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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은 길재선생의 290년전 묘비석은 하늘만 쳐다보고

영지니 2008. 4. 3. 18:09

 

 

  ① 숭정紀元구십(1718)년무술사월일     

       비신:107×49㎝     

       이수높이:36㎝
  ② 崇禎後九十八(1725)年 乙巳三月日改立. 

       비신:107.5×47.5㎝.

       이수높이:33㎝  
 

 

1982년에 비를 새로 세우고 290년전에 세워졌던 묘비는 

묘소 가장자리 땅속에 묻혀 표면만 살짝드러나

하늘만 쳐다보고있다.

아무리 새로운것이 좋다고 하지만 , 

너무 심한 느낌이 든다.

 

 

 

 숭정紀元91무술

 

 

 숭정후98 을사1725년

 

 

  야은 길재 묘소의 묘비

 

 

  선산 하위지 의관묘소의 신.구 비석이 함께 세워져있는 모습

 

 

 

 

 

  망부석            문인석    석수

 

 

 입수도두(入首倒頭)에서

 

 

  재사인 청풍재

 

 

  청풍재에서 묘소로 오르는 길목 대숲   선생의 굳은 마음을 상징하는듯....

 

 

  산신제단석 ?

 

 

 

  길재 묘소

 

 

야은 길재 음택          

 경북 구미시 오태1동.

금오산줄기 용머리산의 끝 부분에 있는 오태동 마을 뒤편에 야은 선생 묘소가 있다.

 

묘비석① 崇禎後九十八(1725)년 乙巳三月日改立. 

           비신:107.5×47.5㎝.

           이수높이:33㎝  


       ② 숭정紀元九十(1718)년 무술사월일        

           비신:107×49㎝     

           이수높이:36㎝

 

        ③고려문하주서야은길선생지묘   임술(1982)년立  

 

 
①.②비석은 가장자리에 땅속에 누워있고, 

③은 봉분옆에 세워져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하고

                               저것이 소멸하므로 이것이 소멸한다

 

1353(공민왕 2)∼1419(세종 1). 려말 선초 학자. 본관:해평. 호: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아버지는 지금주사(知錦州事) 원진(元進)이며, 어머니는  김희적(金希迪)의 딸이다.

 

해평 길씨(吉氏)로서 중정대부 지금주사 원진(元進)의 아들로

지정(至正) 13년 (1353)에 고아 봉한리에서 출생하였다.

8세에 어머니를 이별하고 시냇가에 놀다가 우연히 가재를 한마리 잡아서 노래하되,
"가재야 가재야 너도 어미를 잃었느냐?  나 또한 어미를 잃었노라. 하며 놓아 주고 눈물을 흘리니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애처로움을 보고 눈물 흘리게 하였다고 한다.
이웃 할머니가 그 광경을 보고, 소식을 외조부 김희적(金希迪)에게 전하니,
외조부 내외가 함께 슬피울고 고을 사람이 모두 기특히 여기었다고 한다.
           
나이11세에 비로소 냉산 도리사에서 글을 읽고 쓰고 시 짓는 법을 차츰 이해하였다.
   
16세에 지은 시가 있으니,
"시냇가 오막살이 한가히 살 때 달 밝고 바람 맑아 흥겨웁구나,

손님이라곤 오는 이 없고 산새들만 지저귀는데 대숲
아래 상 옮겨놓고 누워서 책을 읽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양촌 권근 등 여러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의 진리를 배웠다.
1374년에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생원(生員)시험에 합격.

 

 

 

1389년에 문하주서(門下注書)가 제수되었고

1390년 봄에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예측한 나머지 노모를 받든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목은(牧隱)선생을 찾아가 그 뜻을 전하니 목은이 시를 지어 주었다.
그 글귀에 "벼슬은 뜬 것이니 서두르지 말게 저기 저 날아가는 기러기 보게"라 하였다.

 

조정에서는 벼슬을 높여 여러 번 불렀으나,

부임하지 않고 오직 어머니 봉양하는데 모든 것을 손수하였다. 
같은 마을에 살던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후의 태종)과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
훗날 태종이 그를 불렀으나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여 거절하였다.

 

1419년, 선생의 나이 67세로 병환이 나서 급하게 되니

부인 신씨는 아들 사순을 부르기로 하였다.
선생은 "임금과 애비는 일체다.

이미 임금에게 가 있으니 부고를 듣고 오는 것이 옳으니라" 하고, 내가 죽거던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의하여 상례를 치뤄라" 하였다.

말이 끝나자 운명하니 세종 1년(1419)이고 향년 67세였다.

금오산 동편 오태에 장사하였다.

 

영조(英祖) 4년(1728) 시호(諡號)를 충절(忠節)이라 하였으며,

선산 금오서원, 칠곡 오산서원, 금산 성곡서원,
계룡산 삼은사에 향사하고 고려말 포은, 목은과 함께 3은(三隱)이라 불린다.

 

현 구미시 금오산 기슭에는 선생의 유적인 채미정(採薇亭).

원리에 금오서원. 오태동에 지주중유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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