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규원사화(揆園史話) 5. 단군기(檀君紀 )

영지니 2008. 3. 4. 19:30

檀君紀

 

神市氏, 寔爲東方人類之祖, 鴻荒之世, 開 之業, 賴以成焉, 盖檀君以前, 首出之聖人也. 古有淸平山人.李茗[高者](者, 高)麗時人, 有《震域遺紀》三卷, 引《朝代記》, 備載我國故史, 比於一然之書, 甚相逕庭, 中多仙家語. 余以爲, 我國以神設敎, 從古爲俗, 沈漸於人心者, 久矣. 故, 說史者, 不可只擬班.馬之筆而踞 焉. 夫漢自是漢, 我自是我也, 豈堂堂震域, 必擬漢制, 以後乃足乎!  國史蕩失於屢經兵火之餘, 今僅存者, 只是道家及緇流之所記傳, 而僥倖得, 保於岩穴者也. 道家旣承, 檀儉神人所創之源流, 而又得文獻之殘脈, 則其論東史者, 大有愈於緇流所記, 多出於牽强傅會, 臆爲之說者也. 余寧取淸平之說, 而欲無疑云.


신시씨는 진실로 동방 인류의 조상으로서 태고적 세상이 처음으로 개벽하던 일들이 모두 그에게 힘입어 이루어 졌으니, 무릇 단군 이전에 처음으로 나타난 성인이다. 예전에 청평산인(靑平山人) 이명(李茗)이 있었는데, 그는 고려 때의 사람으로서《진역유기(震域遺紀)》 세 권을 저술하였다. 이는《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우리나라 옛 역사를 갖추어 실은 것으로서 일연(一然)의 책과 비교하면 서로 사뭇 큰 차이를 보이며 그 가운데는 선가(仙家)의 말이 많다. 내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신인(神人)이 교화를 베푼 것이 오래 전부터 풍속이 되어 사람의 마음에 점차 스며들어 베어 있는 지가 이미 오래인데,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어찌하여 단지 반고나 사마천의 글만을 흉내내며 옴짝달싹을 못하는가! 한(漢)나라는 한(漢)나라이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인데 어찌하여 당당한 진역(震域)을 꼭히 한나라 정도에 견준 연후에야 만족을 하는가! 항차 나라의 역사가 몇 번에 걸친 병화(兵禍) 끝에 씻은 듯이 소실되고 지금에 근근히 남아 있는 것은 단지 도가와 불가에서 기록하여 전하는 것뿐이었으나 요행히 바위굴에 간직되어 오던 것을 얻게 되었다. 도가는 이미 단검신인(檀儉神人)이 창제한 근본 흐름을 이어받았으며 게다가 이렇게 문헌의 잔맥을 얻게 되었으니, 해동(海東)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 견강부회하고 억측이 많은 불가의 기록에 비해 훨씬 낳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청평의 말을 취함에 의심이 없는 것이다.


桓雄天王御世, 凡闕千歲, 是卽神市氏. 蓬亭柳闕而居, 陶髮跨牛而治, 處無爲之事, 敷自然之化, 開創成業, 源流萬世. 及其暮年, 見功業已完, 民物樂生, 登太白山, 乃置天符三印於池邊石上檀木之下, 因化仙乘雲而朝天. 是以, 名其池曰朝天. 高矢氏諸人, 奉天符三印, 共推其子桓儉神人, 爲君長, 是爲壬儉. 壬儉者, 君長之意也, 新羅所謂尼師今者, 亦此類也. 以今追計, 約算四千餘歲, 正與唐堯同時, 世俗所謂與堯幷立者, 是也. 因稱檀君, 檀君者, 朴達壬儉之譯也. 盖神市氏, 已降於檀木之下, 而桓儉神人, 復踐 於檀樹下, 故因以檀爲國名, 則檀君者, 檀國之君也 而東語謂檀曰朴達, 或曰白達, 謂君曰壬儉, 當時無漢字, 故只稱白達壬儉, 而後世之述史者, 譯以檀君, 復傳至後世, 則只記檀君字, 而不知檀君之爲白達壬儉之譯, 此漢字之功罪相半也. 今若以諺書幷用, 則必無是弊, 而草野愚夫, 亦可易曉, 文化之啓發, 更可速矣. 此未遑長述.


환웅천왕이 세상을 거느린지 무릇 궐천년이니, 그가 바로 신시씨이다. 쑥대 정자와 버드나무 궁궐에 거처하며 정성으로 사람을 교화하고, 앉아서 쉴 틈도 없이 다스리며 행함이 없는 듯이 일을 처리하여 자연스러운 교화를 널리 펴고는 나라를 열어 처음으로 위업을 이루니 그 근본이 만세로 이어졌다. 그 말년에 이르러 공들인 위업이 이미 완성되고 백성과 사물들이 즐거이 사는 것을 보고는 태백산에 올라 하늘의 부절인 세 가지의 인(印)을 못 가의 돌 위 박달나무 아래에 놓고 신선으로 변화하여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랐다. 때문에 그 못을 이름하여 '조천지(朝天池)'라 하는 것이다. 고시씨와 모든 사람은 하늘의 부절인 세 가지의 인을 받들고 그의 아들인 환검신인(桓儉神人)을 다함께 추대하여 군장으로 삼으니 이로서 임금이 되었다. '임금'이라 함은 군장을 뜻하는 것으로서, 신라에서 이른바 '니사금'이라고 말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은 종류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셈하면 대략 4천여 년이 되니 바로 당요(唐堯)와 같은 때로서, 세속에서 말하듯이 [요(堯)와 아울러 함께 일어났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단군(檀君)'이라고 이름하는데, '단군'이란 '박달임금'의 번역이다. 대저 신시씨가 이미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왔고 환검신인이 박달나무 아래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기에 '단(檀)'으로 나라이름을 삼게 된 것이니, '단군'이라 함은 박달나라의 임금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말에 '단(檀)'을 '박달' 혹은 '백달'이라고 하며 '군(君)'을 '임금'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한자가 없었던 까닭에 단지 '백달임금'이라고 하였던 것을 뒤에 역사를 서술하던 자가 번역하여 '檀君(백달임금)'이라 하였고, 다시 후세에 전해지며 단지 '檀君'이라는 글자만 기록하게 되었기에 '檀君'이 '백달임금'의 번역인 줄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한자의 공과 죄가 반반이라, 지금에 만약 언문과 함께 쓴다면 이러한 폐단은 반드시 없을 것이니, 곧 들녘의 어리석은 백성도 쉽게 깨우쳐 문화의 계발이 더욱더 빨라질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於是相地於諸州, 乃建都于太白山西南 牛首河之原, 曰壬儉城. 今滿洲.吉林之地, 有蘇密城, 在於涑沫江之南, 此卽其地也. 涑沫江, 亦稱蘇密河, 乃古之粟末水也. 新羅時, 有粟末靺鞨者, 占居粟水之地, 及大氏之興, 爲其先 . 盖靺鞨者, 古肅愼之後, 而亦檀帝遺族也. 後屬凌夷, 盡擲先祖舊(彊)[疆]於他人之手, 而區區靺鞨一支, 猶能( )[捿]息於 楡之地 大氏一號, 影從者數十萬, 天門大捷, 國基賴定, 夫豈偶然也哉! 盖蘇密 涑沫 粟末, 皆與牛首之意相近, 歷世傳訛, 猶不失其意, 豈聖人所宅, 神化洽被, 經萬載而其韻不絶者耶! 今, 春川.淸平山南十餘里, 昭陽.新淵兩江合襟之處, 有牛頭大村 山中展 而江流抱回, 是爲貊國故都, 貊國亦出於檀氏之世, 則建都襲名, 必有之理也.


그리하여 모든 고을의 지세(地勢)를 살피고는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牛首河)의 벌판에 도읍을 세워 '임금성(壬儉城)'이라 하니, 지금의 만주 길림 땅에 소밀성(蘇密城)이 있어 속말강(涑沫江)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땅이다. 속말강은 또한 소밀하(蘇密河)라고도 일컬어지며 곧 옛날의 속말수(粟末水)이다. 신라 때에 속말말갈(粟末靺鞨)이 있어서 속수(粟水)의 땅을 점거하고 있다가 대조영이 흥기하자 그 선봉이 되었다. 대저 말갈은 옛 숙신(肅愼)의 후예로서 이 또한 단군의 자손인데, 뒤에 점차 쇠퇴해져 선조의 옛 강역을 모조리 다른 사람의 손에 던져 주고는 구구하게 말갈의 일족이 되어서 여전히 고향 땅에 깃들어 살았었다. 대씨(大氏)가 한 차례 호령하니 그 그림자를 쫓는 자가 수십만이 되었으며, 천문령(天門嶺)에서 크게 이기고는 나라의 기초를 이로서 바로잡게 되었으니, 무릇 어찌 우연이라고만 하겠는가. 대개 소밀(蘇密)속말(涑沫)속말(粟末) 등은 모두 '우수(牛首)'의 의미와 서로 가까운데, (그 말은) 대대로 그릇되게 전해졌지만 오히려 그 뜻을 잃지 않았으니, 이는 성인이 자리잡은 곳에 신의 조화가 두루 미쳐 만세가 지나도록 그 운치가 끊어지지 않았음이 어찌 아니겠는가. 지금의 춘천 청평산 남쪽 십여 리에 소양(昭陽)과 신연(新淵)의 두 강이 합쳐지는 어귀에 우두대촌(牛頭大村)이 있으니, 산 속에 드넓게 펼쳐져 있으면서 강의 흐름을 안고 도는 이곳이 바로 맥국(貊國)의 옛 도읍지이다. 맥국 역시 단군 때에 나왔기에 도읍을 세우며 그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니, 반드시 그러한 이치가 있었을 것이다.


淸平云: [粟末水之陽, 有渤海.中京.顯德府地, 此乃檀君始都處, 故壬儉城卽平壤也. 北去上京.忽汗城六百里]云, 又曰: [高王夢有神人, 授以金符曰{天命在爾, 統我震域} 故, 國號曰震, 建元曰天統, 恒敬祀于天, 及至子孫, 驕逸而漸廢, 亦幷事儒.佛, 國遂衰]云. 今, 內外載籍, 幷無是語. 盖忽汗之敗, 遼虜凶殘, 室宮庫藏, 焚燒略盡, 復豈有載籍之得存者耶. 雖然, 渤海王子大光顯以下, 來投於高麗者甚衆, 中多公侯卿相及慷慨泣血之士 淸平所記, 盖有據於渤海人之所秘藏者也.


청평이 말하기를 [속말수(粟末水)의 북쪽에 발해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의 땅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단군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임금성으로 곧 평양이다. 북으로 상경(上京) 홀한성(忽汗城)과는 육백여 리 떨어 졌으며]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고왕(高王)의 꿈 속에 신인이 나타나 금부(金符)를 주며 말하기를 {천명이 네게 있으니 우리의 진역(震域)을 통치하라}고 하기에 나라의 이름을 '진(震)'이라 하고 '천통(天統)'이라 건원하며 항상 하늘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자손에 이르러 교만하고 안락함에 빠져 점차 이를 폐지하고 또한 유학과 불교를 아울러 섬기니 마침내 쇠퇴하여]라고 하였다. 지금 나라 안팎의 서적에는 모두 이 말이 없다. 아마도 홀한의 패배 때 요나라 오랑캐의 흉악한 잔당들이 궁실이며 창고에 감추어져 있던 것을 거의 모두 불살라 버렸으니, 다시 어찌 서적 가운데 남아 존재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발해왕자 대광현(大光顯) 이하 고려에 투항해 온 자가 매우 많았는데, 그 중에는 공경대부나 제후와 재상 및 비분강개하는 의기로운 선비도 많았으니, 청평이 기록한 것은 아마도 발해인들이 비밀리에 소장한 것에 근거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可怪, 金富軾爲仁宗修《三國史記》, 而二千載往聖之遺烈, 闕而無述, 只以[海東三國, 歷年長久, 古記, 文字蕪拙, 事迹闕亡, 前言往事幽昧]如彼等語, 謀逃其責. 至於東川遷都之年, 而僅有[平壤者, 本神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儉).]等[自](字). 當時較今, 猶近古五百年, 而古記之散亡無徵, 曾若是其甚耶! 且《朝代記》之名, 與《[古]朝鮮秘記》.《誌公記》.《三聖(蜜)[密]記》等書, 現於世祖求書之諭, 而金氏之世, 獨無此書耶!


괴이하게도 김부식이 인종(仁宗)을 위하여《삼국사기》를 편수하며 2천년 동안의 옛 성인이 남긴 공덕을 빠트리고 기술하지 않고서, 단지 [해동 삼국의 역년이 장구하나 옛 기록은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며 일의 자취는 이지러져 없어지고 앞선 말들이나 지나간 일들은 가뭇가뭇 어둡기만 하니]라고 하며 이와 같은 말로서 그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다 동천왕이 천도한 해에 이르러서야 겨우 [평양은 본래 신인왕검이 자리잡은 곳이다] 혹은 [왕이 왕검에 도읍을 하였다] 등의 글귀가 있을뿐이다. 당시를 지금과 비교하면 오히려 옛날에 5백년이나 가까운데 옛 기록이 흩어져 없어지고 증거가 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일찍이 이와 같은 일이 이다지도 심할 줄이야! 더욱이《조대기(朝代記)》의이름이《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지공기(誌公記)》.《삼성밀기(三聖密記)》등의 책과 함께 세조(世祖)가 내린 구서(求書)의 유시에도 보이는데 유독 김씨의 세대에 이 책들이 없었더란 말인가.


盖三國鼎立, 互事呑 , 新羅終致聯唐兵而覆麗濟, 厥後渤海雖興, 只與新羅南北相對, 不惟秦.越而已. 是以, 弓裔襲據漢北之地, 則恨平壤之茂草, 聲言爲高句麗報 , 而浿西諸鎭, 望風歸服, 立國建元, 威壓列州 甄萱叛據完山, 則憤百濟之衰亡, 以雪義慈宿憤爲言, 而西南州縣, 所至響應, 建都設職, 喜得人心. 高麗旣承羅後, 而疆土不出鴨水以外一步之地, 自與北方無涉. 且遼.金之勢, 威壓境上, 區區鴨水以南數千里地, 更非雄邦巨國之比, 則民氣之衰微, 自有甚於古者[矣. 是以, 金氏撰史之時, 已無過問, 鴨北之事者.]  平壤之地, 荒廢頗久, 舊基雖存而荊棘滋茂, 蕃人(遊)[游]獵, 侵掠邊邑者, 麗.太祖初年所記也. 然則, 高句麗亡後三百年, 而平壤不免荊棘, 渤海人之遊獵其間者, 則輒稱之以蕃人侵掠邊邑, 則只恨其大害; 然則, 忽汗敗而大氏之來奔高麗者, 亦家敗而睦族之類而已.


대저 삼국이 정립하고 있으며 서로 집어삼키고 물어뜯고 하다가 신라가 마침내 당나라 병사와 연합하게 되자 고구려와 백제를 넘어뜨렸다. 그후 발해가 비록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단지 신라와 더불어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었을 뿐 서로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곧 소원해질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궁예(弓裔)가 한강 이북의 땅을 점령하여 차지하고는 잡초만 무성해진 평양 땅을 한탄하며 고구려를 위하여 원수를 갚겠다고 천명하니, 패서(浿西)의 모든 고을이 그 기세에 힘입고 모여들어 복종하기에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정함에 그 위세가 모든 고을을 제압하였다. 견훤(甄萱)은 완산에서 반란을 일으켜 점거하고 백제의 쇠망을 분하게 여겨 의자왕의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한다고 천명하니, 서남쪽의 고을가운데 그 명성이 이르는 곳마다 모두 향응하기에 도읍을 세우고 직책을 설치하여 기꺼이 인심을 얻게 되었다. 고려가 신라를 계승하였다고는 하지만 강토는 이미압록강에서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는 땅이 되었으며, 북방과 더불어 스스로 관계를 가지지도 않았었다. 또한 요나라와 금나라의 기세가 국경을 위세로 억누르니, 구구하게 압록강 이남의 수천 리 땅으로 다시금 웅혼하고도 거대했던 나라와 비교될 수가 없었기에 백성의 기세가 저절로 쇠미해짐이 옛날보다 심하게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김씨가 역사를 서술할 때는 이미 압록강 이북의 일에 대해 묻는 자가 없었다. 항차 평양 땅은 황폐해진지가 자못 오래되었으니, 예전의 기초는 비록 남아 있다고 하지만 가시덤불이 무성히 자라고 오랑캐들이 수렵하여 노닐며 주변의 고을을 약탈하였다는 것이 고려 태조 초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즉 고구려가 망한 뒤 3백년이 지난 후 평양은 가시덤불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발해인들이 그 곳을 수렵하며 노닐었던 것을 그저 '오랑캐들이 침입하여 주변의 고을을 약탈했다'라고 한 것은 단지 같은 민족을 욕하는 커다란 해악을 두려워해서이며, 그러기에 홀한에서 패한대씨가 고려로 투항하여 온 것과 같이 마치 집안이 망하면 오히려 가족끼리는 화목하여 지는 것과도 같은 것일 따름이다.


及夫 淸之造亂, 奉命剿討者, 又是金富軾也. 金氏旣無信文, 又惡妙淸之妖, 西京之破, 幷不深採其說, 下筆寫過, 只留本神人王儉之宅數句, 亦何足深責 而渤海史, 幷不過問, 金氏於此, 終不免其咎矣. 盖金氏旣醉於漢籍, 又乏雄圖, 則雖有甚歎於吾邦之事, 却茫然不知其始末之處, 而亦無能而已矣. 我邦經史之禍, 其來久矣. 今浩歎無益, 亦復奈何.


무릇 묘청이 난을 일으키자 왕명을 받들어 그를 토벌하여 전멸시킨 사람 또한 김부식이다. 김씨에게는 원래 믿을 만한 글이 없는데, 또한 묘청의 요사스러움과 서경의 파탄을 미워한다 하면서도 더군다나 이 모두에 대해 깊이 있게 그 내용을 캐지 않고 글을 써내려가며 단지 [본래 신인왕검이 자리잡은 곳이다]는 등의 몇 구절만을 남겨 놓았으니 어찌 그를 질책하는 것만으로 족할 것이며, 더욱이 발해의 역사는 언급도 하지 않았으니, 김씨는 이로서 언제까지나 그 허물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김씨는 본디 한나라의 서적에 빠져 있고 또한 웅장한 계책 같은 것도 결핍된 자인지라 비록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 근심하여 한숨을 쉰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엉뚱하게도 그 시작과 끝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경전과 역사 서적이 입은 화는 이미 오래이니, 지금에 와서 아무리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또한 어찌할 수 있을 것인가.


按《遼史地理志》, 有[顯州.奉先軍, 上,節度. 本渤海.顯德府地. 天顯三年, 遷東丹民居之, 升爲南京城. 天顯十三年, 改南京爲東京府曰遼陽]等句. 今遼陽在蘇密以南六百餘里, 與淸平之說, 甚相逕庭. 且遼陽旣爲中京, 則西京當擬於遼西.臨潢等地, 以渤海舊疆考之, 決無是理.  淸平諸說, 已有所據, 而《遼史》則乃元.至正中, 丞相脫脫等所撰也 經金.宋交爭以後數三百年, 文獻自多不備, 傳說亦多失正鵠, 而渤海亡後, 其世族舊臣, 隨處擧兵, 殆將百年不息, 遼人多遷其民, 與漢民雜處, 遼西之地, 以至城邑, 冒稱渤海, 本名者, 不下數十. 元人修史者, 只憑古傳名字, 輒自斷之, 不亦 乎. 壬儉城者, 卽古語京城之意也. 平壤之意, 雖未詳, 亦必都城之義, 如新羅之徐羅伐 百濟之慰禮也.《括地志》云, 高麗治平壤城, 本王險城.《史記》.《漢書》[通及](及《通)典》, 皆有王險城字, 此又儉字之誤也. 此可續述焉.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에 의하면 [현주(顯州)의 봉선군(奉先軍)은 상절도(上節度)로서 본래 발해의 현덕부(顯德府) 땅이다. 천현(天顯) 3년에 동란(東丹)의 백성을 옮겨 살게하고 승격시켜 남경성(南京城)으로 삼았다. 천현 13년에 남경을 고쳐 동경으로 삼고 관청을 두어 요양(遼陽)이라 하였다]는 등의 구절이 있는데, 지금의 요양은 소밀(蘇密)의 남쪽 600여 리에 있으니 청평의 말과는 서로 차이가 매우 심하다. 또한 요양이 이미 중경이 되었으니 곧 남경은 당연히 요서(遼西)나 임황(臨潢) 등의 땅에 비견되어야 하므로 발해의 옛 강토로써 이를 고찰하여 보면 절대로 그럴리가 없다. 더욱이 청평의 모든 말은 이미 그 근거하는 바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지만,《요사(遼史)》는 곧 원나라 중정(中正) 연간에 승상 탈탈(脫脫) 등이 찬술한 것으로서 금나라와 송나라가 서로 다툰 이후 거의 3백년이 지난 뒤이기에 문헌이 많이 소실되었고 내려오는 얘기 또한 자못 그 올바름을 잃어 버렸으며, 발해가 망한 후 그 명문세가나 옛 신하들이 도처에서 병사를 일으킴이 거의 백년 동안 쉴 틈이 없음에 요나라 사람들이 그 백성들을 많이 옮겨 한나라 백성과 섞어 거처하게 하였기에 요서의 땅에는 성읍에 이르기까지 발해의 지명을 모방하여 부르게 되어서 본래의 지명이 남은 곳은 수십 곳을 넘지 못하였는데, 원나라 사람이 엮은 역사는 단지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이름의 글자에만 의지해서 함부로 단정지어 버린 것이므로 이 또한 소흘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임금성'이란 것은 옛날 말로 바로 '서울'이라는 의미이다. '평양'의 의미는 비록 상세하진 않지만 이 또한 반드시 '도읍한 읍성'이란 뜻으로서 신라의 '서라벌'이나 백제의 '위례'와 같을 것이다.《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고려가 평양성에서 다스렸는데 바로 왕험성(王險城)이다]라고 하였으며,《사기》와《한서》및《통전(通典)》에도 모두 '王險城'이란 글자가 있으니 이 또한 '儉'자가 잘못 쓰여진 것이다. 이것은 계속해서 서술하겠다.


