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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원사화(揆園史話)』와『환단고기(桓檀古記)』

영지니 2008. 3. 4. 21:10

『규원사화(揆園史話)』와『환단고기(桓檀古記)』 -

『韓國史 市民講座 제2집』, 일호각,

1988 -조인성(趙仁成)


1. 머 리 말
2. 豫備的 檢討
3.『揆園史話』에 대한 史料批判
4.『桓檀古記』에 대한 史料批判
5. 맺음말 -『揆園史話』․『桓檀古記』와 韓園古代史 硏究

1. 머 리 말 

요즈음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는『揆園史話』와『桓檀古記』에 따르면, 우리 나라 상고사는 그야말로 찬란한 영광의 역사인 셈이다. 그것들을 보면 우리 민족은 桓雄이 다스렸다는 神市시대에 이미 국력과 문화면에서 중국울 능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檀君王檢 때부터 중국의 동북지방과 한반도에 걸치는 방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지금까지 축척되어 온 우리 고대사학계의 연구 성과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따라서 종래 학계에서는『규원사화』와『환단고기』를 무시하여 왔다. 반면에『규원사화』와『환단고기』에 묘사되어 있는 우리 나라 상고사를 매우 근거있는 것으로 믿는 인사들도 일부 있어 왔다. 그를은 위와 같이 찬란한 민족사를 수록하지 않았다고 하여 국정 국사교과서가 식민지주의사관에 물들었다고 공격하였다. 그리고 기왕의 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을 식민지주의사학자라고 비난하였다. 따라서 이른바 국사교과서 파동의 배경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규원사화』와『환단고기』인 것이다. 

한편 국사교과서 파동은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져 한동안 큰 화제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에 짝맞추어『규원사화』․『환단고기』가 본격적으로.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소개되자마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환단고기』는 한때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일부 서점에서는『규원사화』와『환단고기』그리고 그것들과 유사한 내용의 서적들만을 취급하는 독립된 서가를 만들 정도였다. 한국사에 관심있는 시민들 중 일부는 언 옛날 우리조상들의 뛰어난 문화, 강한 국력, 광대한 영토에 대해 호기심 이상의 관심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하지만『규원사화』와『환단고기』에 대한 기왕의 사료비판에 따르면, 이 두 책은 僞書이거나 僞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1) 학계에서『규원사화』와『환단고기』를 무시하였던 것도 사실 이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따라서,『규원사화』와『환단고기』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나 믿음은 결코 바람직스럽게 생각되지 않는다. 

이에 본고에서 필자는 기왕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규원사화』와『환단고기』의 眞僞 여부와 그것들이 쓰여진 연대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나아가 가능하다면 그 저자들에 대해서도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규원사화』와 『환단고기』에 인용된 이른바 古記들에 대해서도 검토하려고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이 두 책에 서술되어 있는 우리나라 상고사가 과연 믿을 만한 것안가 하는 문제가 분명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 글의 시작에 앞서 다음과 갇은 점들을 먼저 밝혀 두려고 한다.2) 첫째, 어떤 단어 혹은 술어는 사료의 성립연대를 알려 주는 지표가 된다는 점이다. 일정한 단어는 일정한 시기부터 사용된다. 예컨대 哲學이란 단어는 philosophy의 번역어로 근대에 들어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어떤 단어는 어느 시기부터 원래의 의미와는 다르게도 사용된다. 가령 經濟는 본래 나라를 다스려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經國濟世)이지만, 근대 이후에는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재화를 획득하고 사용하는 행위(Economy)를 가리키는 것으로 주로 쓰이고 있다. 둘째, 人名이나 書名과 마찬가지로 地名도 사료의 성립연대를 알려 주는 지표가 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京城府라는 명칭은 1910년 10월부터 사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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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慶南大學校 史學科 교수. 

문으로서「묘본인 杜魯 - 高句麗의 殉葬과 守墓制에 관한 一檢討 -」(『歷史學報』87, 198O),「崔致遠의 歷史敍述」(『歷史學報』94․95합집, 1982),「三國 및 統一新羅의 歷史敍述」(『韓國史學史의 硏究』, 乙西文化社, 1985),「弓裔政權의 中央政治組織」(『白山學報』33, 1986) 등 韓園古代史에 관한 논문이 다수있다.

1) 宋찬植,「僞書辨」(『月刊中央』, 1977년 9월호), 李道學,「在野史書 解題『桓檀古記』」(『民族知性』, 1986년 11월호), 趙仁成,「『揆園史話』論添補」(『慶大史論』3, 1987), 李純根,「古朝群 位置에 대한 諸說의 검토」(『聖心大學報』, 1987년 5월 15일),趙仁成,「現傳『揆圍史話』의 史料的 性格에 대한 一檢討」(『李丙燾九旬紀念韓園史學論叢』, l987).

2) 사료비판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은 朴成壽,『歷史學槪擺論』, 1977, pp.259~270 및 杜維運(權重達譯),『歷史學方法論』, 1984, pp.159~184에서 얻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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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豫備的 檢討

(1)『揆園史話』․『桓檀古記』解題 

재 전하고 있는 6종의『규원사화』는 모두 근대에 필사 혹은 등사된 것이다. 예컨대 지금 나와 있는『규원사화』영인본은 1940년 孫普泰가 梁柱東이 갖고 있던 것(역시 근대의 필사본)을 필사시킨 것이다. 이들 6종의『규원사화』를 비교해 보면 약간의 字句 차이를 제외하고는 그 내용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규원사화』의 저자와 저술연대는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저자는「序(文)」에 北崖老人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북애노인이 朔州府使를 지낸 權俔이라는 설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것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저술연대는「서문」에ꡐ上之二年乙卯ꡑ라고만 되어 있다. 그런데「서문」에서 저자가 孝宗(1650~1659)의 北伐실패를 애석해 하고 있음을 보면, 효종 이후 어느 왕 2년 乙卯가 그 저술연대가 된다. 이에 맞는 것으로는 肅宗 즉위 2년 乙卯(숙종 원년, 1675)만이 있으므로, 『규원사화』는 1675년에 쓰여진 것이 된다.3)

