이 넘치므로 옛 사람들은 소금강이라고도 불렀으며, 중국의 수양산에서 고사리로 연명하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이야기와 길재의 충절을 기려 수양산(首陽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선산 방면에서 올려다보면 봉우리가 흡사 붓끝 같다고 해서 필봉(筆峰)이라고도 했는데, 그로 인해서인지 선산 지방에는 문인과, 명필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됐다. 그리하여 조선 성종 때의 문인 성현(成俔)은 그의 저서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라고 했다.

 

  그런데 금오산에 관한 옛 이야기를 할 때 선산과 연관하여 많이 논의되는 것은 구미가 원래는 선산군에 속해 있었으며, 구미시로 독립한 것은 최근의 일이고, 금오산도 원래는 선산군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구미시 인동 방면에서 올려다보면 금오산이 마치 부처님이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와불산(臥佛山)이라고도 했으며, 마치 귀인이 관(冠)을 쓰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귀봉(貴峰)이라 칭하기도 했고, 또한 마치 거인이 누워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거인산(巨人山)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김천 방면에서 보면 부잣집의 노적가리 같다고 해서 노적봉(露積峰)이라 했는데 실제로 예로부터 이 지방에는 큰 부자가 많이 났다.

  이런 찬사의 별칭들이 있는 반면에 김천시 개령면 방면에서 보면 큰 도둑이 무엇을 훔치려고 숨어서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적봉(賊峰)이라고도 했으며, 성주군 방면에서 보면 여인네가 산발한 모습 같다고 해서 음봉(淫峰)이라 하기도 했단다.

 

  헌데 산 하나를 두고 이런 많은 별칭들이 생겨 난 것은 그만큼 이 지역의 중심에서 특출하게 빼어난 자태를 보여주는 금오산이기에 그에 대한 선인들의 애정 어린 해석의 결과라고 보여진다.

  금오산은 이런 명산이고 도시 근교에 있어서 산행 들머리와 오르는 등산로 역시 사방으로 개발이 되어 있다. 그러나 처음 가는 사람은 주차장(채미정) - 케이블카 승강장 - 해운사 - 도선굴 - 대혜폭포 - 정상(현월봉) - 약사암 - 마애불 - 대혜문(금오산성 외문) 코스로 원점회귀하는 것이 정석이다.

 

  경부고속도로 구미 나들목을 빠져나가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금오산 산행 들머리가 있다. 입구의 주차장은 아래의 큰 주차장(일명 채미정 주차장)과 위의 작은 주차장으로 나뉘어 있다. 비록 아래와 위 주차장으로 나뉘어 있지만 걸어서 10분 거리이므로 아무 곳에 주차를 해도 된다.  

  그런데 위 주차장은 작아서 버스는 주차할 수 없고, 자판기나 화장실조차 없으며, 아래 주차장엔 상가와 각종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 있다. 그리고 채미정에 들릴 사람은 아래 주차장에 주차를 해야 편리하므로 처음 가는 사람은 이래저래 큰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 편이 낫다.

 

  큰 주차장 길 건너에 채미정(採薇亭)이 있다. 채미정 입구엔 야은 길재의 회고가(懷古歌)가 돌에 새겨져 있고, 다리를 건너 들어가면 길재를 기리는 서원과 채미정이 있다. 채미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벽채는 없고 기둥만 16개가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형태의 정자각이다.

  길재(1353~1419)는 호를 야은(冶隱) 혹은 금오산인(金烏山人)이라 했으며, 고려 말의 목은 이색(李穡),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삼은(三隱)이라 칭했다.

 

  길재는 11세에 선산 도리사(桃李寺)에 들어가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나중엔 당대의 석학이던 이색, 정몽주, 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그리하여 그의 스승 권근은 “내게 와서 글을 배운 사람은 많지만 길재가 독보적이었다"라고 칭찬했을 만큼 문재가 뛰어났다고 한다.

  길재는 그 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이방원(후의 太宗)과 같은 마을에 살았고, 성균관에서도 같이 공부를 하여 두 사람은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그러나 1388년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李成桂),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몸은 비록 남다를 바 없다마는 뜻은 백이숙제처럼 마치고 싶구나"라는 내용의 시를 읊고, 이듬해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왕조에 참여할 뜻이 없었던 그는 고향에 머물면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그리고 1400년(정종 2)에 세자 방원이 그를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했으나 "여자에게는 두 남편이 없듯이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사양했다.