檀君旣建都於壬儉城, 乃築城郭, 建宮室, 置主命 主穀 主兵 主刑 主病 主善惡及主忽諸官, 以其子夫婁爲虎加,  諸加者也. 神誌氏卽古神誌氏之後,下皆倣此爲馬加, 曰主命 高矢氏爲牛加, 曰主穀 蚩尤氏爲熊加, 曰主兵 二子夫蘇爲鷹加, 曰主刑 三子夫虞爲鷺加, 曰主病 [周](朱)因氏爲鶴加, 是主善惡 余守己爲狗加, 是分管諸州也. 稱爲檀君八加, 乃殺白牛, 以祭天于太白之麓.


단군이 임금성에 도읍을 세워 성곽을 축조하고 궁실을 지으며 생명과 곡식과 병사와 형벌과 질병과 선악과 및 지방의 일 등을 주관하는 여러 관직을 설치하였다. 아들 부루(夫婁)는 호가(虎加)로 삼아 모든 가(加)들을 통괄하게 하였으며, 신지씨(즉 옛날 신지씨의 후손이다. 다음의 모든 것도 이와 같다)는 마가(馬加)로 삼아 생명을 주관하게 하고, 고시씨는 우가(牛加)로 삼아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치우씨는 웅가(熊加)로 삼아 병사를 주관하게 하고, 둘째아들 부소(夫蘇)는 응가(鷹加)로 삼아 형벌을 주관하게 하고, 세째 아들 부우(夫虞)는 노가(鷺加)로 삼아 질병을 주관하게 하고, 주인씨는 학가(鶴加)로 삼아 선악을 주관하게 하고, 여수기(余守己)는 구가(狗加)로 삼아 모든 고을을 나누어 관리하게 하였다. 이를 일컬어 '단군팔가(檀君八加)'라 하고는 흰소를 잡아 태백산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舊禮, 凡祭天, 必先定吉日, 擇白牛而護養之, 及期, 宰殺以頭薦之於嶽瀆, 白頭, 牛首之名, 頗亦有因於此也. 盖祭天報本之禮, 始於檀君, 後世歷代諸國, 莫不祭天. (扶)[夫]餘 濊( )[貊] 馬韓 新羅 高句麗諸國以十月, 百濟以四仲月, 各有禱天 舞天 祭天 郊天 迎鼓 東盟之稱. 夫餘則又有, 祭天殺牛, 以 占吉凶之俗, 盖其源流久遠而沈漸成俗, 亦可知矣. 夫尊卑之禮, 必自敬鬼神而興, 上下尊卑之序定而先王經世之道行焉. 而敬神之禮, 莫大於祭天, 通萬古,  四方, 未有人而不知畏天者. 是以,《易》曰: [大哉! 乾元. 萬物資始, 乃統天.] 又曰: [首出庶物, 萬邦咸寧.] 盖言其聖人,  天而率民也.


옛 예절에 무릇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면 반드시 먼저 상서러운 날을 정하고, 흰소를 선택하여 이를 보호하여 길러 날이 되면 잡아서 그 머리를 명산대천에 제물로 올렸다. '백두(白頭)'는 소의 머리를 이름하는 것이니 이 또한 여기에서 연유한 바가 있다. 대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근본에 보답하는 의식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후세의 역대 모든 나라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음이 없었으니, 부여예맥마한신라고구려 등의 모든 나라는 10월에 지냈고 백제는 사중월에 지냈으며, 각각 도천(禱天)무천(舞天)제천(祭天)교천(郊天)영고(迎鼓)동맹(東盟)의 명칭이 있었다. 부여에서는 또한 하늘에 제사 드린 소의 발굽으로 길흉을 점치는 풍속이 있었으니, 대개 그 원류가 오래되고 요원하지만 생활에 깊숙이 젖어 들어 풍속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대저 존귀하고 비천함에 대한 예절은 반드시 귀신을 공경하면서부터 일어나게 되었으며, 위아래와 귀천의 순서가 정해지니 세상을 다스리는 선왕의 도가 행하여지게 된 것이다. 또한 신을 공경하는 예절 가운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없으며, 만고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하늘의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없었다. 그러한 까닭에《역(易)》에 이르기를 [크도다 건(乾)의 원(元)이여. 만물이 원(元)에 바탕하여 비롯하나니, 이에 하늘을 모두 다스리도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모든 것이 싹이 터 나오니 모든 나라가 다 평안하니라] 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성인이 하늘의 뜻을 체득하고 그것으로 백성을 통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洪範八政, 三曰祀, 祀者, 所以通神明而報其本也. 是以, 陸有祭獸之豺, 水有祭魚之獺. 夫豺獺者, 禽獸也, 猶知報本之意,  人而不知(其)報本之禮乎! 又 神市, 肇宅人界, 其降自天 桓儉繼志述事, 未嘗少弛, 此桓儉所以,  定厥鼎而便祭上天也. 且太白山者, 神市陟降之靈地也 檀君踐(祚)[ ], 亦肇于厥地, 此又始行之, 于太白也. 是爲東方萬世之國典, 故古代國君, 必先敬事上帝卽一大主神[也]及檀君三神, 因以爲道.


홍범팔정(洪範八政)의 세번째는 '사(祀)'를 말하고 있는데, '사'란 신명(神明)과 통함으로써 그 근본에 보답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육지에는 제사를 지내는 짐승인 승냥이가 있고 물에는 제사를 지내는 고기인 수달이 있으니, 대저 승냥이며 수달은 짐승이면서도 오히려 근본에 보답하는 의미를 아는데 항차 사람이면서 근본에 보답하는 예절을 알지 못하겠는가! 또한 신시씨가 인간세계에 처음으로 자리잡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환검은 그 뜻을 이어 이를 처리함에 조금도 소흘하지 않았으니, 그러한 까닭에 환검이 비로소 솥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태백산은 신시씨가 하늘을 오르내리던 신령스러운 땅이며 단군의 등극 역시 그 땅에서 비롯하였으니, 이로서 그 제사를 태백에서 처음으로 행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동방에 있어 만세에 걸친 나라의 제전이 되었으니, 고대의 나라 임금은 반드시 먼저 상제(上帝)(즉 한 분의 큰 주신이다)로부터 단군에 이르기까지 삼신(三神)을 삼가 섬기는 것을 도리로 삼았다.


至於官職, 又有(太)[大]仙 國仙  衣之稱, 至若東明聖王, 有朝天之石, 明臨 夫, 曾帶 衣之職. 泉蓋蘇文, 入鳳凰山, 修鍊十年, [??]遂爲[萬古奇傑 金庾信, 亦入中嶽石]窟, 十年修道, 終爲名將, 助太宗致盛强. 渤海時有報本壇, 高麗時有聖帝祠, 遼有木葉山三神廟, 金有開天弘聖帝之廟. 我世宗, 設檀君廟於平壤, 世祖元年, 改位版曰[朝鮮始祖檀君之廟]. 盖神市氏之事, 聽者多疑其迂怪. 至今惟知崇檀君, 而不知其前實有神市氏之開創矣. 世俗不知原由, 只憑漢籍曰: [仙敎是黃老餘流.] 殊不知, 以神設敎, 實自我神市之世也.


관직에 있어서는 또한 대선(大仙)국선(國仙)조의( 衣) 등의 명칭이 있었으며, 동명성왕에 이르러서는 조천석(朝天石)이 있었고, 명림답부(明臨答夫)는 일찍이 조의( 衣)의 직책을 맡았었다. 연개소문은 봉황산에 들어가 십년을 수련한 뒤 마침내 만고에 뛰어난 호걸이 되었으며, 김유신은 중악의 바윗굴에 들어가 십년을 수도한 뒤 결국에는 명장이 되어 태종을 도와 나라를 강성함에 이르게 하였다. 발해 때는 보본단(報本壇)이 있었고, 고려 때는 성제사(聖帝祠)가 있었으며, 요나라에는 목엽산(木葉山)의 삼신묘(三神廟)가 있었고, 금나라에는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의 사당이 있었다. 우리 세종께서는 단군묘(檀君廟)를 평양에 설치하였는데 세조 원년에 위패를 고쳐 '조선시조단군지묘(朝鮮始祖檀君之廟)'라 하였다. 대저 신시씨의 일을 들은 사람은 현실에 맞지 않고 괴이함에 의심을 많이 한다. 지금은 오직 단군만을 숭상할 줄 알 뿐, 그 앞에 신시씨가 세상을 열어 창조하였음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세속은 그 연유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단지 한나라의 서적에 의지하여 이르기를 [선교(仙敎)는 황노(黃老)의 한 부류이다]라고 하니, 신인으로서 가르침을 베푼 것이 우리 신시씨의 세상에서부터 비롯하였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한다.


檀君旣祭天而立敎率民, 而致道化行數年, 率土之民, 皆洽其化, 陶鈞停毒, 無爲而治, 此檀君神德之所致也, 乃立國之本也. 後可續述焉.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가르침을 세워 백성을 통솔하며 도를 궁구하여 교화를 행한 지 수년만에 강토의 백성에게 모두 교화가 두루 미치니,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모든 악독함이 사라지는 등 행함이 없이도 잘 다스려졌으며, 이는 단군의 신령스러운 덕의 소치로서 곧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후에 계속하여 말하고자 한다.


居牛首河畔十年, 乃遷都於白山之南 浿水之北, 曰平壤卽第二(王)[壬]儉城也. 盖今涑沫之地, 風氣凄冷, 土味勁寒, 雖野勢通豁, 而耕農之利不如南土. 且涑沫之水, 北流入混同江, 南地交通, 自多不便, 此必其由也. 淸平云: [檀氏之世, 四遷其鼎, 第二奠都於浿水之北. 卽渤海.西京.鴨 府地, 神州是也. 高句麗.國內 桓都古城之址, 在其境內焉.] 則浿水之非獨爲今之大同江, 明矣.


우수하(牛首河)의 물가에 거처한 지 10년만에 백산(白山)의 남쪽 패수(浿水)의 북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평양이라 하니 곧 두번째의 임금성이다. 대저 속말의 땅은 바람 기운에 냉기가 돌고 토양이 척박하여 비록 들판의 기세는 광활하게 트였으나 농사를 짓는 이로움은 남쪽 땅만 못하였다. 게다가 속말의 물은 북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으로 들어가기에 남쪽으로의 교통에는 자연히 많은 불편이 있었으니, 이것이 반드시 그 이유일 것이다. 청평이 말하기를 [단씨(檀氏)의 치세 때 모두 네차례 솥을 옮겼는데, 그 두번째는 패수의 북쪽에 도읍을 정하였으니 발해의 서경 압록부 땅인 신주(神州)가 바로 그 곳이다. 고구려의 국내성 및 환도성(桓都城)의 옛 성터가 그 경내에 있다]고 하였으니,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이 아님은 분명하다.


按《新唐書渤海傳》曰: [高麗(古)[故]地爲西京, 曰鴨(綠)[ ]府, 領神 豊 桓 正四州.]《遼史地理志》曰: [ 州, 鴨 軍, 節度, 本高麗(古)[故]國, 渤海號西京.鴨 府, 都督神 桓 豊 正四州事. 故縣三, 神鹿 神化 劒門, 皆廢.] 又曰: [桓州, 高麗.中都城, 古縣三, 桓都 神鄕 淇水, 皆廢.] 夫渤海承高句麗(之)後統, 高句麗復出於夫餘, 則渤海之世, 猶有古史之傳者, 想不少矣. 或曰: [平壤之敗李勣, 盡燒宮室庫藏, 復虜其公侯世族, 則史籍亦不免灰燼矣, 渤海, 安得傳其史乎?] 余以(謂)[爲]不然. 渤海.高王, 乃高句麗舊將也. 高句麗之亡, 徙居營州, 及看藎榮之亂, 與乞四比羽, 領衆東還, 麗.鞨之衆, 響應而起, 盖其舊國宿將, 如百濟之黑齒常之, 明矣 其麾下, 想多舊國遺臣, 能博通古今者. (耳)[且]自高句麗亡後, 距高王之興, 僅二十七八年事也, 古史能無得傳乎? 且以文勢言之, 則神州當爲渤海.西京所在鴨 府地, 而神州 桓州之名, 又有近於神市 桓儉等字.  神市 桓儉, 人每認爲一人, 至今擧世殆然而. 神州屬縣, 有神化 神鹿等地 桓州屬縣, 又有桓都 神鄕 淇水之名. 桓都者, 盖高句麗之丸都也. 丸都之名, 旣出於《魏志》.《北史》等書, 則桓.丸之誤, 固不可知, 而渤海旣以桓州 桓都定名, 則其或原於慕遠之意. 神鄕則, 有寓神市之鄕之義也. 神化則, 言神人之化也. 神鹿之稱, (丸)[尤]益可奇.  古來, 稱桓儉曰神人, 則神 桓等名, 決非偶然, 且淇水,《元.一統志》作浿水, 又與前述浿水之北之說, 暗合. 按漢籍, 說浿水及平壤者, 頗多, 今不可便述, 而神州 桓州 神化 神鹿 桓都 神鄕 浿水之名, 旣與檀君古事, 多合, 則檀君第二之平壤, 當在於鴨水之北.


《신당서.발해전》에 따르면 [고려의 옛 땅을 서경으로 삼아 압록부(鴨 府)로 이름하고 신(神)환(桓)풍(豊)정(正)의 4주를 거느리게 하였다]라 하였으며,《요사.지리지》에는 [녹주( 州)의 압록군(鴨 軍)은 절도(節度)이다. 본래 고려의 옛 국토로서 발해가 서경압록부라 불렀다. 모두 신(神)환(桓)풍(豊)정(正) 등 4주의 일을 감독한다. 옛 현인 신록(神鹿)신화(神化)기수(淇水) 등 세 군데는 모두 폐지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환주(桓州)는 고려의 중도성(中都城)이며 옛 현인 환도(桓都)신향(神鄕)기수(淇水) 등 세 군데는 모두 폐지하였다]고 하였다. 무릇 발해는 고구려를 이어훗날 그 지역을 다스렸고, 고구려는 다시 부여로부터 나왔으니, 곧 발해의 세대에는 아직까지 옛 역사가 전해지는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평양이 이적(李勣)에게 패하여 궁궐이며 곳간이 남김없이 불타 버리고, 게다가 공경대부며 명문세족들은 포로로 잡혀갔기에 역사 서적 역시 재가됨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인데 발해가 어떻게 그 역사를 전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발해의 고왕은 바로 옛 고구려의 장수이다. 고구려가 망하자 영주(營州)로 옮겨 거처하다가 신영(藎榮)의 난을 보고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무리를 영도하여 동쪽으로 돌아오니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들이 이에 호응하여 일어났다. 대저 이들은 옛 나라의 노련한 장수들로 마치 백제의 흑치상지와 같음이 분명하니, 생각건대 그 휘하에는 옛 나라의 신하였던 자로서 능히 고금의 일에 널리 통하는 자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고구려가 망한 후로부터 고왕이 일어서기까지의 사이는 겨우27,8년의 일이니 옛 역사가 능히 전해진 것이 없었겠는가. 또한 문장의 흐름을 보아 말하더라도 곧 신주(神州)가 마땅히 발해의 서경이 있는 압록부 땅이며, 신주(神州)나 환주(桓州) 등의 이름 또한 신시(神市)나 환검(桓儉) 등의 글자에 가까운 바가 있다. 항차 신시씨와 환검신인을 사람들마다 모두 한 사람으로 여기더니 지금은 모든 세상이 거의 다 그렇게 여긴다. 신주에는 그에 속한 현으로 신화(神化)와 신록(神鹿) 등의 땅이 있고, 환주에는 그에 속한 현으로 또 환도(桓都)와 신향(神鄕) 및 기수(淇水) 등의 이름이 있다. 환도(桓都)는 아마도 고구려의 환도(丸都)일 것이다. '환도(丸都)'라는 이름은《위지(魏志)》나《북사(北史)》등의 책에도 이미 나오는데, 곧 '桓'이 '丸'의 잘못 된 표기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발해에서는 이미 환주(桓州)와 환도(桓都)로 이름을 바로잡아 놓았으니, 이는 아마도 오랜 옛날을 그리는 뜻에 그 근원을 두었으리라. '신향'이라 함은 곧 신시씨에게 의지하며 살던 마을이라는 뜻이 있으며, '신화'라 함은 곧 신인의 교화를 말하는 것이다. '신록'의 명칭은 더욱 기이하다. 항차 예로부터 환검(桓儉)을 일컬어 신인(神人)이라 하였으니, 곧 '神''桓'등의 이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기수(淇水)는《원일통지(元一統志)》에 패수(浿水)로 되어 있으며, 또 앞에서 서술한 '패수의 북쪽'이라는 예기와 암암리에 부합한다. 한나라 서적에 의거하면 패수와 평양을 말한 것이 자못 많으나 지금 다 말할 수는 없다. 신주환주신화신록환도신향패수 등의 이름은 이미 단군의 옛 일들과 많이 부합되니, 곧 단군의 두번째 도읍인 평양은 압록강의 북쪽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且《三國史記》, 高句麗.琉璃王二十一年, 薛支見王曰: [臣逐豕至慰那岩, 見其山水深險, 地宜五穀, 又多 鹿魚鱉之産, 王若移都, 則不惟民利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云云. 故明年冬十月, 王遷都國內, 則其地, 非但山水險阻, 原野開 , 亦可知, 適於耕農矣. 夫古者建都, 必取險固殷富及交通之便. 今平壤 松京 漢陽之地, 莫不皆然, 長安 洛陽, 恒爲漢土建都之地, 亦此故也. 然則, 檀君之世, 民物漸繁, 交通愈緊, 且耕農之業, 逐漸而興, 則其捨粟末之地, 而南遷於浿水之濱, 以圖後日之隆運, 盖可想見矣.


또한《삼국사기》의 고구려 유리왕 21년에 설지(薛支)가 왕을 뵙고 아뢰기를 [신이 희생(犧牲)인 돼지를 쫓아 위나암(慰那岩)에 이르렀더니, 그 곳은 산과 물이 깊고 험하며 땅은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고 또한 순록과 물고기 및 자라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일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면단지 백성들의 복리가 무궁할 뿐만 아니라 전쟁의 걱정 또한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다음해 겨울 10월에 왕이 도읍을 국내(國內)로 옮겼으니, 곧 그 땅은 단지 산수가 험준하고 들판이 광활할 뿐만 아니라 또한 농사짓기에 적당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무릇 옛날에 도읍을 세울 때는 반드시 험준하여 견고하며 산물이 풍부하면서도 교통이 편리한 곳을 취하였다. 지금의 평양이나 송경과 한양 등지의 땅이 모두 그렇지 않은 곳이 없으며, 장안과 낙양이 항상한나라에서 도읍을 세우는 땅이 됨은 또한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그러한 즉 단군의 세대에 백성과 사물이 점차로 번창해지고 교통이 더욱 요긴해지며 또한 농사짓는 일도 따라서 점차 일어나게 되니, 그 속말(粟末) 땅을 버리고 남쪽으로 패수의 물가로 옮겨와 후일의 융성한 운세를 도모하게 되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又按《唐書地理志》曰: [自鴨 江口, 舟行百餘里, 乃小舫溯流, 東北三十里, 至泊 口, 得渤海之境 又溯流二百里, 至丸都縣城, 故高麗王都 又東北, 溯流二百里, 至神州 又陸行四百里, 至顯州, 天寶中, 王所都 又正東如北六百里, 至渤海王城.]云. 今, 自鴨綠江口, 約行四百餘里, 乃得婆 江合流處, 又行二百里, 至江界.滿浦鎭隔江處, 田野開豁, 山河固密. 盖檀君南遷四百餘里, 定都于古鹽難水之東, 浿水之北, 渤海.神州 神化等地, 殆無疑, 而渤海之時, 猶傳其蹟也.


