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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 `캘리포니아 섬`

영지니 2010. 11. 15. 18:09

역사의 수수께끼, `캘리포니아 섬`

 

 

▲ 2006년 1월 17일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에 의해 런던에서 공개된 1763년 제작의 세계전도 '천하전여총도'. 지도상엔 1418년에 제작된 '천하제번식공도'를 필사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남극대륙이 나타나고, 북아메리카의 워싱턴, 오리건, 캘리포니아 주 일대가 섬으로 그려져있다. [자료사진 - 서현우]

 

이제 독자들은 눈길을 천하전여총도 위의 북아메리카 대륙의 서안으로 옮겨 보자. 오늘날의 워싱턴, 오리건, 캘리포니아 주州 일대의 미국 서안이 본토로부터 분리되어, 하나의 섬으로 그려진 것이 주의를 끌 것이다. 서술상의 편의를 위해 이 섬을 ‘캘리포니아 섬’이라 일컫기로 하고, 다음으로 나아가자.

필자가 천하전여총도의 가치를 평가함에 있어서 ‘캘리포니아 섬’은 또 하나의 준거가 된다. 독자들은 천하전여총도가 제작된 1763년이란 년도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도 상의 ‘캘리포니아 섬’은 결코 상상이나, 가공, 또 우연의 결과가 아닌 것이 된다. 또한 실제로 1763년에 지도가 제작되었음을 알리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 근거로 ‘캘리포니아 섬’이 앞서 언급한 남극대륙이 나타나는 조선의 두 지도와, 또 중세 유럽의 상당수 지도에서도 나타남을 들 수 있다.

아래에 실린 지도들은 모두 19C 조선에서 간행된 지도인데, 이 중의 ‘곤여전도坤與全圖’는 위에서 말한 조선의 두 지도 중의 하나이다. 이제부터 두 지도를 살펴보자.

 

     

 

▲ 후손 하성래가 소장하고 있는 1821년 제작된 하백원의 만국전도. [자료사진 - 서현우]    

 

 

     

 

▲ 조선에서 제작된 곤여전도상(上)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본(1860년판). [자료사진 - 서현우] 

   
     

 

▲ 조선에서 제작된 곤여전도하(下)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본(1860년판). [자료사진 - 서현우]    

 

‘하백원의 만국전도’는, 16C 후반과 17C 초에 걸쳐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신부들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 이탈리아)와 기울리오 알레니(Giulio Aleni, 1582~1649, 이탈리아)가 각각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1602년)와 ‘만국전도萬國全圖’(1623년)에서 영향을 받은 지도인데 이들 두 지도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이와 거의 비슷한 또 하나의 지도가 존재하는데 조선의 ‘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1770년대)가 그것이다. 이들 지도를 편의상 ‘4지도’라 칭하자.

그런데 위
하백원河百源(1781~1844, 조선 후기의 실학자)의 만국전도에서 볼 수 있듯이, ‘4지도’들엔 공히 남극대륙 및 호주 대륙이 자리할 공간이 남반구를 가득 채운 미지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4지도’가 앞서의 남극대륙이 나타나는 지도들에 비해 훨씬 후대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남반구에 대한 내용만은 분명 뒤쳐짐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번엔 곤여전도(1860년)로 눈을 돌려보자. 곤여전도는 형식에서부터 ‘4지도’와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앞서의 ‘4지도’는 하나의 타원형에 연속성을 담고 있는 데에 비해, 곤여전도는 세계를 두 개의 원에 양분한 양반구형兩半球形지도이다.

그 다음의 차이는 곤여전도엔, ‘4지도’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처리된 남반구 일대에 남극대륙과 함께 호주대륙이 선명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처음에 곤여전도의 남극대륙에 대해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4지도’에서 보듯이 미지의 영역을 나타내는 형상일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검증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곤여전도를 ‘4지도’와 비교해 보았다. 독자들로서는 위의 하백원의 만국전도와 곤여전도의 비교를 통해 상호 차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백원의 만국전도에서 볼 수 있듯이 ‘4지도’의 남반구는 공히 호주대륙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즉 남반구를 둘러싼 선형이 지도상의 여백이라는 것이다. 그에 비해 곤여전도는 호주대륙이 나타남은 물론 남극대륙과 함께 그 선형(
線形)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분명 지형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다, 나아가 나란히 놓인 양 대륙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곤여전도의 그곳이 남극대륙임을 확신하는데, 필경 독자들도 그러하리라 생각된다.

