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비교
*저자
-삼국사기 (관찬) 김부식과 관리들이 저술.
-삼국유사 (사찬) 일연과 제자들이 저술.
*저술당시의 사회적 배경
삼국사기
고려 인종23년 (1145), 50권 10책.
금의 고려에 압력으로 인한 북진 운동의 발현.
묘청의 난으로 인한 민심의 분열
삼국유사
고려 충렬왕 7∼9 (1281∼1283)
무신정변과 몽고의 침공 및 압제.
*저술목적
삼국사기
㉠ 민심의 재수습.
㉡ 국왕중심의 중앙집권체제 강화.
㉢ 유교정치의 재확립 목표.
삼국유사
무신정변 이후의 혼란한 사회에 대한 자각과 반성.
→ 정신적 기준을 찾기 위한 과거의 전통 재인식.
* 저자의 역사인식
삼국사기
김부식 (1075∼1151)
㉠ 이상적인 유교정치의 구현.
㉡ 역사를 교훈이나 후세의 귀감으로 파악하여 역사서술을 현실비판의 도구로 삼음.
㉢ 단순한 개인주의적 사관이 아닌, 멸사봉공의 의무와 도리를 강조한 국가의식을 강조.
삼국유사
일연 (1206∼1289)
㉠ 신이의 강조
㉡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적 태도
㉢ 불교적·신화적 세계
*서술상의 방법
삼국사기
기전체 (열전 20%, 본기 60%).
본기·지·연표·열전으로 구성.
열전에 등장한 인물69명중 나라를 위해 순국한 사람이 21명, 34명이 통일전쟁에서 활약한 인물로 구성.
※기전체란?
왕조를 중심으로 역사를 시대 순으로 훑는 '본기'와 인물 담은 '열전'을 축으로 하는 서술 방식.
삼국유사
체재를 정의할 수 없으나(기사본말체로 보기도 함), 저자 개인의 관심각도에 따라서 자유로이 주제 선택.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신주·감통·피은·효선의 9편 구성.
상지론지, 의왈, 찬 등으로 자신의 의견 제시.
※ 기사본말체란?
연대나 인물보다 사건에 중점을 두어 그 원인·경과·결과 등의 관계를 서술하는 방식.
*사학사적 의의
삼국사기
김부식의 역사학은 우리에게 만족스러운 것이건 불만족스러운 것이건 간에 한국사학사상에서 역사학적 방법과 역사관에 있어서 고대사학으로부터 새로운 발전을 한 것이다.기록을 그대로 전재하고 설화와 신화를 그대로 기록하던 고대의 역사학으로부터 벗어나 철저한 문헌기록에 의존하고 또한 기록된 사료의 사실 여부를 검토·비판하여 취사 · 선택하고 자신의 견지에서 역사사건을 비판했으며 우리 나라만의 관점에서만 역사를 논하지 않고 당시 세계적인 보편성을 띤 유교라는 관점에서 한국 중세사학의 기초를 정립.
삼국유사
사료적 가치의 중요성 - 출처를 명확히 밝힘.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적 태도. 풍부한 신화의 세계 존재.
역사적 신이에 대한 기록은 한국 고대사를 자주적인 입장에서 새로이 이해해보려는 노력.민족 자주성과 문화의 우위성 강조.불교사관을 통한 불교사 영역의 확대.
내용출처 : [직접 서술] 직접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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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저작시기에 관한 논란
「삼국사기」와 함께 한국고대사 문헌자료 양대산맥을 구축하고 있는 「삼국유사」 편찬자는 누구이며, 언제 편찬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론이 있을 수 없었다.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06-1289)과 그 제자무극이 완성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정론'에 대한 반론이 연이어 터져나오고 있다. 반론마다 차이가 있으나, 그 요점을 추린다면 현재 우리가 보는 「삼국유사」가고려 멸망 이전에 있었음은 분명하나 그 형태는 초고였고, 그것이 책으로 처음 간행된 것은 고려멸망 2년 뒤인 1394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나아가 편찬자에 대해서도 일연 혹은 무극이라는 기존 주장은 심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 현존 「삼국유사」 중 일부가 그들의 손으로 거쳐 완성되기는 했을지언정상당수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후대에 덧붙여졌다는 반론이 이어지고 있다.
1-2일 경기 김포시 중앙승가대에서 개최된 2004 한국불교학결집대회에 하정룡송광사 성보박물관연구원이 발표한 '삼국유사의 성립에 대하여'라는 논문 또한 「삼국유사」의 편찬자와 책 인출 시기에 대한 통설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이 논문은 「삼국유사」는 고려시대에 간행된 적은 없고, 가장 빠른 판본은 1394년 본이며, 나아가 현존 「삼국유사」 전 5권 중에서도 일연 저작이라고 단정할 수있는 것은 '일연 찬술'이라는 문구가 확인되는 제5권 뿐이라는 것이다.하 연구원은 현존 「삼국유사」에서 나타나는 '지'(旨)의 이체자는 「고봉화상선요」라는 불경의 각 시대별 판본 중 1390년 인출본에서야 비로소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로 볼 때 현존 「삼국유사」는 이 무렵에야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02년에는 한국 서지학의 원로인 천혜봉 성균관대 명예교수 또한 골자가거의 같은 주장을 제기한 바 있다.