또한《당서.지리지》에 의하면 [압록강 어귀로부터 배로 1백여 리 가서 또 작은 배로 동북쪽으로 3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박작구(泊 口)에 이르러 발해와의 경계에 닿는다. 2백리를 또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현(丸都縣)의 읍성에 이르는데 옛날 고려왕이 도읍한 곳이다. 또 동북으로 2백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神州)에 이르고, 또 육지로 4백리를 가면 현주(顯州)에 이르는데 천보(天寶) 연간에 왕이 도읍한 곳이다. 또 바로 동쪽에서 북으로 6백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에 닿는다]라고 하였다. 지금 압록강 어귀로부터 약 4백여 리를 가면 이내 파저강(婆猪江)과 합류하는 곳에 이르고, 또 2백리를 가면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 강의 맞은편에 닿게 되는데, 밭과 들이 광활하고 산과 강이 견고하게 밀집되어 있다. 대저 단군이 남쪽으로 4백여 리를 옮겨와서 옛 염난수(鹽難水)의 동쪽이요 패수의 북쪽인 발해의 신주신화 등지의 땅에 도읍을 정하였음은 거의 의심할 바가 없으며, 발해 때는 여전히 그 유적이 전해졌었다.


乃復祭天而薦新居, 築城郭, 建宮室, 浚溝 , 開田陌, 勸農桑, 治漁獵, 使諸民進用餘之物, 以補國用, 民皆熙熙而樂之. 時有, 蒼鹿遊郊外, 靑龍見朝天池. 檀君乃出巡, 至南海, 登甲比古次之山, 設壇祭天. 還至海上, 赤龍呈祥, 神女奉 , 有一童子, 衣緋衣, 從 中出謁, 檀君愛之, 因姓曰緋, 名曰天生, 遂爲南海上長. 及還至平壤, 有三異人, 自東方渡浿水而至, 首曰仙羅, 次曰道羅, 又其次曰東武. 於是因二龍之祥, 改虎加曰龍加, 使仙羅主之, 道羅爲鶴加, 東武爲狗加. 又因蒼鹿之瑞, 改鷺加曰鹿加, 依前, 使夫虞主之, 制治比前更完矣.


이에 다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새로운 거처로 옮겨 성곽을 짓고 궁실을 세우며 봇도랑을 준설하고 밭두둑 길을 열어 농업과 누에치기를 권장하였으며, 어로와 수렵을 가르치고 모든 백성들에게 쓰고 남은 물자를 진상하게 하여 이로서 나라의 살림에 보태게 하니, 백성들은 모두 화합하며 즐거워하였다. 이때 푸른 사슴이 교외에서 뛰어 놀았으며, 푸른 용이 조천지(朝天池)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단군은 이에 순행을 나가서, 남해에 이르러 갑비고차산(甲比古次山)에 올라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이르니 붉은 용이 상서러움을 드러내 보이고 신녀가 함을 받들어 바치는데, 한 동자가 붉은 비단 옷을 입고 그 함속에서 나와 단군에게 알현하기에 그를 사랑스럽게 여겨 성을 비(緋)라 하고 이름을 천생(天生)이라 지어 주었더니 마침내 남해상장(南海上長)이 되었다. 돌아와 평양에 이르니 3명의 비범한 사람이 동방으로부터 패수를 건너와 있었는데, 그 첫째는 선라(仙羅)라 하였고, 다음은 도라(道羅)라 하였으며, 또 그 다음은 동무(東武)라 하였다. 이에 두마리 용의 상서러움이 있었다고 하여 호가(虎加)를 고쳐 용가(龍加)라 이름하고 선라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도라는 학가(鶴加)로 삼고 동무는 구가(狗加)로 삼았다. 또 푸른 사슴의 길함으로 인해 노가(鷺加)를 녹가(鹿加)로 고쳐 부르고 예전처럼 부우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니, 제도의 다스려짐이 이전에 비하여 더욱 완전하게 되었다.


當是之時, 檀君之化, 洽被四土, 北 大荒, 西率  兪, 南至海岱, 東窮蒼海, 聲敎之漸, 偉乎廣矣. 乃區劃天下之地, 以封勳戚. 蚩尤氏之後, 封于南西之地, 巨野浩豁, 海天 碧, 曰藍國, 宅奄慮忽. 神誌氏之後, 封于北東之地, 河嶽(鹿 )[ 莊], 風氣勁雄, 曰  國, 亦稱肅愼, 方言, 豪莊之稱也, 治肅愼忽. 高矢氏之後, 封于南東之地, 山河秀麗, 草木暢茂, 曰靑丘國, 宅樂浪忽. 封[周](周)朱因氏之後, 於蓋馬國. 余守己爲(穢)[濊]君. 夫蘇 夫虞及少子夫餘, 皆封于國西之地, 句麗 眞番 夫餘諸國, 是也. 其後, 夫婁又封東來三人於各地, 後世之沃沮 卒本 沸流之稱, 皆起於其所封國名也. 通檀氏之世, 凡大國九, 小國十二, 分治天下諸州, 今不可詳矣.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으니, 가르침이 퍼져 나가 물들어 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  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하며, 숙신홀(肅愼忽)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주인씨의 후손은 개마국(蓋馬國)에 봉하고,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으며, 부소와 부우 및 작은 아들인 부여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와 진번(眞番) 및 부여(夫餘)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에 부루가 또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세의 옥저(沃沮)와 졸본(卒本) 및 비류(沸流) 등의 명칭은 모두 이 봉함을 받은 나라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단씨(檀氏)의 시대를 통하여 무릇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는 열둘로서, 나누어 천하의 모든 고을을 다스렸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蚩尤氏旣受封於藍國, 乃紹先祖之志, 撫民安業, 講習戎事, 恒爲西南藩蔽. 且其民, 數遷(徒)[徙]海岱之地, 以致後世, 恒與漢土諸國, 互相角逐. 神誌氏受封於  國, 地旣勁寒, 不宜五穀, 土廣人稀, 牧畜頗適, 乃使民帶弓佩劒, 幷事遊獵. 後世, 其民漸徙黑水之地, 遂以漁獵爲生, 艱險儉嗇,  健勁悍. 雖强勇遠出於諸國, 漸至不習文事. 後世, 漢曰 婁, 元魏曰勿吉, 隋.唐曰靺鞨, 稍與窮北蠻人相混, 漸失其俗, 頗有陵夷之歎. 近古, 金 女眞等, 皆其後身, 同族異稱也. 高矢氏就靑丘國, 觀山川, 相土地, 開田野, 興農桑. 風氣溫[ ]美, 五穀豊肥. 民皆, 衣輕(暖)[煖]而食肥( )[ ]美, 頗有冠帶衣履天下之槪, 文武亦得以幷興. 夫食足貨通然後, 國實民富而敎化成. 故《管子》曰: [倉 實而知禮節, 衣食足而知榮辱.] 若使民, 終歲  以絲粟爲慮, 則復奚暇言禮義哉! 雖然, 天覆地載, 區隅各殊, 於是氣有寒溫, 土有肥瘠, 其如天澤地利之不齊, 何是, 三家者之守國敎民之道, 所以各異, 而其果應亦自不同者也.


치우씨는 남국에 봉함을 받고서 선조의 뜻을 이어 백성들을 위무하고 생업을 편케하며 군사의 일을 배워서 익히니, 항상 서남방으로 울타리가 되었다. 또한 그 백성들을 수차례 해대(海岱)의 땅으로 옮겨가게 하니, 후세에 이르러 항시 한나라 땅의 뭇 나라들과 더불어 서로 각축하게 되었다. 신지씨는 속진국에 봉함을 받으니, 땅의 기후는 모질게 한랭하여 오곡에 마땅하지 않았으나 넓은 지역에 사람이 드물어 목축이 매우 적합하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활을 매고 검을 차고 유목과 수렵에 함께 종사하게 하였다. 후세에 그 백성들은 점차 흑수(黑水)의 땅으로 옮겨가 마침내 어로와 수렵으로 생업을 삼으며 고생하면서도 검약하니 건장하고도 억세어 졌다. 비록 용감하게 멀리 여러 나라로 나아갔으나 점차 글은 익히지 않게 되었는데, 후세에 한(漢)나라는 읍루( 婁)라고 일컬었고, 원위(元魏) 때는 물길(勿吉)이라 하였으며, 수와 당나라는 말갈(靺鞨)이라 불렀으며, 점차 북쪽 끝의 야만인들과 서로섞이더니 점차로 그 풍속을 잃어버리고 한탄스럽게도 자못 쇠미해져 갔다. 가까이는 금나라와 여진 등이 모두 그 후손으로 같은 족속을 달리 일컬은 것이다. 고시씨는 청구국으로 나아가 산천을 둘러보고 토지의 형세를 관찰하고 밭과 들녘을 개간하여 농업과 잠업을 일으켰다. 바람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오곡은 풍성하게 살찌니 백성들은 모두 가볍고도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지고 훌륭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며 옷을 갖춰 입고 신을 차려 신는 등 자못 천하의 풍채가 있었기에 문무(文武)가 아울러 일어나게 되었다. 무릇 음식이 풍족하고 물자의 유통이 원활한 연후에야 나라가 견실해지고 백성이 부귀해지며 교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 까닭에《관자(管子)》에서 이르기를 [곳간이 가득하고 서야 예절을 알 수 있으며, 입고 먹는 것이 풍족하고 서야 영광됨과 수치스러움을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평생을 곁눈 짓이나 하며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하게 한다면 곧 누가 다시 한가롭게 예의며 의리를 말하려 들겠는가. 비록 다 같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있으나 거처하는 구석은 각기 다르기에 기후는 찬 곳과 따뜻한 곳이 있고 토양은 비옥한 곳과 척박한 곳이 있으니, 마치 하늘의 혜택과 땅의 이로움이 고르지 않은 것과 같으므로 이를 어찌하겠는가! 세 집안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가르치는 도리가 그러한 까닭으로 각기 다르기에 그 결과 또한 응당 같지 않은 것이다.


檀君旣封諸侯, 天下淸靜. 居十年, 有南夷之患, 卽甲比古次以南夷人也, 乃遣夫餘, 率兵定之. 後益遣夫蘇 夫虞, 築城於甲比古次, 以備南巡, 今江華.三郞城, 是也. 摩利山又有塹城壇, 此卽檀君設壇祭天之頭嶽也. 盖水行藉舟, 陸行藉車, 泥行乘 , 山行則 , 此乃上古交通之具. 而陸行不如水行之易, 是以, 上古建都, 必擇臨水之地. 凡人居之稱美者, 必曰阻山帶水, 或依山傍水 背山臨流者, 其所從來尙矣. 故檀君之世, 必使依山臨水而結居, 耕農漁獵, 隨便可行.《山海經》所謂: [北海有國, 名曰朝鮮, 天毒育也其人, 水居 (受)[愛]也人.]者, 非但, 其聲敎之澤, 洽被四 , 亦可窺見, 其結居之風矣. 夫檀君祭天, 非但頭嶽也. 北狩則祭太白, 南巡則祭頭嶽也, 而甲比古次傍在海濱, 通航容易, 則南巡之際, 必致祭於壇所也.  其地, 孤絶靜謐, 山岳淨潔, 海天收霽, 則 深晶瑩之氣, 使人自感, 神明之陟降者耶. 余嘗(遊)[游]觀其地, 祭壇疊石, 爲之上圓下方, 而太多頹 , 仁祖十七年改築云. 噫! 平壤故城, (王)[壬]儉舊闕, 今不留敗石殘礎, 獨一壘天壇, 得保其形骸, 豈僻處海 , 人跡稀到故耶! 余實不勝, 追遠之悲矣.


단군이 제후들을 모두 봉하니 천하는 맑고도 고요하였다. 10년만에 남이(南夷)의 환난이 있었는데, 바로 갑비고차 남쪽의 이인(夷人)들이다. 이에 부여를 파견하여 병사를 인솔해 이를 진정시켰다. 후에 부소와 부우를 아울러 파견되어 갑비고차에 성을 쌓아 이로서 남쪽을 순행할 때를 대비하게 하니, 지금의 강화 삼랑성(三郞城)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산(摩利山)에는 또한 참성단(塹城壇)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단군이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두악(頭嶽)이다. 대저 물로 다닐 때는 배에 의지하고, 뭍으로 다닐 때는 수레에 의지하며, 진흙 위를 다닐 때는 썰매를 타고, 산으로 다닐 때는 징나막신을 신었으니, 이것이 바로 오랜 옛적 교통의 도구이다. 그러나 뭍으로 다니는 것이 물로 다니는 것 보다 쉽지 않았던 까닭에 옛날 도읍을 세울 때는 반드시 물에 잇대어 있는 땅을 택하였다. 무릇 사람이 거처하는 곳 가운데 좋은 곳이라 일컫는 곳은 반드시 '산을 막아서며 물을 두르고 있다'거나 '산에 의지하고 물을 곁에 두고 있다'거나 '산을 등지고 강을 끼고 있다'는 등으로 말하는 있는데, 그러한 장소는 예로부터 바라던 곳이었다. 때문에 단군의 시대에 반드시 산을 의지하고 물을 끼고 있는 곳에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여서 농사짓고 어로와 수렵을 함에 편히 행할 수 있게 하였다.《산해경(山海經)》에 이른바 [북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이라 이름한다. 하늘이 그 사람들을 길렀고(毒은 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가에 살면서 남을 아끼고 사랑( 는 사랑함을 의미한다)한다]고 한 것은, 비단 그 덕스러운 교화의 은택이 사방에 흡족히 두루 미친 것 뿐만이 아니라 집을 지어 거처하는 기풍 또한 엿볼 수 있게 한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냄은 단지 두악(頭嶽)에서 만이 아니었다. 북으로 사냥을 나가면 곧 태백에서 제사를 지내고, 남으로 순행할 때는 곧 두악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갑비고차는 바닷가에 있어서 배를 통하기에 용이하므로 남쪽을 순행할 때는 반드시 들러 제단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항차 그 땅은 홀로 떨어져 있으면서 고요하고 평온하며 산악은 정결하고 바다와 하늘은 가든히 개어있으니, 곧 안존하고 깊으며 밝게 빛나는 기운이 사람으로 하여금 신명이 오르내리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해준다. 내가 그 땅을 유람하며 살펴보니 제단은 돌을 포개어 위는 둥글고 아래로는 네모지게 하였는데, 아주 많이 무너져 있던 것을 인조(仁祖) 17년에 다시 고쳐서 쌓았다고 한다. 오호라! 평양의 옛 읍성과 임금성의 옛 궁궐은 이제 부서진 초석의 조각하나 남아 있지 않은데 유독 한 채의 천단(天壇)만이 그 모습의 골격을 보존하고 있으니, 이는 편벽된 바다의 후미진 곳이기에 사람의 자취가 드물게 닿은 까닭이 어찌 아니겠는가. 나는 실로 옛일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구나!


御國三十餘年, 正値洪水, 浩波溜天, 懷襄遼滿之(時)[野], 浿水漲溢平壤沈潛. 乃遣四子, 遍相土地之宜, 占居阿斯達下唐莊之野, 今文化.九月山下, 有莊莊坪, 卽其地也. 余嘗觀其地, 方數百里無大河, 而水勢東走, 原土高燥, 可避西來之水矣. 乃結廬阿斯達下, 使夫婁, 盡濟平壤之民, 復治平水土屢年(以)[而]後功完, 唐莊之民, 亦已安土而樂居矣. 今俗士或云: [檀君遭洪水, 使彭吳治山川, 奠民居]云云, 而《漢書食貨志》明書: [武帝卽位數年, 彭吳穿濊( )[貊] 朝鮮.]等句, 則是乃, 東西有兩個彭吳, 相前後而同掌朝鮮水土之役也, 史上豈有, 如此奇巧事耶. 盖夫婁[與]弗虞同音, 且漢音.虞 吳相(同)[通], 而彭 弗兩字之初聲, 皆與夫音相近, 則後人忘夫婁字而只記其音, 又訛而只記彭吳也. 今, 人家有夫婁壇地者, 籬落淨潔處, 築土爲壇, 土器盛禾穀, 置於壇上, 編(緝)[葺]藁艸掩之, 每十月, 必薦之以新穀, 或稱業主嘉利, 卽報賽夫婁氏治水奠居之義, 賴爲鎭護之神[也].


나라를 다스린지 30여 년만에 홍수를 만났는데, 어마어마한 파도는 하늘까지 치솟아 요만(遼滿)의 들녘을 품으며 올라서니 패수의 물은 불어 넘치고 평양은 물에 잠겨 버렸다. 이에 네 아들을 보내 마땅한 땅을 두루 살피게 하고는 아사달(阿斯達) 아래 당장(唐莊)의 들녘을 차지하여 거처케 하였는데, 지금의 문화(文化) 구월산(九月山) 아래 장장평(莊莊坪)이 있으니 바로 그 땅이다. 내가 그 땅을 살펴보니 사방 수백리에 큰 물줄기가 없고 물의 형세는 동쪽으로 내달으며 넓은 들녘의 땅은 높고도 건조하여 서쪽에서 오는 물을 피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이에 아사달 아래에 띠풀집을 짓고 부루로 하여금 평양의 백성들을 모두 구제하게 하고, 다시 물과 흙을 다스리기를 몇 년 한 후에 그 일을 온전하게 하니, 당장(唐莊)의 백성 또한 그 땅에서 편안하게 기거하며 즐겁게 생활하게 되었다. 지금의 세속 선비들이 혹 이르기를 [단군이 홍수를 만나자 팽오(彭吳)로 하여금 산천을 다스려 백성들의 거처를 정하게 하고]라고 들 하는데,《한서.식화지(食貨志)》에 [무제가 즉위한지 몇 년만에 팽오가 예맥 및 조선과의 길을 터놓았다]는 등의 문구가 분명히 적혀 있으니, 이는 곧 동쪽과 서쪽에 두 명의 팽오가 연이어 앞뒤로 있으면서 조선의 물과 흙을 관장하는 일을 맡았다는 것인데, 역사에 어찌 이와 같이 기이하고 공교로운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아마도 '부루(夫婁)'와 '불우(弗虞)'는 음이 같고 또한 한나라 소리로 '우(憂)'와 '오(吳)'는 서로 통하며 '팽(彭)'과 '불(弗)' 두 글자의 초성이 모두 '부(夫)'의 음과 서로 가까우므로, 훗날의 사람들이 '부루(夫婁)'라는 글자는 잊어버리고 단지 그 소리만을 기록하면서 또한 잘못 전하여져 단지 '팽오(彭吳)'라고 만 기록하게 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의 집에는 '부루단지(夫婁壇地)'라는 것이 있는데, 울타리를 친 깨끗한 곳에 흙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토기에 곡식을 담아 제단 위에 놓아 볏짚으로 지붕을 이어 그것을 덮어두고 매 10월마다 반드시 새로운 곡식을 올리는 것으로서 혹은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 이름하기도 하는데, 곧 부루씨가 물을 다스리고 거처를 정하여 준 것에 보답하여 제사를 지내는 의미이니, 이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누르고 백성을 보호하는 신이 된 것이다.


夫婁旣平水土仍舊而奠民居, 萬民咸懷其德. 及至粗定宅宇而, 濕汚之氣蒸成 疫, 罹病死者甚多, 夫虞幷醫藥而治之. 又値猛獸毒 乘間滋殖, 殆將橫行民間, 夫蘇乃演高矢舊法, 以乾艾爲料, 金石相擊, 因此廣造火種, 燻燒山澤, 於是獸 遠遁而其害漸除. 今人, 多携取火之物, 有金 石 艾三種, 必冠之以夫蘇之名, 如夫蘇鐵 夫蘇石 夫蘇羽者, 皆原於夫蘇氏之完其功也. 夫婁, 又使民帶劒戟而行, 及至關嶺  , 必積石爲堆, 行逢猛獸則用以爲備, 後世所謂石子軍者, (爲)[謂]東國用武之一目, 而實原於此也. 今遺俗尙存而, 野 村氓, 以此謂石城隍, 頗懷畏敬之意. 何後俗之陵夷, 如此其甚耶!


