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그르 [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 8. 29 프랑스 몽토방~ 1867. 1. 14 파리. 프랑스의 화가) 개요-자크 루이 다비드가 죽은 뒤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회화를 이끈 지도자이다. 차분하고 투명하며 정교하게 균형잡힌 그의 작품들은 당대 낭만주의 작품과 대조를 이루었다. 특히 초상화(〈오송빌 부인 Mme d'Haussonville〉, 1845)에 뛰어났는데 〈그랑드 오달리스크 The Grand Odalisque〉(1819)에서 볼 수 있듯이 선과 윤곽을 강조하는 그의 화풍은 신고전주의 미술에서는 유일한 관능성을 보여준다.
초기생애와 작품-보잘것없는 지방화가로 시작한 앵그르가 종신의원이자 여러 명예직의 보유자로서 명예를 누리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더디고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재능 및 자신이 선택한 길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처음으로 미술을 가르쳐준 그의 아버지는 장식조각가 겸 초상화가였고 음악가이자 지방 학술 아카데미의 회원이었다. 앵그르가 실제로 학교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은 6세 때였다. 그무렵 그는 크리스천 교리교육 수사회에 들어갔다. 불행히도 프랑스 혁명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그 학교는 4년 뒤 문을 닫았다. 앵그르의 공식교육은 그것이 전부였으며 갑작스러운 교육의 중단은 그뒤 평생토록 학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했다. 그는 자신이 바라는 학식을 얻으려고 끝없이 공부했다. 툴루즈가 고향인 그의 아버지는 1791년에 그를 그 도시의 미술가 친구들에게 보냈다. 어린 앵그르는 툴루즈 아카데미에 들어가 소묘·인물화·풍경화를 공부했다. 툴루즈에 머무는 동안 그린 인물소묘 가운데 〈소년 앵그르 Ingres fils〉는 그 첫 해에 그린 것으로 그의 서명이 들어 있으며 인물소묘에서 3등상을 받았다. 13~16세의 거의 3년 동안 카피탈 오페라단의 오케스트라에서 제2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앵그르는 그후에도 평생토록 취미삼아 바이올린을 연주하곤 했다. 1797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파리로 가서 신고전주의의 대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의 활기차고 유명한 화실에 학생으로 들어갔다. 2년 뒤 앵그르는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의 회화과에 들어갔다. 1800년 2월 그 학교에서 토르소 작품으로 1등상을 받고, 10월에는 '로마상'(Prix de Rome)에서 2등상을 받았다. 당대의 미술가들은 그해에 군복무를 면제받았다. 1년 뒤 그는 〈아가멤논에서 온 사절단 The Envoys from Agamemnon〉이라는 그림으로 '로마 대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무렵 프랑스의 국고는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금을 지불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정부에서는 그에게 예전의 카푸친회 수도원에 작업실을 차려 주고 약간의 수당을 지급했다. 1804년 그는 리에주 시(지금은 벨기에에 있음)의 주문으로 〈수석 집정 보나파르트 Bonaparte as First Consul〉를 그렸으며 아버지의 초상화(몽토방)와 자신의 자화상(프랑스 샹티이)을 그렸다. 그 다음해에 그는 리비에르가(家)의 인물 3명(아버지·어머니·딸)의 초상화를 완성했으며, 1년 뒤에는 종교적 색채가 짙은 감동적인 〈황제의 권좌에 앉은 나폴레옹 1세 Napoleon Ⅰ on the Imperial Throne〉를 완성했다.
