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왕(善德王)의 지기삼사(知幾三事)
제27대 덕만(德曼; 만曼은 만萬으로도 씀)의 시호(諡號)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 성(姓)은 김씨(金氏),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 632)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붉은빛·자줏빛·흰빛의 세 가지 빛으로 그린 모란[牧丹]과 그 씨 서 되[升]를 보내 온 일이 있었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더니 말하기를, "이 꽃은 필경 향기가 없을 것이다"하고 씨를 뜰에 심도록 했다. 거기에서 꽃이 피어 떨어질 때까지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 4일 동안 울어 댄 일이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2,000명을 뽑아 가지고 속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 가면 반드시 적병(賊兵)이 있을 것이니 엄습해서 모두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서교(西郊)에 가 보니 부산(富山) 아래 과연 여근곡(女根谷)이 있고 백제(百濟) 군사 500명이 와서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백제의 장군(將軍) 우소(우召)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으므로 포위하고 활을 쏘아 죽였다. 또 뒤에 군사 1,200명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모두 쳐서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셋째는, 왕이 아무 병도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도利天)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이 그게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니라." 그 날이 이르니 왕은 과연 죽었고, 여러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文虎(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는데 불경(佛經)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도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大王)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
왕이 죽기 전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해서 모란꽃에 향기가 없고, 개구리 우는 것으로 변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왕이 대답했다.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또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兵士)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부(陰部)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빛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근(男根)은 여근(女根)이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탄복했다. 꽃은 세 빛으로 그려 보낸 것은 대개 신라에는 세 여왕(女王)이 있을 것을 알고 한 일이었던가. 세 여왕이란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이니 당나라 임금도 짐작하여 아는 밝은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선덕왕(善德王)이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 말하기를, "이 임금 때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했다.
진덕왕(眞德王)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왕위에 오르자 친히 태평가(太平歌)를 지어 비단을 짜서 그 가사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서 당(唐)나라에 바치게 했다(다른 책에는, 춘추공春秋公을 사신으로 보내서 군사를 청하게 했더니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기뻐하여 소정방蘇定方을 보냈다고 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현경現慶 이전에 춘추공春秋公은 이미 왕위王位에 올랐다. 그리고 현경懸磬 경신庚申은 태종太宗 때가 아니라 고종高宗 때이다. 정방定方이 온 것은 현경現慶 경신庚申년이니 비단을 짜서 무늬를 놓아 보냈다는 것은 청병請兵한 때의 일이 아니고 진덕왕眞德王 때의 일이라야 옳다. 대개 이때는 김흠순金欽純을 석방해 달라고 청할 때의 일일 것이다).
당(唐)나라 황제(皇帝)는 이것을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을 계림국왕(鷄林國王)으로 고쳐 봉했다. 태평가(太平歌)의 가사(歌詞)는 이러했다.
큰 당(唐)나라 왕업(王業)을 세우니, 높고 높은 임금의 계획 장하여라.
전쟁 끝나니 천하를 평정하고, 문치(文治)를 닦으니 백왕(百王)이 뒤를 이었네.
하늘을 거느리니 좋은 비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모든 것이 광채가 나네.
깊은 인덕(人德)은 해와 달에 비기겠고, 돌아오는 운수는 요순(堯舜)보다 앞서네.
깃발은 어찌 그리 번쩍이는가, 징소리 북소리는 웅장도 하여라.
외이(外夷)로서 황제의 명령 거역하는 자는 칼 앞에 자빠져 천벌을 받으리.
순후(淳厚)한 풍속 곳곳에 퍼지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상서(祥瑞)를 바치네.
사시(四時)의 기후는 옥촉(玉燭)처럼 고르고, 칠요(七曜)의 광명은 만방에 두루 비치네.
산악(山嶽)의 정기는 보필할 재상을 낳고, 황제(皇帝)는 충량(忠良)한 신하에게 일을 맡겼네.
