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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진실은?

영지니 2010. 11. 19. 18:39

 

 

백제의 진실은?  

[1] 중국 본토에 식민지를 경영한 백제  

우리 역사 상 가장 활발했던 국가 백제...


백제는 강력한 해상력을 바탕으로 중국과 일본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더군다나 백제의 초기 건국지는 요서 일대인 대방고지로, 백제는 자신들의 옛 땅이었던 대방고지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그래서 중국 내에 세력의 공백이 생기가만 하면 여지없이 그 곳에 진출하여, 기존 세력 위에 백제에서 진출한 세력을 합해 식민지를 경영하게 된다. 중국 본토에 건설한 백제의 식민지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요즘 인정 받기 시작한 요서 · 진평을 포함한 '하북성 지구'로 산동반도를 포함한 지역이다. 다른 하나는 양자강구 좌우 양안 지방이다. 중국의 『구당서』 「백제전」에 "백제국은 서쪽으로 바다 건너 월주에 이르고 남쪽으로 바다 건너 왜국에 이르며, 북쪽으로 바다건너 고구려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 「백제전」에도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 경계는 왜, 북쪽경계는 고구려로서 모두 바다를 건넌다"라고 하여 백제가 중국의 요서 및 월주 그리고 왜국(일본열도)을 식민지로 거느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은 사실이 전해지지 않았을까? 그건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가 백제의 역사서를 불태웠고, 또한 일제강점 시대 일제가 이와 같은 사실을 은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백제가 넓은 중원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것이 증명된다.


1. 요서 · 진평의 백제 식민지

하북성 지구를 포함한 중국 동북부 발해만 지방은 원래 백제국의 출발지이다. 백제 고이왕 시기에 낙랑번지 점령, 분서왕이 오늘날의 천진 지방인 낙랑 서현 지방 점령, 비류왕 연대에 요서 · 진평지구 점령, 동성왕의 산동반도 지역 점령이 계속 이루어졌고, 중국 남북조 시대에 고구려에 복속된 북위에 대항하는 남조의 남제를 실질적으로 조종하는 종주국의 역할을 백제가 행사하였다. 그것은 남제 및 북위의 중요한 요충지인 산동반도 및 양자강구를 백제가 점령하여 식민지화했기 때문이다.

이것의 증거가 되는 기록으로 중국 『진서』 「모용황전」에는 "고구려, 백제, 우문, 단부의 무리들은 모두 병세지도(並勢之度)"라 하여 백제가 한반도의 백제가 아닌 것을 분명히 하였고, 『송서』 「백제전」에는 "요서를 차지한 백제의 치소(治所)는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혀 놓았으며, 『양서』 「백제전」에는 "백제는 원래 고구려와 같은 뿌리로서 요동 동쪽에 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 역시 요서를 점거하여 요서, 진평 두군을 두었다. 백제의 자치군 이었다"라고 하였고, 「자치통감」에는 "전연의 수도에 강제로 옮겨진 고구려와 백제의 사람들이 너무 많아 걱정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통전」 「백제전」에는 "원래 백가제해라는데서 백제라 부르게 되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 두 군을 영유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지금의 유성과 북평 사이다"라 기록하여 이를 또한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이 곳 식민지는 백제가 멸망당할 때 까지 거의 300여 냔간이나 막강한 중국 세력이라고 허위를 일컬어 왔던 북위 등을 제압학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2. 월주지방의 백제 식민지

백제는 비류왕 때 중국 양자강구 좌우 양안 지방을 점령하여 이후 250여 년간이나 통치하였다. 다른 사서에는 이러한 사실이 전하지 아니하나 중국의 역사서인 『주서』 「백제전」과 『북사』 「백제전」에는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주서』 「백제전」을 보면 "自晋 宋 齊 梁據江左 後魏宅中原"라 기록되어 있고, 『북사』 「백제전」에는 "自晋 宋 齊 梁據江左右"라 기록하여 백제가 晋(서진 시대)나라 때 양자강 연안을 점령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당나라에서 부성군 태수로 벼슬한 최치원이 당조의 태사시중에게 제출한 상소문에도 이러한 사실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을 보면

"백제 전성시대에는 강병이 100만이었다. 남으로 월을 치고 북으로는 유, 연, 제, 노를 경계로 하였다. 커다란 중원국가 건설을 추진하였다.

