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종남산 송광사

영지니 2008. 7. 19. 22:22

 

종남산 송광사 대웅전

 

전주에서 진안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완주군 소양면이 나온다. 송광사라는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다가 보면 20리 길이 50년 이상 된 벚꽃으로 가로수가 되어 있는 길을 만난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얀 벚꽃을 피우고 있는 터널 길을 따라가면 내를 끼고 있는 좁은 다리를 건너 종남산 송광사에 다다른다.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번지에 소재한 송광사는 이렇게 꽃피는 계절에 환한 웃음으로 나그네의 발길을 붙든다.


천년 고찰 송광사는 신라 경문왕 7년(867)에 구산선문의 개산조인 보조체징선사가 개창하였다. 원래의 사명은 백련사였으며, 현재의 일주문이 3km밖 나들이라는 곳에 서있던 대찰이었으나, 역사의 변천 속에 거의 폐찰이 된 것을 순천 송광사의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중창을 발원하신 후 현재의 도량 전각들은 1,600년대 보조 지눌국사의 법손들이 대대적인 불사를 추진한 것이다. 특히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낸 인조대왕이 두 왕세자의 무사환국과 국란의 아픔을 부처님의 가호로써 치유하고자 대대적으로 중창한 인조대왕의 호국원찰이다.

 

송광사 일주문


이렇듯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호국원찰이어서인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대웅전, 나한전, 지장전의 불상이 많은 땀과 눈물을 흘리곤 한단다. 특히 대웅전의 불상은 KAL기 폭파사건, 12.12사건, 군산 훼리호 침몰사건, 강릉 잠수함 출몰, 그리고 1997년 12월 2일부터 13일까지 엄청난 양의 땀과 눈물을 흘려 I.M.F 한파를 예견하였다고 한다. 전국 4대 지장도량답게 최대 크기의 지장전에 봉안되어 있는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나한전의 석가여래와 500의 나한상은 대웅전과 함께 많은 이들의 참배처가 되고 있으며 평지가람으로 노약자가 편히 올 수가 있는 곳이다. 대형버스 30대가 주차할 수 있는 대형주차장과 식당이 준비되어 있고, 봄철 송광사 벚꽃 터널의 아름다움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대웅전, 삼세불상, 아(亞)자형 종각, 사천왕상 등 4점의 보물 문화재와 8점의 유형 문화재 등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사찰이다. 


송광사를 찾으면 먼저 그 절의 단아함에 놀란다. 화려하지 않으면서 품위가 있고, 크지도 않으면서 세파의 모든 번뇌를 다 끌어안은 듯한 그 모습에 절로 머리가 조아려진다. 전북지정 유형문화재인 금강문을 지나면 보물 제1255호인 소조 사천왕상을 만날 수 있다. 소조상으로 는 국내 최고의 조형미를 구비하였다는 이 사천왕상은 대웅전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과 북방 다문천왕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이 위치하고 있다. 동방 지국천왕상은 오른쪽 팔꿈치를 높이 쳐들어 칼을 잡고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길게 펴서 칼끝을 잡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칼자루의 장식은 없다. 왼쪽다리 옆의 악귀는 상의를 벗고 오른쪽 어깨로부터 굵은 끈을 왼쪽 옆구리에 걸쳤으며 바지를 입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상은 양손으로 비파를 들고 있으며 지상에서 약간 들어 올린 왼쪽다리를 악귀가 오른손으로 받들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악귀는 상투장식에 눈이 심하게 튀어 나오고 주먹코에 광대뼈가 불거져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는데 상의를 벗고 바지만 걸쳤으며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옆구리에 굵은 띠가 감겨져 있다.

 

보물 제1225호 송광사소조사천왕상 


남방 증장천왕상은 왼손에는 보주를 잡고 오른손으로 용을 움켜쥐고 있는데 용은 입을 벌리고 천왕상의 얼굴을 향해 치솟고 있으며 꼬리는 팔뚝을 한번 휘감으며 올라가고 있다. 악귀는 꽃장식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는데 자세는 북방상과 같으며 발등의 근육과 발톱까지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서방의 광목천왕상은 오른손을 들어 당(幢)을 잡았는데 깃발은 뒤로 휘어지고 왼팔은 거의 어깨까지 올려 손바닥 위에 보탑을 올려놓았다. 다리 아래의 악귀는 측면을 향하고 있는 다른 악귀에 비해 정면을 향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이들 사천왕상은 눈이 유달리 튀어나오고 수염이 독특하게 뚜렷할 뿐 아니라 다리를 질끈 묶은 표현양식이나 악귀를 발로 누르고 있는 모습 등이 분노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갑옷, 허리띠, 무기를 든 모습 등에서 무장이 갖추어야 할 용맹상들도 아울러 지니고 있어 청정도량을 수호하는 호법신중으로서의 기능을 지닌 사천왕상을 잘 나타낸 조형물이라 할 수 있다.

 

보물 제1244호 송광사 종루 


사천왕상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종루가 보인다. 보물 제1244호인 국내 유일의 아(亞)자형 지붕 종각인 이 종루는 평면십자형(平面十字形)의 누각건축이다. 재산대장에는 16평 2합이라 하였다. 근세의 다포계 가구를 보여주고 있으나, 매우 희유한 건축으로써 주목된다. 그 안 정면에 바라다 보이는 대웅전 역시 보물 제1243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대웅전은 송광사의 본전으로서, 석가여래를 본존불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가 안치되어 있다. 전면5간, 측면3간의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로서, 『대웅전(大雄殿), 의창군서(義昌君書)』 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의창군은 선조의 8남이며, 광해군의 아우로서, 인조 15년(1636)에 세운 송광사개창비(松廣寺開創碑)의 비문을 썼으며, 이는 대웅전 건립 년대에도 참고가 된다.


외에도 「성상즉위구년정사육월초이일기(聖上卽位九年丁巳六月初二日記)」라는 상량문이 있는바, 이는 철종 8년 정사(丁巳)인 것 같다. 대웅전 안에는 천정을 떠받치듯 소조 삼불상이 좌정을 하고 있다. 본존불인 석가불을 중앙에 안치하고 오른쪽에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을 배치한 삼불상으로 5m가 넘는 거불이며, 조선후기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무량사 소불상과 함께 가장 거대한 소조불상이지만 불두와 불신, 대좌 등이 비교적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상호는 장중ㆍ원만하고 목에는 삼도를 나타내지 않고 있다. 법의는 통견을 두텁게 처리하여 당당한 불상양식에 걸맞는 표현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나발의 표현을 뚜렷하게 하여 강한 인상을 나타내고 있다.

 

송광사 소조삼존불상

 

이 삼불상은 본존불의 복장에서 나온 조성기에 의하면 숭정(崇禎) 14년(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발원하면서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과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극복의 의지와 역사의식의 반영과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진묵대사가 점안을 하였다고 하는 소조 삼불상은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는 땀을 흘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한상 


가는 곳마다 문화재를 만날 수 있는 송광사.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그래서 다 어미의 품처럼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송광사를 뒤로하고 일주문을 나서니 황토 벽 위에 활짝 핀 벚꽃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는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가 있다. 

 

더욱 송광사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위봉산성과 보물이 있는 위봉사 등이 있어 봄철 벚꽃이 만개할 무렵 여행 길로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듯 하다. 그 곳에는 많은 문화재들과 이야기들이 나그네들을 반기고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