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문화유산

남성의 머리치장

영지니 2013. 1. 23. 22:20

남성의 머리치장

조숙하의 초상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란 말이 있다. 신체와 터럭,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함부로 다루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공자의 가르침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유교의 가르침을 숭상했던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머리를 기르고 단정하게 묶어 치장을 하였다. 고분벽화, 풍속화 등의 회화자료에 묘사된 남성들은 뒤에서 길게 하나로 땋거나 머리를 틀어 올린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인물은 나이 어린 소년일 것이고 상투를 튼 사람은 성년임이 분명하다.

머리치장의 도구들과 사회 계층별 스타일

조선시대에는 관례를 치른 남자는 머리를 빗어 올려 정수리에서 상투를 트는데 이 과정은 남자가 성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투빗으로 흘러내리는 머리 없이 깨끗이 끌어 올려 상투를 트는데 머리를 빗을 때 이외에는 머리를 풀어헤치는 일이 거의 없어 잠잘 때에도 상투를 튼 채로 잤다. 상투는 풀어지지 않도록 동곳으로 고정한다. 동곳은 끝이 뾰족한 형태로 일반서민들은 나무나 뿔로 만든 것을 사용하였으나 양반들은 금ㆍ은ㆍ옥ㆍ밀화ㆍ산호 등의 각종 보석으로 만든 것으로 치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맨상투를 보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 하여 상투 위에 상투관을 썼다. 상투관은 상투를 덮을 만큼 크기는 작으나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장식적인 효과를 더하였다.

 

 

각종 보석으로 만든 화려한 동곳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상투빗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상투를 틀고 나면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머리에 망건을 두른다. 망건은 양 가장자리에 단추모양의 관자를 달아 당줄을 당겨 머리 크기에 맞게 조절하여 쓰는데 망건의 앞에는 갓을 고정시키는 풍잠을 달았다. 경제력에 따라 관자나 풍잠을 옥이나 금과 같은 고급재료로 만들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양한 형태의 상투관(출전: [머리에서 발끝까지])

망건

 

 

조선시대 남성들의 머리치장 도구 가운데 살쩍밀이라는 것이 있다. 귀밑털을 살적이라고 하는데 이 살적이 흘러내리면 망건이나 관 속으로 밀어 넣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다. 대나무나 대모, 또는 조개껍질로 얇게 만드는데 끈을 달아 휴대할 수도 있었다. 머리카락이 한 올이라도 흘러내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깔끔함이 느껴진다.

 

 

살쩍밀이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집안에 있을 때에도 머리에 관을 쓰고 있었는데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탕건은 앞이 낮고 뒤가 높은 형태로 사대부뿐만 아니라 일반서민들도 사용하던 관이다. 서민들은 탕건을 외관(外冠)으로 사용하였으나 사대부들은 그 위에 방건이나 정자관 등을 덧써서 탕건이 내관(內冠)의 기능도 하였다.

양반들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관은 정자관이다. TV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집에서 한가로이 있는 양반이나 사대부로 분장한 인물들은 대부분 정자관을 쓰고 있어 매우 익숙하게 봐왔던 관모이다. 정자관은 말총으로 산(山)자의 형태로 엮어 만드는데 1, 2단 혹은 3단으로 튀어나오도록 만들며 단수에 따라 단층정자관, 2층정자관, 3층정자관으로 나뉜다. 3층정자관은 높이가 약 30㎝정도로 꽤 높으며 하늘로 솟구치는 듯한 생김새가 상위계층의 권위를 나타내고 있는 관모이다.

 

 

탕건

2층정자관

 

 

방건은 형태가 사각형으로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1881년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 조숙하의 초상화에는 청색 학창의를 입고 방건을 쓰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방건 안에 망건과 탕건을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방건은 양반뿐만 아니라 서민들도 사용했던 관모로 양반들은 탕건과 함께 겹으로 착용하기도 했으나 서민들은 방건 하나만을 쓰기도 했다.

조선 후기 문신인 신임(1639~1725)이 81세 되던 해에 그린 초상화를 보면 옥색의 직령(直領)을 입고 상투관에 와룡관을 쓴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망건은 표현되어있지 않아 상투관을 쓰고 바로 와룡관을 쓴 것으로 보인다. 와룡관은 중심이 높으면서 세로골이 진 형태인데 대부분 5개의 골이 지게 되어있으며 사대부들만이 쓰던 관모로 학창의와 함께 착용하기도 했다. 제갈량의 별호가 와룡(臥龍)·복룡(伏龍)으로 그가 쓰고 다녔다는 데서 유래된 관모이다.