라 하여 백제의 양자강 유역의 점령의 근거로 활용된다. 그리고 이 곳 월주는 이후 당, 송을 거치면서 중국의 대표적 항구였던 항주로, 산동반도의 적산포와 함께 한반도와 일본으로 출발하는 중국의 유일한 무역항으로 역할하였으며 이후 동북아 해상권을 장악하는 전진기지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재당 신라인 내지는 당인, 고려시대에는 고려인 내지는 송인으로 기록되는 이 곳의 백제인은 그 당시 유일무이한 무역상들로, 이들을 통하지 않고는 무역은 물론 바다에서의 전쟁 등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 곳 양자강 양안 항주만의 무역지인 주산군도는 백제의 점령 이후 지속적으로 동북아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장보고의 완도에 똑같은 법화사, 상왕산, 관음암, 조음도, 신라국이 있듯이, 이곳 주산군도의 중심지인 보타도에도 법화동, 상왕봉, 관음사, 조음동, 신라초가 지금도 존재하고 있어 이곳에 백제인의 해상 세력권이 있었음을 강력하게 증명해 준다. 그런데 통일신라 시대 동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한 장보고가 여러 각도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그것 중의 하나가 '장보고는 우리가 이제껏 알고 있었던 사실대로 통일신라에 의해 해상세력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중국의 동부 · 북부 해안지방 및 동북아 해상권은 백제인(이 시기에는 재당 신라인)이 장악하고 있었고, 반면 통일신라는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당나라는 통일 신라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하는 목적과 중국 내에서 중앙  통치의 힘이 미칠 수 없었던 중국 내의 백제 영향권 지역과 해상권을 끌어들여 조세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중국 내의 백제 영향권 출신인 장보고를 신라에 중용하라 강요하였다는 학설이 제기 되었다. 이러한 여러 사실로 보아 통일신라시대까지도 중국 동부 빛 북부 해안은 우리민족(백제인:재당 신라인)의 절대적인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며, 해상권 또한 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에 통일신라에 반기를 든 고려 건국의 시조인 태조 왕건은 이 세력에 기반을 둔 재당 신라인으로, 왕건도 이 곳의 강력한 지원하에 집권이 가능하였을 정도로 그 영향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라의 통일에 의한 이들 백제인의 외국인화와 이들 백제인이 해상권을 장악함에 따른 국내의 향력, 사치의 억제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신라는 쇄국정책을 펴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동북아의 해상권을 거머쥔 장보고가 멍청한 신라 정부에 의해 암살당함으로써 우리민족은 영원히 동북아 해상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참고: 한국 고대사 다시 쓰여져야 한다.
        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1500년


[2] 일본은 백제의 식민지였다.

1. 백제의 일본 지배


아직도 우리의 역사 교과서인 국사책에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끼친 영향으로 문화적인 것만을 기술하고 있으니, 이는 엄청난 축소 왜곡인 것이다. 일본의 건국신화인 '천손강림 신화'는 사실 한반도인인 우리 민족이 일본 열도를 정복하는 사실을 신화로 꾸민 것이다. 일본의 正史인 『일본서기』 및 『고사기』에는 일본의 건국신화 및 고대국가 건립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중 일본의 건국신화는 '신대 상 · 하편'에 기록되어 있는데 '신대 상'은 1)신대 7세, 2)팔주기원, 3)사신출생, 4)서주맹약, 5)보경개시, 6)보검출현으로 되어 있고, '신대 하'는 천손강림 등 3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건국신화 중 '신대 상'-2)팔주기원 편에 '담로'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담로는 백제의 통치기구로 일본국 기원은 담로, 즉 백제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일본의 천황이라 일컬어지는 왕들 전부 우리 한민족의 국가인 고조선 및 부여, 백제, 가야, 고구려, 신라라는 사실은 현재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요즘 일본 천황가에서 자신들의 뿌리가 백제라고 밝히는 것을 보면, 백제가 일본에 끼친 영향력은 막대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식민지 경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삼국시대 말기 일본 열도 국가의 왕이 백제의 왕족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요, 일본의 정사인 『일본서기』는 주객만 전도되었을 뿐 백제의 일본통치사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국에 대한 일본 왜국의 비교적 대규모의 군사적 지원이 세 차례 있었는데,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백제 침공시, 백제 성왕시의 위기, 그리고 백제 멸망 당시가 그것으로, 만약 왜(일본)가 백제의 식민지가 아닌 동맹관계였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특히나 663년 주류성의 함락으로 백제 부흥운동이 막을 내리자 후퇴하던 왜군들이 "아, 아, 주류성이 함락되었구나. 이제 조상의 땅을 잃었으니 어찌 찾아 뵈리오"라고 울부짖은 걸 볼 때 당시 왜국의 뿌리가 백제였음을 확인해볼 수 있다.  이처럼 백제의 일본통치는 강력한 것으로 본국인 백제가 위기에 처하거나 어려울 때면 언제든지 왜에게 군사적 징발을 강요하였고, 비류백제의 통치기구인 담로에 의하여 직접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는데, 이와 관련된 대표적 유물 중의 하나가 바로 '칠지도'이다.

