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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문화

영지니 2008. 4. 2. 19:37

 

 

    

      유교문화

 

 
     
삼국시대 건국초부터 중국대륙의 여러 왕조와 빈번히 접촉하였으니 고구려는 한, 위, 북조 및 수, 당, 등의 문화를 받아들여 학술, 종교, 미술, 공예 등의 진보가 대단했고 영양왕 11년(600년)에 벌써 한자로 사기를 기록했고 백제도 근초고왕(346-374) 말년에 박사 고흥이 서기를 지었다.
 
 

또한 신라도 22대 지증왕(500-513) 23대 법흥왕(514-539) 때 이미 대륙의 문물을 그대로 따랐으며 젊은 학도와 승려를 수, 당에 유학시켜 크게 꽃을 피웠다. 그중에서도 설총과 최치원이 크게 두드러진 분이다.

고려에 들어와 성종(982-997)은 신라의 설총을 홍유후로 추봉하고 최치원을 문창후로 추봉하여 문묘에 배향하니 우리나라 유자들의 문묘배향이 처음이었다. 중기에는 최충이 사학을 일으켜 크게 융성하더니 숙종(1096-1105)과 예종(1106-1122)에 이르러 관학이 진흥되고 과거제도가 시작되어 젊은 학도의

등용문이 열려 더욱 크게 융성하였고 안유는 충렬왕 16년(1290) 연경에서 신간 주자서를 읽고 작심연구하고 손수 베끼고 공자의 초상화를 묘사하여 왔다.

고려말에 이르러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가 회헌 안유의 송학을 이어 양촌 권근에 이어졌고 이고장 출신 야은 길재는 이색 포은 양촌등의 연원을 같이 조선조 사림의 효시가 되었다.

그는 호를 야은이라 했는데 금오산아래 살았다해서 금오산인이라고도 한다.

양촌과는 한 살 차이였지만 스승으로 모셨고 양촌이 타계하자 3년 심상을 입었다. 태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과거 동문수학한 의로 태상박사로 추천했으나 야은은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킬 수 있도록 부탁했다.

 
 

야은은 향리에 돌아와 사숙을 열고 지방 학도를 기르되 실천방면의 학문을 중히 여겨 효제, 충신, 예의, 염치를 앞세우고 사람의 언행이 낮에 착오가 나는 것은 밤에 존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고 밤이면 정좌하여 밤중이 되어야 자리에 들고 혹은 이불을 덮고 앉아서 밤을 세우기도 했다. 새벽에 닭이 울면 관대를 갖추고 정장하여 사당과 선성에 먼저 예를 올렸고 상장과 제사에는 오로지 주자가례 만을 따랐다.

그는 조선의 뼈대와 정신의 지주로서 확고하게 구축한 공로가 있고 그의 학맥을 사학의 연원을 열어 사림의 고도한 풍도를 이루었다.

그의 문도로는 예천 사람 조용과 역시 예천 사람 윤상이 있고 선인으로 강호 김숙자는 12세때 야은에게 배우고 뒷날 별동 윤상에게 주역을 배웠다. 벼슬이 성균관사예에 이르렀고 그의 학문은 아들 점필재 김종직에게 전해졌고 점필재는 문도가 매우 많아 한때 사림의 극성기에 이르렀다.

그의 문도로 저명한 분은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매계 조위, 탁영 김일손, 지지당 김맹성, 임계 유호인, 우제 손중돈 등 대부분 영남 출신의 인사들로 모두 조야에서 활약하여 명성을 떨쳤다.

그후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에 이르러 유학의 꽃이 피워졌으니 모두 야은에게서 이어온 유학의 맥락이요 조 선조 500년 동안 정신문화의 뼈대를 이루어 오늘날 세계속으로 뻗어가는 국력도 세계의 석학들의 말에 의하면 끈끈한 맥이 오늘에 사는 한국민의 혈류속에 흐르고 있음이라 하고 있으니

 

다가오는 21세기 태평양시대를 주도할 한국민은 유학의 정신문화로 이루어 나갈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그러한 뜻에서 오늘날 구미문화원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사를 [금오문화제]로 승격하고 발간하는 기관지도 [금오문화]지라 하고 있음은 금오산은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총본산이요 발원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