오제(五帝) 삼황(三皇)의 덕(德)이 하나로 이룩되니, 우리 당(唐)나라 황제(皇帝)를 밝게 해 주리.
왕의 대(代)에 알천공(閼川公)·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 자장慈藏의 아버지)·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이 있었다. 이들은 남산(南山) 우지암(우知巖)에 모여서 나랏일을 의논했다. 이때 큰 범 한 마리가 좌중에 뛰어들었다. 여러 사람들은 놀라 일어났지만 알천공(閼川公)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범의 꼬리를 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처럼 세었으므로 그를 수석(首席)에 앉혔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유신공(庾信公)의 위엄에 심복(心腹)했다.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러운 땅이 있어서 나라의 큰 일을 의논할 때면 대신(大臣)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일을 의논했다. 그러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 네 곳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쩨는 남쪽의 우지산(우知山)이요,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요,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다. 이 왕 때에 비로소 정월 초하룻날 아침의 조례(朝禮)를 행했고, 또 시랑(侍郞)이라는 칭호도 이때에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김유신(金庾信)
호력(虎力) 이간(伊干)의 아들 서현각간(舒玄角干) 김(金)씨의 맏아들이 유신(庾信)이고 그 아우는 흠순(欽純)이다. 맏누이는 보희(寶姬)로서 소명(小名)은 아해(阿海)이며, 누이동생은 문희(文姬)로서 소명(小名)이 아지(阿之)이다. 유신공(庾信公)은 진평왕(眞平王) 17년 을묘(乙卯; 595)에 났는데,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났기 때문에 등에 일곱 별의 무늬가 있었다. 그에게는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나이 18세가 되는 임신(壬申)년에 검술(劍術)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 이때 백석(白石)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여러 해 동안 낭도(郎徒)의 무리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때 유신은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두 나라를 치려고 밤낮으로 깊은 의논을 하고 있었는데 백석이 그 계획을 알고 유신에게 고한다. "내가 공과 함께 먼저 저들 적국에 가서 그들의 실정(實情)을 정탐한 뒤에 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신은 기뻐하여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났다. 고개 위에서 쉬고 있노라니 두 여인이 그를 따라와서 골화천(骨火川)에 이르러 자게 되었는데 또 한 여자가 갑자기 이르렀다. 공이 세 여인과 함께 기쁘게 이야기하고 있노라니 여인들은 맛있는 과자를 그에게 주었다. 유신은 그것을 받아 먹으면서 마음으로 그들을 믿게 되어 자기의 실정(實情)을 말하였다. 여인들이 말한다. "공의 말씀은 알겠습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백석을 떼어 놓고 우리들과 함께 저 숲속으로 들어가면 실정을 다시 말씀하겠습니다." 이에 그들과 함께 들어가니 여인들은 문득 신(神)으로 변하더니 말한다. "우리들은 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護國神)이오. 지금 적국 사람이 낭(郎)을 우인해 가는데도 낭은 알지 못하고 따라가므로, 우리는 낭을 말리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소." 말을 마치고 자취를 감추었다. 공은 말을 듣고 놀라 쓰러졌다가 두 번 절하고 나와서는 골화관(骨火館)에 묵으면서 백석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다른 나라에 가면서 중요한 문서를 잊고 왔다. 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가지고 오도록 하자." 드디어 함께 집에 돌아오자 백석을 결박해 놓고 그 실정을 물으니 백석이 말한다.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오(고본古本에 백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추남楸南은 고구려 사람이요, 도한 음양陰陽을 역행逆行한 일도 보장왕寶藏王 때의 일이다). 우리 나라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신라의 유신은 우리 나라 점쟁이 추남(楸南; 고본古本에 춘남春南이라 한 것은 잘못임)이었는데, 국경 지방에 역류수(逆流水; 웅자雄雌라고도 하는데, 엎치락 뒤치락 하는 일)가 있어서 그에게 점을 치게 했었소. 