성숙기-그는 법관의 딸인 안 마리 줄리 포레스티에와 약혼했는데, 그녀도 다비드의 학생이었다. 1806년 마침내 로마 체재비용을 받고 곧 파리를 떠나 그해 10월에 로마로 갔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그는 핀초 언덕에 있는 메디치 가문 소유지의 끝에 있는 산가에타노 파빌리언에 화실을 차릴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곳은 로마의 전경과 메디치 저택의 넓은 정원을 굽어볼 수 있는 멋진 곳이었다. 그가 떠난 뒤 1806년 파리에서 열린 살롱 전에 전시된 그의 그림들은 '기괴'하고 '혁신적'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그는 이 쓰라린 비평을 받아들였지만, 이에 아랑곳없이 로마의 빌라에서 4년 동안 많은 작품을 그렸으며 그 중 몇 점을 파리에 보냄으로써 그의 의무를 다했는데 그 중에는 유명한 〈발팽송의 욕녀 Valpin&sc#162l;on Bather〉도 들어 있었다. '장학생'으로서의 기간이 끝났을 때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고 그레고리아나가(街) 근처로 작업실을 옮겼다. 1807년 그의 장인은 즉시 파리로 돌아오라고 명령했으나 그가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그 명령을 거부하자 약혼은 파기되고 말았다. 앵그르는 그의 친구이자 판화가인 자크 에두아르 가토를 통해 점령지 로마를 통치하는 프랑스의 관리들과 사귀었다. 그들 중 샤를 프랑수아 마르코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에게 작품을 의뢰했을 뿐만 아니라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 당국의 요청에 따라 산타트리니타데이몬티 수도원에 커다란 역사화 〈아크론을 이긴 로물로스 Romulos Victorious over Acron〉·〈아이네이스를 읽는 베르길리우스 Virgil Reading the Aeneid〉(뒤에 수정되었음)를 그렸다. 로마 시기에는 연필로 많은 인물소묘를 그려 조금이나마 수입을 보충했는데, 앵그르 자신은 그것들을 돈벌이를 위한 것일 뿐이라고 냉소했지만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며 찾고 있다. 특히 모델의 사실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 및 그 민족성까지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데다가 아울러 선을 놀랍도록 섬세하면서도 뚜렷하게 구사하고 있다. 또한모델에게 참신한 자세를 잡아주고는 그 독특한 제스처를 날카롭게 관찰하여 개성을 나타내고 있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1813년 그는 마들렌 샤펠과 결혼했다. 그녀는 프랑스의 셰레에서 여성용 모자 상점을 경영했으며 앵그르의 초청과 앵그르의 친구이자 그녀의 사촌인 로레알 부인의 권유로 로마에 왔으며 그 이전에는 앵그르를 알지 못했다. 결혼 후 첫번째 아이가 죽은 뒤 자식은 없었지만 행복하게 지냈다.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앵그르는 수개월 동안 공식적인 주문을 받지 못하다가 새로 부임한 대사로부터 〈성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 Christ Giving the Keys to St. Peter〉(몽토방)의 제작을 의뢰받았다. 1816~17년에 앵그르는 로마에 여행온 영국인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1819년의 파리 살롱 전에 출품한 〈그랑드 오달리스크〉(루브르 박물관)·〈베뤽 사령관에게 훈장을 달아주는 펠리페 5세 Philip Ⅴ Decorating Marshall Berwick〉(마드리드의 알바 공작)·〈안젤리카를 구출하는 루첼로 Roger Delivering Angelica〉(루브르 박물관) 등은 예전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혹평을 받았다. 앵그르는 슬픔에 잠겨 예전의 작업실 동료이자 음악 친구인 조각가 로렌초 바르톨리니의 초청을 받아들여 1820~24년에는 피렌체에서 지냈다. 그는 역사를 주제로 소품을 많이 그렸으며 친구들의 청탁을 받아 인물소묘 및 초상화들을 그렸고 몽토방 대성당의 주문으로 대규모 제단화 〈루이 13세의 서약 Vow of Louis ⅩⅢ〉을 그리는 등 바쁘게 지냈다. 1824년 가을 〈루이 13세의 서약〉을 둘둘 말아 가지고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자신이 환영받을지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아 피렌체에 사랑하는 아내를 남겨두고 갔다. 그러나 그 그림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샤를 10세는 살롱 전이 끝나자 그에게 레지옹 도뇌르 십자훈장을 주었다. 그 다음해 6월에 그는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해말에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화실을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은 100명이 넘었으며, 그들 중에는 장차 그의 전기를 쓴 외젠 에마뉘엘 아모리 뒤발도 있었다. 앵그르는 엄격하고 성미가 급하고 재치가 없어 보였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서는 변함없는 우정과 존경을 받았다. 1827년 아카데미의 회원으로서 앵그르는 '프랑스 학술원'의 아파트를 받았다. 바로 그해에 그는 복잡한 구도의 야심작 〈호메로스 예찬 Apotheosis of Homer〉(루브르 박물관)을 완성했다. 1829년 그는 국립미술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고 1833년에는 교감, 1834년에는 교장이 되었다. 그러나 1834년말 살롱 전에 출품한 〈성 심포리아누스의 순교 The Martyrdom of St. Symphorien〉가 냉랭한 반응을 받자 슬픔에 빠진 앵그르는 자청하여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원장직을 맡았다. 그는 1835년 1월 학생들과 직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로마에 도착했다. 프랑스 아카데미의 원장으로 있는 동안(1835~41) 그는 건물을 복구·확장하고 도서관을 늘리고 고고학 강좌를 개설했다. 또한 많은 연주회에 참가했으며 장학생으로 온 젊은 음악가인 샤를 구노와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 이 젊은 작곡가를 그린 소묘는 현재 시카고 미술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1841년 파리로 돌아가기 전에 그는 마르코트를 위하여 〈오달리스크와 그녀의 노예 Odalisque with Slave〉를, 오를레앙 공작을 위해 〈안티오쿠스와 스트라토니케 Antiochus and Stratonice〉(1840, 샹티이 콩데 박물관)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를 위하여 〈성체를 든 동정녀 마리아 The Virgin with the Host〉(1841, 모스크바 푸슈킨 미술관)를 완성했다.