부루가 물과 흙을 예전과 같이 모두 바르게 하고 백성들을 그 땅에 편안하게 살게 하니 만백성은 모두가 그 덕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대충이나마 집들을 정하고 보니 축축하고 더러운 기운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병에 걸려 죽는 자가 많아서 부우가 의술과 약으로 이를 치료하였다. 또한 맹수와 독충이 그 틈을 타고 무수히 번식하여 머지않아 민간에 거리낌없이 돌아다닐 것 같기에, 부소가 이에 고시씨의 옛법을 헤아려 마른 쑥을 재료로 하고 쇠와 돌을 맞부딧쳐 이로서 불씨를 만들어 산과 못 등을 태우니, 그제야 맹수와 독충이 멀리 숨어 버리고 그 해악이 점차 제거되었다. 불을 일으키는 물건으로 지금의 사람들이 많이 지니고 있는 것에는 쇠와 돌과 쑥의 세 가지가 있는데, 반드시 '부소(夫蘇)'라는 이름을 머리에 붙여 '부싯쇠(夫蘇鐵)''부싯돌(夫蘇石)''부싯깃(夫蘇羽)'이라 하니, 모두 부소씨가 그 공덕을 온전히 하였음에서 연유한 것이다. 부루는 또 백성들로 하여금 검과 창을 지니고 다니게 하였으며, 관문과 산꼭대기의 고갯길 등 좁고 험한 길에는 반드시 돌을 쌓아 돌무더기를 만들어 놓고지나다니다가 맹수를 만나면 곧 그것을 사용하여 위험에 대비케 하였다. 후세에 이른바 '석자군(石子軍)'이라 하는 것이 우리나라 무예의 한 종목이라 일컬어지게 된 것은 실로 여기에 그 기원을 둔다. 지금도 그 풍속이 남아 있어 시골의 늙은이와 들녘의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석성황(石城隍)'이라 하며 자못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뜻을 품고 있으니, 뒷날에 와서 풍속의 쇠퇴함이 어찌 이다지도 심하단 말인가.


初, 神市之末, 蚩尤氏兄弟, 雖自 鹿退歸, 而東人之占居淮岱者甚多, 與漢土之人雜處, 農 織牧, 資以爲業. 且南鄙海島之民, 皆以 珠魚貝, 相交易於漢土, 稍稍住息於濱海之地. 至是海岱.江淮之地, 遂爲其州里, 與漢土之民, 交(遊)[游]而錯居.《尙書》所稱,  夷 萊夷 淮夷 島夷者, 皆是也.


처음 신시씨의 말기에 치우씨의 형제가 비록 탁록으로부터 물러나서 돌아왔으나 동방의 사람으로 회대(淮岱)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한나라 땅의 사람들과 섞여 거처하면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 또한 남쪽 지방의 바다섬 백성들은 모두 진주와 물고기 및 조개 등으로 한나라 땅에서 서로 교역하더니 차차 해변의 땅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해대(海岱)와 강회(江淮)의 땅에는 마침내 마을을 이루어 한나라 땅의 백성들과 교류하며 섞여 살게 되니,《상서(尙書)》에 이른바 우이( 夷)래이(萊夷)회이(淮夷)도이(島夷) 등이 모두 그들이다.


夫餘之平南夷也, 洌水以南, 完服王化, 以故靑丘之民, 得漸遷居, 及洪水旣平, 南渡者益多. 於是南夷之人, 幷沾於神化, 遂變其俗. 後之辰 弁諸族, 皆是也.


부여가 남쪽의 이인(夷人)들을 평정하니 열수(洌水)의 남쪽은 완전히 왕의 교화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 까닭에 청구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가서 살게 되었고, 홍수가 완전히 다스려진 뒤로는 남쪽으로 넘어가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로서 남쪽의 이인들도 함께 신인의 교화에 물들어 마침내 그 풍속이 변화하였으니, 후의 진.변(辰.弁)의 뭇 부족들이 모두 그들이다. 御國四十餘載, 而有  兪之亂.   兪者,   之屬也, 洪水之際, 僥倖得免, 及看水土 定而州里蕭然, 乃乘 東侵, 其勢頗猛, 卽使夫餘會集中外之兵, 討平之. 乃益封夫餘, 北方之地, 使宅牛首忽卽先平壤, 使夫婁居(王)[壬]儉城, 令夫蘇修樂浪忽, 夫虞監唐莊京, 更封高矢氏於南方之地. 나라를 다스린지 40여 년만에 설유(  兪)의 난이 있었다. 설유는 험윤의 족속으로 홍수를 만났을 때는 요행히 그 해를 면하더니, 물과 흙이 겨우 안정을 되찾은 뒤 마을과 고을이 쓸쓸해진 것을보고는 이내 그 틈을 타고 동쪽으로 침략해 오니 그 기세가 자못 맹렬하였는데, 곧 부여로 하여금 안팎의 모든 병사를 모아 그를 토벌하여 평정케 하였다. 이에 부여에게 북방의 땅을 더하여 봉하고 우수홀(牛首忽)(즉 먼저 번의 평양이다)에 자리잡게 하였으며, 부루로 하여금 임금성에 거처하게 하고, 부소에게는 낙랑홀을 다스리게 하고, 부우는 당장경을 살펴보게 하였으며, 고시씨는 그 봉토를 고쳐 남쪽의 땅에 봉하였다.


於是檀君西至(王)[壬]儉城, 按撫庶民, 大會諸侯, 令復申天下[農桑之政. 乃北巡而祭天于太白之麓, 封天下]山嶽河川之神, 凡三千餘. 歷牛首忽, 而至肅愼忽, 會北東諸侯, 令祭神誌氏之靈, 遂立廟于夙沙達. 西轉而至奄慮忽, 會南西諸侯, 令祭蚩尤氏之靈, 遂立廟于奄慮達. 復南巡, 而至甲比古次, 祭天于頭嶽之顚. 遂至樂浪忽, 會南東諸侯, 令祭高矢氏之靈, 遂立廟于蘇婁達. 乃還至平壤, 八加及衆諸侯畢集.


그리하여 단군은 서쪽으로 임금성에 이르러 모든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제후들을 크게 모아 명하기를, 다시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을 천하에 널리 펴게 하였다. 이에 북쪽으로 순행하여 태백산의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의 산악과 하천의 신을 봉하니 무릇 3천 곳 남짓 되었다. 우수홀을 지나 숙신홀에 이르러 북동의 제후들을 모아 명령하기를, 신지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숙사달(夙沙達)에 사당을 세웠다. 서쪽으로 돌아 엄려홀에 이르러 남서의 제후들을 모아 명령하여 치우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엄려홀에 사당을 세웠다. 다시 남쪽으로 순행하여 갑비고차에 이르러 두악의 꼭대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마침내 낙랑홀에 이르러 남동의 제후들을 모아 명하여 고시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소루달(蘇婁達)에 그 사당을 세우고는 평양으로 돌아오니 팔가(八加)와 뭇 제후들이 모두 모였다.


檀君乃使諸加及國內人民, 各獻祭于日月 陰陽 四時之神, 及山岳 河川 里社之主. 祭畢, 大誥于有衆, 若曰: 惟皇, 一神在最上一位. 創天地, 主全世界, 造無量物, 蕩蕩洋洋, 無物(不)[弗]包, 昭昭靈靈, 纖塵弗漏. 惟皇, 一神在最上一位. 用御天宮, 啓萬善, 原萬德, 群靈護侍, 大吉祥, 大光明, 處曰神鄕. 惟皇, 天帝降自天宮, 率三千團部, 爲我皇祖, 乃至功完而朝天, 歸神鄕. 咨爾有衆, 惟則天範, 扶萬善, 滅萬惡, 性通功完, 乃朝天. 天範惟一, 弗貳厥門, 爾惟純誠一爾心, 乃朝天. 天範惟一, 人心惟同, 惟秉己心, 以及于人心, 人心惟化, 亦合天範, 乃用御于萬邦. 曰: 爾生由親, 親降自天, 惟敬爾親, 乃克敬天 以及于邦國, 是乃忠孝, 爾克體, 是道. 天有崩, 必克脫免. 飛禽有雙, 弊履有對 爾男[女], 以和, 毋怨 毋妬 毋淫. 爾嚼十指, 痛無大小 爾相愛毋胥, 讒互佑毋相殘, 家國以興. 爾觀于牛馬, 猶分厥  爾互讓毋胥奪, 共作毋相盜, 家國以殷. 爾觀于虎, 强暴不靈, 乃作  爾毋桀 以 物, 毋傷人, 恒(導)[遵]爾天範, 克愛物, 爾如有越厥, 則永不得神佑, 身家以殞. 爾如衝火于(花)[華]田, (花)[華]將殄滅, 神人以怒 爾扶傾, 毋凌弱, 濟恤, 毋侮卑. 爾雖, 厚包厥(杳)[香], 必漏 爾敬持彛性, 毋懷慝, 毋隱惡, 毋藏禍, 心克, 敬于天, 親于民, 爾乃福祿無窮. 咨爾有衆, 其欽哉!


단군은 이에 뭇 가(加)와 나라안의 인민들로 하여금 각기 일월과 음양 및 사시(四時)의 신과 산악과 하천 및 마을의 주인에게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제사를 마친 다음 무리들에게 크게 유시하니 다음과 같았다. 하느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하늘과 땅을 시작하게 하고 모든 세계를 주재하며 한없는 사물을 만드시니, 가없이 넓고도 넓음에 감싸지 아니한 사물이 없으며, 신령스럽게 밝고도 밝음에 가녀린 티끌마저도 새지 아니한다. 하느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부리고 거느리는 하늘 궁전은 모든 선함이 열리고 모든 덕화가 근원하는 곳이며, 뭇 영령들이 보호하고 모시는 크게 길하고도 크게 밝은 곳이니, 이름하여 신향(神鄕)이라 한다. 하늘의 천제(天帝)께서는 하늘 궁전으로부터 3천의 동아리를 거느리고 내려와 우리들 임금의 조상이 되더니, 공덕을 온전히 함에 이르러 하늘로 향하여 신향으로 돌아갔다. 너희 무리들아! 오직 하늘 본보기를 본받아 모든 선함을 돕고 모든 악함을 소멸시키며, 본바탕이 통하여 맡을 일을 온전케하면 이에 하늘로 향하느니라.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그 문은 둘이 아니니, 너는 오로지 정성을 순수하게 하고 너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한다면 이에 하늘로 향하리라.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사람의 마음도 오직 같으니, 오로지 자기의 마음을 잡아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 미치게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교화되고 또한 하늘 본보기에 부합하게 되므로 이에 만방에 이르러 부리고 거느리리라. 말하노니, 네가 생겨난 것은 어버이로 말미암은 것이요 어버이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것이므로, 오로지 너의 어버이를 공경하면 이는 능히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다. 이로서 나라에 미치게 하면 그것이 곧 충효이며, 네가 극복하여 체득하게 된다면 이가 곧 도(道)이니, 하늘이 무너짐이 있더라도 능히 피하여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날아다니는 짐승도 쌍이 있고 헤어진 신발도 짝이 있으니, 너희 남녀들은 화합할 뿐 미워하지 말고 투기하지 말며 음탕하지 말지어다. 네가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아라 아픔에는 크고 작음이 없으니, 너희는 서로 사랑할 뿐 너희끼리 헐뜯지 말 것이며, 서로 도울 뿐 너희끼리 죽이지 말지어다. 집안과 국가가 이로서 일어나리라. 너희는 보아라, 소나 말도 가히 그 먹이를 나눠 먹으니, 너희는 서로 양보할 뿐 너희끼리 서로 빼앗지 말 것이며, 서로 같이 경작할 뿐 너희끼리 훔치지 말지어다. 집안과 국가가 이로서 은성하리라. 너희는 보아라, 범은 강하고도 사나우나 신령스럽지 않기에 재앙을 일으키는 법이다. 너희는 사납고 교만해져 사물을 상하게 하지 말며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고 항상 존중하며 너희 하늘 본보기를 따라 사물을 사랑하라. 너희가 만약에 그것에 지나침이 있다면 곧 영원히 신인의 도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몸과 집안은 이로서 망하리라. 너희가 만약 꽃밭에 불을 질러 꽃이 장차 모조리 없어지게 되면 신인이 이로서 노여워할 것이다. 너희는 위태로움을 도울 뿐 약함을 업신여기지 말며, 어려움을 구제할 뿐 천하다고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가 비록 두텁게 감싼다 하더라도 그 향기는 반드시 새어나오는 것이니, 너희는 타고난 떳떳한 성품을 삼가 지닐 뿐 간사함을 품지 말고 악함을 숨기지 말고 재앙을 감추지 말라. 마음으로 능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가까이하면 너희는 이에 복록이 한없을 것이니, 이로서 너희 무리들은 삼갈지어다.


檀儉旣大誥于有衆, 於是神德大彰, 如此數十年, 天下復熙熙焉, 忘其災矣. 或曰, 此卽檀君八條之敎令, 可以此分八目, 或說是也. 後世, 駕洛國.房登王時, 有 始仙人者, 自七點山而來, 見王於招賢臺曰: [君以自然爲治, 則民[自以](以自)然成俗. 爲治之道, 古有其法, 君何不體之.] 饋以大牢, 辭不受而去. 此道, 破先聖之訣也. 又崔孤雲.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實乃包含三敎, 接化 生. 且如入則孝於親, 出則忠於君,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孤雲, 精敏文學, 卓越諸人, 博通古今, 文名飄動, 其言可謂善採先聖垂訓之精華矣. 此外, 散見於載籍者, 及道家文集, 如《四聞錄》.《三韓拾遺記》等諸書者, 不可 記矣.


단검이 무리들에게 크게 유시를 내리니 이에 신인의 덕화가 크게 빛나기를 수십년, 천하는 다시 화락하여 그 재앙을 잊게 되었다. 혹은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단군팔조(檀君八條)의 교령(敎令)'이라 하는데, 이것을 여덟 조목으로 나눌 수 있으니 혹은 그 예기가 맞을 것이다. 후세에 가락국 방등왕(房登王) 때 암시선인( 始仙人)이 있어 칠점산(七點山)으로부터 내려와 초현대(招賢臺)에서 왕을 뵙고 이르기를 [임금께서 자연의 도리로서 다스림의 기본을 삼으면 곧 백성들도 자연의 도리로서 풍속을 이루어 갈 것입니다. 다스림의 기본이 되는 도(道)는 예로부터 그 법도가 있는데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이를 체득하지 않습니까]라고 하기에, 왕이 크게 희생(犧牲)을 잡아 보내 주었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그가 말하는 도가 바로 앞선 성인의 도를 공구(窮究)할 수 있는 비결이다. 또 최고운(崔孤雲)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는 심오한 이치를 지닌 도가 있으니, 실로 삼교(三敎)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뭇 삶의 무리들을 가까이에서 교화한다. 또한 들어오면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서면 임금에게 충성함과 같은 것은 노나라 공자의 요지이고, 행함이 없는 듯이 일을 다스리고 말함이 없는 듯이 가르침을 펴는 것은 주나라 노자의 근본 되는 생각이며, 모든 악함을 짓지 말고 모든 선함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천축국 태자의 교화이다]라 하였다. 최고운은 문학에 정통하고 재주가 뭇 사람들 보다 뛰어나며 고금의 일에 대해 두루 통하고 글의 명성이 자자한데, 그의 말은 앞선 성인들이 후세에 전하는 교훈의 진국을 잘 가려 뽑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여러 서적에 흩어져 보이는 것과《사성록(四聞錄)》과《삼한습기(三韓拾記)》같은 도가(道家) 문집에 있는 것들은 빠짐없이 적지 못하였다.


從此時, 常出巡, 以孟冬月祭天, 遂爲萬世之遺俗, 此乃東方特有之盛典, 而非外邦之可比也. 太白一山, 足壓崑崙之名而有餘矣. 古之三神山者, 卽太白山也. 三神, 又云三聖, 今文化.九月山有三聖祠, 卽敬祀桓因 桓雄 桓儉者也. 今檀君之敎, 雖不得健行, 而神化靈訓猶傳於後世. 擧國男女, 猶崇信於潛默之中, 卽人生生死, 必曰三神所主, (兒小)[小兒]十歲以內, 身命安危及智愚庸俊, 多托於三神帝釋. 三神者, 卽創天地 造治民物之三神也. 帝釋等語, 雖出於佛家之《法華經》, 亦天帝之意. 此則, 只因古史譯出於緇流之手也, 不可妄以爲非. 昔司馬相如謂漢.武帝曰: [陛下謙讓而弗發, 契絶也三神之歡.] 註云: [三神, 上帝.] 三神之說, 當時亦通于漢土矣.


이때부터 항상 순행을 나가면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마침내 만세에 길이 전하는 풍습이 되었다. 이는 동방 특유의 성대한 제전으로 외국과는 가히 비할 바가 아니다. '태백'이라는 하나의 산은 족히 곤륜(崑崙)의 이름을 누르고도 남음이 있으니, 예전의 삼신산이 곧 태백산이다. '삼신(三神)'을 또는 '삼성(三聖)'이라 하는데, 지금의 문화 구월산에 삼성사(三聖祠)가 있어서 환인과 환웅 및 환검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낸다. 지금에 와서 단군의 가르침이 비록 꾸준히 행해지지는 않지만 신령스러운 교화의 가르침은 여전히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온 나라의 남녀가 여전히 은연중에 받들어 믿고 있는 것으로서, 곧 사람의 삶에서 나고 죽고 하는 것은 반드시 삼신이 주관한다고 말하며, 10살 이전 어린아이의 신변과 목숨의 안위 및 슬기롭고 어리석음과 못나고 뛰어남 등을 모두 삼신제석(三神帝釋)에게 의탁한다. '삼신'은 곧 하늘과 땅을 열고 백성과 사물을 만들어 다스린 삼신을 말하는 것이다. '제석' 등의 말은 비록 불가의《법화경》에서 나왔지만 역시 하늘 임금의 뜻으로서, 이것은 단지 옛 역사가 승려의 손으로 옮겨진 까닭일 뿐이니 망령되게 잘못되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한나라 무제에게 아뢰어 [폐하께서 겸손하게 사양만 하시고 내어 비치지 않으신다면 이는 삼신(三神)의 기쁨을 끊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주석에 삼신은 상제를 말한다 하였으니, 삼신이란 말은 당시 한나라에도 통용되었던 것이다.


盖東方諸山, 以太白名者, 頗多. 俗士, 卒以寧邊.妙香山當之, 實由於一然《三國遺事》之說, 而彼等眼孔如豆, 安足以與論哉! 今白頭山上, 有大池, 周八十里, 鴨( )[綠] 混同諸[江]發源於此, 曰天池, 卽上述神市氏乘雲朝[天]處也. 妙香, 曾無一小 , 其不爲桓雄肇降之太白, 不足辨也. 盖白頭巨岳, 盤據大荒之南, 橫 千里, 高出二百里, 雄偉山層   磅 , 爲東方諸國之鎭山. 神人陟降, 實始於此, 豈區區妙香一山, 只係狼林西走之一 , 而得 如許聖事耶! 世俗, 旣以妙香爲太白, 則其見, 只局於鴨水以南一隅之地, 便唱, 山之祖宗崑崙, 欣欣然, 以小中華自甘宜 其貢使北行屢百年而不爲之恨, 僅以南漢下城之羞,  ( )然, 自歎者也.