  그리고 길재는 고려의 옛 도읍지인 개경을 둘러보며 느낀 망국의 한과 인간사 덧없음을 시조로 읊었으니 그 시가 바로 채미정 입구 바위에 새겨진 회고가이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런 길재가 백이숙제의 덕을 사모하며 후학을 가르치던 금오산 기슭에 그의 높은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 때(1768년)에 세운 정자가 채미정이다. 채미(採薇)란 다른 왕조를 섬기지 않으려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았다는 백이와 숙제의 고사에서 따온 말이다.

 

  채미정을 둘러본 후 금오산호텔 앞을 지나 10여분 올라가면 작은 주차장과 산행기점이 되는 탐방안내센터 앞에 닿는다. 그리고 이어서 다리를 건너면 오른편에 자연보호발상지 표지석이 있고, 그 앞의 이정표에 ‘정상 3.3km, 폭포 1.2km’라 적혀 있으며, 왼편이 케이블카 출발지이다.

 

  케이블카는 15분 간격으로 운행되고, 805m 거리를 5분에 실어다주므로 왕복(요금 5000원)보다는 편도(요금 3500원)를 끊어 올라갈 때는 한번 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케이블카를 타면 도선굴 바로 아래 해운사 앞까지 실어다 준다. 걸어서 30여분 걸리는 구간인데,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시간은 얼추 같이 걸린다고 봐야 한다.

 

  케이블카를 내리면 거기 이정표에 ‘대혜폭포 10분, 도선굴 15분, 정상 100분’이라 적혀 있다. 그러나 대혜폭포도 보고, 도선굴에도 들리고, 여기저기 전망도 즐기면서 사진도 찍고, 하려면 정상까지 2시간도 더 걸린다.

 

  해운사(海雲寺)의 전신은 신라 말 도선(道詵) 대사가 창건한 대혈사(大穴寺)라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대혈사가 불타 폐허가 됐던 것을 1925년 재건하면서 해운사라 했다고 한다.

  해운사에 들렸다가 먼저 대혜폭포에 들려도 되고, 도선굴에 먼저 들려도 되지만 도선굴에 먼저 들렸다가 대혜폭포 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정석이다.

 

  도선굴을 올라가는 암릉 길은 안전시설이 잘 돼 있어서 위험하진 않으나 낭떠러지 절벽 위로 가고 길바닥이 닳아서 무척 미끄러우므로 신경이 쓰인다. 얼어붙으면 위험할 것 같고, 사람이 많이 몰리면 병목현상이 일어날 것 같은 좁은 난간 길이다.

 

  도선굴은 해운사 위 절벽에 위치한 천연동굴로 신라 말기에 도선이 이곳에서 참선하여 득도를 하고, 풍수지리설의 창시자가 됐다고 하며, 야은 길재 또한 이곳에서 수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굴의 규모는 폭과 높이가 각기 5m, 길이는 10m 쯤 된다.

  도선굴 안엔 부처님을 모셔 놓았고, 도선굴 앞의 난간에서 구미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일품이다.

 

  도선굴에 들렸다가 내려오면 명금폭포(鳴金瀑布)가 반긴다. 해발 400m 지점의 수직절벽에서 폭포가 쏟아져 내린다. 높이가 38m나 되는 이 폭포는 구미시 일원의 농가에 물을 대줘 주민들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해서 대혜폭포(大惠瀑布)라고도 한다.

 

  대혜폭포 앞의 나무계단 옆 이정표엔 ‘정상, 약사암 2.1km, 성안 2.0km, 마애석불 1.8km’라 적혀 있다. 거기서부터 300여m 가파른 계단 길을 12~3분 올라가야 한다. 숨을 헐떡이며 나무계단을 다 올라가면 거기에 할딱고개 설명판이 있다.

 

  ‘오시느라 수고하였습니다. 정상까지 제1단계 지점입니다. 금오산 등산 코스 중 가장 숨이 찬 지점이라 해서 예로부터 할딱고개라 불러졌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숨이 차다는 것을 묘사한 부사인데 대개 ‘깔딱’이라 표현하지만 이곳과 속리산만은 ‘할딱’이라 표현하고 있다. 허긴 ‘할딱’은 의태어 같고, ‘깔딱’은 의성어라고 할까, 그런 차이밖에 없는 듯하다.

 

  할딱고개 설명판 바로 위 암릉이 전망대이다. 이곳에서 채미정과 주차장 일원, 그리고 금오저수지 너머 구미 시가지를 바라보는 전망이 멋지고, 이어지는 할딱고개를 올라가기 위해 숨을 고를만한 곳이다.