이와 같은 군사적 징발은 물론, 자기 종주국과 적대적인 나라라는 이유로 일본은 해적으로 가장하여 수없이 신라 해변을 강탈하였다. 이는 역사서에 명백히 나와 있는 것으로 신라는 수 많은 왜구(왜구가 일본에서 출발한 왜인이 아니라 중국 본토 舊 백제의 식민지에서 출발한 백제 유민이라는 설도 있음)의 침탈을 받은 반면, 백제는 왜구의 침탈을 받았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는 바 바로 왜에 대한 백제 통치의 작은 증거가 되는 셈이다.

이처럼 왜는 백제의 식민지로서 자연스런 망명지가 되고, 일시 피난처도 되었다. 백제 본국의 세력다툼을 피하여 일시 일본으로 건너가 힘을 기른 후 다시 백제에 돌아와 정권을 잡은 동성왕, 무령왕이 대펴적인 사롕다. 백제 멸망시에는 백제 무왕의 딸이자 의자왕의 누이인 일본 열도의 제명여왕은 백제의 멸망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다하여 백제에 원병을 보내기 위하여 직접 진두 지휘하다가 사망하고, 제명여왕의 아들이 뒤를 이어 천지왕이 되자 일본 열도의 나라 명을 '일본'이라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 열도에 대한 우리 민족의 지배는 단군조선 멸망과 함께 이주를 시작한 단군조선 유민이 그 기반이고, 이후 가야인의 규슈지방 이주에 의하여 기반이 형상된 후, 백제의 담로체제를 통해 일본 열도를 고대국가로서 식민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아스카(지금의 오사카)를 중심으로 고대 국가의 틀을 마련하고 고대 문명을 이루게 된다. 통치자의 상징인 백제식 칼과 금동제 신발 등의 출토는 백제에 의한 직접 통치가 이루어졌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2. 일본 칠지도의 진상 및 칠지도에 숨어 있는 한일관계사

일본이라는 나라가 국호를 '日本'이라고 칭한 시기는 7세기 말 경이고, 그 전에는 '倭'라고 불리운 여러 지방정권 국가 단계였다. 그들의 종주국이자 모국인 백제가 멸망하자 비로소 한반도와의 단절을 꾀하고, 독자적인 나라를 꾸미기 위해서, 한반도 특히 백제에 종속적인 역사에서 탈피하고자 일본의 중앙통일정권이 완전 허구로 꾸민 역사서가 『일본서기』라는 것은 주지없는 사실이다. 나라의 정통성과 통일성을 필요로 한 명치유신(메이지 유신) 이후에 나라의 주체성과 역사성을  억지로 조작한 일본서기는 왕권강화와 군국주의에 의한 팽창주의에 적당한 근거가 되어, 이후 일본은 『일본서기』에서 자기의 역사 및 우리의 역사를 억지로 꿰맞추는 제2의 역사 왜곡을 시행한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광개토태왕릉비문의 변조'와 '칠지도에 대한 왜곡 작업'이다.