무릇 동방의 모든 산 중에 '태백(太白)'이라 이름한 것이 자못 많은데 세속의 선비들이 졸지에 영변의 묘향산을 그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이는 그저 일연의《삼국유사》의 이야기에서 연유한 것일 뿐이니, 저들의 눈구멍이 마치 콩알 같음에 어찌 족히 더불어 논박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백두산 위에는 큰 못이 있어 주위가 80여 리며, 압록(鴨綠)과 혼동(混同) 등의 여러 강이 여기에서 발원하기에 '천지(天池)'라 일컫는데, 곧 위에서 서술하였듯이 신시씨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곳이다. 묘향산에는 일찍이 작은 물줄기 하나 없었으니 그 곳이 환웅이 처음으로 내려온 '태백'이 될 수 없음은 밝힐 필요도 없다. 무릇 백두의 웅대한 산악은 대황(大荒)의 남쪽에 굳게 자리하여 좌우로 1천리에 뻗치고 위로 2백리를 솟아 있으며, 웅장하면서도 층을 지은 험한 능선이 길게 이어지면서 아울러 하나가 되어 있으니, 동방의 모든 나라를 위엄으로 진압하는 명산이다. 신인의 오르내림이 실로 여기에서 처음 하였거늘, 구구하게 단지 서쪽으로 내달은 낭림의 한 줄기에 매어 달린 묘향의 산 하나가 어찌 그와 같은 많은 신성한 일들에 참여할 수 있었겠는가! 세속에선 이미 묘향을 태백으로 여기지만, 이는 곧 그 견해가 단지 압록강 이남의 한 모퉁이에만 국한된 것일 뿐이다. 곧잘 산의 으뜸이 되는 우두머리는 곤륜이라 노래 부르고 기꺼이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로 마땅한 듯 달갑게 여기며, 그 조공의 사절이 북으로 다닌지가 수백년이 되었으나 이는 한스러워 하지 않다가 겨우 남한산성 아래의 수치만을 떠들썩해 하니 스스로 한탄스러울 뿐이다.


 余嘗歷觀載籍, 白頭山之異名, 頗多.《山海經》曰: [大荒之中, 有山, 名不咸, 有肅愼氏之國.].《後漢書》曰: [東沃沮, 在高句麗.蓋馬太山之東, 東濱大海, 北與 婁接.] 註云: [在平壤城西.] 此, 漢士眩學之(忘)[妄]語也.  婁, 乃肅愼後身, 東沃沮, 又在今咸鏡之地, 則蓋馬之(謂)[爲]太白, 可知. 且《麗史列傳》曰: [女眞, 本高句麗之部落, 聚居于蓋馬山東.]云, 當時女眞, 明在白頭山之東北, 蓋馬之爲白頭, 明矣.《魏書勿吉傳》曰: [國有徒太山, 魏言太白, 有虎豹熊狼不害人, 人不得上山 溺]云云.《北史勿吉傳》[曰亦](亦曰): [國有徒太山, 華言.太白, 俗甚畏敬之.]《唐書》曰: [粟末部居最南, 抵太白山, 亦曰徒太山, 與高麗接.]《括地志》曰: [靺鞨, (古)[故]肅愼也, 其南有白山, 鳥獸艸木皆白.]《金史高麗傳》述高句麗以來靺鞨之事曰: [黑水末曷, 居故肅愼地, 有山曰白山, 蓋長白山, 金國之所起焉.] 葉隆禮《遼志》曰: [長白山在冷山東南千餘里, 盖白衣觀音所居, 其山內禽獸皆白, 人不敢入, 恐穢其間]云云, 又曰: [黑水發源于此.]《明一統志》曰: [長白山在三萬衛東北千餘里, 故會寧府南六十里, 橫 千里, 高二百里, 其 有潭, 周八十里, 淵深莫測, 南流爲鴨綠江, 北流爲混同江, 東流爲阿也苦河.]云. 然則, 不咸 蓋馬 太白 徒太 長白等名, 皆爲同山異名, 而歷代方言之異也. 又《高麗史》[光宗十年, 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居之.]云, 則白頭之名, 始見於此. 而蓋字之音, 近[白於](於白)字之意 東語, 馬 頭亦同訓, 蓋馬, 白頭之異字同意亦可明辨, 而白頭之名, 其來亦尙矣.


내가 일찍이 여러 서적들을 두루 살펴 보건대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 자못 많았다.《산해경》에 이르기를 [대황의 가운데 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불함(不咸)이라 하며 숙신씨의 나라가 있다] 하였으며,《후한서》에 이르기를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태산(蓋馬太山)의 동쪽에 있다. 동으로 큰 바다를 접해 있고 북으로 읍루와 더불어 접해 있다] 하고는 그 주석에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하였는데 이것은 한나라 선비가 잘 알지 못하고 배웠기에 생긴 망령된 말이다. 읍루는 곧 숙신의 후신이며 동옥저 또한 지금의 함경의 땅에 있었으니 '개마'가 '태백'이 됨을 알 수 있다. 또한《고려사.열전》에 이르기를 [여진은 본래 고구려의 한 부락이었는데 개마산의 동쪽에 모여 살았다]라 하였으니, 당시의 여진이 분명히 백두산의 동북에 있었으므로 '개마'가 '백두'가 됨은 분명하다.《위서.물길전》에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태백'이라 한다. 범과 표범승냥이 등이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은 산위에 올라가서는 방뇨를 하지 않았다] 하였고,《북사.물길전》에도 역시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중원의 말로 '태백'이라 하며, 풍속에 그것을 매우 삼가며 공경한다]고 하였다.《당서》에는[속말부가 가장 남쪽에 살고 있는데, 도태산(徒太山)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태백산과 맞닥뜨린 곳에서 고려와 더불어 접해있다] 하였다.《괄지지》에는 [말갈은 옛 숙신이다. 그 남쪽에 백산(白山)이 있는데 새와 짐승이며 풀과 나무가 모두 희다]라 하였고,《금사.고려전》에는 고구려 이래 말갈의 일을 기술하며 [흑수말갈이 옛 숙신의 땅에 거주하였는데'백산(白山)'이라 불리는 산이 있었으니 곧 '장백산'으로서 금나라가 일어난 곳이다]라고 하였다. 엽융례(葉隆禮)의《요지(遼志)》에는 [장백산은 냉산(冷山)의 동쪽 1천여 리에 있으며 대저 백의관음이 기거하는 곳이다. 그 산 안의 짐승은 모두 희다. 사람들은 그 곳을 더럽힐까 염려하여 감히 들어가지 않는다]라 하였고, 또 [흑수(黑水)가 그 곳에서 발원하였다]라고 하였다.《명일통지(明一統志)》에는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 동북쪽의 1천여 리에 있으니 옛 회녕부(會寧府)의 남쪽 60리에 있다. 좌우로 1천리에 뻗어 있고 위로 2백리를 솟아 있으며, 그 곳의 정상에 못이 있는데 주위는 80리이며 못은 깊어서 측량할 수 없다.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서 혼동강이 되며 동쪽으로 흘러서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 하였으니, 불함개마태백도태장백 등의 이름은 모두 같은 산의 다른 이름으로 역대 방언의 차이점일 뿐이다. 또《고려사》에 [광종(光宗) 10년에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어 살게 하였다] 하였으니, 곧 '백두'의 이름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보인다. '개(蓋)'의 음은 '백(白)' 자의 뜻과 가까우며, 동방의 말에 '말(馬)'과 '두(頭)'는 같은 새김이기에 글자의 뜻으로 새기면 '개마(蓋馬)'와 '백두(白頭)'가 글자는 다르지만 같은 뜻임이 분명한 것이 되므로 '백두'라는 이름의 유래 또한 오래된 것이라 할 것이다.


東方諸山, 有馬耳 摩尼等山, 俗人幷以摩利呼之, 曾不相別. 盖馬耳 摩尼, 幷出於頭字之意也. 今廣州有修理山, 此必鷲山之意也 積城有紺岳山, 則乃玄山之意也 忠州有達川, 則是月川之意也 而馬耳 摩利之爲頭嶽或頭山之訛, 尤可辨矣. 太白之一名曰白頭, 甲比古次之祭天處曰頭岳, 此非檀君祭天, 必隨頭名之山也, 乃檀君祭天處, 必成頭名之山也. 盖頭者, 最上或元首之稱也. 白頭爲東方諸山之宗, 而又是東人始降之地, 兼復, 元首檀君, 恒行祭天禮于其山, 當時之人, 名之曰頭山也, 必矣. 而甲比古次之頭嶽, 亦不出於此外也. 獨不知, 牛首河之名, 亦只出於沈牛首之俗耶? 此不可斷矣. 然則, 神市氏(之)降, 旣在[白頭於山](於白頭山), 乃漸(徒)[徙]西南, 復沿浿水而南來, 三氏之族, 又各四遷也. (耳)[且]太白旣爲東方靈地, 祭天大儀必始於其山, 則自古, 東民之崇敬是山也, 不尋常. (耳)[且]古(者)昔, 禽獸悉沾神化, 安捿於其山而未曾傷人, 人亦不敢上山 溺而瀆神, 恒爲萬代敬護之表矣. 夫我先民, 皆出於神市所率三千團部之裔. 後世, 雖有諸氏之別, 實不外於檀祖同仁之神孫. 因 雄 儉.三神之, 開創肇定之功德, 常傳誦而不忘, 則古民指其靈山曰三神山者, 亦必矣.


동방의 여러 산에는 '마이(馬耳)'나 '마니(摩尼)' 등의 산이 있는데, 항간의 사람들은 뭉뚱그려 '마리(摩利)'라고 부를 뿐 일찍이 구별하지 않았다. 대저'마이'와 '마니'는 모두 '頭'의 '머리'라는 뜻에서 나왔다. 지금의 광주에 '修理山'이 있는데 이는 필시 '수리산(鷲山)'이라는 뜻이며, 적성에 있는 '紺岳山'은 곧 '검은산(玄山)'이라는 뜻이며, 충주에 있는 '達川'은 바로 '달천(月川)'이라는 뜻이니, '마이'나 '마리'가 '頭嶽' 혹은 '頭山'이 잘못 전해져 그리되었음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태백'을 달리 일컬어 '백두'라 하였으며 갑비고차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을 '두악'이라 하였는데, 이는 단지단군이 반드시 '머리'라는 이름이 붙은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아니라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은 반드시 '머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음을 말한다. 무릇 '머리'라 함은 가장 높다거나 혹은 으뜸 되는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백두'가 동방 모든 산의 으뜸이 되고 또한 동방의 사람이 하늘로부터 처음 내려온 땅이 되며, 게다가 더하여 으뜸 되는 우두머리인 단군이 항상 그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예식을 행하였기에 당시의 사람들이 '머리산(頭山)'이라 이름하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니 갑비고차의 '두악'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수하(牛首河)'라는 이름은 알지 못하겠는데, 이 역시 단지 소머리를 물 속에 담그는 풍속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는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시씨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미 백두산에 있으면서 점차 서남쪽으로 옮기고, 다시 패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니 삼씨(三氏)의 겨레들은 각자 더욱더 사방으로 옮겨갔다. 또한 태백이 이미동방의 신령스러운 땅이 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큰 의식은 반드시 그 산에서 시작하였으니, 예로부터 동방 민족이 이 산을 숭상하고 공경함은 남다른 것이었다. 또 옛날에는 짐승들이 모두 신의 교화에 젖어 그 산에 편안히 깃들여 살며 사람을 해치지 않았으며, 사람 또한 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는 등의 신을 모독하는 행위를 감히 하지 않았으니, 만대에 걸쳐 항상 받들고 보호하는 지표가 되었다. 무릇 우리 선조들은 모두 신시씨가 거느린 3천의 무리에서 나온 후예들이다. 뒷 날 비록 여러 씨(氏)의 구별이 있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단군 선조께서 똑같이 어여삐 여기는 신의 후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환인(桓因)환웅(桓雄)단검(檀儉)의 삼신이 나라를 열고 기초를 바로잡은 공덕을 항상 전하여 예기하고 잊지 않았으니, 곧 옛 백성들이 그 신령스러운 산을 가리켜 '삼신산'이라 하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盖神市以降, 神化之漸, 逐歲益深, 立國經世之本, 自與人國逈異. 其神風聖俗, 遠播於漢土, 漢土之人, 有慕於神化者, 必推崇三神, 至有東北.神明之舍之 焉. 及其末流之弊, 則漸陷於荒誕不經, 愈出愈奇, 怪誕之說, 迭出於所謂燕齊海上怪異之方士. 盖其地, 與我震邦相接, 民物之[敎](交)特盛, 自能聞風驚奇. 又推演傅會曰: [三神山, 是蓬萊 方丈瀛洲, 在渤海中]云云. 且患其無驗, 則曰: [望之如雲, 終莫能至]云云, 以惑其世主.《神仙傳》又以[海中]字, 推以斷之曰: [海上有三神山, 曰蓬萊 方丈 瀛洲山, 謂之三島]云云. 而於是[海上] [六鰲], 荒怪之說, 繼出於(閑)[閒]人之(革)[筆], 乃我國之士, 則更效嚬於此, 曰: [金剛.蓬萊也, 智異.方丈也, 漢拏.瀛洲也.] 則此, 又返咀漢士之餘唾也.《史記封禪書》曰: [三神山者, 其傳, 在渤海中. 盖嘗有至者, 諸僊人及不死之藥皆在焉, 其物禽獸盡白, 而黃金銀爲宮闕]云云. 又仙家書類或曰: [三神山, 有還魂 不老等艸, 一名震檀.]云.


대저 신시씨가 하늘에서 내려온 이래로 신의 교화가 점차 세월에 따라 더욱더 깊어 감에,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경영하는 근본이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와는 자못 다르게 되었기에 그 신성한 풍속이 멀리 한나라 땅에까지 퍼져서 한나라 땅의 사람 가운데 신의 교화를 사모하는 자가 있었으니, 오로지 삼신을 추앙하여 동북 지방에는 '신명의 집(神明之舍)'이라는 명칭까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말단의 폐해에 이르러 곧 점차 허무맹랑함에 빠지고 더욱 기괴해지더니 괴이하고 허망한 말들이 꼬리를 물고 갈마들어 나왔는데, 심지어 '연나라와 제나라의 바다 위에 신선의 술법을 닦는 괴이한 사람이 있다'라고 말해지기까지 하였다. 무릇 그 땅은 우리의 진방(震邦)과 더불어 서로 접해 있어 백성과 사물의 교류가 특히 왕성한데, 직접 그 풍문을 듣고는 놀라며 이상하게 여겼다. 또한 생각을 미루어 넓히고 억지로 이치에 맞춰 말하기를 [삼신산은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으로 발해 가운데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 증거가 없음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바라보면 마치 구름과 같은데 결국에는 능히 다다르지 못한다]라고 말하며 세상의 주목을 미혹케 하였다.《신선전(神仙傳)》에서는 또 '海中'이라는 글자만으로 추측하고 단정지어 말하기를 [바다 위에 삼신산이 있는데 봉래방장영주산이라 하며 이를 일컬어 삼도(三島)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해상(海上)'이나 '육오(六鰲)' 등의 황당무계한 말들이 한가로운 사람들의 붓 끝에서 연이어 나왔음에도 우리나라 선비들은 다시 그것을 억지로 흉내만 내어 [금강산이 봉래산이며, 지리산이 방장산이고, 한라산이 영주산이다]라고 말하니, 이는 또한 한나라의 선비가 뱉은 침을 도리어 받아 곱씹는 격이다.《사기》의 <봉선서>에 말하기를 [삼신산이란 발해의 바다 가운데 있다고 전해진다. 무릇 가본 적이 있는 사람에 의하면 뭇 신선들과 불사의 영약이 모두 있으며, 그 곳의 사물과 짐승들은 모두 희고 황금과 은으로 궁궐을 지었으며] 하였고, 또한 선가(仙家)의 서책에서 혹은 말하기를 [삼신산에는 넋을 부를 수 있거나 먹으면 늙지 않는 등의 풀이 있는데 일명 '진단(震檀)'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今白頭山, 自古有白鹿 白雉或白鷹之屬《括地志》所云: [其南有白山, 鳥獸草木皆白.]者, 是也 方士之說, 亦頗有所據也. 又白頭山一帶, 時産山蔘, 世人擬之以不老草, 山氓欲採取, 則必沐浴致齋祭山以後, 敢發, 其還魂 不老之名, 想, 亦原於此也. 古, 烏斯帝北巡而得靈草, 則此尤驗矣. 且白頭山産紫檀樹, 從古所稱檀木者, 是也. 而古記所傳, 九 震檀之說, 想, 必有因於此, 而[不老震檀]云云者, 盖亦聽者之錯誤也. 然則, 燕.齊方士, 扼腕而言[海中三山]者, 亦 遊於夢中, 欺其主而又自欺也. 今我國有 [願得三山不老草, 拜獻高堂白髮親.]之句, 殆爲養老者, 春祝之定文, 究其原則, 亦可噴飯. 何不, 卽往白頭山, 拜檀帝之靈, 而祈其萬壽耶?


지금의 백두산에 예로부터 흰사슴이나 흰꿩 혹은 흰매의 무리가 있었으며,《괄지지》에서 말한 바 대로 [그 남쪽에 '백산'이 있는데 날짐승과 들짐승 및 초목이 모두 희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니,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의 얘기 역시 상당히 근거하는 바가 있다. 또한 백두산 일대에는 때때로 산삼이 나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불로초로 생각하였다. 산에 사는 백성들이 이를 캐고자 하면 반드시 목욕하고 정성을 들여 산에 제사를 드린 후에야 감히 캐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고 하는데, '환혼(還魂)'이나 '불사(不老)'라는 이름은 생각건대 역시 이러한 것에 근거한 것 일 것이다. 옛날 오사제(烏斯帝)께서 북쪽을 순행하다 신령스러운 풀을 얻었다 하였으니, 곧 그것으로 더욱 증거가 된다. 또한 백두산에는 자단수(紫檀樹)가 나는데 예로부터 단목(檀木)이라 일컫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생각건대 옛 기록에 전하는 '구변진단(九 震檀)'이란 얘기는 반드시 이러한 것에 연유함이 있을 것이나 '불로진단(不老震檀)' 운운하는 것은 아마도 역시 전해들은 사람의 착오일 것이다. 그러한 즉 연나라와 제나라의 방사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바다 속의 삼신산'을 말하는 것 역시 똑 같이 꿈속을 노닐며 그 주인을 속이고 또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된다. 지금 우리나라에 [원하건대 삼신산의 불로초를 얻어 윗채에 계신 백발의 어버이에게 바치고자 한다]는 글귀가 있으니, 아마도 노인을 봉양하는 자가 젊음을 찾아 드리고자 하는 전형적인 글인 것 같은데, 그 근원을 따져 보면 역시 가히 웃음을 참지 못할 뿐이다. 어찌하여 백두산에 가서 단제(檀帝)의 영정에 절을 하고 만수를 기원하지 않는 것인가?


 漢.淮陽之地, 古陳國地, 本太昊之墟, 婦人崇好祭祀用史巫, 故其俗崇巫鬼.《陳詩》曰: [坎其擊鼓, 宛丘之下. 亡冬亡夏, 値其鷺羽.] 又曰: [東門之 , 宛丘之 . 子仲之子, 婆娑其下.] 吳札, 聞其歌則曰: [國亡主, 其能久乎?]云. 此 又伏犧所傳, 倚數觀變之餘弊也.《孟子》[舜曰](曰: [舜)生諸馮, 東夷之人也.]《尙書》曰: [舜肆類于上帝,  于六宗, 望秩于山川,  于 神.] 虞舜以前, 曾無是事, 此或原於上古東邦祭天報本之禮, 及山嶽 河川 洋海 沼澤, 皆有奉命主治之神者也. 漢土, 自古, 以雍州積高爲神明之 , 故立 郊上帝, 諸神祠皆聚云, 則此又與檀祖祭太白, 同其類也. 齊俗有八神之祭, 八神者曰天主 地主 兵主 陰主 陽主 月主 日主及四時主也. 天好陰, 故祠之必於高山之下小山之上, 此祭天太白之麓之類也. 地貴陽, 祭之必於澤中 丘, 此祭天頭嶽之類也. 兵主, 祠蚩尤, 蚩尤氏爲萬代强勇之祖, 作大霧, 驅水火, 又爲萬代道術之宗. 是以, 太初之世, 恒爲東方戎事之主, 海岱一帶, 曾爲其族虎據之地. 藍侯之民, 再進而建奄 徐諸國於淮岱之地, 則八神之說, 萌於是時也.


