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만행(왜란)

곳곳에 남은 일제의 상흔..강제 노역의 증거 '방공호'

영지니 2019. 8. 15. 18:26
긴담모퉁이길 방공호 
         

제국주의시대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고 영구 점령키 위해 한반도 각지에 수많은 군사시설을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일제는 1937년 4월 1일 ‘방공법’을 제정했다. 
공습대피시설 건설을 법제화하고 도심지·군사기지 주변에 갱도를 뚫어 방공호로 활용하는 내용이다.
전문가들은 1940년대 태평양전쟁 말기 연합군과의 결전을 준비하며 여러 갱도를 마련, 최후 방어 진지로 계획한 것으로 판단한다.
 
인천 곳곳에는 여전히 일제강점기의 상흔이 남아 있다.
바로 당시에 건설된 방공호로 적지 않은 조선인을 강제 동원해 축조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방공호가 일본 침탈과 강제 노역의 증거로 불리는 이유다.
현재 인천지역 방공호 중 일부는 일반주택 내 포함됨에 따라 도심지 재개발 등으로 전혀 조사되지 않은 채 입구의 함몰이나 통째 매몰되는 실정이다.
그나마 가끔 주민들의 입으로 소재 파악 등이 알려지고 관리 주체도 불분명하다.
 
일제 방공호 현장을 조사 중인 인천시립박물관은 최근 내부로 진입이 가능한 자유공원(응봉산) 맥아더동상 뒤 공영주차장과 제물량로 석정루 절벽 아래, 신포로 인천시역사자료관 관내 등 3곳을 점검했다고 15일 밝혔다.           
   

자유공원 공영주차장 내 방공호는 높이와 폭이 각각 약 2m 규모다. 현재 도달할 수 있는 길이는 10m, 그 이상은 시멘트로 막아 들어갈 수 없었다.

다음으로 석정루 아래 절벽에 위치한 시설의 초입 부분은 천정과 벽체가 시멘트 마감이 이뤄졌다.
안쪽으로 정확한 면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지금은 현지 카페의 창고로 사용 중이다.
 
중구청 뒤 역사자료관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사업가 코노 다케노스케(河野竹之助)의 저택으로 알려졌다.
방공호는 경내에 2개 있었으나 1곳은 입구가 폐쇄된 상태다.
정문에서 정원 돌계단을 올라가는 길의 축대 아래에 ‘ㄷ자’ 형태 석실형 방공호가 존재한다.
 
방공호 위치는 확인됐지만 미조사 대상으로
△긴담모퉁이길(중구 답동 65-1) 
△인천기상대 정문 옆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아래(개인주택) 
△항동 올림포스호텔 초입 
△중구 노인복지관 
△미추홀구청 인근 주차장 
△동구 미림극장 건너편 가게 
△옛 인천여고(전동)
인일여고 내 
△부평 3보급단 등 10곳이다.
 
예컨대 1908년 신흥동과 경동 싸리재를 잇는 신작로를 내면서 쌓은 석축은 일명 ‘긴담모퉁이길’로 불린다.
주변으로 옛 인천부윤관사를 비롯해 일본인 관료 및 사업가들의 주택이 몰려 있었다.
이 석축 아래에 방공호가 있는데 아치형 입구에, 주위는 콘크리트로 보강돼 철문이 닫혀져 있다.
언덕 너머 1884년 개교한 아사히소학교(현 신흥초교)와 길게 연결됐다는 소문이 있다.
 
유동현 인천시립박물관장은 “방공호는 아픔을 기억하고 후세에 교훈적인 가치를 전해야 하는 기억유산이다.
흔적들을 지워버리면 증거를 잃어버리는 것”이라며 “침략·학살·수탈 등 어두운 역사를 보여주는 네거티브 문화재를 지역 유산으로 보호하고 보존해야 하는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