  전망대부터는 계단 길은 아니지만 더러 돌계단도 나타나는 가파른 길이 이어진다. 그러나 올라가는 도중 가끔 뒤쪽으로 시야가 열려서 얼마간 위안을 준다. 그런 길을 50여분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타나면서 거기 이정표에 왼편을 가리키며 ‘마애석불 0.6km’, 오른편을 가리키며 ‘정상, 약사암 0.9km, 성안 0.8km’라 적혀 있다.

 

  거기서 마애석불을 먼저 들리려면 왼편 길을 택해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른편 길을 택해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올 때 마애불을 거쳐 왼편 길로 내려온다. 그리하여 오른편 길로 2분 정도 올라가면 능선 상의 커다란 송전철탑 아래 이르고, 이후 가팔랐던 길도 순해진다.

 

  그리고 거기서 1분 정도 진행하면 다시 갈림길이 나타나서 이정표가 서 있다. 직진하는 길 쪽을 향해 ‘정상 0.8km’, 오른편 내리막길을 향해 ‘성안 0.7km’라 적혀 있다. 그러나 직진하는 길 쪽으로 가더라도 일부 금오산성 터를 볼 수 있으므로 대개 직진하는 길로 정상을 바로 향한다.

 

  그리하여 그 갈림길에서 5분 정도 올라가면 금오산성 터를 지난다. 금오산은 낙동강을 끼고 있으며, 산세가 험해서 천혜의 요새지이기도 하여 예로부터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을 잇는 길목을 지키는 군사요충지였다. 따라서 고려시대부터 금오산성이 있었다고 하며, 고려 말에는 인근 주민들이 산에 들어와 왜구의 노략질을 피했다고 한다. 

 

  이처럼 금오산성은 천혜의 지형을 잘 이용한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어서 고려시대부터 군창과 군영이 있었다고 하며, 조선 초기 태종 10년(1410)에는 다시 축성했다고 한다. 그 후 선조 28년(1595)에 증축했고, 1597년 정유재란 일어났을 당시엔 정기룡(鄭起龍) 장군이 왜적을 맞아 싸워서 이 성을 지켜냈다고 한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는 군관민이 함께 피난을 했고, 인조 17년(1639)에도 증축을 했으며, 그 후 고종 5년(1868)에 다시 수축했을 당시엔 금오산 동북쪽 계곡을 막은 외성과 정상 서쪽 아래의 너른 분지를 에워싼 내성으로 꾸며, 외성 둘레는 1,253m, 내성 둘레는 2,316m였다고 한다.  

 

  금오산성 터에서 다시 오르막을 25분 정도 올라가면 널따란 헬기장이 나타나고, 헬기장 바로 위가 정상이다. 이럭저럭 하다가 보면 산행기점에서 정상까지 3.3km 오르는데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금오산 정상인 현월봉에는 통신시설이 즐비하고, ‘달이 매달려 있다’는 뜻의 현월봉(懸月峰)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시설물들을 피해 여기저기 살피면 동남쪽 아래로 구미공단과 낙동강 물줄기가 보이는 너머 대구 팔공산(1,192.9m)이 보이며, 남쪽으로는  가야산(1,432m)과 수도산(1,316.8m) 쪽으로 뻗은 능선이 시원스럽게 보이고, 북쪽으로는 김천의 황학산(1,111.4m), 서북쪽으로 삼도봉(1,172m), 민주지산(1,241.7m) 등이 보인다.

 

  정상에서 전망을 즐기고 내려서면 약사암으로 통하는 일주문인 동국제일문(東國第一門)을 통과한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내려다 본 약사암의 풍경, 약사봉(958m) 아래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듯한 약사전, 삼성각과 종각은 금오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환상적인 모습을 표출하고 있다,

  특히 종각은 또 다른 봉우리 위에 현수교로 연결되어 있어서 운무라도 끼이면 절해고도의 섬이 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625~702)가 초년에 천하비경을 찾아 이 바위 아래에서 참선을 할 때 하늘의 선녀가 하루 한 끼의 주먹밥을 내려주어 하루하루 요기를 했고, 약사여래가 내려와 시중을 들어줌으로써 사바의 번뇌를 끊고 득도하여 고승이 됐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이와 함께 붙여진 이름이 약사봉이고, 약사암이다.