이제 곤여전도가 ‘4지도’와 구별되는 세 번째 차이를 살펴보자. 그것은 이 장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세 번째 차이는 시선을 곤여전도의 남반구 영역에서 벗어나, (곤여전도하下의) 북아메리카의 서부 해안 일대로 향하면서 나타난다. 그곳의 한 섬이 독자들의 눈에 들어왔을 때, 독자들의 머릿속은 어느 새 앞서 천하전여총도에서 본 ‘캘리포니아 섬’을 떠올릴 것이다. (주의: 캐나다 중앙부에 보이는 세로방향의 직사각형은 바다를 나타내는 만灣이 아니라, 글귀가 씌어진 공간임)

오늘날의 우리는 지도를 통해 아주 쉽게 그곳이 섬이 아니라, 단지 캘리포니아 반도가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 반도는 캘리포니아 주州와 이어져 있는데다, 캘리포니아란 이름으로 인해 자칫 미국의 영토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주州와 달리 그곳은 엄연한 멕시코의 영토이다. 사실 캘리포니아란 말 자체가 스페인에서 유래된 것으로, 현재의 미국령領 캘리포니아 주州 역시 이전엔 멕시코 영토였음을 반영하고 있다.

스페인 제국이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때 오늘날의 텍사스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미국 서남부의 광활한 지역이 스페인령領에 속했다. 그러다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자 멕시코의 영토가 되었던 것이 19C 중반의 미국-멕시코 전쟁의 결과로 미국의 영토에 편입된 것이다.
당시 멕시코가 상실한 지역은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텍사스, 오클라호마, 콜로라도, 그리고 와이오밍 주의 일부인데 현재의 멕시코 영토와 거의 맞먹는 수준의 엄청난 면적이다.

어쨌든, ‘캘리포니아 섬’은 한동안 유럽의 지도에서도 등장했는데 당시의 상황을 들여다보자.

현재까지 그 유래가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수수께끼로서, 18C 중엽에 이르기까지 무려 2백여 년 이상이나 당시의 유럽인은 물론, 북아메리카 진출 백인들에게 있어서 캘리포니아 일대는 섬으로 잘못 알려지고 있었다.

혹자는 그 이유의 하나로, 북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은 유럽인의 진출이 비교적 늦게 이루어진 곳이라는 사실을 들기도 하겠지만, 실제로는 캘리포니아 연안으로의 탐험은 이른 시기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16C만 해도 1542년 포르투갈 출신의 스페인 탐험가인 후안 카브리요(Juan Rodriguez Cabrillo, ?~1543?)를 필두로 하여, 유명한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5~1596)와 토머스 캐번디시(Thomas Cavendish, 1555~1592)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C 유럽에서 출판된 대부분의 지도들은 캘리포니아 일대를 섬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캘리포니아 섬’은 하나의 정설이었다.

1705년 독립 이전의 미국 본토에서 그곳을 섬이 아닌 실제의 반도로 나타낸 지도가 간행되자, 지도제작사에는 반발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심지어 어떤 이는 ‘캘리포니아 섬’을 일주한 선원이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런 가운데 1746년이 되기까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유럽에서는 여전히 ‘캘리포니아 섬’을 묘사한 지도가 제작되었다.

 

 

     

 

▲ 1626년 영국의 존 스페드가 제작한 '캘리포니아 섬'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 1650년에 제작된 '캘리포니아 섬' 지도. 캘리포니아란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자료사진 - 서현우]    

 

 

     

 

▲ 1696년 조한느 쟌이 제작한 '캘리포니아 섬' 지도. 이 지도상엔 남극대륙이 나타나지 않는다. [자료사진 - 서현우]    

 

독자들은 이제 당시 유럽의 ‘캘리포니아 섬’ 지도와 우리가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천하전여총도 및 곤여전도와의 상관성에 대해 유추하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두 지도상上의 ‘캘리포니아 섬’이 남극대륙과 더불어 유럽 지도들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 단정할 것이다.

