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의 병진년화첩)
▲ 김홍도, 병진년화첩 중 옥순봉. 조선 1796년, 31.6 x 26.6cm 삼성미술관 리움
▲ 김홍도, 병진년화첩 중 도담삼봉. 조선 1796년, 31.6 x 26.6cm 삼성미술관 리움
▲ 김홍도, 병진년화첩 중 유조도(버드나무 위의 새). 조선 1796년, 31.6 x 26.6cm 삼성미술관 리움
작아도 명화는 명화다.
중국 명나라 문인 동기창은 "소중현대(小中現大)"라며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 있다"라고 했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단원 소장품 특별전은 작은 기획전이었지만
모처럼<병진년화첩, 보물 제782호>이 전시되어 나를 오랫동안
진열장 앞에 붙잡아놓았다.
단원 김홍도의<병진년화첩>은 그의 나이 52세(1796년)에 그린
산수화 10폭, 화조화 10폭을 두 첩으로 묶은 것이다.
그중에는 도담삼봉(島潭三峰), 사인암(舍人巖), 옥순봉(玉筍峰)등
단양의 풍광을 그린 것이 많다. 이는 단원이 3년간 단양 옆 고을인
연풍의 현감을 지냈기 때문이다.
단원이 연풍현감으로 나간 것은 정조의 어진을 제작한 공으로
받은 벼슬이었다. 그러나 단원은 풍류 화가였지 행정력을 갖춘
인물은 아니었다. 결국 임기 말년에 "연풍의 행정이 해괴하다"는
보고가 있어 관찰사의 감사를 받고 끝내는 파직되고 말았다.
그때의 일을<일성록 日省錄>에는 "단원은 천한 재주로 현감까지
되었으면 더욱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 동네 과부 중매나 일삼고
토끼 사냥을 간다고 병력을 동원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만이 파직 이유라면 단원으로선 좀 억울한 면도 있어 보이지만,
이로 인해 그가 모처럼 자유인이 되어<병진년화첩> 같은 명화를
남기게 된 것은 한국 미술사를 위해서는 오히려 다행한 일이다.
평민으로 돌아온 단원은 이때부터 맘껏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다.
더 이상 초상화나 기록화를 제작하는
궁중의 회사(繪事)에 불려 나가는 일도 없었다.
때마침 단원은 50대에 접어들면서 원숙한 필치를 구사하고 있어
파직한 해에는<을묘년화첩>, 그 이듬해에는<병진년화첩> 같은
명화를 그렸다. 이때부터 단원의 화풍은 확연히 달라졌다.
40대까지만 해도 그의 그림엔 화원다운 치밀함과 섬세함이 있었다.
그러나<병진년화첩>에 이르면 대상의 묘사에 생략이 많고 붓길이
빠르며 강약의 리듬을 능숙하게 구사하여 대가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연풍현감 해직 이후가 사실상 단원 예술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옥순봉>에서는 화강암의 준봉이 절리(節理)현상으로 인해
수평수직으로 결을 이루는 것을 그의 독특한 준법(峻法)으로
묘사하면서 그 아래로 안개 낀 강변과 강 위를 유람하는 배 한 척을
그려넣어 짙은 시정이 화면에 가득하다.
필치에 강약이 리드미컬하게 구사되었고 산봉우리와 산자락에
적당히 아름다운 소나무들을 배치하여 조선 산수의 그윽한 멋을
한껏 풍기고 있다.
<도담삼봉>은 부감법으로 위에서 내려다본 시각으로 구성했는데
여기에 강한 동세를 곁들여 도담삼봉이 사선으로 치닫는 듯하다.
헬기를 타고 지나가면서 영상으로 잡은 듯한 대담한 구도의 변형이 있어
차라리 현대적 구도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면서도 강 안쪽과 강 건너편 그리고 먼 산을 적절히 배치하여
우리 산천의 온화한 맛을 실수 없이 담아내었다.
<버드나무 위의 새 (柳鳥圖)>는 더욱 현대적인 시각 구성을 보여준다.
흐드러진 갯버들 가지에 새 한 마리가 물가를 응시하고 있는데
냇물이 대각선으로 급하게 흐르다가 냇돌과 어우러지면서
여울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대담한 생략과 변형에서 우리는 단원의
대가다운 능숙한 면모를 엿보게 된다.
<병진년화첩>에서 본격적으로 구현된 단원 산수화와
화조화의 특징은 어떤 특수한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소재를 택하면서도 우리 산천의 아늑하고 편안한
모습을 한 폭의 서정적인 공간으로 잡아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단원을 가장 조선적인 화가라고 일컫는다.
<병진년화첩>을 보면 단원의 그림은 대단히 부드럽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산이나 나무줄기를 묘사한 것을 보면 필치가 아주
거칠다는 것이 눈에 뛴다. 속도감마저 느껴지는 붓놀림이다.
이는 그의 필력이 능숙할 데로 능숙해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처럼 스스럼없는 필치가 스스럼없이 구사될 때
단원은 가장 단원 다웠다.
(유홍준의 국보순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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