『규원사화』는「서문」․「肇判記」․「太始記」․「檀君記」(서문)․「漫說」등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는『규원사화』를 쓰게 된 동기와 그 과정이 밝혀져 있다. 「조판기」에서는 桓困과 桓雄이 천지를 개창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으며, 「태시기」에서는 환웅이 君長이 되어 東夷族을 다스리던 수천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단군기」는 환웅의 아들인 桓儉이 최초의 檀君(檀國의 임금)이 된 때부터 마지막 단군인 古列加에 이르는 47代 1195년의 역사를 적은 것이다. 끝으로「만설」에는 저자의 인생관과 역사의식․문화의식 그리고 조선이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방략(强國之要)이 개진되어 있다. 

한편 현재 전하고 있는『환단고기』는 1949년 李裕립(1907~1986)이 吳炯基로 하여금 正書시킨 것이라고 한다(「跋文」). 이로 미루어 그 대본이 되었다는『환단고기』는 필사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위 정서본 범례를 보면, 原『환단고기』는 桂延壽가 편찬하고 李沂가 감수하여 1911년 인쇄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안쇄본은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이유립이 소장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필사본도 역시 찾을 수 없다. 지금은 오형기의 정서본이 1979년 이유립에 의해 영인되어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환단고기』가 1979년에 와서야 영인되었던 것은 계연수가 1920년 죽으면서 다음 庚申年(1980)이 되거든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놓으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한다.4)

『환단고기』는『三聖記』․『檀君世紀』․『北扶餘紀』․『太白逸史』를 묶은 것이다.「범례」에 따르면『삼성기』는 安含老가 撰한 것과 元董仲이 찬한 것 두 종류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 안함로의 것은 계연수가, 원동중의 것은 白寬黙이 갖고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삼성기』에는 인류의 출현요로부터 高句麗 개국까지의 역사가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삼성기』의 이름이『世祖實錄』7, 3년 5월 戊子조에 나오므로, 저술연대는 세조 3년(1457) 이전이 된다. 

『단군세기』도 백관묵이 소장했던 것이라고 한다(「범례」). 여기에는 47代 2096년에 걸친 단군조선의 역대 임금명과 그들의 재위기간, 치적 등이 나온다. 고려말의 李암(1296~1364)이 恭民王 12년(1363)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북부여기』는 休崖居土 范樟이 찬한 것으로 원래 『단군세기』와 合編되어 있는 것을 李亨拭으로부터 얻었다고 한다(「범례」). 『북부여기』는 解慕漱에서 高朱蒙에 이르는 북부여의 역사를 다룬 것으로 내용상 『단군세기』의 속편인 셈이다. 여기에는 동부여의 역사를 서술한「迦葉原夫餘紀」가 붙어 있다. 『태백일사』「고려국본기」를 보면, 범장은 이암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북부여기』가 쓰여진 것은 고려말 무렵이 된다.

『태백일사』는, 「범례」에 따르면, 李陌(端宗~中宗)5)이 편찬하였으며, 이기가 소장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三神五帝本紀」․「桓國本紀」․「神市本紀」․「三韓管境本紀」․「蘇塗經典本訓」․「高句麗國本紀」․「大震國本紀」․「高麗國本紀」로 구성되어 있다. 「삼신오제본기」는 주로 우주의 생성에 관한 것이다. 「환국본기」는 환인이 다스렸다는 환국의 역사를, 「신시본기」는 환웅이 다스렸다는 신시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삼한관경본기」에는 단군왕검이 나누었다는 辰韓(眞朝鮮)․馬韓(莫朝鮮)․番韓(番朝鮮)중 마한․번한의 역사가 실려 있다.「소도경전본훈」은「天符經」․「三一神諾」등 단군신앙과 관련된 경전․교리에 관한 것이다. 「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고려국본기」는 각각 고구려․발해․고려의 역사를 다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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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韓永愚,「l7세기의 反尊華的 道家史學의 成長 - 北崖의『揆園史話』에 대하여 -」, 『韓國學報』1, 1975;『韓國의 歷史認識』(上), 1976, p.267.

4) 李道學, 앞의「해제」, pp.205~206.

5) 朝鮮總督府編, 『朝鮮人名辭典』,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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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問題의 提起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1675년에 저술되었다고 하는『규원사화』는 1928년에 나온 金洸의 『大東史鋼』에 최초로 이용되고 있다. 이처럼『규원사화』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것이 性理學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암암리에 전하여져 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현전하는 『규원사화』가 모두 근대에 필사 혹은 등사된 것이며, 그 저자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과 더불어,『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 의심을 갖게 한다. 즉 근대에 고양된 단군신앙을 배경으로 짜여진 僞書가 아닌가 회의하게 되는 것이다.