더하여 독자들은 ‘캘리포니아 섬’은 유럽의 초기 탐험가들이 캘리포니아 반도를 섬으로 오인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1763년에 제작된 천하전여총도는 크게 이상할 게 없다. 다만 천하전여총도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원본 지도로서의 (1418년의) 천하제번식공도에 대한 내용은 한마디로 완전 거짓이며, 원본지도는 존재한 적이 없게 된다. 더불어 필자는 지금까지 별것 아닌 지도를 가지고 쓸데없이 시간과 지면을 낭비한 셈이 되어버린다.

과연 그럴까?

오늘날 지도제작의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실수로 간주되는 ‘캘리포니아 섬’에 대해 다시 주의를 환기해 보자.

‘캘리포니아 섬’은 16C 중엽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란 말이 스페인어에서 유래했음은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매우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하고, 초기 탐험가의 착오에 기인한 것이라 가정해 본다면, 1542년 최초로 캘리포니아 연안을 탐험한 스페인 탐험가 후안 카브리요가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미국령領 캘리포니아에까진 미치지 못했지만, 멕시코의 태평양 연안을 카브리요에 앞서 탐험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즈텍 제국의 정복자이자, 스페인령領 멕시코 총독을 역임 했던 유명한 헤르난 코르테즈(Hernan Cortes, 1485~1547, 스페인)이다.

코르테즈는 1536년부터 약 3년에 걸쳐 오늘날 멕시코의 태평양 연안을 대부분 탐사하면서 아메리카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는데, 1539년 그의 부하 프란시스코 울로아(Francisco de Ulloa, ?~1540, 스페인)가 코르테즈의 명령에 의해 캘리포니아 만灣을 샅샅이 조사하곤 그곳이 섬이 아니라, 반도라는 사실을 최초로 확인한다.

코르테즈는 당시 스페인 정부의 신대륙 정책을 수행한 스페인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캘리포니아 반도가 확인된 1539년부터이거나, 최소한 그가 스페인으로 최종 귀환한 해인 1541년부터 ‘캘리포니아 섬’은 수정되었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위 17C의 지도들에서 보듯이 캘리포니아 일대는 지도상에 오랜 시간에 걸쳐 계속 섬으로 남아 있게 된다.

필자는 그 이유를 당시 스페인 지도제작자들의 머릿속에 이미 ‘캘리포니아 섬’이란 관념이 습관처럼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라 추정한다. 즉 코르테즈의 탐사 이전부터 지도상엔 ‘캘리포니아 섬’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탐험의 결과 착오로 인해 섬이라 알려진 것이 아니라, 코르테즈도, 카브리요도, 드레이크도 캐번디시도 이미 지도를 통해 그곳에 존재하는 ‘캘리포니아 섬’을 가정하고 탐험에 나섰다는 얘기이다.

그 증거는 ‘캘리포니아’란 말 자체에서 찾을 수 있는데, ‘파라다이스 섬’이란 뜻의 이 말은 1510년 스페인 남부도시 세비야에서 출간된 G. R 몬탈보(Garci Rodrigues de Montalvo)의 소설 ‘에스플랜디안의 모험’에서 유래하여 당시 유행어가 되어 있었다. 즉 코르테즈나, 카브리요가 탐험에 나설 당시 스페인에서는 이미 그곳이 캘리포니아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그들은 그 섬을 찾아 탐험에 나섰다는 뜻이다. 