이에 추남(楸南)이 아뢰기를, '대왕(大王)의 부인(夫人)이 음양(陰陽)의 도(道)를 역행(逆行)한 때문에 이러한 표징(表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했소. 이에 대왕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고 왕비는 몹시 노했소. 이것은 필경 요망한 여우의 말이라 하여 왕에게 고하여 다른 일을 가지고 시험해서 물어 보아 맞지 않으면 중형(重刑)에 처하라고 했소. 이리하여 쥐 한 마리를 함 속에 감추어 두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물었더니 그 사람은, 이것이 반드시 쥐일 것인데 그 수가 여덟입니다 했소. 이에 그의 말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죽이려 하자 그 사람은 맹세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는 꼭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라 했소. 곧 그를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 보니 새끼 일곱 마리가 있었소. 그제야 그의 말이 맞는 것을 알았지요. 그날 밤 대왕의 꿈에 추남(楸南)이 신라 서현공(舒玄公) 부인의 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더니 모두 '추남이 맹세하고 죽더니 과연 맞았습니다' 했소. 그런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나를 보내서 그대를 유인하게 한 것이오." 공은 곧 백석을 죽이고 음식을 갖추어 삼신(三神)에게 제사지내니 이들은 모두 나타나서 제물을 흠향했다.
김유신의 집안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靑淵) 상곡(上谷)에 장사지내고 재매곡(財買谷)이라 불렀다. 해마다 봄이 되면 온 집안의 남녀들이 그 골짜기 남쪽 시냇가에 모여서 잔치를 열었다. 이럴 때엔 백 가지 꽃이 화려하게 피고 송화(松花)가 골짜기 안 숲속에 가득했다. 골짜기 어귀에 암자를 짓고 이름을 송화방(松花房)이라 하여 전해 오다가 원찰(願刹)로 삼았다. 54대 경명왕(景明王) 때에 공(公)을 봉해서 흥호대왕(興虎(武)大王)이라 했다.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 북쪽 동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
태종(太宗) 춘추공(春秋公)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이름은 춘추(春秋), 성(姓)은 김씨(金氏)이다. 용수(龍樹; 혹은 용춘龍春) 각간(角干)으로 추봉(追封)된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며 비(妃)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이니 곧 유신공(庾信公)의 끝누이였다.
처음에는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라가서 오줌을 누는데 오줌이 서울 안에 가득 찼다. 이튿날 아침에 문희에게 꿈이야기를 하자 문희는 이 말을 듣고 "내가 그 꿈을 사겠어요"하고 말하니, 언니는 "무슨 물건으로 사려 하느냐"하고 물었다. "비단치마를 주면 되겠지요." 언니가 "그렇게 하자"하여, 동생이 옷깃을 벌리고 받으려 하자 언니는 "어젯밤 꿈을 네게 준다"했고, 동생은 비단치마로 값을 치렀다. 그런 지 10일이 지났다. 정월(正月) 오기일(午忌日; 위의 사금갑射琴匣에 보였으니 최치원崔致遠의 설說이다)에 유신(庾信)이 춘추공과 함께 유신의 집 앞에서 공을 찼다(신라 사람은 공 차는 것을 농주弄珠의 희롱이라 한다). 이때 유신은 일부러 춘추의 옷을 밟아서 옷끈을 떨어뜨리게 하고 말하기를 "내 집에 들어가서 옷끈을 달도록 합시다"하매 춘추공은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아해(阿海)를 보고 옷을 꿰매 드리라 하니 아해는 말한다. "어찌 그런 사소한 일로 해서 가벼이 귀공자(貴公子)와 가까이한단 말입니까"하고 사양했다(고본古本에는 병 때문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유신은 아지(阿之)에게 이것을 명했다. 춘추공은 유신의 뜻을 알고 드디어 아지와 관계하고 이로부터 자주 왕래했다. 유신은 그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꾸짖었다. "너는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아이를 배었으니 그게 무슨 일이냐." 그리고는 온 나라 안에 말을 퍼뜨려 그 누이를 불태워 죽인다고 했다. 어느 날 선덕왕(善德王)이 남산(南山)에 거동한 틈을 타서 유신은 마당 가운데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연기가 일어나자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한 때문이라고 했다. 왕이 "그게 누구의 소행이냐"고 물었다. 이때 춘추공은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빛이 몹시 변했다. 왕은 말한다. "그것은 네가 한 짓이니 빨리 가서 구하도록 하라." 춘추공은 명령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王命)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후에 버젓이 혼례를 올렸다.