이에 한국불교사 전공인 동국대 사학과 김상현 교수는 「경주선생안」이라는 조선시대 문헌에 고려 공민왕 때와 관련된 기록에서 「삼국유사」라는 책 이름이 나온다는 점을 들어 고려시대 편찬설을 내세웠다.이에 대해 천혜봉 교수는 그것은 필사본을 말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사실 「삼국유사」가 고려시대 승려인 일연에 의해 고려시대에 완성된 문헌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대목이 너무 많다.한국고대사 전공인 이근직 경주대 강사는 「삼국유사」에 대한 기존 통설을 부정하는 증거들을 조목조목 제시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그에 의하면 「삼국유사」 고조선 관련 기록에 보면 '백악궁'(白岳宮)이라는 지명이 나오지만 이것은 고려 공민왕 때 설치되었으며 아무리 빨라도 그 편찬시기는공민왕 이전이 될 수 없다.또 강원도 철원에 대한 표기가 '鐵圓'에서 '鐵原'으로 바뀐 것은 일연이 사망하고 난 이후인 1308년임에도 「삼국유사」가 철원을 '鐵圓' 혹은 '鐵原'을 뒤섞어 표기하고 있는 것도 「삼국유사」 일연 편찬설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삼국유사」에서 단군조선을 고(古)조선이라고 표현한 것은 중국계 정권인 위만조선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을 염두에 둔 표현이므로 고려시대 판본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이근직씨는 "이밖에도 「삼국유사」 일연 편찬설을 부정하는 증거는 한 두 가지가 아니어서 이에 대한 더욱 면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연합뉴스. 2004.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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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의 주요 사상
일연은 최충헌이 집권할 때 경주의 속현인 章山郡(현재의 경북 경산)에서 출생하였는데, 아버지 김언칠은 지방 향리층이었던 것 같다. 일연은 열 네 살에 설악산 진전사(陣田寺)에서 정식으로 승려로 입문하였다. 본래 진전사는 가지산문의 개창자인 도의(道義)가 운거한 곳으로 가지산문의 주요한 사찰이었다.
가지산문에 입산한 이후 일연의 주요생애는 다음의 네 시기로 나누어진다. Ⅰ기는 포산(包山)의 여러 사찰에 주석하던 시기(1227∼1248), Ⅱ기는 정안(鄭晏)의 초청에 의하여 남해 정림사와 지리산 고상암에 거주하던 시기(1249∼1260), Ⅲ기는 원종의 명에 의해 강화도 선월사에 주석한 이후 경상도의 여러 사찰에 주석하던 시기(1261∼1276), Ⅳ기는 충열왕의 명에 의해 운문사에 주석하다가 국존(國尊)에 책봉되고 입적할 때까지의 시기(1277∼1289)로 나눌 수 있다.
제Ⅰ기는 정치적으로 최우가 집권한 시기로 대몽항전기였다. 이 시기 불교계는 수선사(修禪社)와 백련사(白蓮社)를 중심으로 최씨정권에 밀착하여 비호를 받으면서 소극적이지만 대몽항전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때 일연은 현풍의 비슬산에서 뚜렷한 행적 없이 잠적해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 최씨 집권기에 가지산문 세력이 운문사를 중심으로 무인항쟁을 진행했다는 점과 결부시켜 볼 때 무인정원으로부터 배체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Ⅱ기는 일연이 정안을 매기로 최씨정권과 연결되면서 일연 개인이 수선사와 사상적 연관을 갖게 되고, 가지산문이 중앙정계에까지 부상하는 시기이다. 정안은 최우의 장인인 정숙첨(鄭叔瞻)의 아들이었다는 점에서 최씨정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우의 정치적 행동에는 반발하였다. 정안이 일연을 초청한 이유는 최우를 싫어했기 때문에 최우와 결탁해 있던 수선사 계통을 기피하여 새로운 인물인 일연을 선택했을 것이다. 또다른 이유는 수선사 제3세인 몽여(夢如)가 최씨정권에 협력을 거부하자 그 대안으로 일연을 등장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이리하여 가지산문이 최씨정권과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1251년 왕성된 대장경 초판 중 남해분사(南海分司)에서의 작업에 일연 계통이 참여하면서 수선사와 사상적 교류를 맺는다.
제Ⅲ기는 정치적으로 최씨정권이 붕괴되고 강화도 정부가 몽고에 항복함으로써 몽고와 화해분위기로 접어드는 시기이다. 이때 원종(元宗)이 즉위하면서 선월사(禪月寺)에 일연을 초청한 것은 정치적 차원에서 불교계를 통솔하기 위한 조처로 생각된다. 중앙정계와 연결된 일연은 경상도의 여러 사찰에 주석하면서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썼다. 이 시기에 《삼국유사》를 간행하기 위한 그 준비작업으로 《역대연표》를 간행하고, 그 판각을 담당할 수 있는 기술집단을 양성하였다.