『환단고기』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거기에 수록된 네 책의 저술연대는 모두 조선 전기 이전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환단고기』는 1911년 인쇄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9년 이전에 『환단고기』에 나오는 네 책이나 『환단고기』를 인용하고 있는 문헌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환단고기』에 실린 네 책이 근대 이후(어쩌면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와 아울러 이유립이 인쇄본이 아닌 필사본을 갖고 있었으리라는 점, 현재 『한단고기』의 인쇄본이나 이유립이 갖고 있었을 필사본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1911년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편찬하였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

3.『換園史話』에 대한 史料批判

(1) 著述年代와 著者

『규원사화』저자는「단군기」에서 

-『高麗史』光宗 10년에 ꡒ압록강 밖의 女眞을 白頭山밖으로 몰아내어 살도록하였다ꡓ고 하였는데,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 고 하였다. 그리고 蓋馬山이 백두산과 같은 산임을 언어학적인 방법으로 밝히고 있다. 

한편 1823년 『海東繹史』의 「地理考」를 쓴 韓鎭書도 『규원사화』 저자와 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도 고려사 광종 10년조에 ꡒ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어 살도록 하였다ꡓ는 구절이 나온다고 하면서 ꡒ백두의 칭호가 여기에서 비로소 나타난다고 하였다.ꡓ 그리고 『규원사화』에 나오는 것과 같은 방법, 같은 논거로써 개마산이 백두산임을 증명하였다(山水 1, 白頭山).   그런데 『규원사화』 저자와 한진서는 모두 성종 10년을 광종 10년으로 혼동하였다. 두 사람이 『고려사』에서 인용한 구절은 광종 10년조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종 10년 10월조에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치는 우연일까.

『고려사』를 인용한 두 사람이 모두 성종 10년을 광종 10년으로 혼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똑같이 백두산이라는 명칭이 거기에서 처음 보인다고 설명하였고, 또 개마산이 백두산임을 같은 방법, 같은 논거로써 증명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없다. 즉 위와 같이 양자가 일치하게 된 것은 둘 중의 하나가 『고려사』를 보고 그것을 나름대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다른 하나를 참고하였기 때문임이 분명한 것이다. 

만약 『규원사화』가 1675년에 쓰여진 것이라면 한진서가 『규원사화』를 보았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규원사화』가 알려진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였다. 그리고 한진서의 『해동역사』「지리고」에는 전거가 된 모든 문헌이 제시되어 있지만, 거기에 『규원사화』는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한진서가 『규원사화』를 보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결국 『규원사화』저자가 『해동역사』「지리고」를 참고한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1823년 이후에 쓰여졌으면서도 1675년에 저술되었음을 표방하고 있는 『규원사화』가 위서임을 알 수 있게 된다.6) 이 점은 다음을 검토함으로써 더욱 분명해진다. 

- 만약 지금 諺書를 함께 쓴다면 반드시 이런 폐단이 없을 것이며, 草野의 愚夫라도 또한 (檀君이 박달임금임을) 쉽게 깨닫게 될 것이니 文化의 계발이 또한 빨라질 수 있을 것이다(「단군기」). - 

이것은『규원사화』저자가 후대의 역사가들이 한자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박달임금을 한자로 번역한 것이 단군임을 모르게 되었다고 하면서 제시한 의견이다. 




그런데 저자가 한자와 諺書(한글)를 함께 사용한다면 계발될 것이라고 한 문화는 古典에 나오는 文治敎化의 뜻이 아니다. 저자가 만설에서 고유어의 사용을 포함한 고유성의 보존(이를 保性이라고하였다)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음을 보면, 한글을 사용하여 계발될 문화는 고유문화이다. 따라서 위에 나오는 문화는 Kultur․Culture의 의미인 것이다. 

이미 알려진 바이지만 Ku1tur․Cu1ture가 문화라고 번역되어 사용된 것은 日本에서부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20세기 초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政治․經濟․藝術 등의 번역어와 함께 우리 나라에 전해졌다.7) 그러므로 위에 나온 저자의 한자․한글 병용론은 근대인의 주장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규원사화』가 근대에 만들어진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8) 

그런데 저자는 「만설」에서 

 - 나라의 흥망은 뒤바뀜이 무상하니 지금 조선의 불행은 앞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실마리가 아니겠는가. 내가 인심이 분열되고 民氣가 가라앉은 것을 보니 붓을 던지고 길게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슬프다 桓因이여. 슬프다 桓因이여. 지금 한 조각의 震域과 한 줄기의 遺民은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장차 어찌 될 것인가. - 라고 헌실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규원사화』가 1675년에 쓰여진 것이라면 이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의 암담한 실정을 걱정한 것이라고 불 수 있다. 하지만 『규원사화』에 나오는 이같은 저자의 심경은 근대인의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ꡐ한 조각의 진역ꡑ과 ꡐ한 줄기의 유민ꡑ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후의 우리 민족의 처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9) 

그렇다면 『규원사화』는 1910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 된다. 『규원사화』가 1928년에 나온 金洸의 『大東史鋼』에 최초로 이용되고 있음을 보면, 그 저술연대는 1928년 이전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내용의 곳곳에서 환웅과 단군에 대한 신앙이 드러나 있으므로, 그 저자는 단군신앙을 가진 근대 민족주의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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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趙仁成,「현전『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일 검토」, pp.658~659.
7) 李崇寧,「韓國語發達史」下,『韓園文化史大系』9, 1967, pp.317~318.
8) 趙仁成, 앞의 논문, pp.659~661. 鄭求福의 교시에 따르면,『규원사화』에 자주 보이는 朝鮮이라는 용어도 大韓帝國 이후에야 흔히 사용되었다고 한다.
9) 李純根은 위 인용문에 대하여 ꡒ숙종2년에 특히 불행했던 일도 없고 나라가 망했던 것은 더욱 아니었다ꡓ고 하였다(「고조선 위치에 대한 제설의 검토」).
10) 宋찬植은 『규원사화』의 저자를 한말․일제시대의 大倧敎系 인물로 보았다(「위서변」). 趙仁成은 檀君敎와 관련된 인물이 尹德榮의 후원을 받아『규원사화』를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규원사화』론 첨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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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引用된 古記들에 대한 檢討 