한나라 회양(淮陽) 땅은 옛적 진(陳)나라의 땅으로 본디 태호씨(太昊氏)의 옛터이다. 그 땅의 부인들이 제사지내 받들기를 좋아하여 화려하게 꾸민 무당을 이용하였기에 그 곳의 풍속은 무당과 도깨비를 숭상하게 되었다.《시경》의 <진시(陳詩)>에서 이르기를, 그 북을 둥둥치며 완구(宛丘) 아래에서 놀고 있네. 겨울이나 여름도 잊고 저 백로깃을 가지고 춤추네. 또 이르기를, 동문(東門)에는 흰느릅나무 완구땅에는 상수리 나무. 자중(子仲)씨 딸이 그 아래서 덩실덩실 춤을 추네. 라 하니, 오찰(吳札)이 그 노래를 듣고는 말하기를 [나라는 망하고 주인은 없는데 그 향락이 오래 가겠는가?] 하였다. 이는 또한 복희씨가 전한 '의수관변(倚數觀變)'의 남겨진 폐단이다. 《맹자》에 이르기를 [순(舜)은 제풍(諸馮)에서 났으며 동이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며,《상서》에 이르기를 [순(舜)에 이르러 드디어 상제(上帝)에게 성대히 제를 올리고, 육종(六宗)에게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며, 섶을 태워 멀리 산천에 제를 지내고, 여러 신들에게 두루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우순(虞舜) 이전에는 일찍이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옛적에 동방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고 그 근본에 보답한다'는 예식과 '산악하천해양소택에 있어서도 모두 하늘의 명을 받들어 맡은 곳을 주관하여 다스리는 신이 있다'는 생각에서 근원 하였을 것이다. 한나라 땅에는 예로부터 옹주(雍州)의 높은 산을 신명이 거처하는 곳으로 여기고 제사 터를 세워 상제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뭇 신들의 사당 또한 모두 모여 있다 하니, 이는 또한 단군이 태백에서 제사지내던 것과 같은 것이다. 제(齊)나라의 풍속에 '팔신제(八神祭)'라는 것이 있는데, 여덟 신이라 함은 천주(天主)지주(地主)병주(兵主)음주(陰主)양주(陽主)월주(月主)일주(日主) 및 사시주(四時主)를 말한다. 하늘은 음(陰)을 좋아하기에 제를 올릴 때는 반드시 높은 산 아래의 작은 산 위에서 지냈으니 이는 태백산의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던 것과 같은 것이며, 땅은 양(陽)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못 가운데의 둥근 언덕에서 지냈으니 이는 두악(頭嶽)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던 것과 같은 것이다. 군사를 주재하는 자는 치우씨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치우씨는 만대에 걸쳐 굳셈과 용감함의 조상으로서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몰아쳐 부리니 또한 만대에 걸친 도술의 근본이 된다. 그러한 까닭에 태초의 세상에서는 항상 동방의 군사(軍事)를 주재하는 자가 되었으며, 해대(海岱) 일대는 일찍부터 그의 부족들이 자리잡고 앉은 땅이 되었다. 남후(藍侯)의 백성들이 다시 더욱 나아가서 엄국(奄國)과 서국(徐國) 등의 뭇 나라들을 회대(淮岱)의 땅에 세웠으니, '팔신(八神)' 등의 얘기는 이 때 싹튼 것이다.


漢.高起兵於豊沛, 則祠蚩尤,  鼓旗, 遂以十月至 上, 與諸侯平咸陽, 而立爲漢王, 則因以十月爲年首. 此雖, 襲於秦之正朔, 而亦有因於敬蚩尤也. 後四歲, 天下已定, 則令祝官, 立蚩尤之祠於長安, 其敬蚩尤之篤如此.《晋書天文志》[蚩尤旗類彗而後曲象旗, 主所見之方下, 有兵.]云, 則是乃蚩尤氏, 上爲列宿也.《通志氏族略》[蚩氏, 蚩尤之後也.]云, 則是蚩尤氏之後而永居於漢土者也. 蚩尤氏之英風雄烈 播傳異域之深, 推此可知, 而今世人, 殆無過問者, 則此, 又國史散滅之故也, 而後代學者, 竟不免疎迂之譏矣.


한나라 고조는 풍패( 沛)에서 병사를 일으키며 치우씨에게 제사를 지내고는 북과 깃발에 희생의 피를 발랐으며, 마침내 10월에 패상( 上)에 이르러 제후들과 더불어 함양(咸陽)을 평정하고 한나라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런 연유로 10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비록 진(秦)의 책력을 이어서 따른 것이긴 하지만 역시 치우씨를 공경함에서 연유되었다 할 것이다. 그 뒤 4년에 천하가 이미 안정되자 곧 축관(祝官)에게 명하여 치우씨의 사당을 장안에 세우게 하였으니, 치우씨를 공경함이 이와 같이 돈독하였다. 《진서.천문지(晋書.天文志)》에 [치우기(蚩尤旗) 유형의 혜성은 그 뒷 꼬리의 곡선이 마치 깃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주로 나타나는 방향의 아래에는 병사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치우씨가 하늘로 올라가서 별자리가 되었음을 말한다.《통지.씨족략(通志.氏族略)》에 [치(蚩)씨는 치우의 후손이다]라 하였으니, 곧 이들은 치우씨의 후손으로서 영원히 한나라 땅에 머무른 자들이다. 치우씨의 영웅된 기풍은 다른 지역까지 매우 널리 퍼졌음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으나 지금의 세상 사람들 가운데 이를 물어 오는 자가 거의 없으니, 곧 이는 또한 나라의 역사가 흩어지고 없어진 까닭이지만, 후대의 학자들도 그것을 소흘히하고 멀리하였다는 비난을 결국에는 면할 수 없을 것이다. 盖燕.齊之士, 沈惑於神異之說, 亦尙矣. 自齊.威宣燕.昭之時, 遣使求三神山. 秦.漢之際, 宋無忌 正伯 僑克 尙  門子高之徒, 則皆燕人也 文成 五利 公孫卿 申公之屬, 皆齊人[人]也. 昔, 太公治齊, 修道術, 後世其地, 多好經術者, 則此又太公爲之助俗也, 燕.齊之士, 安得以不好怪異之說哉! 무릇 제나라와 연나라의 선비들은 신비하고 괴이한 말에 깊이 현혹되고 또한 이를 높이 여겼다. 제나라의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및 연나라의 소왕(昭王) 때부터 사신을 보내 삼신산을 찾게 하였으니, 진(秦)과 한(漢) 때의 송무기(宋無忌)정백(正伯)교극(僑克)상선(尙羨)문자고(門子高) 같은 무리는 모두 연나라 사람이고, 문성(文成)오리(五利)공손경(公孫卿)신공(申公) 등의 무리는 모두 제나라 사람이다. 옛날 태공(太公)이 제나라를 다스리며 도술을 닦았더니 뒷날 그 땅의 사람들이 도술 부리는 것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곧 이것은 또한 태공이 세상의 풍속을 그렇게 이끈 것이므로, 연나라와 제나라의 선비들이 어찌 괴이한 말들을 좋아하지 않았겠는가.


余幼而嫌梳頭, 老婢諭曰: [不梳頭者, 蚤 鑽穴, 將至耳腦相通, 寧不懼乎?] 余曰: [寧有是事乎?] 曰: [東部山邨之兒, 正如是矣.] 及後, 到山村, 無有是事. 嘗與客坐談, 客曰: [木之最大者, 有(經)[徑]數間者.] 曰: [寧有是事乎?] 曰: [嶺東之地, 多斯木, 斫而橫之, 則行旅可連枕而宿其上, 一面至(數十人)[十數人].] 其後, 余隨舍叔父, 至嶺東, 曾無是木. 及讀《莊子》曰: [北溟有魚, 其名爲鯤, 化而爲鳥, 其名爲鵬, 其長數千里, 其翼若垂天之雲.] 余問於師曰: [可信有此事否?] 曰: [窮髮之北, 安知, 其必無耶?] 雖然, 其後歷觀載籍, 且無是語. 今, 大荒數萬里, 未聞有數千[里]巨湖, 且寒威酷烈, 絶冠天下, 安容如許大物, 能逍遙於寒熱兩極之間耶? 其云[ 扶搖而上[者](有)九萬里.]者, 欲杜世人之辨也. 又看《神異經》曰: [崑崙之西, 有大蛇繞山, 長三萬里]云云. 長三萬里大蛇, 盤據於崑崙之西, 則西域諸國, 應遊牧於鱗角之下, 世間寧有是事耶? 盖喜作迂怪之說者, 必藉於聽者之所不知. 此, 漢土迂怪之士, 只憑東方.三神之說, 而  然, 胥出浮言, 以惑其聽者也.


내가 어렸을 때 머리에 빗질하기를 싫어하였더니 늙은 종이 빗대어 말하기를 "머리를 빗지 않으면 이가 구멍을 뚫어 장차 귀와 뇌가 서로 통하게 되기에 이르는데 어찌 두렵지 않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였더니 "동쪽 산골 마을의 아이가 바로 그렇게 되었다"고 하여 나중에 산 마을에 가 보았더니 그런 일이 있은 적이 없었다 한다. 한번은 손님과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데 손님이 말하기를 "나무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직경이 몇 칸이나 되는 것이 있습니다"라고 하기에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영동 땅에 그런 나무가 많습니다. 베어서 가로질러 놓으면 지나가는 나그네가 그 위에서 배게를 나란히 하고 누워 잘 수 있는데, 한 쪽 면에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누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내가 작은 아버님을 따라 영동에 가 보았더니 일찍이 그러한 나무는 없었다 한다. 《장자》를 읽으니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은 곤(鯤)이다. 변화하여 새가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하는데, 그 길이는 수천리가 되며그 날개는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도 같다]라 하였다. 내가 스승에게 여쭙기를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은 믿을 만한 것입니까?" 하니 "초목이 나지 않는 북극 지방인데 어찌 알겠냐 마는 그것이 반드시 없다고는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그 후에 모든 서적들을 낱낱이 살펴보았지만 또한 그러한 말은 없었다. 지금에 대황의 수만 리 넓은 땅에 수천 리에 걸친 큰 호수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며, 또한 추위의 위세가 혹심하기로 으뜸인 하늘 아래 어찌 그와 같은 큰 사물을 받아들여서 능히 춥고 더운 양극 사이를 유유자적히 노닐게 할 수가 있겠는가. [큰 바람을 북돋우며 9만리의 상공으로 오른다]라고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의 분별을 가로막기 위해서이다. 또한《신이경(神異經)》을 보았더니 [곤륜산의 서쪽에 큰 뱀이 있어 산을 휘어 감고 있는데 그 길이가 3만리이다] 하였다. 길이가 3만리나 되는 큰 뱀이 곤륜의 서쪽에 또아리를 틀고 앉았으면 서역의 뭇 나라들이 응당 그 비늘조각 아래에서 짐승을 길렀을 터인데, 세상에 어찌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릇 이상한 말을 짓기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듣는 사람이 모르는 것을 빌미로 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한나라 땅의 기괴한 선비들도 단지 동방의 삼신 예기에 빙자하여 공연히 시끄럽게 거짓말을 퍼트려 인심을 선동하고 이로서 듣는 자들을 미혹케 하였다.


高麗.仁宗九年, 因妖僧妙淸之說, 置八聖堂于西京.林原宮中. 淸平爲之說曰: [第一曰護國白頭嶽太白仙人, 有大(彗)[慧]大德, 助主神, 造大界, 卽桓雄天王之謂也. 第二曰龍圍嶽六通尊者, 有 化萬理之能, 掌人間禍福. 第三曰月城嶽天仙, 掌風雨之神. 第四曰駒麗平壤仙人, 掌光明之神. 第五曰句麗木覓仙人, 掌人間壽命之神. 第六曰松嶽震主, 有大勇大力, 掌神兵, 恒鎭守國都, 以驅外敵, 卽古蚩尤氏之神. 第七曰甑城嶽神人, 掌四時穀蔬草木之事, 卽古高矢氏之神. 第八曰頭嶽天女, 掌地上善惡, 卽神市氏之后 桓儉神人之母. 皆在主神調度之下, 掌治天下諸事之神]云云. 盖仁宗之於妙淸, 信惑太甚, 卒致西京之變, 使金富軾討平. 妙淸, 發身於沙門, 蠱惑其世主, 寵傾宗戚, 權壓內外, 漸致驕傲, 敢謀不軌, 其罪固不可誅. 然而, 當時猶有, 恨國力之不振, 憤外侮之 至, 採古來之神明於殘散傳說之中, 欲以激當時之人心, 其行雖乖, 其志則猶有可采者矣. 古之說史者, 只以妖僧荒誕之說, 唾棄而不采, 則猶有一分迂 之責[八聖矣](矣. 八聖)之名, 必表以佛家名字, 僧侶之筆, 安不得如斯耶? 此不可深怪也.


고려 인종(仁宗) 9년에 요승 묘청(妙淸)의 말로 말미암아 서경의 임원궁에 팔성당(八聖堂)이 설치되었다. 청평이 그 예기를 보충하여 이르기를 [그 첫번째를 호국백두악(護國白頭嶽)의 태백선인(太白仙人)이라 하는데, 큰 지혜와 큰 덕을 지니고 주신을 도와 큰 세상을 만드니 곧 환웅천왕을 일컫는 것이다. 그 두번째를 용위악(龍圍嶽)의 육통존자(六通尊者)라 하는데, 1만 가지의 이치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길융화복을 관장하고 있다. 그 세번째를 월성악(月城嶽)의 천선(天仙)이라 하는데, 바람과 비를 관장하는 신이다. 그 네번째를 구려(駒麗)의 평양선인(平壤仙人)이라 하는데, 광명을 관장하는 신이다. 그 다섯번째를 구려(句麗)의 목멱선인(木覓仙人)이라 하는데,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신이다. 그 여섯번째를 송악(松嶽)의 진주(震主)라 하는데, 큰 용기와 큰 힘을 지니고서 신의 군사를 관장하고 항시 나라의 도읍을 지키며 외적을 몰아내니 곧 예전의 치우씨 신이다. 그 일곱번째를 증성악(甑城嶽)의 선인(神人)이라 하는데, 사시(四時)와 곡식 채소 및 초목의 일을 관장하니 곧 예전의 고시씨 신이다. 그 여덟번째를 두악(頭嶽)의 천녀(天女)라 하는데, 땅위의 선악을 관장하니 곧 예전 신시씨의 황후이며 환검신인의 어머니이다. 이들 모두가 주신의 영도 아래 있으면서 천하의 모든 일을 관장하여 다스리는 신이다]라고 하였다. 무릇 인종이 묘청에 대하여 믿고서 현혹됨이 너무 심하여 결국에는 서경의 변란이 일어나기에 이르자 김부식으로 하여금 토벌하여 평정하게 하였다. 묘청은 불문(佛門)에서 몸을 일으켜 임금의 마음을 미혹시키고 종친과 외척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권력으로 안팎을 누르고는 점차로 교만해져 감히 모반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니 그 죄는 진실로 주살 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당시에도 여전히 국력이 위세를 일으키지 못함을 한탄하고 외적들의 업신여김이 거듭됨을 분개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에 헤지고 흩어져 전해 내려온 얘기 가운데에서나마 예로부터 내려오는 신명(神明)을 골라내어 이로서 당시의 인심을 격앙시키고자 하였으니, 그 행위는 비록 어그러졌다 하지만 그 뜻은 오히려 가려서 취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할 것이다. 옛적에 역사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단지 요승의 황당무계한 말만을 들어 침을 내뱉듯이 버리고는 가려서 취하지 않았으니, 이는 오히려 조금은 그 일에 어둡고 소흘한 책임이 있다 하겠다. 여덟 성인의 이름을 반드시 불가의 이름으로 나타낸 것은 승려의 글이기에 어찌 그와 같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는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噫! 神市立極, 檀帝垂訓, 聖化神澤, 皇皇亮亮, 足爲萬代之天範. 而後孫不肖, 乃致聖謨鴻猷, 潛消默失於冥冥之中, 使堂堂皇謨, 盡付於空山臥睡之人, 所傳者, 只遺怪亂之說, 不亦悲乎. 今, 崇三神帝釋之風頗盛, 每人家正寢壁上, 以檀木爲釘, 紙囊盛純白米而掛之, 名曰三神囊或帝釋囊. 每十月, 新穀肇成, 則主婦必 手, 換新甑, 蒸爲餠, 以賽其神而祝景福. 此, 旣出於檀朝之遺制, 而俗民競以巫覡相尙, 或至禍福壽夭, 專托巫祝而云爲之, 此乃古俗末流之弊也. 能向燕.齊之士, 而嗤其迂怪也哉! 悲夫!


오호라! 신시씨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고 단제가 그 교훈을 후세에 전하니 성스러운 교화와 신인의 은택은 환히 빛나서 족히만대에 걸쳐 하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후손이 불초하여 성스럽고도 원대한 대계(大計)는 어둑어둑한 가운데로 잠겨서 사라지듯 소리 없이 잃어버리고, 당당하던 임금의 천하 경영의 뜻은 빈 산에 누워 잠든 이들에게로 모두 미뤄 버리니, 전해지는 것이라곤 단지 괴상하고 어지러운 말만 남았을 뿐이라, 이 역시 슬프지 않겠는가. 이제 삼신제석(三神帝釋)을 숭배하는 풍조가 자못 성하여, 집집마다 잠자리의 바로 윗 벽에 박달나무로 만든 못을 박고 종이 주머니에 깨끗한 흰 쌀을 가득 담아 걸어 두며 이름하여 '삼신낭(三神囊)' 혹은 '제석낭(帝釋囊)'이라 한다. 매년 10월 새로운 곡식이 날 때면 주부는 반드시 손을 정결히 하고 새로 마련한 시루에 떡을 쪄서 그 신에게 정성을 올리며 큰 복을 바란다. 이것은 단조(檀朝)때 생겨나 지금까지 남겨진 풍속인데, 속된 백성들은 다투어 무당과 박수를 받들면서 혹은 길흉화복과 장수하고 단명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무당과 박수에게 의탁하며 말과 행동을 그것에 따르니, 이는 곧 옛 풍속의 끄트머리로 흐르는 폐단이다. 그러니 어찌 연나라와 제나라 선비를 향하여 그들이 괴상하다고 비웃을 수 있겠는가. 슬프도다!


先是, 夫婁旣平水土, 而夏禹適治唐堯九(年)[秊]之水. 宇內諸國, 悉會於塗山.明.鳳陽府. 夫婁亦奉命往會, 又使神誌(氏)齋寶玉 弓矢以從焉. 自蚩尤.軒轅大戰以後, 兩國始以玉 帛相見, 可稱東方會盟之始矣.


이 보다앞서 부루가 물과 땅을 모두 안정시키고 나니 하(夏)나라의 우(禹)가 마침 당요(唐堯) 9년의 홍수를 다스리기에 세상의 모든나라들이 모두 도산(塗山)(명明의 봉양부鳳陽府)에 모였다. 부루 역시 명을 받들고 가서 함께 모이며 신지씨로 하여금 보옥 및 활과 화살을 지니고 따르게 하니, 치우와 헌원이 크게 싸운 이후 두 나라가 처음으로 옥과 비단을 가지고 서로 만난 것으로서 가히 동방회맹(東方會盟)의 시초라고 할 만하다.


在位九十餘載, 天下  然, 忘其樂焉. 乃命夫婁攝位曰: [天道昭昭, 降在爾心, 惟秉爾心, 以親萬民, 其惟純誠乎!] 乃南至唐莊, 入居阿斯達, 以孟冬月, 化神朝天. 在世凡二百十年, 在君位九十三年. 於是夫婁率諸加及諸侯, 獻祭於朝天處, 以辛丑歲卽位于平壤, 是二世檀君也. 後有文朴氏, 居阿斯達, 韶顔方瞳, 頗得檀儉之道. 其後, 如向彌山之永郞及馬韓之神女寶德諸人, 只得其一斑, 淸 無爲, 適遙塵外, 又非檀祖用化萬民之大義也.


재위 90여 년 동안 천하는 공허롭게 넓기에 즐거움을 잊고 지냈다. 이에 부루에게 명하여 재위를 잇게 하며 이르기를 [하늘의 도는 밝디 밝게 네 마음에 내려와 있으니, 오로지 네 마음을 잡고 그로서 만백성을 사랑하면 그 뜻은 순수하고 정성스러울 것이니라] 하고는, 남쪽으로 당장(唐莊)에 이르러 아사달에 들어가 기거하다가 10월에 신이 되어 하늘에 오르니, 세상에 있은 지 무릇 210년이요 임금의 자리에 있은 지 93년이다. 이리하여 부루가 뭇 가와 제후를 거느리고 하늘에 오른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는 신축년에 평양에서 즉위하니 바로 두번째 단군이다. 뒤에 문박씨(文朴氏)가 아사달에 살고 있었는데, 환하게 젊어 보이는 얼굴에 모가 난 눈동자를 하고서 자못 단검(檀儉)의 도를 얻은 듯하였다. 그 후에 향미산(向彌山)의 영랑(永郞)과 마한(馬韓)의 신녀보덕(神女寶德) 등 뭇 사람들은 단지 그 한 부분만을 체득하여 정결하게 무위(無爲)로서 속세를 벗어나 소요할 뿐이었으니, 이 또한 단조(檀朝)가 만백성을 교화시키는 그러한 큰 뜻은 아니다.