 

 

와룡관을 쓴 신임

복건을 쓰고 있는 임매

 

 

1771년에 한정래가 그린 임매(1711~1779)의 초상화에는 옥색포를 입고 복건을 착용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머리 부분을 살펴보면 복건 안에 상투관을 쓰고 있으며 이마부분의 흔적으로 보아 망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건은 온폭(全幅)의 천으로 만들므로 복건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는데 머리 뒷부분은 곡선으로 하고 앞단에서 귀 윗부분에 좌우 2개씩 주름을 잡되 아래 주름 속으로 끈을 달아 뒤로 돌려 맨다. 전복은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연령층에 관계없이 사용하던 것으로 관례를 치르지 않은 미혼자는 예복인 사규삼이나 전복에 함께 착용하였고 사대부나 유생들이 심의나 학창의를 입을 때에 함께 썼다.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은 장보관이라는 관모가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입제변증설(笠制辨證說)에 “상(商)나라의 관인데, 우리나라에 그 제도가 남아 사용되었다.”로 기록되어 있어 중국에서 전해진 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박물관에 남아있는 장보관들은 먼저 종이로 형태를 잡고 그 위에 검은색 모시나 삼베로 배접하여 만들었다. 호남 기호학파의 대학자인 전우(1841~1922)가 심의를 입고 망건을 쓴 위에 장보관을 착용하고 있다.

 

 

심의와 장보관 차림의 전우 초상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외출용 관모는 갓이다. 갓은 흑립이라고도 하는데 용도에 따라서는 그 색을 달리하여 붉은 옷칠을 한 주립은 융복(戎服)을 입을 때 착용하였고, 백립은 상복(喪服)에 착용하였다. 갓은 시대에 따라 모자의 높이와 양태의 넓이가 변하였는데 조선 중엽에는 갓이 커져 한 틀에 백미 한 섬을 주어야 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효종대에도 문을 출입할 때 지장이 있을 정도로 갓의 크기가 컸는데 조선시대 말기에는 비교적 작은 크기의 갓을 썼다. 갓에는 밀화나 호박, 대모 등으로 만든 갓끈(笠纓)을 가슴 밑으로 길게 늘어뜨려 그 멋을 한층 더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갓끈에 대해 수차례에 걸쳐 규제를 두었는데 [경국대전]에서는 1품에서 3품까지의 문무관리들이 상복(常服)을 입을 때 갓끈은 금옥(金玉)을 사용하라고 하며, [속대전]에서는 당상3품 이상은 자립(紫笠)에 패영(貝纓)을, 당하3품 이하는 흑립에 정영(晶纓)을 쓴다고 하였다. 연산군 8년(1502) 6월에는 갓끈에 산호, 유리, 명박(明珀)의 사용을 금하였으며, 중종 17년(1522) 8월에는 마노, 호박, 산호, 청금석의 갓끈은 당상관 외에는 일체 금하도록 하였다.

혜원의 신윤복의 ‘청금상연(廳琴賞蓮)’은 양반과 기생들이 연꽃이 만발한 연못가에서 가야금을 들으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인 것으로 보이는데 오른쪽을 바라보며 서있는 양반은 갓끈을 길게 드리워 멋을 부리고 있으며, 기생들 앞에 앉아있는 양반은 술이 취해서인지 갓끈을 왼쪽 귀부분에 묶고 있으며 신발은 벗어던지고 버선발로 앉아있다. 갓끈은 길이가 길고 재료가 보석인 만큼 가격도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갓끈은 남성들이 자신의 개성과 지위, 그리고 경제력까지도 과시할 수 있는 중요한 치장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청금상연]의 일부

기산의 [매사냥가고]

 

기산 김준근이 그린 [매사냥가고]에는 다섯 명의 남성이 매사냥하러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각기 다르게 머리를 치장하고 있다. 왼쪽으로부터 첫 번째 매잡이로 추정되는 사람은 상투를 틀고 망건을 둘렀고, 두 번째 인물은 탕건을 쓰고 있다. 세 번째 뒤를 돌아보고 있는 남자는 갓을 쓰고 있으며 네 번째 사람은 건(巾)을 두르고 갓을 썼으며 옆의 인물은 상투를 틀고 분홍색 건(巾)만을 둘러맸다. 모두 포는 입지 않고 바지, 저고리만을 입은 일반 서민층의 인물들로 외출할 때의 머리치장 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그림이다. 의관정제를 선비의 도리로 삼던 조선시대에 부유한 양반층은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다양한 형태의 관모를 썼으나 가난한 서민들은 맨상투만하고 망건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외출할 때에는 패랭이나 초립(草笠)을 쓰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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