韓永愚와 李相時는『규원사화』저자가『震域遺記』․『朝代記』․『古朝鮮秘記』․『誌公記』․『三聖密記』․『四聞錄』․『三韓拾遺記』등 道家 계통의 역사서와 문집을 참고하였다고 하면서 이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11) 특히 이상시는, 그렇기 때문에 「단군기」의 내용이 첫째 『三國遺事』보다 문헌고증적 근거가 연원적으로 더 오래되었고, 둘째  뿌리가 깊고 신뢰성이 두터우며, 세째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타당성을 갖고 있으며, 네째 『규원사화』저자가 참고하지 않은 문헌에 나오는 사실과 일치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를 들어「단군기」에 나오는 단군조선사가 국사교과서에 반영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제부터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 (상략)하지만 다행히 산골짜기에서 淸平이 지은 『진역유기』를 얻었다. 그 중에는 三國 이전의 옛 역사가 있는데, 비록 간략하고 상세하지는 않지만 항간에 전하는 구구한 설에 비하면 오히려 사기를 높일 수 있는 것이었다(「서문」). 

옛날에 淸平山人 李茗이란 사람이 있었으니 고려때 사람으로 『진역유기』 3권이 있다.(이는)『조대기』를 인용하여 우리 나라의 옛 역사를 적은 것이다. 一然의 책(『삼국유사』)과 비교하면 심히 서로 다르며, 그중에는 仙家의 말이 많다. (중략) 道家는 이미 檀儉神人이 창조한 원류를 계승하였고 또 문헌의 진맥을 얻었으니, 東史(우리 나라 역사)를 논한 것으로는 승려들이 기록한 것보다 휠씬 낫다. (숭려들의 기록은) 대부분 견강부회와 억설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차라리 청평의 말을 취해서 의심하지 않는다(「단군기」서문). -

위에 따르면 『진역유기』는 고려시대 도가의 한 사람인 이명이『조대기』를 저본으로 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진역유기』는 특히「단군기」를 쓰는데 크게 참고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체「서문」이 아니라 「단군기」서문에서 『진역유기』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 것이나 실제 이명의 설이 인용되고 있는 곳이 「단군기」뿐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따라서「단군기」의 골자는 저자가 『진역유기』에서 보았다는 ꡐ三國 이전의 옛 역사ꡑ에 의거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에 나온 『조대기』는 저자가 「단군기」에서   - 청평이 쓴 것은 대개 渤海人이 秘藏하였던 것에 근거한 것이다. - 라고 한 것을 보면, 발해인들이 고려에 망명하면서 가져온 역사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저자가 『조대기』를 참고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만약 『조대기』를 보았다면 굳이 『진역유기』에 의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자가 실제 참고하지 않았지만 그 이름이 나오는 경우는 더 있다. 『고조선비기』․『지공기』․『삼성밀기』등이 그러하다. 이들의 명칭은 『규원사화』에 단 한번씩 등장한다. 

- 또 『조대기』라는 이름이 『조선비기』․『지공기』․『삼성밀기』등의 책(이름)과함께 世祖가 내린 求書의 유시에 보이거늘 金氏(金富軾)시대에 홀로 이 책(『조대기』)이 없었겠는가(「단군기」). - 

이것은 저자가, 이명이『조대기』를 보았으므로 김부식도 역시 그러하였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에는 ꡐ삼국 이전의 옛 역사ꡑ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고 김부식을 비난하면서, 그 비난의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참고한 것은 세조가 내린 求書의 유시가 나오는 『세조실록』(7, 3년 5월 戊子 조)이나 기타 다른 문헌이지 『고조선비기』등이 아님은 명백한 것이다.12) 

한편 단군의 가르침을 설명하면서 

- 이외에 (여러) 서적 및 『사문록』․『삼한습유기』와 같은 도가문집 등 諸書에 흩어져 나오는 것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단군기」). -




고 하였음을 보면, 『사문록』․『삼한습유기』등은 그 내용이 일부 『규원사화』에 반영된 듯하다.13) 그렇다면 실제 저자가 참고하였다고 할 수 있는것 중에서 그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은 『진역유기』․『사문록』․『삼한습유기』뿐이다. 

이중 『사문록』과『삼한습유기』는 조선시대 도가의 한 사람인 趙汝籍(宣祖~仁祖)이 지은 『靑鶴集』14)에 그 내용이 일부(?) 인용되어 있다. 『청학집』에 인용된 『삼한습유기』에서는 『규원사화』와 일치하는 것을 찾을수 없다. 반면에『사문록』과「단군기」가 일치하는 곳은 세 군데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단군기」에는 『사문록』이 인용된 셈이 된다. 그렇지만 『사문록』에 단군의 말년이 

- 세상을 주재하기 1084년에 阿斯達山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 -
라고 되어 있는 것은 단군조선의 47代 임금을 설정하고 있는「단군기」와는 전혀 다르다.따라서「단군기」의 주된 참고 자료는 역시『진역유기』였다고 할 수 있다.

「단군기」에서는 『진역유기』로부터 직접 인용하였다고 되어 있는 부분을 네군데 찾을 수 있다. 그중 둘은 王儉城의 위치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발해사에 대한 것이며, 또다른 하나는 고려시대 8聖에 관한 것이다. 이중 마지막 것을 보도록 하자. 