辛丑歲, (王)[壬]儉夫婁元年. 夫婁旣卽位, 繼父志而治天下, 凡三年, 出巡國中, 祭天如禮, 復使諸侯, 致祭如古. 居數年, 有 肅者無道, 使仙羅往撫之. 其後,  肅再叛, 乃使仙羅會   蓋馬之兵, 討平之, 逐其徒於窮北. 益修德政, 廣采賢能, 乃擧息達爲龍加, 今勿爲馬加, 增置主財之職曰鳳加, 使阿密主之. 於是浚渠 , 開道路, 興農桑, 勸牧畜, 啓學而廣敎, 民生益殷, 聲聞大彰. 令天下, 以孟冬西成之後, 居民相聚, 薦穀而祭天, 幷祀檀儉在天之神, 民人咸悅, 推戴欽慕, 無異存日.


신축년은 부루 임금의 원년이다. 부루가 즉위하여 부왕의 뜻을 이어 천하를 다스리니, 무릇 삼년만에 나라안으로 순행을 나가서 예를 갖추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다시 제후들로 하여금 제사를 지냄을 예전처럼 하게 하였다. 수년이 지난 후에 앙숙( 肅)이라는 무도한 자가 있어서 선라(仙羅)로 하여금 가서 그를 달래게 하였는데, 그 후에 앙숙이 다시 배반하기에 선라로 하여금 속진과 개마의 병사를 모으게 하여 그를 토벌하고는 그 무리를 북쪽의 후미진 곳으로 내어쫓았다. 이에 덕스러운 정치를 더욱 닦으며 널리 현명하고 능력 있는 가려 뽑았으니, 식달(息達)을 등용하여 용가로 삼고, 금물(今勿)을 마가로 삼았으며, 재정을 주관하는 직책을 증설하여 붕가(鳳加)라 이름하고 아밀(阿密)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물도랑을 파고 길을 내며 농사와 누에치기를 일으키고 목축을 권장하였으며 학문을 계도하여 널리 가르치니, 백성의 생활은 더욱 윤택하여지고 이를 기리는 소리는 천하에 자자하였다. 천하에 영을 내려 10월 추수를 마친 후에 그 땅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서로 모여 새 곡식으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아울러 하늘에 계신 신(神)인 단검께도 제사 드리게 하니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추대하여 떠받들고 그 덕을 흠모하기를 살아 있을 때와 다름없이 하였다.


初, 夫婁踐位之際, 虞舜以藍國隣接之地爲營州, 凡數十年, 夫婁使諸加征其地, 盡逐其衆. 是時, 天下諸侯, 來朝者數十. 於是作於阿之樂, 以諧人神. 於阿者, 喜悅之詞也. 時有, 神獸出於靑丘, 白毛九尾, 銜書作瑞, 乃賞高矢氏, 令國中奏樂而致歡, 又作朝天之舞. 封仙羅於 肅之地, 後數年, 又封道羅 東武, 以表其功, 卽後之沃沮 沸流 卒本(朝)諸國也. 在位三十四歲, 崩, 壽一百四十六歲. 子, 嘉勒立.


처음에 부루가 임금의 자리에 올랐을 때 우순(虞舜)이 남국(藍國)에 인접한 땅을 영주(營州)로 삼은지가 무릇 수십년이기에 부루가 뭇 가로 하여금 그 땅을 정복하게 하고 그 무리들을 모두 내치게 하였다. 이 때 천하의 제후 가운데 들어와 알현하는 자가 수십 명에 이르니, 이에 '어아의 노래(於阿之樂)'를 지어 이로서 사람과 신이 어울려 화합하였다. '어아'라 함은 기쁨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때 신령스러운 짐승이 청구(靑丘)에 나타났으니, 털은 희고 꼬리는 아홉에 서책을 입에 물고 상서러움을 드러내는지라, 이에 고시씨에게 상을 내리고는 나라 안에 영을 내려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매우 즐기며 또한 '조천무(朝天舞)'를 지었다. 선라(仙羅)를 앙숙의 땅에 봉했다가 그 몇 년 뒤에 또 도라(道羅)와 동무(東武)를 봉하여 그 공덕을 표창하니, 곧 뒤에 옥저(沃沮)비류(沸流)졸본(卒本) 등의 뭇 나라들이다. 임금으로 있은 지 34년만에 세상을 떠나니 수(壽)는 146세였다. 아들 가득(嘉勒)이 임금이 되었다.


乙亥歲, (王)[壬]儉嘉勒元年. 亦有聖德, 能繼父祖之道. 又擧九室氏爲龍加, 益致其隆盛焉. 時, 夏王失德, 其臣有簒逆者, 乃使息達率藍 眞蕃之民, 以征之, 於是國威益彰. 乃行祭天禮, 遍及于諸神. 在位五十一歲, 威德流被于四表, 國人咸慕其化. 以乙丑歲崩, 壽八十四. 子, 烏斯立.


을해년은 가륵 임금의 원년이다. 역시 성스러운 덕이 있어 능히 부왕과 조부의 길을 이었다. 또 구실씨(九室氏)를 등용하여 용가로 삼으니 그 융성함이 더욱 극진하였다. 이 때 하나라 왕이 덕을 잃어 그 신하 가운데 왕위를 넘보고 반역하는 자가 있으므로, 이내 식달(息達)로 하여금 남국(藍國)과 진번(眞蕃)의 백성들을 이끌고 가서 그를 정벌케 하니 나라의 위세가 더욱 빛났다. 이에 하늘에 제사의 예식을 행하며 뭇 신들에게 고루 미치게 하였다. 임금으로 있은 지 51년에 위엄 있는 덕은 사방으로 퍼져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가 그 교화를 사모하게 되었다. 을축년에 세상을 떠나니 수는 84세였다. 아들 오사(烏斯)가 임금이 되었다.


丙寅歲, (王)[壬]儉烏斯元年. 北巡而得靈草. 分天下爲二十一州. 征夏王后相, 不克, 後和, 遣使相通. 在位四十九歲, 崩, 子, 丘乙立.


병인년은 오사 임금의 원년이다. 북쪽을 순행하다 신령스러운 풀을 얻었다. 천하를 21주(州)로 나누었다. 하나라 왕 후상(后相)을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후에 화해하여 사신을 보내고는 서로 교통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4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구을(丘乙)이 임금이 되었다.


乙卯歲, (王)[壬]儉丘乙元年. 時, 夏民有慕化而至者, 使處於奄慮忽. 後, 少康復興夏道, 久相和好. 封太白之山, 使凡民不得恣意侵犯. 在位三十五歲, 崩. 子, 達門立.


을묘년은 구을 임금의 원년이다. 이 때 하나라 백성 가운데 임금의 교화를 사모하여 오는 자가 있으므로 엄려홀(奄慮忽)에 거처하게 하였다. 뒤에 소강(少康)이 하나라의 도를 다시 일으키므로 오랫동안 서로 화목하게 지냈다. 태백산을 봉하여 일반 백성들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3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달문(達門)이 임금이 되었다.


庚寅歲, (王)[壬]儉達門元年. 生而有異, 及長, 有聖德. 又得東海人黎老爲龍加. 德聞益彰, 國人不知惡 不知煩懊, 聲敎之漸, 可謂盛矣. 乃西撫  兪, 北安 肅, 南攘夏, 東至于蒼海, 而波息十年. 在位三十二歲, 崩. 子, 翰栗立.


경인년은 달문 임금의 원년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다름이 있더니 자라서는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또 동해 사람 여로(黎老)를 얻어 용가로 삼으니 그 덕의 평판은 더욱 빛났다. 나라 사람들은 악을 모르고 번민을 몰랐으니, 임금의 가르침이 번져나가 백성에게 물들어 감이 가히 융성하였다 할 것이다. 이에 서쪽으로 설유를 달래고 북쪽으로 앙숙을 진정시켰으며, 남으로 하나라를 물리치고 동쪽은 푸른 바다에 이르니, 십년동안 어려움 없이 조용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32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한율(翰栗)이 임금이 되었다.


壬戌歲, (王)[壬]儉翰栗元年. 有阿叱者, 作亂害民, (王)[壬]儉曰: [惟罪歸于作犯, 惟道成于謹修.] 乃益修德政, 使黎老征之, 三年而後始禽. 且當時, 夏政方殷, 使藍侯勤修戎事, 而終世以和. 在位二十五歲, 崩. 子, 于西翰立.


임술년은 한율 임금의 원년이다. 아질(阿叱)이라는 자가 있어 난을 일으켜 백성을 해치니 임금이 이르기를 [죄(罪)는 오로지 그것을 범한 자에게로 돌아가며 도(道)는 오로지 그것을 삼가 닦은 자에게서 이루어진다]라 하고 더욱 덕스러운 정치를 닦으며 여로(黎老)에게 그를 정벌하게 하니 삼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사로잡았다. 또한 당시에 하나라의 정치가 바야흐로 융성해지므로 남후로 하여금 군사의 일을 힘써 다스리게 하니 오랫동안 이로써 평화로웠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5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우서한(于西翰)이 임금이 되었다.


丁亥歲, (王)[壬]儉于西翰元年. 或曰烏斯含. 使民, 九十稅一, 廣通有無, 以補不足. 在位五十七歲, 崩. 子, 阿述立.


정해년은 우서한 임금의 원년이다. 혹은 오사함(烏斯含)이라고도 한다. 백성들에게 90분의 1을 세금으로 내게 하였으며, 물자의 유무에 따라 널리 통하게 하여 부족한 것을 보충케 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57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아술(阿述)이 임금이 되었다.


甲申歲, (王)[壬]儉阿述元年. 有仁德. 時, 民有犯禁者, (王)[壬]儉曰: [糞地雖汚, 乃有降露之時.] 置而不治, 犯禁者, 乃化其德. 在位二十八歲, 崩. 子, 魯乙立.


갑신년은 아술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에게 어진 덕이 있었는데 이 때의 백성 가운데 금지한 것을 범한 자가 있기에 임금이 말하기를 [똥을 눈 땅이 비록 더럽기는 하지만 거기에도 이슬이 내릴 때가 있을 것이다]라 하며 내버려두고 죄를 다스리지 않으니 범한 자가 그 덕에 감화되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8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노을(魯乙)이 임금이 되었다.


壬子歲, (王)[壬]儉魯乙元年. 始作 , 養畜外之獸. 在位二十三歲, 崩. 子, 道奚立.


임자년은 노을 임금의 원년이다. 처음으로 우리를 만들어 바깥의 짐승들을 길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도해(道奚)가 임금이 되었다.


乙亥歲, (王)[壬]儉道奚元年. 夫餘侯有  兪之難, 熊加與句麗 眞番侯, 助平之. 在位三十六歲, 崩. 子, 阿漢立.


을해년은 도해 임금의 원년이다. 부여후가 설유 때문에 어려움을 치르자 웅가와 구려후 및 진번후 등이 도와서 이를 평정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36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아한(阿漢)이 임금이 되었다.


辛亥歲, (王)[壬]儉阿漢元年. 在位二十七歲, 崩. 子, 屹達立.


신해년은 아한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7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흘달(屹達)이 임금이 되었다.


 戊寅歲, (王)[壬]儉屹達元年. 有武勇, 國人畏愛之. 得奚門爲龍加. 夏人來至, (王)[壬]儉優禮之. 時, 夏德旣衰, 使人往觀其政, 又送舞樂而試之. 及後, 使奚門與藍侯率諸兵, 進征奄至 .岐之間. 後與夏王和. 在位四十三歲, 崩. 子, 古弗立.


무인년은 흘달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은 무예에 용맹이 있음에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좋아하였다. 해문(奚門)을 얻어 용가로 삼았다. 하나라 사람이 건너오자 임금이 그를 예절로서 대우하였다. 이 때 하나라의 덕이 이미 쇠퇴하니 사람을 시켜 가서 그 정치를 살펴보게 하고는 또 춤과 노래를 보내어 그를 시험하게 한 후에 해문과 남후로 하여금 모든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엄(奄)에서 빈( )기(岐) 사이의 지역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 후 하나라 왕과 서로 화해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4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고불(古弗)이 임금이 되었다.


辛酉歲, (王)[壬]儉古弗元年. 繼父志而修戎事, 然而終世無事.   侯獻赤玉之瑞. 在位二十九歲, 崩. 子, 伐音立.


신유년은 고불 임금의 원년이다. 부왕의 뜻을 이어 군사의 일을 잘 다스렸으나 오랫동안 그 군사를 쓸 일이 없었다. 속진후가 상스러운 붉은 옥을 바쳤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벌음(伐音)이 임금이 되었다.


庚寅歲, (王)[壬]儉伐音元年. 種薰華於階下, 以爲亭. 使末良爲龍加. 曰: [孩提, 亦歸于寵者. 保民之道, 不可暫弛.] 遂, 廣施德政, 於是兆民久懷. 時, 夏王遣使請援, 乃使末良興兵進救. 後, 夏王復請兵, (王)[壬]儉以其無道, 却而不許. 及湯王.商大修仁政, (王)[壬]儉曰: [有德之君也, 不可相侵.] 乃 其兵, 後和. 使民, 八十稅一. 在位三十三歲, 崩. 子, 尉那立.


경인년은 벌음 임금의 원년이다. 훈화(薰華)를 섬돌 아래 심어서 이를 길렀다. 말량(末良)을 용가로 삼았다. 이르기를 [어린아이도 그를 귀여워해 주는 사람에게 끌려 돌아가기 마련이니, 백성을 보살피는 도리는 잠시라도 소흘히 할 수 없다] 하며 마침내 널리 덕스러운 정치를 펼치니, 이로서 모든 백성이 그 덕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다. 이 때 하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 와서 구원을 청하므로 말량에게 군사를 일으켜 나아가 구원하게 하였다. 뒤에 하나라 왕이 또다시 병사를 요청하였으나 임금이 그의 무도함을 들어 청을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았다. 탕(湯)왕이 상(商)나라를 일으키고 크게 어진 정치를 닦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덕이 있는 군주로다. 서로 침범할 수 없도다] 하고는 군사를 거두어들인 뒤 화해하였다. 백성들로 하여금 80분의 1의 세금을 내게 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3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위나(尉那)가 임금이 되었다.



癸亥歲, (王)[壬]儉尉那元年. 國內靜謐. 在位十八歲, 崩. 子, 余乙立.


계해년은 위나 임금의 원년이다. 나라 안은 고요하고 평온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8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여을(余乙)이 임금이 되었다.


辛巳歲, (王)[壬]儉余乙元年. 有異獸出于太白之陽, 九尾白毛, 似狼而不害物. 是年, 大[諸會侯](會諸侯), 賞眞番侯. 在位六十三歲, 崩. 子, 冬奄立.


신사년은 여을 임금의 원년이다. 태백산의 남쪽에 이상한 짐승이 나타났는데 꼬리는 아홉에 흰 털을 지니고서 흡사 늑대 같았으나 사물을 해치지는 않았다. 이 해에 제후들을 크게 모으고 진번후에게 상을 주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6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동엄(冬奄)이 임금이 되었다.


甲申歲, (王)[壬]儉冬奄元年.   侯獻巨獸, 其大如屋. 時, 諸侯有相攻者, 牛首州復有 骨者, 與其弟長骨作亂, 西鄙之民, 皆被其虐. 夫餘侯不能安 , 乃使熊加充達率師西征, 濊侯及  侯, 亦以兵來助,  骨悖惡無倫,  害庶民, 凡五年而始定. 充達曰: [豈有飮全海之水, 而始覺其 者耶? 皇祖肇基, 今垂七百歲, 而 骨之衆, 恣意橫暴, 貽毒于黎民, 此聖道之攸衰也. 君其修德乎!] 冬奄, 乃大修先君之德, 使充達往撫西鄙之民, 居數年, 民有, 擢髮  以報其德者. 在位二十歲, 崩. 子,  牟蘇立.


갑신년은 동엄 임금의 원년이다. 속진후가 커다란 짐승을 바쳤는데 그 크기가 집채만하였다. 이 때 제후들 가운데 서로 공격하는 자가 있었다. 우수주(牛首州)에 또 다시 앙골( 骨)이라는 자가 있어 그의 동생 장골(長骨)과 함께 난을 일으키니 서쪽 지방의 백성들이 모두 그에게 괴롭힘을 당하였다. 부여후가 쉽사리 평정할 수 없어서 웅가인 충달(充達)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케 하니 예후와 속진후 역시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도왔는데, 앙골이 패악무도하게도 많은백성을 해치기를 무릇 다섯 해 만에야 비로소 평정되었다. 충달이 아뢰기를 [어찌 바다의 모든 물을 다 마시고서야 그 짠 맛을 깨닫겠습니까! 임금님의 조상께서 나라의 터전을 닦은지 이제 7백년에 이르렀는데, 앙골의 무리가 제 멋대로 횡포를 부려 그 독이 백성들에게 미치니 이는 성인의 도가 시든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덕을 닦으소서] 하였다. 동엄은 이에 선대 임금의 덕을 크게 닦고는 충달로 하여금 서쪽 지방에 가서 백성들을 보살피게 하니, 그 지방에 머물기를 몇 년만에 백성 가운데 머리카락을 뽑아 그것으로 신을 삼아 덕에 보답하는 자가 있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0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구모소( 牟蘇)가 임금이 되었다.


甲辰歲, (王)[壬]儉 牟蘇元年. 南巡至樂浪忽, 修城郭. 孟冬月, 靑丘民 聚舞天, 散而爲獵, 有人至山陂, 爲大蛇所卷, 靑丘侯使 强搜捕曰: [蛇大如何?]  强曰: [穴中藏蛇, 安知其修短耶? 今, 孟冬而蛇出卷人, 爲 非常, 只可搜斬, 以除民害.] 乃使猛士, 毁陂而求之, 蛇大如樑, 以巨斧破其頭殺之, 蛇害遂絶, 重賞 强. 在位二十五歲, 崩. 子, 固忽立.


갑진년은 구모소 임금의 원년이다. 남쪽으로 순행하다 낙랑홀에 이르러 성곽을 수리하였다. 10월에 청구의 백성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서 축제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는 흩어져 사냥을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산비탈에 이르러 큰 뱀에게 감겨 버렸다. 청구후가 구강( 强)을 시켜 그 뱀을 잡게 하고는 묻기를 [뱀의 크기가 얼마 만 한가?] 하니 구강이 말하기를 [구멍 속에 숨어 있는 뱀인데 그 길고 짧음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마는, 지금이 벌써 10월인데도 뱀이 나와서 사람을 감는다는 것은 그 재난이 범상하지 않으니 오로지 뱀을 찾아내어 베어 버려서 이로서 백성의 해로움을 없앰이 옳은가 합니다]라 하고는 곧 날랜 장사들을 시켜 비탈을 허물고 찾아내니 뱀의 크기가 대들보만 하였다. 큰 도끼로 뱀의 머리를 깨서 죽이니 마침내 뱀의 해악이 없어졌다. 구강에게 큰 상을 내렸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고홀(固忽)이 임금이 되었다.


己巳歲, (王)[壬]儉固忽元年.   侯獻貂 , 使藏之而待有功者. 在位十一歲[而]崩. 子, 蘇台立.


기사년은 고홀 임금의 원년이다. 속진후가 담비 가죽으로 만든 옷을 바치니 이를 잘 보관하여 두게 하고는 공덕이 있는 자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1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소태(蘇台)가 임금이 되었다.


庚辰歲, (王)[壬]儉蘇台元年. 西巡諸地, 觀藍侯之政, 尋陳兵于商地. 在位三十三歲, 崩. 子, 索弗婁立.


경진년은 소태 임금의 원년이다. 서쪽의 여러 지역을 순행하고 남후의 정치를 살펴 본 뒤 얼마 후에 상나라 땅에 군대를 들여놓았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3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색불루(索弗婁)가 임금이 되었다.


癸丑歲, (王)[壬]儉索弗婁元年. 與商戰破之, 尋和. 後, 復大戰破之, 進入其境, 遂屯海上, 庶民復漸遷徙. 在位十七歲, 崩. 子, 阿勿立.


계축년은 색불루 임금의 원년이다. 상나라와 싸워 이긴 후 얼마 있지 않아 화해하였다. 뒤에 다시 크게 싸워 상나라를 깨트리고 그 국경 안까지 들어가서 마침내 해대(海岱)의 위에 주둔하니 많은 백성들이 다시 점차 옮겨갔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7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아물(阿勿)이 임금이 되었다.


庚午歲, (王)[壬]儉阿勿元年, 令弟固弗加治樂浪忽. 遣熊加乙孫, 觀南征之兵, 立邑商地. 後, 商人互爭不和, 乃進兵攻之, 尋罷. 蓋馬侯獻九尾獸. 在位十九歲, 崩. 子, 延那立.