진덕왕(眞德王)이 죽자 영휘(永徽) 5년 갑인(甲寅; 654)에 춘추공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8년 만인 용삭(龍朔) 원년(元年) 신유(辛酉; 661)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석을 세웠다.
왕은 유신과 함께 신비스러운 꾀와 힘을 다해서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런 때문에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고 했다. 태자 법민(法敏)과 각간(角干) 인문(仁問)·각간 문왕(文王)·각간 노차(老且)·각간 지경(智鏡)·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가 낳은 아들들이었으니 전날에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서자(庶子)는 개지문(皆知文) 급간(級干)과 거득(車得) 영공(令公)·마득(馬得) 아간(俄間)이다. 딸까지 합치면 모두 다섯 명이다.
왕은 하루에 쌀 서 말(三斗) 밥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다. 그러나 경신(庚申; 660)에 백제(百濟)를 멸한 뒤로는 점심을 먹지 않고 다만 아침 저녁뿐이었다. 그래도 하루에 쌀 여섯 말,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먹었다.
성안 물건값은 포목(布木) 한 필에 벼가 서른 섬 혹은 쉰 섬이어서 백성들은 성대(聖代)라고 불렀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 고구려를 치고자 군사를 청하려고 당(唐)나라에 간 일이 있었다. 이때 당나라 임금이 그의 풍채(風彩)를 보고 칭찬하여 신성(神聖)한 사람이라 하고 당나라에 머물러 두고 시위(侍衛)로 삼으려 했지만 굳이 청해서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 백제 마지막 왕 의자(義慈)는 곧 호왕(虎(武)王)의 맏아들로서 영웅(英雄)스럽고 용맹하고 담력(膽力)이 있었다. 부모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해동증자(海東曾子)라 했다. 정관(貞觀) 15년 신축(辛丑; 641)에 왕위에 오르자 주색(酒色)에 빠져서 정사는 어지럽고 나라는 위태로웠다. 좌평(佐平; 백제百濟의 벼슬 이름) 성충(成忠)이 애써 간했지만 듣지 않고 도리어 옥에 가두니 몸이 파리해지고 피곤해서 거의 죽게 되었으나 성충은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忠臣)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습니다. 원컨대 한 마디 말만 여쭙고 죽겠습니다. 신(臣)이 일찍이 시국의 변화를 살펴보오니 반드시 병란(兵亂)이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용병(用兵)은 그 지세(地勢)를 잘 가려야 하는 것이니 상류(上流)에 진을 치고 적을 맞아 싸우면 반드시 보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陸路)로는 탄현(炭峴; 침현沈峴이라고도 하니 백제의 요새지要塞地임)을 넘지 말 것이옵고, 수군(水軍)은 기벌포(伎伐浦; 곧 장암長암이니 손량孫梁이라고도 하고 지화포只火浦 또는 백강白江이라고도 함)에 적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험한 곳에 의지하여 적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깨닫지 못했다. 현경(現慶) 4년 기미(己未; 659)에 백제 오회사(烏會寺; 오합사烏合寺라고도 함)에 크고 붉은 말 한 마리가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아다녔다. 2월에는 여우 여러 마리가 의자왕(義慈王)의 궁중으로 들어왔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좌평(佐平)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4월에는 태자궁(太子宮) 안에서 암탉과 작은 참새가 교미했다. 5월에는 사자수(泗차水; 부여扶餘에 있는 강 이름) 언덕 위에 큰 물고기가 나와서 죽어 있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나 되었으며 이것을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9월에는 궁중에 있는 홰나무가 마치 사람이 우는 것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귀신이 대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5년 경신(庚申; 660) 봄 1월엔 서울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다. 서쪽 바닷가에 작은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이것을 백성들이 다 먹을 수가 없었다. 또 사자수의 물이 핏빛이 되었다. 4월에는 청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서울 시정인(市井人)들이 까닭없이 놀라 달아나는 것이 마치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이래서 놀라 자빠져 죽은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은 자는 그 수효를 모를 만큼 많았다. 6월에는 왕흥사(王興寺)의 중들이 보니 배가 큰 물결을 따라 절문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또 마치 들사슴과 같은 큰 개가 서쪽에서 사자수 언덕에 와서 대궐을 바라보고 짖더니 이윽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성안에 있는 여러 개들이 길 위에 모여들어 혹은 짖기도 하고 울기도 하다가 얼마 후에야 흩어졌다. 또 귀신 하나가 궁중으로 들어오더니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하다가 이내 땅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니 석 자 깊이에 거북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등에 글이 씌어 있었다.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새 달과 같네."