- 고려 仁宗 9년에 요망한중 妙淸의 말로 인해 八聖堂을 西京 林原宮 안에 두었다. 淸平이 말하기를 ꡒ제1은 護國白頭嶽의 太白仙人이니 大慧․大德이 있어 主神을 도와 大界를 만들었다. 즉 桓雄天王을 일컬음이다. 제2는 龍圍嶽의 六通尊者이니 萬理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人間의 禍福을 관장한다. 제3은 月城嶽의 天仙이니 風雨를 관장하는 神이다. 제4는 句麗平壞의 仙人이니 光明을 관장하는 神이다. 제5는 句麗木멱의 仙人이니 人間의 壽命을 관장하는 神이다. 제6은 松嶽의 震主이니 大勇․大力을 갖고 神兵을 관장하여 항상 國都를 지키고 외적을 물리친다. 즉 옛날 蚩尤氏의 神이다. 제7은 甑城嶽의 神人이니 四時․곡물․초목의 일을 관장한다. 즉 옛날 高矢氏의 神이다. 제8은 頭嶽의 天女이니 地上의 선악을 관장한다. 즉 神市氏의 부인이며 桓檢神人의 어머니이다. 모두 主神의 조절과 헤아림 아래서 천하의 모든 일을 관장하고 다스리는(治) 神이다ꡓ라고 하였다. - 

위에 나오는 이명의 설은 발해인들이 소장하였다는 『조대기』를 참고한 것이 아니라 이명 자신의 것이다. 왜냐하면 송악(지금의 개성)이나 월성악(청주)등은 단군조선이나 고구려․발해와 전혀 관계없는 지명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둘 때 우선 다스린다는 것을 ꡐ治ꡑ로 쓰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게 된다. 왜냐하면 ꡐ治ꡑ는 고려 성종의 이름이므로 고려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ꡐ治ꡑ를 피하여 같은 뜻의 ꡐ理ꡑ를 사용하였던 것이다(避위). 뿐만 아니라 각 神들이 맡고 있었다는 업무가 실제 고려인들이 생각하고 있었먼 것과 다른 경우를 찾을 수 있다. 『고려사』

 

4, 현종 3년 9월조에 

- 이달에 서경 木멱祠의 神像을 만를었다. - 고 하고, 崔滋의「三都賦」(『東文選』2)에 

- (東明王의) 혼령이 계시는 곳 平壞神祠가 아닌가. 風伯을 부르고 雨師를 지휘하시니 노하시면 대낮에 번개와 우박․나무․돌이 섞여 날리네. 또 木멱神祠는 농업을 관장하니 애써 갈지 않아도 풍년들어 볏가리가 산더미같으며 公私로 두호하여 큰 이불로 덮어 주네. -

라고 되어 있음을 보면, 우선 목멱신이 고려시대에 농업을 관장하는 신으로 받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15) 그리고 평양신은 동명왕으로 풍우를 관장하는 것으로 믿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에 나온 이명의 설에 따르면 농업을 관장하는 신은 증성악 신인이고 풍우를 담당하는 신은 월성악 천선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역유기』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셈이다. 여기서『진역유기』가 『청학집』을 비롯한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고 오직 근대에 만들어진 『규원사화』․『태백일사』(이에 대하여는 곧 살펴보게 될 것이다)에만 보인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즉 『진역유기』는 『규원사화』를 저술하면서 그 저자가 꾸며낸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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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韓永愚, 「17세기의 반존화적 도가사학의 성장」, pp.293~297 및 李相時, 『檀君實史에판한 文獻考證』, 1987, pp.163~190.
12) 趙仁成, 「현전 『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일 검토」, p.66l의 註 (26).
13) 필자는 위의 논문, p.661의 註 (26)에서『사문록』․『삼한습유기』가 직접 참고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그를 수정한다.
14) 韓永愚, 「解題」, 『揆園史話․靑鶴集』, 1976, p.viii.
15) 李丙燾, 『高麗時代의 硏究』(개정판), 1986,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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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桓檀古記』에 대한 史料批判

(1) 著述(編纂)年代와 著(編)者

『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에는 淸나라 때부터 사용된 지명이 자주 나오고 있다. 그중 두 가지만 예로 들도록 하겠다. 

- 戊子 7년 寧古塔 서문 밖 甘勿山 아래에 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지냈다(『단군세기』33세 단군 甘勿). 
癸亥 2년 帝가 寧古塔에 순행해 흰 노루를 얻었다(『북부여기』하 6세 단군 古無胥). 
戊子년에 馬韓이 명을 받들고 京師에 와 寧古塔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諫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태백일사』「마한세가」하). - 

위에 나오는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 전설과 관련하여 생긴 지명이다. 따라서 영고탑이라는 지명은 청나라 이전에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16) 

- (高朱蒙) 32년 甲午 10월에 北沃沮를 쳐서 멸하고 이듬해 乙未에 卒本으로부터 訥見으로 도읍을 옮겼다. 訥見은 지금의 常春 朱家城子이다(『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丁巳 2년 淸海의 褥薩 于捉이 군대를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니 帝가 常春에 피하고 구월산 남쪽 기슭에 新宮을 지었다(『단군세기』9세 단군 阿述). - 

朱家城子가 있는 곳은 常春이 아니라 長春이다. 따라서 상춘은 장춘의 誤寫일 것이다. 그런데 장춘이라는 지명은 청 嘉慶年間(1796~1820)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군세기』와 『북부여기』가 고려 말에, 『태백일사』가 조선 전기(중종대?)에 쓰여졌다고 되어 있는 것이 거짓임을 알게 된다. 이들의 실제 저술연대는 대체로 1796년 이전일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는 후대의 위서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삼성기」도 이들의 예에 비추어 역시 그러할 것임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언제 쓰여진 것일까. 