제Ⅳ기는 원에 예속된 고려예서 원이 일본을 정복하기 위해 고려에 가중한 부담을 지워 사회상이 극도로 피폐한 시기라 하겠다. 이 때 고려왕실은 이전의 체제에서 주류를 이루던 불교계를 정리해야 할 필요성에서 일연을 중심으로 하는 가지산문을 핵심적 교단으로 지원하였다. 즉 1281년(충렬왕 7)에 충렬왕이 경주에 갔을 때 그 행재소에 부름을 받게 되고, 그 이후 일연은 최고의 승직을 얻게 된다.
일연의 사상적 경향은 우선 수선사 계통에 의해 종합 . 정리된 간화선(看話禪)에 입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조동오위》를 중편한다든지 《인천보감》을 간행하게 하고 《조정사원》을 편수하는 등 다양한 선종의 전적을 간행하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풍미하던 간화선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다른 계통의 선사상까지 폭넓게 수용하였다. 이러한 선사상과 함께 일연은 교학과 유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특히 일연은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인식하여 현실적인 구원사상을 표방한 경전류를 간행하였는데, 이는 실천적 . 현세적 신앙을 강조함으로써 이민족의 침략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와 고통을 받았던 일반 민들로 하여금 구원과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한 신앙적 노력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실천적 . 현실적 신앙의 표방은 결국 《삼국유사》 찬술과 연결되는 사상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연은 선종승려이면서도 《삼국유사》는 선종계통의 저술이 아니며 불교신앙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에서 제작된 것이다. 이는 《삼국유사》를 찬술하는 일연의 말년에 주목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13세기 후반기는 사회상황의 변화에 따라 일연 내부에서도 선사상에서 신앙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사상적 전황이 일어난 시기이다. 이는 《삼국유사》를 저술하기 위한 기초작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던 《역대연표》의 사상적 경향을 파악해 보면 분명해진다. 《역대연표》는 1278년 인흥사(仁興寺)에서 간행한다. 이 시기 인흥사에서 간행된 《大悲心陀羅尼經》, 《法華經普門品》은 일연의 문도들에 의해 판각되었는데 이는 관음신앙의 근본 경전이다. 그 내용은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설한 것이며 현세구원적, 실천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일연과 그의 문도들이 현세구원적인 관음신앙에 심취한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일연의 사상적 변화는 왕정복고를 주도한 세력의 지원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최씨정권을 비록한 무신세력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무신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판단된 민중의 입장을 깊이 인식한 대문이다. 그래서 일연은 이러한 민중의 처지에 공감하면서, 현실적 차원에서의 구원과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한 신앙적 노력의 일환으로 실천적·현세구원적 성격을 띤 불교를 표방했던 것이다. 한편 이민족의 침략이 야기한 일반 민의 고통과 피지배 사회로의 전락이라는 현실은 일연에게 있어서는 민족적 위기감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의식에서 《삼국유사》의 저술을 시도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상적인 변화를 보였을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후기의 선승인 일연(一然, 1206∼1289)이 편찬한 사서이다. 《삼국유사》는 전체 5권 2책으로 되어 있고, 권과는 별도로 왕력(王歷) . 기이(紀異) . 흥법(興法) . 탑상(塔像) . 의해(義解) . 신주(神呪) . 감통(感通) . 피은(避隱) . 효선(孝善) 등 9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체재는 정사인 《삼국사기》와 다를 뿐 아니라 불교사서인 《해동고승전》과도 다르다. 이 책의 체재를 10과로 분류한 중국의 세 가지 고승전의 경우와 비슷한 듯 하지만, 왕력 . 기이 . 효선 등 중국고승전의 선례와 다른 것도 있다.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신이(神異)한 사화(史話)가 많이 인용되고 있음을 흔히 지적된다. 이는 역사에 반영된 신이가 하등 기이할 것이 없다는 일연의 역사인식과 많은 사료를 수집, 전거를 밝혀 인용하고 고대 사료의 원형 전달을 도모한 역사서술방법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연의 역사인식과 서술태도는 유교적 역사관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위치에 대해서, 《삼국사기》에 비해 복고적이라거나 진보적이라는 상반된 견해도 있다. 그러나 찬술동기나 서술체재가 서로 다른 두 사서의 직접적인 비교는 바람직하지 않고, 또 《삼국유사》의 역사서술 방법론에 대한 분석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의 역사 전반에 관한 사서도 아니며, 불교사 전반을 포괄하지도 못하였고 저자의 관심을 끈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수집, 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이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역사 . 지리 . 문학 . 종교 . 언어 . 민속 . 사상 . 미술 . 고고학 등 총체적인 민족문화유산의 원천적 보고로 평가될 만큼 다른 전적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하고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pkh.co.kr/hi_00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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