이 글뜻을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은, "둥근 달이라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차면 기우는 것입니다. 새 달은 차지 않은 것이니 차지 않으면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하자 왕은 노해서 무당을 죽여 버렸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둥근 달은 성(盛)한 것이옵고, 새 달은 미약(微弱)한 것이오니, 생각건데 우리 나라는 점점 성하고 신라는 점점 약해진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왕은 이 말을 듣고 기뻐했다.
태종(太宗)은 백제에 괴상한 변고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5년 경신(庚申; 660)에 김인문(金仁問)을 사신으로 당나라에 보내서 군사를 청했다. 당 고종(高宗)은 좌호위장군(左虎(武)衛將軍) 형국공(荊國公) 소정방(蘇定方)으로 신구도 행군총관(神丘道 行軍摠管)을 삼아 좌위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英)과 좌호위장군(左虎衛將軍) 빙사귀(馮士貴)·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농효공(龐孝公) 등을 거느리고 13만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치게 했다. 또 신라 왕 춘추(春秋)로 우이도 행군총관(우夷道 行軍摠管)을 삼아 신라의 군사를 가지고 합세하도록 했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 서쪽 덕물도(德勿島)에 이르자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서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싸움에 나가게 했다.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고 지킬 계책을 물으니 좌평(佐平) 의직(義直)이 나와 아뢴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큰 바다를 건너왔고 또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여, 또 신라 군사는 큰 나라가 원조해 주는 것만 믿고 적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당나라 군사가 싸움에 이롭지 못한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決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은 말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왔기 때문에 속히 싸우려고 서두르고 있으니 그 예봉(銳鋒)을 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편 신라 군사는 여러 번 우리에게 패한 때문에 이제 우리 군사의 기세를 바라만 보아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오니 오늘날의 계교는 마땅히 당나라 군사의 길을 막고 그 군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일부 조그만 군사로 신라를 쳐서 그 예기(銳氣)를 꺾은 연후에 편의를 보아서 싸운다면 군사를 하나도 죽이지 않고서 나라를 보전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왕은 망설이고 어느 말을 따를지 모르고 있었다. 이때 좌평(佐平) 흥수(興首)가 죄짓고 고마며지현(古馬며知縣)에 귀양가 있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물었다. "일이 급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흥수는 말한다. "대체로 좌평 성충(成忠)의 말과 같사옵니다." 대신들은 이 말을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죄인의 몸이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오니 그 말은 쓸 것이 되지 못합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白江; 기벌포伎伐浦)에 들어가서 강물을 따라 내려오되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또 신라군은 탄현(炭峴)에 올라와서 소로(小路)를 따라 내려오되 말[馬]을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 놓고 군사를 놓아 친다면 마치 닭장에 든 닭과 그물에 걸린 물고기와 같을 것입니다" 했다. 왕은 "그 말이 옳다" 했다.