- 辛丑 원년 (중략) 제한의 선악을 살펴 상벌을 신중히 하며 도랑을 파서 農桑을 권하고 학교를 세워 학문을 일으키니 文化가 크게 진보하여 명성이 날로 드러났다(『단군세기』 2세 단군 扶婁). 

杏村侍中(이암)은 저서가 3종 있다. 그는 『단군세기』를 지어 原始國家의 體統을 세웠고 또 『太白眞訓』을 지어 桓檀이 서로 전한 道學․心法을 紹術하였으며 『農桑集要』는 經世實務의 학문이다(『태백일사』「고려국본기」). - 
위에 나오는 ꡐ문화ꡑꡐ원시국가ꡑ 등이 근대적 용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17) 그런데 『단군세기』의 「서문」에서 - 나라가 形이라면 역사는 魂이다. 形이 魂을 잃고 보존될 수 있는가. - 고 하고, 외세의 간섭에 대한 구국의 방책으로 『단군세기』를 쓴다고 하고 있는 것은 朴殷植이 『한국통사』(1915)「緖言」에서 - 대개 나라는 形이고 역사는 神이다. 지금 한국의 形은 허물어졌으나 神만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것이 痛史를 저술하는 까닭이다. 神이 존속하여 멸하지 않으면 形은 부활할 때가 있는 것이다. - 라고 한 것과 다름이 없다.18) 따라서 단군세기는 우리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던 1910년을 전후하여(아마도 1915년 이후일 듯)쓰여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단군세기』서문에서 말하고 있는 외세란 元나라의 간섭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상은 얼제의 침략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음을 살펴봄으로써 그 저술연대를 보다 좁혀 볼 수 있다. 
- 淵蓋蘇文은 蓋金이라고도 하는데 姓은 淵氏이다.그 선조는 鳳城人이다.아버지는 太祖라고 하고 할아버지는 子遊라고 하며 증조는 廣이라고 한다. 모두가 莫離支였다.(『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 이것은 『조대기』로부터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태백일사』에 인용된 『조대기』는 다음에서 보게 될 바와 같이 근대에 조작된 것이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祖父의 이름이 子遊와 太祖라는 것은 1923년 중국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인 泉男生基誌가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알려졌다.19) 그러므로 『태백일사』는 1923년 이후에 작성된 것이 된다. 그리고, 이로 미루어 『단군세기』를 비롯한 나머지 책들도 1923년 이후에 쓰여진 것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미 의심하였던 바와 같이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가 펀찬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태백일사』 등을 짓고, 그것들을 모아 『환단고기』를 편찬한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1949년 오형기로 하여금 인쇄본이 아닌 필사본 『환단고기』를 정서시켰다고 하며, 1979년 그것을 영인하여 공개한 이유립이 아닐까. 

이와 같이 이유립을 실제 편저자로 생각할 경우, 『단군세기』와 『태백일사』에 『규원사화』와 거의 일치하는 부분이 적지 않은 까닭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유립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1920년대 말 始興의 鹿洞書院에서 수학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무렵 녹동서원서에는 『규원사화』를 등사하여 판매하였다고 한다. 현전하는 등사본 『규원사화』가 바로 이때 등사된 것으로 여겨지거니와, 그렇다면 이유립은 당시 『규원사화』를 보았음이 분명하다.20) 이 점에서 『환단고기』와 『규원사화』가 일치하고 있는 것은 이유립이『환만고기』를 편저하면서 『규원사화』를 중요한 참고자료의 하나로 삼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단고기』는 1920년대 말 이후에 이유립에 의해 저술․편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환단고기』가 1949년 정서되었다고 하므로 이유립은 1949년 이전 멀지 않은 시기에 『환단고기』의 초고를 작성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후 그것을 수정․보충하여 l979년 세상에 내놓은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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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李道鶴, 앞의「해제」, p.207.
17) 주 (16)과 같음.
18) 李純根, 「고조선 위치에 대한 제설의 검토」
19) 葛城末治,『朝鮮金石攷』, 1935, p.169.
20) 趙仁成,「『규원사화』론 첨보」, pp.17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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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引用된 古記들에 대한 檢討

『환단고기』에 실린 네 책 중 『태백일사』에는 고기로 여겨지는 문헌들이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미 세조 때에 求書의 대상이 되었던『表訓天詞』․『大辨經』․『朝代記』․『三聖密記』등(『세조실록』7, 3년 5월 戊子)과 『진역유기』․『三韓秘記』등이 그것들이다. 이중 『표훈천사』․『대변경』․『조대기』․『삼성밀기』등은 그 이름만이 전할 뿐 『환단고기』를 제외한 다른 문헌에도 전혀 인용된 바 없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다음을 보도록 하자. 

- 옛날에 桓仁이 있어 天山에 내려와 살았다. (중략) 친하고 친하지 않음의 구별이 없었으며 상하가 차등이 없었다. 남녀가 권리를 공평히 하였으며(男女平權) 노소가 일을 나누니 이 시절에는 비록 법규와 명령이 없어도 스스로 和樂과 循理를 이루었다(「환국본기」). 
(상략) 너는 노고를 아끼지 말고 웃사람들을 이끌고 下界에 내려가서 開天施敎하고 主祭天神하여 父權을 세우라(「신시본기」). - 위에 제시한 것은 『조대기』로부터 언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ꡐ男女平權ꡑ․ꡐ父權ꡑ이니 하는 말이 근대에 들어와 쓰여졌던 것임은 재언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조대기』는 근대에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위와 같은 말들이 나오는 『조대기』가 세조의 求書 대상이 되었던 『조대기』일 수 없음은 명백한 것이다. 여기서『조대기』의 경우를 미루어 생각하면, 『환단고기』에 인용되고 있는 고기들은 모두 근대에 위조된 것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즉 書名만 빌어 왔을 뿐 그 내용은 근대인이 쓴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역유기』는 저자가  『규원사화』를 참고하면서 빌어온 것이 틀림없다.