 

  약사전 앞의 뜰악에 서서 낙동강 구비를 내려다보고, 북쪽으로 휘돌아 10여분 내려가면 갈림길이 나타난다. 거기 이정표에 ‘해발 832m, (왼편)마애보살입상 0.7km, (내리막길)법성사 2.4km’라 적혀 있다.

 

  거기서 법성사 쪽으로 하산할 수도 있으나 마애불을 보려면 왼편 산허리 길로 들어서서 오르락내리락 10여분 전진하면 마애불에 이른다.

  마애보살입상(磨崖菩薩立像)은 정상 봉우리 옆의 보봉(普峰;925m) 북쪽 자연암벽의 바위 모서리를 이용한 특이한 구조로 남향으로 조각된 입상이다. 동체의 중심이 모서리에 오게 하고 양쪽은 좌우 벽에 부조로 조각돼 있다.

 

  높이는 5.55m로 작지 않은 규모이고, 광배와 좌대를 갖추었으며, 머리에는 삼면보관(三面寶冠)의 흔적이 보이는 고려 초기의 걸작품으로 보물 제490호이다.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풍만한 인상인데다가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윤곽은 매우 수려한 모습이다. 어찌 보면 아리따운 여인의 얼굴을 닮았으며,  먼 산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 오히려 초연해 보이기만 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곳에 보봉사(普峰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 주위에 흩어져 있는 기와 조각들이 그 흔적인 것으로 보아 옛날 「보봉사가 보봉 아래 있어 동쪽으로 수백리의 통망(通望)이 좋다」는 기록대로 보봉사의 옛 터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마애석불입상 옆 절벽 밑에 옹달샘이 있었다고 하며, 이 샘에는 용이 못된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무기는 천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바라고 바라던 등천(登天)의 날을 맞이했단다.

  그리하여 이무기는 어느 봄날, 천지가 진동하는 큰 소리를 지르며 서서히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공교롭게도 언덕 아래에서 나물을 캐던 아낙이 뜻하지 않게 굉음과 함께 이무기의 등천 광경을 목격하는 순간 너무도 놀란 나머지 방정맞게 그만 “저 이무기 봐라!”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천년을 기다려 용이 되고자 하는 순간 이 부정스런 소리 때문에 이무기는 용이 되지 못하고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런데 이무기가 떨어질 때 생긴 홈에서 샘물이 솟아나고 있어서 ‘용샘’이라 불렀다고 하며, 나병환자가 이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면 병이 나았다고 한다. 또한 나병환자가 이곳에 머물던지 이곳에 묘를 쓰면 가뭄이 온다고도 했다.

  그리하여 가뭄이 심할 때는 인근 주민들이 몽둥이를 들고 몰려와 나병환자를 내쫓고 또 묘를 파헤쳤는데, 그렇게 하면 그날 밤부터 틀림없이 비가 왔다고 한다. 이런 영험 있는 곳이라 하여 예전에 가뭄이 들 때는 여기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는데,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길이 없다. 

 

  마애불 앞을 내려서서 계속 산허리를 휘돌아 10여분 가면 작은 규모의 너덜지대가 나타나고, 이어서 5분 정도 더 가면 아침에 올라갈 때 만났던 갈림길에 이른다. 이렇게 되면 정상부의 세 봉우리인 현월봉, 약사봉, 보봉을 한 바퀴 돈 것이 된다.

  그리고 그 갈림길에서 아침에 올라왔던 길을 되짚어 30여분 내려가면 할딱고개 설명판이 있는 전망대에 닿는다.

 

  전망대에서 쉬면서 숨을 돌리고 한 번 더 전망을 즐긴 후 하산을 해야 하는데, 거기서 아침에 올라왔던 대혜폭포 쪽으로 이어지는 계단 길을 피해 그 반대편 동쪽 길로 내려가는 것이 좋다.

  이 길은 지형도엔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편안한 길이 이어진다. 지형도엔 없지만 인근 주민들은 주로 이 길을 이용한다. 계단 같은 인공시설물이 없는 자연스런 등산로가 이어지고, 이 길로 20여분 내려가면 금오산성의 외성 정문인 대혜문(大惠門)에 이른다.

 

  그리고 편안한 길로 30여분 내려가면 주차장에 닿으면서 산행을 마감하게 되는데, 현월봉에서 약사암과 마애불을 거쳐 하산하는 데에도 2시간 정도 걸리므로, 그렇게 할 경우 총 산행거리 약 7km, 산행시간 5시간 정도 걸린다.


2009, 9, 29(화요일) 글쓴이 - 아미산(이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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