경오년은 아물 임금의 원년이다. 아우 고불가(固弗加)에게 영을 내려 낙랑홀을 다스리게 하였다. 웅가 을손(乙孫)을 보내 남쪽으로 정벌을 나간 군사들을 살펴보게 하고는 상나라 땅에 고을을 세웠다. 뒤에 상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화해하지 않으니 병사를 진격시켜 이를 공격하고는 얼마 있지 않아 물러나왔다. 개마후가 꼬리가 아홉 달린 짐승을 바쳤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연나(延那)가 임금이 되었다.


己丑歲, (王)[壬]儉延那元年. 叔父固弗加攝政. 翌年, 商人攻我, 師至南界, 藍侯率諸軍, 戰克. 後, 互相戰 和. 國內, 增設壇所, 使諸侯, 承命禱天, 凡國中大事及風雨 災異 有求, 則祈于主神, 以遍于諸神也. 有大蛇現  之地, 靑質黃頭, 能呑大鹿, 民有趨拜者, 乃使巨屈支斷戮之. 在位十三歲, 崩. 弟, 率那立.


기축년은 연나 임금의 원년이다. 숙부 고불가(固弗加)가 섭정을 하였다. 이듬해 상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여 그 군사가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는데 남후가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싸워 이겼으며, 뒤에는 서로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였다. 나라 안에 제단을 증설하고 제후들로 하여금 명을 받들어 하늘에 기도하게 하였으니, 무릇 나라안에 큰 일이나 비바람 등 별스런 재난이 있거나 구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곧 주신에게 빌어 이로서 뭇 신들에게 두루 미치게 하였다. 큰 뱀이 속진의 땅에 나타났는데 몸은 푸르고 머리는 누런 것이 능히 큰 사슴을 삼키니, 백성들 가운데 이를 좇아 숭배하는 자가 있기에 거굴지(巨屈支)를 시켜 끊어 죽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우 솔나(率那)가 임금이 되었다.


壬寅歲, (王)[壬]儉率那元年. 出巡北鄙, 見小民艱苦爲生, 歎曰: [蝸牛有室, 蜂 有餌, 安使我民有或流離耶?] 乃勸民貿遷, 以廣其用. 於是南北之民, 舟車相通. 在位十六歲, 崩. 子, 鄒盧立.


임인년은 솔나 임금의 원년이다. 북쪽 궁벽한 곳으로 순행을 나갔다가 아랫백성들이 어렵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달팽이도 집이 있고 벌과 전갈에게도 먹이가 있는데 어찌 나의 백성을 유랑하게만 하겠는가]라고 하며, 백성들에게 권하여 물자를 서로 교환하고 옮기게 하여 그 쓰임새를 더욱 넓히게 하였다. 따라서 남북의 백성들이 배와 수레를 사용하여 서로 교통하게 되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6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추로(鄒盧)가 임금이 되었다.


戊午歲, (王)[壬]儉鄒盧元年. 在位九歲, 崩. 子, 豆密立.


무오년은 추로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두밀(豆密)이 임금이 되었다.


丁卯歲, (王)[壬]儉豆密元年. 使人記桓儉以來列聖之詞, 掛於宮門內側, 使出入朝覲者閱之. 遣兵伐商.   侯.多忽遣兵入東海伐鬼洲, 平其地. 在位四十五歲, 崩. 子, 奚牟立.


정묘년은 두밀 임금의 원년이다. 사람을 시켜 단검이래 열성조(列聖祖)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여 궁문의 안쪽에 걸어 두고는 출입하는 신하들에게 이를 읽도록 하였다. 병사를 보내 상나라를 정벌하였다. 속진후 다홀(多忽)이 병사를 보내 동해(東海)로 들어가 귀주(鬼州)를 쳐서 그 땅을 평정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4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해모(奚牟)가 임금이 되었다.


壬子歲, (王)[壬]儉奚牟元年. 使藍侯與沸流侯 靑丘侯, 共聚 泥水. (王)[壬]儉有疾, 使人白衣禱天, 尋愈. 卒本侯獻靈草, 能除人萬病. 在位二十二歲, 崩. 子, 摩休立.


임자년은 해모 임금의 원년이다. 남후로 하여금 비류후 및 청구후와 더불어 소니수( 泥水)에 모이게 하였다. 임금이 병을 얻으니 사람을 시켜 흰 옷을 입고 하늘에 빌도록 하였더니 얼마지 않아 완쾌되었다. 졸본후가 신령스러운 풀을 바쳤는데 능히 사람의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이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2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마휴(摩休)가 임금이 되었다.


甲戌歲, (王)[壬]儉摩休元年. 商人來朝. 靑丘侯報, 南夷海中出泥山, 火出水中, 泥合爲石. 在位九歲, 崩. 弟, 奈休立.


갑술년은 마휴 임금의 원년이다. 상나라 사람이 와서 임금을 알현하였다. 청구후가 남이(南夷)의 바다 가운데에서 진흙산이 솟아 나오고 불이 물 가운데에서 솟더니 진흙이 굳어져서 돌이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우 나휴(奈休)가 임금이 되었다.


癸未歲, (王)[壬]儉奈休元年, 句麗侯.于 入爲龍加. (王)[壬]儉南巡而觀靑丘之政, 至阿斯達. 復西巡而至奄(盧)[慮]忽, 大會諸侯, 尋還. 與殷人和. 在位五十三歲, 崩. 子, 登 立.


계미년은 나휴 임금의 원년이다. 구려후인 우타(于 )가 들어와서 용가가 되었다. 임금이 남쪽으로 순행하여 청구의 정치를 살피고 아사달에 이르렀으며, 다시 서쪽으로 순행하여 엄려홀에 이르러 제후들을 크게 모이게 하고는 얼마지 않아 돌아왔다. 은나라 사람과 화목하게 지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5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등올(登 )이 임금이 되었다.


丙子歲, (王)[壬]儉登 元年. 在位六歲, 崩. 子, 鄒密(五)[立].


병자년은 등올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6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추밀(鄒密)이 임금이 되었다.


壬午歲, 壬儉鄒密元年. 濊侯.知莫婁入爲龍加. (王)[壬]儉出巡, 至牛首忽, 會諸侯. 遂崩于其地, 在位八歲. 子, 甘勿立.


임오년은 추밀 임금의 원년이다. 예후인 지막루(知莫婁)가 들어와서 용가가 되었다. 임금이 순행을 나가 우수홀에 이르러 제후들을 모이게 하였다. 마침내 그 땅에서 세상을 떠나니 임금자리에 있은 지 8년만 이었다. 아들 감물(甘勿)이 임금이 되었다.


庚寅歲, (王)[壬]儉甘勿元年. 在位九歲, 崩. 子, 奧婁門立.


경인년은 감물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오루문(奧婁門)이 임금이 되었다.


乙亥歲, (王)[壬]儉奧婁門元年. 遷都樂浪忽, 使眞番侯監舊都. 民有取人物者, 鷹加治之曰: [小蛇能濁全海之水. 今不敎斯人, 世德以衰, 國其亂乎!] (王)[壬]儉聞之曰: [民之行, 如水就于決, 且源淸而下流自淸, 此吾凉德(耶)[所]致也. 吾皇祖肇基, 已千載, 國無大難, 民無大 , 今有此犯, 吾恐, 先祖之業, 因我而廢.] 乃大修先君之德. 於是犯者以化, 民無染惡者. 在位二十歲, 崩. 子, 沙伐立.


을해년은 오루문 임금의 원년이다. 도읍을 낙랑홀로 옮기고 진번후를 시켜 옛 도읍을 감독하게 하였다. 백성 가운데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지는 자가 있기에 응가가 이를 다스려 말하기를 [작은 뱀이 능히 모든 바다물을 흐리게 할 수 있듯이, 지금 그 사람을 가르치지 못하면 세상의 덕은 이로써 쇠퇴하게 되고 나라는 그로 혼란하게 되리라] 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듣고 이르기를 [백성의 행실은 마치 물줄기가 터진 틈새를 따라 흐르는 것과 같으며, 또한 그 근원이 맑으면 아랫물은 자연히 맑은 것과 같은 것이니, 이는 내가 덕이 두텁지 못한 소치이다. 우리 황조(皇祖)께서 나라의 기틀을 잡은지 이미 천년이 되었으나 나라에는 커다란 어려움이 없었고 백성들은 큰 원망이 없었는데 지금에 이러한 범법이 있게 되니,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선조의 위업이 나로 인해 무너질까 해서다] 하고는 이내 선대 임금을 본 받아 크게 덕을 닦았다. 이로 인해 범법한 자가 교화되니 백성 중에는 악에 물드는 자가 없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0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사벌(沙伐)이 임금이 되었다.


己未歲, (王)[壬]儉沙伐元年. 在位十一歲, 崩. 子, 買勒立.


기미년은 사벌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1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매륵(買勒)이 임금이 되었다.


庚午歲, (王)[壬]儉買勒元年. 在位十八歲, 崩. 子, 麻勿立.


경오년은 매륵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8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마물(麻勿)이 임금이 되었다.


戊子歲, (王)[壬]儉麻勿元年. 眞番侯.鄒 入爲龍加. 南巡至唐莊京, 遂崩于阿斯達, 在位八歲. 眞番侯立, (王)[壬]儉弟多勿.


무자년은 마물 임금의 원년이다. 진번후 추돌(鄒 )을 들게 하여 용가로 삼았다. 남쪽으로 순행하다가 당장경에 이르러 마침내 아사달에서 세상을 떠나니 임금자리에 있은 지 8년 만 이었다. 진번후가 보위에 올랐는데 임금의 아우인 다물(多勿)이다.


丙申歲, (王)[壬]儉多勿元年.   兪復侵西鄙, 眞番侯與濊侯 夫餘侯擊却之, 進入其境而還. 在位十九歲, 崩. 子, 豆忽立.


병신년은 다물 임금의 원년이다. 설유가 다시 서쪽 변경을 침범하니 진번후가 예후 및 부여후와 더불어 그를 쳐서 물리치고 나아가 그 경계까지 들어갔다가는 돌아왔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두홀(豆忽)이 임금이 되었다.


乙卯歲, (王)[壬]儉豆忽元年. 沸流侯獻大鼈, 長丈餘.   侯爲龍加. 初, 屹達之世, 東人之進據 .岐者甚衆. 及商.湯之興而遂漸撤退, 然細民以耕桑爲業者, 猶散處其地, 久不失其俗. 至是藍侯頗强, 稍役率諸侯, 逐孤竹君, 南遷其都, 居奄瀆忽, 與殷逼近, 使黎巴達將兵, 進至 .岐之間, 與其遺民相結, 立國曰黎, 治黎忽, 遂與殷家諸侯及西戎之人相雜處. 於是藍[氏](侯)之威漸盛而, (王)[壬]儉之命亦及乎恒山以南之地矣. 在位二十八歲, 崩. 子, 達音立.


을묘년은 두홀 임금의 원년이다. 비류후가 큰 자라를 바쳤는데 길이가 한 길이 넘었다. 속진후가 용가가 되었다. 처음 흘달 임금 때 우리나라 사람으로 빈( )기(岐) 지역으로 나아가 거처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상나라 탕왕이 일어나니 마침내 점차 물러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빈천한 백성으로서 농사짓고 누에치는 것을 생업으로 하던 자들은 여전히 그 땅에 흩어져 살면서 오랫동안 풍속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즈음 남후가 자못 강성하여 차츰 제후들을 부리고 거느리게 되었는데, 고죽군(孤竹君)을 몰아내고 도읍을 남쪽으로 옮겨 엄독홀(奄瀆忽)에 거처하였다. 그 곳은 은나라와 매우 가까우므로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빈( )기(岐) 사이로 나아가게 하여 그 유민들과 더불어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우고 '여(黎)'라고 이름 짓고 여홀(黎忽)에서 다스리게 하니, 이에 마침내 은나라의 제후 및 서융(西戎)의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거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남후의 위세가 점차 번성하여 졌으며, 임금의 명령 또한 항산(恒山)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8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달음(達音)이 임금이 되었다.


癸未歲, (王)[壬]儉達音元年. 娶靑丘侯之女阿施氏爲后, 賢而有德, 國人慕之. 蓋馬侯獻靈艸. 昔, 夫餘民有遁居于  兪之地, 遂與其民雜處, 頗習其俗, 殆無恒業, 以狩獵爲生, 獸皮爲服, 人謂之貊. (後)[復]漸遷徙, 處於奄慮北西之地, 遂爲藍氏之民. 在位十四歲, 崩. 子, 音次立.


계미년은 달음 임금의 원년이다. 청구후의 여식 아시씨(阿施氏)를 취하여 황후로 삼으니, 어질며 덕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흠모하였다. 개마후가 신령스러운 풀을 바쳤다. 옛적에 부여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설유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貊)'이라 하였다. 다시 점차 옮겨와서 엄려(奄慮)의 북서쪽 땅에서 살게 되어 마침내 남후의 백성이 되었다. 임금의 자리에 있은 지 14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음차(音次)가 임금이 되었다.


丁酉歲, (王)[壬]儉音次元年. 先是, 王室頗微, 諸侯漸强, 及音次卽位, 有仁德, 國人咸慕. 於是王道復興, 而諸侯相率來朝. 在位十九歲, 崩. 子, 乙于支立.


정유년은 음차 임금의 원년이다. 이 보다 앞서 왕실이 자못 쇠약하고 제후들이 점차 강성하여 졌으나, 음차가 즉위하자 어진 덕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기에 이에 왕도가 부흥하게 되었으며 제후들은 서로 좇아와서 알현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을우지(乙于支)가 임금이 되었다.


丙辰歲, (王)[壬]儉乙于支元年. 在位九歲, 崩. 子, 勿理立.


병진년은 을우지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물리(勿理)가 임금이 되었다.


乙丑歲, (王)[壬]儉勿理元年. 仁而好勇. 時, 諸侯已强而猶尊(王)[壬]儉, 時常朝覲. 藍侯.儉達, 與靑丘侯 句麗侯   侯, 率兵伐殷, 遂深入其地, 淮岱之間, 莫不響應. 諸侯乃定淮岱之地, 乃立薄姑氏於靑州之地曰奄國, 盈古氏於淮北.徐州之地曰徐國, 互相聯盟而援結, 殷人莫敢當者. 盖海岱.江淮之地, 爲東人占居者, 已久, 及至殷道之衰, 而藍侯與諸侯進攻. 於是濱海之民, 皆以其州欣迎其師也. 自蚩尤氏撤退以後, 復見斯時之盛矣. 雖然, 諸侯亦稍輕王室, 雖外修其職, 不甚崇戴焉. 在位十五歲, 崩. 子, 丘忽立.


을축년은 물리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은 어질면서도 무도(武道)의 용맹을 좋아하였다. 이 때의 제후들은 이미 강성하였으나 여전히 임금을 존중하여 때를 맞추어 항상 알현하였다. 남후인 검달(儉達)이 청구후구려후속진후 등과 더불어 병사를 거느리고 은나라를 정벌하여 마침내 그 땅의 회대(淮岱) 사이로 깊이 들어가게 되니 반가이 맞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제후들이 이에 회대의 땅을 평정하고 박고씨(薄姑氏)를 청주(靑州)의 땅에 세워 '엄국(奄國)'이라 이름하고 영고씨(盈古氏)를 회(淮)의 북쪽 서주(徐州)의 땅에 세워 '서국(徐國)'이라 이름하고는 서로 연맹하여 원조하고 단결하니 은나라 사람들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였다. 무릇 해대(海岱)와 강회(江淮)의 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지하고 살아 온 지 오래되었는데, 은나라의 도가 쇠퇴해지자 남후가 제후들과 더불어 공격하여 들어간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바다를 인접한 곳의 백성들은 모두 그들의 마을을 바치며 흔쾌히 군사를 환영하였던 것이다. 치우씨가 물러난 이후 다시 이 때에 번성함을 보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제후들 역시 조금씩 왕실을 가볍게 여기게 되었으니, 비록 겉으로는 맡은 일을 처리하였지만 마음으론 받들지 않게 되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구홀(丘忽)이 임금이 되었다.


庚辰歲, (王)[壬]儉丘忽元年. 蓋馬侯買 入爲龍加. 在位七歲, 崩. 子, 余婁立.


경진년은 구홀 임금의 원년이다. 개마후 매올(買 )이 들어와 용가가 되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7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여루(余婁)가 임금이 되었다.


丁亥歲, (王)[壬]儉余婁元年.   侯移治達婁忽. 藍侯立鮮牟國於殷.淮南之地. 在位五歲, 崩. 子, 普乙立.


정해년은 여루 임금의 원년이다. 속진후가 달루홀(達婁忽)로 옮겨 다스렸다. 남후가 은나라 회대의 땅에 선모국(鮮牟國)을 세웠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보을(普乙)이 임금이 되었다.


壬辰歲, (王)[壬]儉普乙元年. 藍侯遂總(師)[帥]諸侯, 朝覲者, 遂稀. 在位十一歲, 崩. 子, 古列加立.


임진년은 보을 임금의 원년이다. 남후가 마침내 제후들을 총괄하여 거느리게 되니 임금을 알현하는 자가 드물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1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고열가(古列加)가 임금이 되었다.


癸卯歲, (王)[壬]儉古列加元年. (王)[壬]儉初立而國用不敷, 鳳加收畿內之貢, 僅得充用, 民亦有, 輸穀助用者. (王)[壬]儉與諸加謀曰: [昔, 我皇祖肇基立業, 爲萬世後孫之範. 今, 王室衰微, 諸家浸(疆)[彊], 方外諸侯, 殆無奉命者. 雖, (坼)[坼]圻內之民, 懷列聖之化, 猶表忠虔, 惟予凉德, 不可以致化立威, 欲讓於有德, 則遍觀聖裔, 又無其人. 予欲, 避居於唐莊京, 入阿斯達, 以安奉先聖之神靈.] 諸加悽愴而從之. (王)[壬]儉乃奉祭器, 遜居于唐莊京, 遂宅于阿斯達. (坼)[坼]圻內民, 從來者甚衆, 皆宅于唐莊京. 於是國遂除, 在位三十歲. 自檀儉神人開創鴻業, 歷四十七世, 一千一百九十五年. 檀君旣徙居阿斯達而國人猶推尊之, 諸侯亦無敢逼者. 或曰, 朴氏 白氏, 皆其後裔, 而赫居世亦出於檀君之後云, 今文獻無徵, 未知其確矣. 自後, 諸侯頗以武力相競, 獨藍侯者出諸家之右, 時常役率 后, 以行國政, 是爲列國焉.


계묘년은 고열가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이 즉위한 처음에는 나라에 쓰이는 것이 두루 충당되지 못하자 봉가(鳳加)가 기내(畿內)의 공물을 거두어 근근히 쓰임에 충당케 하였으며 백성들 역시 곡식을 보내어 그 쓰임에 도움을 주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제가와 더불어 의논하여 말하기를 [예전 우리 황조(皇祖)는 나라의 터전을 열고 위업을 세워 만세 후손의 모범이 되었다. 지금에 왕실은 쇠미하니 나라의 제후들은 점차 강성해지고, 나라 밖의 제후들 중 명을 받드는 자는 거의 없게 되었다. 비록 기내의 백성들이 열성조의 교화를 가슴에 품고 여전히 충성과 공경을 나타내고 있으나 오로지 내가 덕이 두텁지 못한 탓으로 지극한 교화로 위엄을 세우지 못하기에 덕이 있는 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자 열성조의 후예들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또한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이에 나는 당장경으로 거처를 피하여 아사달에 들어가서 선성(先聖)의 신령(神靈)들을 편안히 받들어 모시고자 한다] 하였다. 제가는 슬퍼하며 뜻에 따랐다. 임금은 이에 제기를 받들고 당장경으로 피하여 거처하다가 마침내는 아사달에 자리를 잡았다. 기내의 백성들 가운데 임금을 좇아 온 자가 매우 많았는데 모두 당장경에 집을 정하였다. 이로서 나라는 마침내 없어지니 임금으로 있은 지 30년이요 단검신인이 큰 위업을 처음으로 펼친 때부터 역년이 47世에 1,195년이다. 단군이 이미 아사달로 옮겨 거처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받들어 존중하였으며 제후들 역시 감히 핍박하는 자가 없었다. 혹은 말하기를 박씨(朴氏)와 백씨(白氏) 등이 모두 그 후예라고 하며, 혁거세(赫居世) 역시 단군의 후손 가운데에서 나왔다고들 하지만 지금의 문헌에는 증빙이 없어 그 확실한 것을 알 수가 없다. 그 후로 제후들은 자못 무력으로 서로 경쟁하였는데 유독 남후만이 제후들의 강성함 가운데에서도 뛰어나서 항상 모든 제후들을 거느리고 국정을 행하게 되었기에 이로서 열국(列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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