5.맺음말 - 『揆園史話』․『桓檀古記』와 韓國古代史 硏究 

이제까지 필자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가 1920년대 혹은 그 이후에 만들어진 僞書임을 살펴보았다. 아울러 거기에 인용된 이른바 古記들도 역시 근대 이후에 조작된 것임을 밝힐 수 있었다. 따라서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에서 근대 민족주의사학자들의 한국 고대사에 대한 연구 성과와 비슷한 점들을 적지않게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규원사화』에 나오는 김부식에 대한 호된 비난이나 『태백일사』에 설정되어 있는 三韓은 申采浩의 김부식에 대한 비난과 그의 前三韓을 연상시킨다. 두 책 (특히 『태백일사』「환국본기」)에 보이는 광명숭배는 崔南善의 이른바 不咸(밝)文化를 떠 올리게 한다. 이것은 아마도 1920~1930년대 초에 집중적으로 발표되었던 신채호나 최남선 등의 연구21)를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저자들이 받아들인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혹 『규원사화』․『환단고기』는 史論集으로서의 의의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韓末․日帝시대에 단군신앙이 고양되면서 단군신앙에 입각하여 단군과 단군조선사를 다룬 『檀奇古史』․『神檀實記』등이 출현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단기고사』는 발해 武王 원년(719)에 大祚榮의 아우 大野勃이 짓고, 발해의 文人 皇祚福이 중간하였다는 檀君朝鮮과 奇子朝鮮의 역사서이다. 여기에는 단군조선의 47대 임금명, 재위기간, 그들의 치적이 나오고 있다. 그에 따르면, 단군조선은 정치군사문화 등 모든 면에서 중국보다 우월하였으며, 특히 그 문화는 동양문화의 원류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宋찬植이 ꡒ『단기고사』가 위서임은 천하가 다 아는 일ꡓ22)이라고 하였을 정도로 그것이 위서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07년 學部 편집국장 李庚職이 썼다는 「『檀奇古史』重刊序」나 1912년 신채호가 썼다는「『檀奇古史』重刊序」등을 보면,『단기고사』가 처음 출현한 것이 1900년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내용 곳곳에서 저자의 단군에 대한 신앙심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단기고사』는 한말 단군신앙을 가진 사람이 만든 宗敎史話이다.23)

『신단실기』의 저자인 金敎獻은 1903년 『文獻備考』纂輯委員, 1909년 奎章閣副提學으로 『國朝寶鑑』刊印委員을 역임한 인물로서 박식한 학문을 바탕으로 대종교의 역사와 교리를 정리하였다.24) 그중 그의 박식함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것이 1914년에 지은 『신단실기』이다. 『신단실기』는 신성한 단군에 대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는 제목대로 단군에 관련된 기록이나 학설․풍습 등을 수집하여, 그것들을「檀君世紀」․「三神上帝」․「敎化源流」등 19개 항목으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참고되었음직한 『단기고사』가 전거로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단군조선의 歷年은 1212년이고, 傳世는 알수 없다고 하고 있을 뿐, 『단기고사』에 나오는 역대 임금명 등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군과 단군조선에 견강부회된 사실이 많다는 점에서 『신단실기』도 역시 종교사화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25) 

여기서 우리는『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게 된다. 단군신앙의 입장에서 각종 기록․학설을 수집하고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두 책은 우선 『신단실기』와 유사하다. 하지만 『단기고사』와 마찬가지로 사실을 위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는 『신단실기』보다 더 종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규원사화』와『환단고기』는 단군신앙과 관련된 종교사화일 뿐 우리의 한국 고대사 연구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규원사화』는 1920년대 일제의 지배에 대항하였던 민족주의적 움직임의 한 예로서 일정한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환단고기』가 일제하에서 집필되었다면, 그것에도『규원사화』와 마찬가지의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일찌기 신채호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을 음미해 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 역사를 연구하려면 史的 材料의 수집도 필요하거니와 그 재료에 대한 선택이 더욱 필요한 자라. 古物이 山같이 쌓였을지라도 古物에 대한 학식이 없으면 日本의 寬永通寶가 箕子의 유물도 되며, 十萬冊의 藏書樓 속에서 坐臥할지라도 書籍의 眞僞와 그 내용의 가치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면, 後人 僞造의 『天符經』등도 壇君王檢의 聖言이 되는 것이다(「三國志 東夷列傳 校正」, 『東亞日報』1925년 l월 26일;『朝鮮史硏究草」, 1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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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宋찬植, 「위서변」.
23) 韓永愚, 「1910年代의 民族主義的 歷史敍述 - 李相龍․朴殷植․金敎獻․『檀奇古史』를 중심으로 -」, 『韓國文化』, 1981, pp.132~134.
24) 朴永錫, 「大倧敎의 民族意識과 獨立運動 - 金敎獻敎主時期를中心으로 -」, 『韓民族獨立運動史硏究 - 滿洲地城을 中心으로 -』, 1982, p.157.
25) 韓永愚, 앞의 논문, pp.116~124 안악 3호고분의 낙랑(樂浪) 평동장군 묘지해석 안악 3호고분 묘지(墓誌)의 원문

사진1. 冬壽墓誌 (崔淳雨 "韓國美術")

宋靜淑 엮음

金石資料   釜山大學校 社會科學大學   文獻情報學科   1992. 9.
이 해석은 KBS역사스페셜 홈페이지에 최초로 발표한 것인데 약간 보정(補正)하였다.

