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서원 전경
읍청루(挹淸樓) ▲
문회문(文會門) ▼
부백 김사철 송공비. 樓上日月. 樓下水淸
유당(由堂) 김사철(金思轍, 1847년 양력 8월 21일 ~ 1935년 양력 2월 17일)은 구한말의 관료.
金思轍송공비: 선산부사. 경상도 암행어사. 병조.이조참판,도승지. 1910년 한일합방때 남작(男爵).
東齋 일건재(日乾齋):새벽부터 해가 질때까지 끊임없이 공부하라는뜻.
西齋 시민재(時敏齋):시간을 아껴서 공부하라는뜻,
금오서원 정학당
정학당 정면
읍청루 배면
내삼문(內三門)
상현묘
정료대
상현묘
肅廟御製仰筆(숭정기원후2정축숙종241697)
일건재명 숭정2계해(1683)
日乾齋: 새벽부터 해가 질때까지 끊임없이 공부하라는뜻.
금오서원중수기 權 書
서원중수기 세재신묘부백 유당(由堂) 김사철(金思轍, 1847년 양력 8월 21일 ~ 1935년 양력 2월 17일)
구한말의 관료이며 일제 강점기의 조선귀족.
금오서원 院規 七條
오예창벽(汚穢窓壁) 창과 벽에 낙서하거나
손상서책(損傷書冊) 책을 손상하거나
유희폐업(遊戱廢業) 놀면서 공부를 안하거나
군거무례(群居無禮) 함께 살면서 예의를 차리지 않거나
간색주음(干索酒食) 술이나 음식을 밝히거나
설화난잡(說話亂雜) 난잡한 이야기를 하거나
의관부정(衣冠不正) 옷차림이 단정하지 않거나
범차칠금자기래칙귀미래칙막래(犯此七禁者己來則歸未來則莫來)
이런 일곱가지의 금기를 어기는 자가 이미 돌아왔으면 돌아가고 아직 오지 않았다면 오지를 말라
정학당
읍청루중수기 장병달 경신
금오서원중수기 知郡同福오재순경오(1930)년 오재순(吳在淳, 1880 ~ )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
서원중수기 옥산 張 경오년
시민재(時敏齋):시간을 아껴서 공부하라는뜻,
시민재銘 숭정후2계미
금오서원(金烏書院)
경북 구미시 선산읍 원리 276
야은 길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길재(1353∼1419)는 정몽주·이색과 함께 고려 후기 고려삼은(三隱)으로 불리는 학자이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는 것을 알고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건국되고 세자 이방원(태종)이 관직에 임명하였으나 거절하고
학문과 후학양성에만 전념했다.
금오서원은 선조 3년(1570)에 금오산 자락에 세웠으며
선조 8년(1575)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
1602년에 금오산은 외진 곳이라 서원을 지킴에 어려움이 있다는 청에 의하여
선산부사 김용(金涌)이 지금의 선산읍 원리 남산(藍山)에 복원하게 되었다.
1609년에 중건하였는데 이 때 점필재 김종직.신당 정붕,송당 박영.여헌 장현광 등을
추가로 배향하여 5현의 위패를 모셨다.
길재의 출생지인 봉계리를 향하여 남향으로 서 있는데
앞쪽으로 감천(甘川)과 낙동강이 만나는 물길이 내다보인다.
선조 35년(1602)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고,
광해군 1년(1609)에 다시 사액되었다.
이 때 점필재 김종직·신당 정붕·송당 박영·여헌 장현광을 추가로 모셨다.
서원 경내에는 상현묘. 정학당, 동재와 서재, 읍청루 등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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