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에 관해서는 나도 한가지 증언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광주에 처가가 있고 당시 서울에 거주하는 봉급생활자 였습니다.
1980년 5월 22일(토) 광주에서 처남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며칠전에 광주에서 난리가 나니까 모두 취소되고 말았다가 며칠 후 수습이 되자
다시 날을 잡아서 한주간이 늦은 29일(토)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돼서 광주에 내려갔습니다.
처가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은명기)가 광주사태에 가담을 해서 피신해 있었던 고로 부득이
그 교회의 원로목사님이 주례를 맡아야 했고 결혼식 후(당시 시골에서 하는 예에 따라) 신랑집에
와서 모두 식사(피로연)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사동안에 주례목사님께서 광주사태의 전말에 관해서 손님들에게(대부분 서울에서 왔음)
소상하게 설명을 하셨습니다. 이 주례목사님은 백영흠 목사님이신데 젊을때 미국에 유학도
하신적이 있고 1950년대에는 호남지역의 여러 곳에 부흥집회도 다니셨던 유명한 목사님입니다.
당시에는 80대 중반의 고령이 셨으나 자그마한 체구에도 건강하셨습니다.
이분의 말씀을 요약하면--
광주시내 이골목 저골목에서 " oo 다리밑에 여자가 군인의 대검에 젖가슴이 찔려서 버려져 있다"
고 소리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다.
사람들은 이소리에 한사람 두사람 집을 나와서 그 다리께로 몰려들었다 한다.
(원래 군인들의 대검이란 끝만 약간 뾰족하지 날이 없어서, 심지어 연필도 제대로 못깎는,
칼로서는 무딘 칼인데 어떻게 그런 말이 통했는지 모르겠다)
광주 중심부에 모여든 사람들은 대부분 이 젖가슴 찢겨진 여인의 시체를 보러 나온 것이라한다.
(후일 1990년대 국회 청문회에서 이것이 문제가 됐을 때, 당시 시민군 측에 섰던 사람들은
이 말을 군부에서 광주시민을 선동해서 무언가 사건을 만들기 위한 흑색선전이었다고 주장했다.)
금남로의 인파는 (한사람 한사람은 선량한 시민이지만) 그 다중의 위력은 경찰서의 경비병력들에게
공포심을 주어서 경찰들이 모두 도망을 가버리는 사태가 첬째 문제고
그 후 몇명의 젊은이들이 경찰서에 저항없이 들어가서 무기를 꺼내들고 일이 시작되었다.
(그 날의 사태는 모두 숙지하는 것이니 생략하겠다)
그날 밤 누군가가 수습위원회라는 명칭으로 전남도청에 광주시내 유지들을 소집했는데
이 백영흠 목사님도 초청이 돼서 거기 참석을 했었다 한다. 사람마다 제각각 이소리 저소리 했지만
대세는 "이것으로 광주시민들의 의사는 충분히 개진되었다. 나라를 뒤집어 엎을 것도 아니고 하니
이제 그만 하고 무기 도로 경찰서에 집어넣고 일상의 일로 돌아가자" 는 것이었다고 한다.
물론 백목사님도 그런 요지의 연설을 해서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았고 모임이 해산되어 집으로 왔는데
다시 소식이 오기를, 일단 경찰서에 반환했던 무기를 다시 꺼내들고 도청에 모여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 과정을 알아보니 수습위원회 모임이 끝난 후 미처 해산하지 않은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어느 목사가 나서서 "일단 우리가 승리를 쟁취했는데 왜 이것을 포기하려 하느냐,
최후의 한사람까지 나가서 싸우자" 이렇게 웨쳤다 한다. 이 말에 젊은이들이 (무기를 반환 하지않고)
도청 지하실에 진치고 싸울준비를 했다한다. 그때 백목사님이 알고있는 정보는 젊은이들의 대다수는
직업이 시원치않는 사람들이었고 정작 대학생들은 별반 눈에 띄지 않았는데
문제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이들을 지휘했다 한다.
그래서 편제를 짓고 베란다로 옥상으로 또 어디로 병력 배치를 하고 전투준비를 했다 한다.
백목사님은 광주사태는 이 정체불명의 선동과 또 정체불명자들의 전투지휘로 큰 사건이 되었다고 했다.
백목사님은 흥분한 어조로 "사태가 끝나고 보니 그렇게 최후까지 싸우자고 했던 목사들은 한사람도
죽은자가 없이 다 도망해서 살고 결국 철모르는 젊은이들만 죽었다. 광주사태의 책임은
우리 목사들이 져야한다. 기독교가 광주에 뿌리 내리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한지 100년만에
이제는 사람을 죽이고 사회를 패망케 하는 일을 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한다" 고 통탄했다.
손님들은 숨을 죽이고 한 두어시간 역설하시는 백목사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그 사태를 전환시킨 목사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 때 백목사님은 한참이나 망설이더니
"광주사람들은 다 알아요 내가 여기서 누구라고 말 안해도--" 했다. 그 때 나는 그게 아마 은명기 목사가
아니였나 생각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있던 손님중에 상당수가 그 교회 교인들이므로
차마 직설적으로 그 이름을 거론하기 난처했을 것이고. 그 당시 관련되었던 교회 목사가 몇분 있었지만
그중에 은명기 목사가 제일 연장자 였고, 군부가 진압한 후 피신할 만큼 가담정도가 심해서 오늘 주례도
바뀌는 해프닝이 생긴게 아닌가 생각이 되었다.
그 후 백목사님은 한 5년 더 사시고 별세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내가 경험한 광주사태의 일부이다. 독자들의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이 글은 데일리안 토론마당 역사학도님의 글에 필명 "빨치산"이란 분이 올린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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