永和十二年十月戊子朔卄六日
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總夷校尉樂浪
玄토 帶方太守都
成幽州遼東平郭
鄕敬重終壽字
王年六十九薨官 (59字)


우리나라의 문법대로 풀어본다.
"영화 12년(356AD) 10월 무자초하룻날에서 26일까지 사지절도독제군사인 평동장군을 안온하게 모시는 일의 총괄은 낙랑(樂浪)의 예하장군이 합니다.
유주요동평곽 12500호(戶)를 다스린 현토대방태수도 수종(壽終)의 추도식(追悼式)을 장중(莊重)하게 거행합니다. 자(字)자의 뜻은 본 이름이 아닌 다음의 왕칭(王稱)을 의미한다.
왕년(王年) 69세에 훙관(薨官) (세상에 공을 세운 왕이나 제후가 죽었다 는 뜻이다.)

참고사항

①겨울동 글자로 보아온 한문자는 이 동자(冬字) 좌편의 점하나가 실사변을 약서했다고 보았다. 백제국왕태비가 죽었다는 기록은 수종(壽終)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그 반대로 종수(終壽)로 되어 있다.
②향(鄕)은 행정구역의 하나이다. 주한(周漢)시대에는 12500호(戶)라고 되어있다.
③성(成)자는 다스림의 뜻으로 본다.
④경중(敬重)은 장중하게 하는 뜻으로 보았다.
⑤KBS역사스페셜 大고구려 염수의 비밀에서 유주(幽州)의 영역이 후연의 영토였던 북경인근으로 밝혀졌다는 말은 한한대자전의 유주유자가(幽州猶自可)란 불교어를 보고 한 말인 듯 한데 이 지칭은 송대(宋代)이후의 유주란 이야기이다. 한진(漢晋)시대 유주는 요동(遼東), 조선(朝鮮)의 땅이라고 되어 있다.
⑥대방(帶方)은 군명(郡名)인데 한나라말 낙랑군 남부지방이 대방땅이라고 되어있다.
⑦사지절도독 즉 자사(刺史)인 여러 군사를 총체적으로 관할한 평동장군이 죽어서 호상하는 임무는 낙랑 예하 장군이 주관하였다.
※ 세계미술전집 제4권 서기 1930년경 일본의 평범사 (平凡社)발행을 보면 서진(西晋)의 건흥원년 서기 313년에 이르러 낙랑(樂浪)은 고구려 때문에 망해버렸다고 되어 있다. 한국미술전집 4권 동화출판공사발행을 보면 김원룡선생은 종수(終壽)를 동수(冬壽)란 이름으로 보아 낙랑의 평동장군이 죽은 해에 항복하여 고구려로 귀화하였다고 하였고 평동장군이 이미 매장된 다음해인 서기 357년에 사망했다고 하였다.

… 한번 웃어볼까요?

아무리 무지한 사람이라도 자기 이름을 겨울목숨(冬壽)이라고는 작명(作名) 안한다고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러나 이 평동장군 속칭 동수 묘지(墓誌)적으로 보면 어느나라에 예속된 시대의 왕묘(王墓)란 기미가 조금도 안보인다는 사실이다.

동진(東晋) 목제시대의 영화13년은 없다.
⑧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黃海道 安岳郡 龍順面 柳順里) 안악3호분(安岳三號墳) 전실서벽(前室西壁)의 평동장군(平東將軍) 즉 속칭 동수(冬壽) 묘지(墓誌)는 드러난 이래 동양의 어느 나라 학자도 판독 해석을 못한 것이다.

⑨다시 더 쉽게 풀어 본다. 이 묘지에는 서기 356년 10월 1일에서 26일까지 연합군의 총사령관 격인 사지절도독의 상례를 그 예하의 낙랑의 장군이 주관하여 치하(治下) 12,500호(戶)의 군민(郡民)과 아울러 장중한 추도식을 거행하였고 세상에 공을 많이 세운 왕은 69세가 되는 해에 돌아가셨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묘지(墓誌)는 4세기 중기에 이 곳에 있었던 실제 상황이고 이 기록이 진실이면 동양의 이 부분의 역사와 특히 삼국사기 가운데 고구려편의 여기에 연관되는 곳을 다시 써야 되는 불가피한 이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이런 사실은 엄청난 역사적인 오차를 발견한 증명이 되는 바이다. 그러니까 그 어떤 역사책이라고 해도 잘못된 기록이 적잖게 있다고 보아서 역사 탐구의 첨병이면 그런 미흡한 사기(史記)를 바로 세우는 역할이 주임무임은 알고 있는 바 일반상식이다.

광개토지호태왕이 승하한 년(AD414)보다 58년전(AD356)에 평동장군이 훙관하였다고 되어 있는 이 묘지는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은 이 때에도 엄존해 있었다는 고증이 되는 바라 고구려의 고국원왕26년(故國原王二十六年)에는 이 대방지역(帶方地域)이 고구려의 땅이 아니었다는 결론도 된다. 그리고 이 고분 현실(玄室)의 분위기는 향로등이 비치되어 있는 사실로 보아 어쩌면 사지절도독 평동장군을 안치할 때의 숙연한 의식장면을 그린 그림이지 싶다. 수많은 고분이 발굴되었지만 그런 고분속에서 낙랑(樂浪)이란 군명(郡名)의 글자가 사지절도독의 묘지에서 발견됨은 오직 하나인 사실도 주목할 점이라고 여기는 바이다.

* 진실한 역사 탐구에 열중할 뿐 동양인(東洋人)은 한 혈통(血統)인데 어느 나라 누구의 편도 아닌 입장에서 쓰는 글이니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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