또 들으니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 한다. 의자왕은 장군 계백(階(偕)伯)을 보내 결사대(決死隊)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나가 신라 군사와 싸우게 했더니 계백은 네 번 싸워 네 번 다 이겼다. 하지만 군사는 적고 힘이 다하여 마침내 패하고 계백은 전사했다. 이에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합세해서 전진하여 진구(津口)까지 나가서 강가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때 갑자기 새가 소정방의 진영(陣營) 위에서 맴돌므로 사람을 시켜서 점을 치게 했더니 "반드시 원수(元帥)가 상할 것입니다" 한다. 정방이 두려워하여 군사를 물리고 싸움을 중지하려 하므로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이르기를, "어찌 나는 새의 괴이한 일을 가지고 천시(天時)를 어긴단 말이오. 하늘에 응하고 민심에 순종해서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데 어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하고 신검(神劍)을 뽑아 그 새를 겨누니 새는 몸뚱이가 찢어져 그들의 자리 앞에 떨어진다. 이에 정방은 백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서 산을 등지고 진을 치고 싸우니 백제군이 크게 패했다. 당나라 군사는 조수(潮水)를 타고 전선(戰船)이 꼬리를 물어 북을 치면서 전진했다.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바로 백제의 도성(都城)으로 쳐들어가 30리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이때 백제에서는 군사를 다 내어 막았지만 패해서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당나라 군사는 이긴 기세(氣勢)를 타고서 성으로 들이닥쳤다.
의자왕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한다. "내가 성충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의자왕은 드디어 태자 융(隆; 효孝라고도 했지만 잘못이다)과 함께 북비(北鄙)로 도망했다. 정방이 그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성을 굳게 지켰다. 이때 태장의 아들 문사(文思)가 태(泰)에게 말한다. "왕이 태자와 함께 성에서 나가 달아났는데 숙부(叔父)가 맘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한 것을 풀고 물러간다면 그때에는 우리들이 어떻게 온전할 수가 있겠습니까"하고는 좌우 사람들을 거느리고 성을 넘어 나아가자 백성들은 모두 그를 따르니 태(泰)는 이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시켜 성첩(城堞)을 세우고 당나라 깃발을 꽂으니 태(泰)는 일이 매우 급해서 문을 열고 항복하기를 청했다. 이에 왕과 태자 융(隆), 왕자 태(泰), 대신 정복(貞福)과 여러 성이 모두 항복했다. 소정방은 왕 의자와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演) 및 대신·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만 2,807명을 당나라 서울로 보냈다.
백제에는 원래 5부(部), 76군(郡), 200성(城), 36만 호(戶)가 있었는데 이때 당나라에서는 이곳에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蓮)·덕안(德安) 등 다섯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都督)·자사(刺史)를 삼아 다스리게 했다.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에게 명하여 사자성(泗차城)을 지키게 하고, 도 좌위낭장(左衛郎將) 왕문도(王文度)로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삼아 백제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무마하게 했다. 소정방은 포로들을 이끌고 당나라 임금에게 뵈니, 임금은 이들을 책망만 하고 용서해 주었다.
의자왕이 그곳에서 병으로 죽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을 증직(贈職)하고 그의 옛 신하들이 가서 조상하는 것을 허락했다. 또 명하여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의 무덤 옆에 장사지내게 하고 모두 비를 세워 주었다.
7년 임술(壬戌; 662)에 당에서는 소정방을 명하여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을 삼았다가 다시 평양도(平壤道)로 고쳐 고구려군을 패강(浿江)에서 깨뜨리고 마읍산(馬邑山)을 빼앗아 진영(陣營)을 세우고 드디어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했으나 때마침 큰 눈이 내려서 포위를 풀고 돌아가니, 양주안집대사(凉州安集大使)를 삼아 토번(吐藩)을 평정했다.