일본 건국신화에 의하면 사신(四神) 중 하나인 스사노오(소전오)가 8개의 머리를 가진 뱀을 죽이고 그 뱀 속에서 끄집어낸 보검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이 보검은 천황가에 대대로 내려와 천황의 상징물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환란 중에 그 보검을 분실하였는데, 천황가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명치시대에 이 보검을 열망하였다. 그러던 중 그 보검이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다는 전설을 듣고는 이것을 찾으라는 밀명이 천황가로부터 떨어졌다. 여기서 찾은 것이 다름 아닌 칠지도였다. 그러나 이를 찾은 간마사토모는 여기에 새겨진 명문이 자기들의 필요성과는 엄청나게 틀리다는 것을 알고 긁어 못쓰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는 오히려 엉뚱한 해석을 내려 백제가 왜에 종속되었다고 주장하여 그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현재 많은 일본학자는 물론 우리나라 및 중국의 학자들에 의하여 기존에 주장하여 온 이러한 주장은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그것은 자신들 편의대로 끊임없이 고집하는 주장으로 아직도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 칠지도는 일곱 개의 가지가 있어 칠지도라 일컫게 되었는데, 이 일곱가지는 백제의 일곱 나라 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랍게도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그 명문 중 '태화'아는 연호가 문제되었는데, 예전의 일본인 학자들은 이를 중국 동진의 연호 '태화'라고 주장하였다. 즉, '백제의 종주국인 동진의 황제가 왜왕을 위해 만들어 백제왕을 통하여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다'라고 해석하여, 왜의 백제에의 종속국임을 부정하게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현재 일본의 고대 역사관은 그들의 고등학교 등 국사 교과서에 확연히 드러나 있다. 그들은 『일본서기』의 편찬과정에서 백제 등 우리나라와의 종속관계를 극력 부정하고, 반대로 중국과의 직접 교류를 강조함으로써 애써 일본의 독립성과 주체성을 강조하는 이중적 역사관을 가지게 된다. 즉 '동북아의 문화 및 군사대국이었던 중국과는 문화교류가 있었지만, 한반도로부터는 일체 유입이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반도와 동등 내지는 우월하다'라고 교묘히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은 『일본서기』를 쓸 당시 일본의 역사가 백제에 의한 식민지 통치 역사였으므로 이를 부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백제의 한반도와 일본 열도 내에서의 역사적 활동을 일본의 활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즉 백제가 가여 지방을 지배하였던 것을 일본이 가야를 지배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또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은 한반도 국가들보다도 나은 국가임을 강조하고자 지속적으로 역사를 왜곡해 정통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침략행위로 많은 아시아 민족을 고통과 참담 속에 몰아넣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대동아 전쟁이 오히려 아시아 국가들을 서구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해방시키고, 근대화 발전을 이루게 한 전쟁이라고 합리화시키면서 끝내 반성을 안하는 일본의 민족성은 이러한 역사성에 의거한 것이다. 이처럼 일본민족은 지속적으로 역사를 왜곡시키는 불가사의한 민족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경제대국, 소위 말하는 선진 강대국이지만 국가의 대외정책, 국제사회 기여도와 국가이념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국제 사회로부터 외면당함은 물론, 일본의 군비확장에 대해 모든 아시아 국가가 우려하고 있다. 일본이 그만한 힘을 가진 나라로서 값어치를 못하고 덩치만 커서 위험한 어른 대접 밖에 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래부터 일본은 역사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며 왜곡시키는 민족이기 때문에 그 국가 및 민족 이념의 근원(根原)이 없다. 때문에 아무리 다른 국가들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여도 시정되지 않는다. 왜곡하는 역사관이 그들의 원초적인 역사관이기 때문이다.

칠지도가 왜국에 전해진 시대는 백제가 중국 본토 동북부 해안 등을 식민지로 두어 동진이 백제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던 시기이다. 그리하여 이같은 주장은 허무맹랑할 수 밖에 없으며, 일본의 전통적인 역사관을 인식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사안이다. 더군다나 이 칠지도를 처음 발견하여 왜곡된 설을 전파한 간마사토모는 일본 군국주의 시기에 역사왜곡에 깊이 간여한 인물로서, 그러한 이가 일본에 치욕적인 칠지도의 명문을 그대로 놓아둘 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하나 살펴볼 것은 전통적인 일본 왕가의 보검 및 그 유래 또한 한반도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건국신화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한반도인의 일본 정복사를 신화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여기의 소전오와 검은 한반도인, 특히 가야인의 일본 열도로의 철 문화 전래 사실을 신화적으로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일본은 근본적으로 역사에 왜곡을 가하고, 또 다시 근세에 이르러 왜곡을 가하게 되는 역사 왜곡의 전통성을 보여주고 있다. 정확히 말하여 이 칠지도는 '백제국 태자가 왜왕을 위하여 칼을 만들어 하사한 것으로, 백제국의 왕자가 왜왕과 동격 내지는 상급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겠다. 그것은 태화라는 연호와 아울러 태자라는 단어에 대한 것이다. 경주 출신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에서 신라의 역사를 중요시하면서 고구려 및 백제의 역사를 깎아내리는 작태를 행한 것은 주지의 사실로, 김부식은 신라의 연호 사용은 전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연호 사용은 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대국가에서 연호의 독자적 사용은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독립성을 나타낸 것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과 대등 내지는 우월한 관계에 있었던 삼국시대 및 그 이전에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 이후 통일신라, 근세 조선에는 이러한 사실이 없다가 대한제국의 성립으로 황제로 칭하는 시기에 연호를 사용하게 된다. 삼국시대에는 독자적인 연호를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사용하고 있었다. 광개토태왕 비문에는 '영락'이라는 연호와 칠지오에 나타난 백제의 '태화'라는 연호가 있으며, 이외의 고구려 태조의 연호 융무, 장수태왕의 건흥, 평원왕의 대덕, 영양왕의 홍무, 보장왕의 개화란 연호가 기록상 확인되고 있다.