반복하자면 ‘캘리포니아 섬’은 탐험과 무관하게 애초부터 섬으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물론 탐험 결과를 반영한 지도도 존재했다. 아래 지도는 17C의 ‘캘리포니아 섬’들의 지도와 달리 이미 16C에 실제의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 1570년 벨기에 지도제작자 오르텔리우스의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1570년에 이런 지도가 제작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탐험의 결과가 지도학계에서 제대로 공유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럼에도 이후 2백여 년 가까이나 ‘캘리포니아 섬’이 대세를 이뤘다는 것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단지 추정해 보건대, 당시 지도제작자들에게 있어서 탐험가들의 보고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캘리포니아 섬’ 지도가 광범하게 퍼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되기까지 더욱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므로, 어쩌면 ‘캘리포니아 섬’ 지도의 기원이 콜럼버스 시대 이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르네상스의 절정기에 접어든 유럽사회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탐험가들을 다룬 전기 작가들의 공통적인 지적에 의하면 당시 유럽사회는 지리지식에 대한 갈망이 폭발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캘리포니아 섬’ 지도는 콜럼버스 이전부터 그렇게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의문을 던져야만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최초로 ‘캘리포니아 섬’을 지도상에 남겼는가? 이에 대한 답은 남극대륙에 이은 또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겨두자.

독자들은 이쯤에서 천하전여총도와 곤여전도에 나타난 ‘캘리포니아 섬’이 우연이나, 상상, 가공의 산물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 것이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동양의 지도에서 ‘캘리포니아 섬’을 찾을 수 있는 지도라곤, 우리가 지금까지 확인한 천하전여총도와 곤여전도 외에 또 하나가 있는데, 흥미롭게도 그 지도 또한 조선에서 제작된 지도이자, 남극 대륙이 나타나는 지도로서 앞서 말한 조선의 두 지도 중 나머지 하나가 그것이다. 그 지도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이제 이 장의 마지막으로, 곤여전도의 유래와 현황에 대해 살펴보고 그와 관련하여 천하전여총도를 평가해 보자.

곤여전도는 목판본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으론 3종류의 판본이 존재하는데, 그 시초는 17C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소속의 또 다른 서양선교사 페르디난드 베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1623~1688, 벨기에)에 의해 1674년 북경에서 판각된 북경판이고, 2번째는 그로부터 2백여 년이 지난 1856년의 광동판, 다음 3번째는 광동판이 나온 불과 4년 뒤 1860년 조선에서 판각된 조선판이다. 위에서 살펴본 곤여전도는 조선판으로, 조선판은 현재 각자 3개 본이 전해져오는데, 서울대 규장각(보물 제882호)과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성신여대 박물관 소장본이 그것이다.

북경판과 광동판은 2백여 년의 시차만큼이나 많은 차이가 있으며(필자가 아직까지 직접 확인하진 못함), 조선판은 광동판을 모본으로 하여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우리가 ‘캘리포니아 섬’의 관점으로 천하전여총도를 바라볼 때 우선적으로 인지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극대륙이 발견되기(1820년) 이전의 남극대륙이 그려진 지도가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1929년에 발견된 피리 레이스 지도를 제외하곤) 20C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라는 사실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학문의 보편화에다, 학문세계의 확장, 대중매체의 발전 등에 힘입었을 것이다.

더불어 캘리포니아 섬이 그려진 지도들의 존재사실이 동양에까지 알려진 것은 위의 예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경로를 거쳤다는 점이다.

만약 천하전여총도가 20C 초반이나, 혹은 그 이전에 누군가에 의한 위작이라면 도대체 그 인물은 어떻게 당시에 쉬이 알 수 없는 여타 정보들을 죄다 모을 수 있었겠는가?

혹시 중국의 그 위작자가 곤여전도 광동판(1856년)을 모본으로 한 것이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가정할 땐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만약 위작자가 곤여전도(구형지도)를 모본으로 삼았다면 당시의 뛰어난 지도제작 수준을 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천하전여총도에 1763년이란 제작년도를 정하기 위해 18C 여타 지도들의 제작수준도 확인해 봤을 것이다. 어쩌면 마테오리치나 알레니의 곤여만국전도와 만국전도(모두 평면지도)를 접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하전여총도의 제작수준이 백여 년 전인 17C 초의 이들 지도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조잡한 수준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작으로서 유일하게 설명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것은 위작자가 1418년의 지도를 필사했다고 밝힌 만큼 그럴 듯 하게 하기 위해 15C 초 수준을 감안하여 제작했을 경우이다.


 

 

출처 :

 

잃어버린 역사,보이는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