말기-파리로의 귀환은 성공적이었다. 대규모 축하연회가 열리고, 베르사유와 뇌이에서 루이 필리프 왕의 초청을 받았으며, 코메디 프랑세즈에 무료로 들어갈 수 있는 평생 무료입장권을 받아 자랑스럽게 사용했다. 1842년 오를레앙의 공작이 마차사고로 죽기 2개월 전에 공작의 초상화를 완성했다. 그 다음해에 당피에르에서 륀의 공작을 위하여 우의를 담은 2점의 대규모 패널화 〈황금시대 The Golden Age〉·〈철기시대 The Iron Age〉를 그리기 시작했다. 1849년 7월 이것이 채 완성되기 전에 앵그르 부인이 죽었다. 절망한 앵그르는 그가 맡은 일을 완성하기 위해 혼자 당피에르로 돌아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결국 1850년 륀의 공작과의 계약은 파기되었다(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 포그 미술관에 그의 서명과 '1862'라는 연대가 적혀 있는 〈황금시대〉의 축소판 복제품이 있음). 1년 뒤 그는 국립미술학교에서 사임했다. 1852년 봄에 친구들의 권유로 옛 친구인 마르코트의 친척인 43세의 델핀 라멜과 결혼했다. 첫번째 결혼과 마찬가지로 이 결혼도 행복했다(포그 미술관에 델핀[1855]과 그녀의 아버지[1852], 그녀의 어머니[1852]를 그린 소묘가 있음). 1853년 그는 시청에 있는 황제실의 천장에 〈나폴레옹 1세 예찬 Apotheosis of Napoleon Ⅰ〉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황제와 황후 및 그들의 측근들은 1년 뒤 앵그르의 작업실에 와서 완성된 작품을 구경했다(이 작품은 1871년 5월에 들라크루아의 〈평화 Peace〉와 함께 파리 코뮌의 방화로 소실되었음). 1840년대 후반과 1850년대에 우피치 미술관이 의뢰한 〈자화상 Self-Portrait〉(1858, 포그 미술관에 1859년의 개정판이 있음)을 비롯하여 뛰어난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1862년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으며(그보다 몇 년 전에 레지옹 도뇌르의 원로급에 올랐음), 1865년 '벨기에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어는 전혀 모르고 라틴어는 기초만 조금 알고 있었지만, 번역판을 통하여 고대 시인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우상인 라파엘로의 그림에 못지않게 정통했다. 개인적으로 꾸준하고 성실한 연구와 고고학자인 카트르메르 드 캥시, 데지레 라울로셰트와 같은 학자들과의 친밀한 교제는 초기 교육의 부족을 보충해주고도 남았다. 현대의 학자들은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황제의 권좌에 앉은 나폴레옹 1세〉·〈안티오쿠스와 스트라토니케〉·〈아이네이스를 읽는 베르길리우스〉와 같은 그림들의 암시와 비유 및 상징들을 밝혀내기 시작했다. 앵그르는 87세에도 여전히 과거의 거장들을 연구했으며 심지어 죽기 1주일 전에 그는 피렌체의 화가 조토의 그림을 정밀하게 모사한 마지막 소묘를 완성했다. 그의 작업실에 있는 작품들은 그가 태어난 도시인 몽토방에 유증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4,000여 점의 소묘(일생 동안의 습작과 스케치 및 시공도)를 비롯해 차분한 고전적 분위기의 〈율법학자에 둘러싸여 있는 예수 Jesus Among the Doctors〉(1862년에 완성했으나 그의 임종시 작업실에 남아 있었음)와 1835년 수정할 생각으로 다시 사들인 〈오시아누스의 꿈 Dream of Ossian〉(그의 서명과 '1813'이라는 연대가 적혀 있음) 등의 그림들이 있었으며, 또한 그가 모아 놓은 참고도서 및 미술수집품, 그의 노트, 고전적인 구도를 위한 작은 나무 모형들, 그의 유명한 바이올린 및 누드를 주제로 한 초기의 유화 습작들과 1807년 로마에서 완성한 원형의 작은 풍경화 3점 중 2점도 들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현재 앵그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평가-앵그르는 1800년 이후 60여 년 간 선과 뚜렷한 윤곽, 미묘한 농담의 선명한 색채, 주의 깊게 균형잡힌 구도를 묘사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다. 그는 그의 경쟁자이자 낭만주의 화가인 들라크루아의 그림에 나타난 극적인 명암표현과 소란한 움직임, 격정적인 화풍을 경멸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살던 시대의 신랄한 논쟁은 점점 누그러졌으며, 아직도 가끔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진정한 천재성은 더욱 뚜렷해졌다. 그가 서양미술사에서 뛰어난 대가들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가 오귀스트 르누아르, 파블로 피카소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널리 인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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