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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최익현(崔益鉉)先生 墓所

영지니 2010. 12. 8. 17:05

참 선비 면암 최익현(崔益鉉)先生 墓所

참 선비 면암 최익현(崔益鉉)先生 墓所

 

*소재지 :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1-1 <기념물 제29호> 

예산에서 광시, 청양방향으로 예산저수지를 지나 광청못미처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조선 말기의 巨儒이자 의병장인 면암 최익현 선생(1833~1906)의 유택 푯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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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선생 묘(崔益鉉先生墓)는 본래 1907년에 논산군 노성면(魯城面)의 국도변에 마련했었다. 그러나 참배객이 끊이지 않자 일제의 명령으로 1910년에 오지인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로 이장되었다.

최익현 선생의 묘 좌측으로는 건립된 비석은 직사각형의 화강암으로 된 대좌와 오석(烏石)의 비신, 옥개형의 화강암으로 된 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로 구성되었다. 비신의 전면에는 ‘면암최익현지묘,정부인청주한씨부좌(勉庵崔益鉉之墓, 貞夫人淸州韓氏附左)’라고 음각되었으며, 묘의 앞에는 상석과 높이 1m의 석주가 좌우에 1개씩 있다.

 

홍살문의 입구 전면에는 1973년 4월 9일 예산 모현사업회(慕顯事業會)에서 건립한 최익현의 춘추대의비가 서 있다.

이 춘추대의비는 화강석재의 대좌와 이수, 오석의 비신 등 3매의 별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로변의 홍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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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좌는 방형의 지대석 위에 두 단이 올려져 있고, 이 대좌 위에  면암최익현선생춘추대의비 이선근찬 김기승서勉菴崔益鉉先生春秋大義碑, 李瑄根 撰, 金基昇 書’라는 각서가 전면에 새겨진 비신이 올려져 있다.

 

春秋大義碑는 벼슬을 모두 사양하고 상소, 또 상소로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고 국가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일생을 바친  면암 선생의 당당한 기개와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투철한 정신 그의 정연한 춘추필법을 떠올리게 된다.

묘소의 주변은 보호시설을 해서 깨끗이 보호되어 있고 뒤쪽으로는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최익현 선생은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서 출생하시고 본관은 경주(慶州). 아명은 기남(奇男).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아버지는 대(岱)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문인이다.

 

 <묘소 입구의 春秋대義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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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 때 김기현(金琦鉉)에게 유학의 기초를 배우고, 14세 때부터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855년(철종 6)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으며, 이어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이조정랑·신창현감(新昌縣監)·성균관직강 등을 지냈다.

 

1866년(고종 3) 어머니 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른 후 1868년 9월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그해 10월 경복궁 중건의 중지, 취렴정책(聚斂政策)의 혁파, 당백전(當百錢)의 폐지, 사대문(四大門) 문세(門稅)의 폐지 등을 주장하며 대원군의 대내정책을 비판했다.

 

특히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해 대원군이 하야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민씨 일족의 옹폐(壅蔽 : 웃사람의 총명을 막아서 가림) 비난 상소, 병자수호조약 체결 반대 상소 등으로 제주도·흑산도 등지로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勉菴 崔益鉉先生春秋大義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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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을미사변이 발발하고 단발령이 단행되자, 상소를 통해 시폐의 시정과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진충보국(盡忠報國)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고, 일본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하다 숨을 거두었다.

제향은 모덕사(慕德祠 :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 농암리 소재)와 포천·해주·고창·곡성·순화·무안·함평·광산·구례 등에서 봉향되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묘소의 全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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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선비정신>

우리 역사상 가장 의로움으로 살다간 여러분들 중에 첫번째는 조선 말기의 면암(勉庵)최익현(崔益鉉1833~1906) 선생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생은 지부복궐상소(持斧伏闕上疏)라 하여 옆에 도끼를 지니고 궐문 앞에 꿇어 앉아 상소를 올리는, 즉 상소를 가납하지 않으면 도끼로 죽여달라는 그런 결연한 태도로 상소를 하였다.