일본은 말도 안되는 지방정권의 왕들을 꿰어 멎추어 천황이라 하였다. 엄연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고구려, 백제를 중국에 복속국화한 김부식의 작태를 이어받은 우리의 역사관이 너무도 개탄스럽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역사서술의 기술 상 중국인들은 자기들의 통일된 국가의 왕을 '황제'라 서술하고, 그렇지 못한 국가의 수장을 '왕'이라 불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고대 국가는 중국에 예속되었기에 왕이라 칭한 것이 아니라 통례상 '왕'이라 서술한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왕들은 황제라 칭하고, 반대로 일본의 천황은 왕이라 칭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3. 무령왕릉에 나타난 일본에 대한 지배 증거

무령왕릉의 발굴은 그야말로 동북아 삼국의 역사 정립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던 역사적 발굴이었으나 그만큼 논란도 많았고, 졸속 발굴과 발굴 결과의 해석에 대한 비판이 상당히 많았다. 여기서 무령왕릉의 역사적 의의에 대하여 살펴본다.

① 무령왕의 관으로 사용한 관목은 일본산 금송

무령왕의 관목을 분석한 결과, 일본 내 백제의 본거지인 오사카 부근 와카야마현 고야산의 금송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고야산 근처의 오사카 하비키노 포도밭에서 소위 관음청이라는 백제 양식의 횡혈식 고분이 발견되는 등 이 근방에는 무려 약 1000여 개의 고분이 있다. 이 고분들의 부장품 중에는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청동 다리미와 똑같은 것들이 있었고, 토기 또한 백제의 것이며 벽화에는 머리에 깃털을 꼽고 말을 탄 인물상인 북방 기마민족상이 나타나는 등 모두가 아예 한반도 백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인근에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올 때 각라도에서 무령왕을 낳은 곤지왕을 모시는 아스카베 신사가 있는데, 그 당시에는 최대의 규모였다고 한다. 일본의 이 지방에서 특한되는 금송으로 관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 곳이 백제의 통치 지역이라는 확실한 증거인 셈이다.

② 금동신발은 백제의 통치기구인 '담로제'의 증거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금동제 신발과 똑같은 것이 익산 입점리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이 고분은 왕급 무덤으로 역시 5세기 중엽의 백제 양식인 횡혈식 석실고분이다. 또한 일본의 구마모토현 후나야마의 6세기 백제 양식 고분에서도 무령왕릉의 그것과 똑같은 금동관모 및 금동신발이 발견되었다. 중국의 사서 『양서』 「백제전」에는 "백제는 22개 담로를 두어 전체 영토를 통치하였는데, 왕의 자제 및 친척을 보내어 다스린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백제 담로제에 의한 통치의 또 다른 확실한 증거가 된다. 또한 중국 남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흑치상지 묘비에 "흑치상지는 원래 백제왕족인 부여씨였으나 흑치지방의 수장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흑치로 성을 바꾸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흑치 지방은 남양군도에 있는 지명으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일본에서 4천리 밖에 흑치라는 나라가 있다"라고 하여 이를 증명하고 있다. 여기서 '흑치'라는 지명에 대하여 "원래 양자강 부근에 있었는데 옮겼다"는 설이 있다. 이것이 맞는다면 흑치의 위치는 동남아가 아니라 양자강 양안(월주, 주산부근)으로, 그 곳을 백제가 지배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이와는 별도로 '담로'라는 말이 한반도는 물론 중국 동북부 및 남부와 멀리 동남아시아에서까지 나타나는 것을 보면, 백제가 중국,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에도 '담로'를 두어 통치하던 해상 대제국이었다는 사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참고: 한국 고대사 다시 쓰여져야 한다.

 

출처 ; http://www.sunslif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