특히 면암 선생은 기울어가는 조선의 마지막 역사의 고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고 또 좌절을 느끼기도 했던 지조의 선비라 생각한다. 큰 의리(義理)와 충의(忠義)를 몸소 행동으로 보인 유림의 거벽이기 때문이다. 고종의 생부로 천하의 독선과 위세를 남김없이 휘두르고 있는 흥선대원군에게 맞서 그의 실정을 따졌고, 사림(士林)들에게 참 선비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한 주인공 이었다.

 <묘소 石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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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1905년 치욕의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최익현 선생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실천하여 참 선비로서의 도리를 몸소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호남의 제자들을 찾아가 위기에 처한 종사를 구할 것을 호소하며 800여명의 의병군을 모아 스스로 의병대장이 된다.

그리하여 태인, 곡성, 순창 등을 중심으로 크게 위세를 떨치나 1906년 교전해야할 상대가 조선군 진위대임이 확인되자 조선인끼리 싸울 수 없다고 하여 의병해산을 명하고 관군에 투항  서울로 압송된다.

조선통감부는 최익현을 조선 땅에 두고서는 감당하기어렵다고 판단 약식 재판에 회부하여 대마도(對馬島)로 강제압송(押送)하기로 하고 이곳에 유폐(幽閉)된다.

 

최익현 선생은 대마도에 도착하면서부터 ‘이미 이지경에 이르러 너희들의 음식을 먹고 너희들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의(義)가 아니니 지금부터 단식(斷食)하겠다,’라고 저항하면서 임금의 분발을 촉구하는 직언을 한다.

선생은 정도를 지키고 이단을 물리치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정신을 말로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앞장서 행동으로 보인 점에서 문약(文弱)한 지식인의 귀감(龜鑑)이라 아니할 수 없다.

 <소박한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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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남긴 마지막 유시(遺詩)>

"기첨북두배경루(起瞻北斗拜瓊樓) 
일어나 북두를 우러르고 임금님 계신곳에 절하고
백수만삼분체류(白首蠻衫憤涕流) 
흰마리 오랑캐의 옷자락에 분한 눈물 쏟아져 흐른다네.
만사불탐진부귀(萬死不貪秦富貴) 
만 번을 죽는다해도 부귀를 탐하지 않으리
일생장독노춘구(一生長讀魯春秋) 
평생을 읽은 글이 노나라의 춘추라네."

마지막 구절 “평생을 읽은 글이 노나라의 춘추라네”라는 대목에서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역사에 대한 외경심(畏敬心)이 있었기에 이런 자부심이 있는 것이아니겠는가.

 <勉菴선생과 貞夫人 淸州韓氏 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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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선생은 주위의 회유를 물리치고 결연한 의기로 단식(斷食)을 단행하나 단식 중 일본군 수비대장이 ‘선생의 식사는 조선의 국왕(國王)이 보내오고 있다’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약해져 임금의 어명(御命)은거역할 수 없었기에 단식을 중단할 수 밖에... 74세 노구의 옥중 생활은 무리였기에 그로 인해 병마(病魔)에 시달려 결국 풍토병(風土病)에 걸려 유배 4개월만에 순사(殉死)한 것이란다. 그러나 선생의 죽음이 너무 극적이기에 단식사(斷食死)라 오르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게 대수인가. 선생의 정신이 그토록청정하고 의로운 것을...선생의 유해(遺骸)는 이곳 대마도 이즈하라의 수선사에서 장례를 치른 후 보름남짓 있다 부산에 도착했다 한다.

이런 치열한 삶을 사신 선생의 정신을 영원히 계승하여라****************.

 <재실과 멀리 보이는 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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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암 최익현의 유소>

유소(遺疏) 병오년(1906, 광무 10) 7월 11일 ○ 정미년(1907, 융희 1) 3월 7일에 올리다

 죽음을 앞둔 신 최익현(崔益鉉)은 일본 대마도(對馬島) 경비대 안에서 서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황제 폐하께 말씀을 올립니다.


삼가 아룁니다. 신이 금년 윤4월에 의거(義擧)를 시작한 처음에 대략 상소로 아뢰었는데, 그 상소가 진달되었는지의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거사를 잘못하여 마침내 체포되는 욕을 당하여 7월 8일에 일본 대마도로 압송되어 현재 경비대 안에 수감되었습니다. 스스로 분간하면, 필경 살아서 돌아갈 희망은 없습니다. 지금 이놈들이 처음에 강제로 신의 머리를 깎으려 하였고, 끝에서 다시 교활한 수단으로 달래며 말을 하니, 놈들의 심사를 측량할 수 없으니 반드시 죽이고야 말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이 여기에 온 뒤로 한 술의 밥이나 한 모금 물도 모두 적의 손에서 나왔으므로, 설령 적이 신을 죽이지 않아도 신이 차마 구복(口腹) 때문에 자신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드디어 식사를 거절하고 옛사람의 ‘자신을 깨끗이 하여 선왕(先王)에게 부끄러움이 없다.’는 의리를 따르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신의 나이 74세이니 지금 죽은들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치지 못하고 원수를 없애지 못하였으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도로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4천 년 화하(華夏)의 정도(正道)가 흙탕에 빠지는 것을 붙들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에 있는 선왕의 백성이 어육이 되는 것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신이 삼가 헤아리건대, 왜놈은 멀어도 4, 5년 사이에 반드시 망할 징조가 있는데, 우리가 대응할 방법을 다하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이제 청국과 러시아 두 나라가 밤낮으로 이놈들에게 이를 갈고 있고, 영국과 미국 여러 나라도 이놈들과 반드시 잘 지내는 것만은 아니니, 조만간 틀림없이 서로 공격할 것입니다. 또한 전쟁을 치르면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바닥나서 민중이 그 윗사람을 원망할 것입니다. 밖으로 틈을 엿보는 적이 있고 안으로 위를 원망하는 백성이 있으면 그들이 망하는 것은 발을 들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폐하께서는 국사(國事)를 다스릴 수 없다고 하지 마시고 마음을 분발하여 성지를 넓게 세워서 퇴폐함을 진작하소서. 답습하는 습관을 진작하고 참을 수 없는 것은 참지 말며, 믿을 만하지 않은 것은 믿지 마소서. 헛된 위엄에 지나치게 겁내지 말고, 아첨하는 말을 솔깃하여 듣지 말며, 더욱 자주하는 정신을 굳게 지키고 의뢰심을 영원히 끊고 와신상담하는 뜻을 새겨 자수(自修)하는 방법을 다하소서.

 

그리하여 영재와 준걸을 불러들이고 군인과 백성을 어루만지며 양성하여 사방 형편을 관찰하고 중용을 취하여 일을 하신다면, 이 나라 백성은 진실로 임금을 높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며, 선왕의 5백 년 성덕과 지선의 혜택이 마음에 젖어들 것이니, 어찌 폐하를 위해 죽을힘을 다해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지 않겠습니까? 그 동기는 다만 폐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폐하께서는 신이 죽음을 앞두고 하는 말이라 해서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으신다면, 신은 지하에서 또한 두 손을 모아 기다릴 것입니다.


신은 죽음에 임해서 정신이 어지러우니, 하고 싶은 말을 일일이 진달할 수 없어서 이것만 써서 신과 함께 갇힌 전 군수 신 임병찬(林炳瓚)에게 부탁하고 죽으면서, 그에게 때를 기다려 올리게 하였습니다. 삼가 빌건대, 폐하께서는 어여삐 여기시어 살펴 주소서.
신은 울면서 영결하는 심정으로 삼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아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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