건봉(乾封) 2년(667)에 소정방이 죽자 당나라 황제는 슬퍼하여 좌효기대장군(左驍騎大將軍) 유주도독(幽州都督)을 증직하고 시호(諡號)를 장(莊)이라 했다(이상은 <당사唐史>에 있는 글이다).
<신라별기(新羅別記)>에 의하면, 문호(文虎(武))왕이 즉위한 5년 을축(乙丑; 665) 8월 경자(庚子)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성(熊津城)에 가서 가왕(假王) 부여(扶餘) 융(隆)과 만나 단(壇)을 만들고 백마(白馬)를 잡아 맹세하는데, 먼저 천신(天神)과 산천(山川)의 영(靈)에 제사를 지낸 뒤에 말의 피를 뿌리고 글을 지어 맹세했다.
"저번에 백제의 선왕(先王)이 순종(順從)하는 것과 반역하는 이치에 어두워 이웃 나라와 평화를 두텁게 하지 않고 인친(姻親)과 화목하지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해서 왜국(倭國)과 서로 통하여, 그들과 함께 잔포(殘暴)한 짓을 했다. 신라를 침략하여 성읍(城邑)을 파괴하고 백성을 짓밟아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중국의 천자(天子)는 한 물건이라도 제가 살 곳을 잃는 것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들이 해독을 입는 것을 불쌍히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서 사이좋게 지내기를 타일렀었다. 그러나 백제는 지리(地理)의 험하고 먼 것을 믿고 천경(天經)을 업신여기니 황제(皇帝)는 크게 노하여 삼가 정벌(征伐)을 행하니 깃발이 가리키는 곳 한 번 싸움에 이 땅을 평정했다. 마땅히 궁실(宮室)과 주택(住宅)을 무너뜨려 못을 만들어서 자손들을 경계하고 그 폐단의 근원을 아주 뽑아 없애어 뒷 세상에 교훈을 보이려 한다. 귀순(歸順)해 오는 자는 회유하고 반역하는 자를 정벌하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이요, 망한 나라를 흥하게 하고 끊어진 대(代)를 잇게 하는 것은 전철(前哲)의 공통된 법칙이다.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하는 것은 전의 사책(史冊)에 전해 오는 것이기 때문에, 전백제왕(前百濟王) 사가정경(司稼正卿) 부여(扶餘) 융(隆)을 세워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삼아 그 선조(先祖)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상재(桑梓)를 보전케 하는 것이다.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우방(友邦)이 되어 각각 묵은 감정을 없애고 좋은 의(誼)를 맺어 화친하게 지낼 것이며 삼가 조명(詔命)을 받들어 영원히 번국(藩國)이 될 것이다. 이에 사자(使者)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노성현공(魯城縣公) 유인원(劉仁願)을 보내서 친히 권유하여 나의 뜻을 자세히 선포(宣布)하는 것이다. 혼인할 것을 약속하고 맹세를 소중히 여겨 희생(犧牲)을 잡아 피를 뿌리고 함께 시종(始終)을 두텁게 할 것이다. 재앙을 나누고 환란(患亂)을 서로 구원하여 은의(恩誼)를 형제처럼 할 것이다. 삼가 윤언(綸言)을 받들어 감히 버리지 말 것이며, 이미 맹세를 정한 뒤에는 함께 변하지 말도록 힘쓸 것이다. 만일 어기고 배반하여 그 덕을 변하여 군사를 일으켜 변방을 침범하는 때에는 신명(神明)이 이를 살펴서 백 가지 재앙을 내리시어 자손들도 키우지 못하고 사직(社稷)도 지키지 못하여 제사는 끊어져서 남는 씨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런 때문에 여기에 금서철계(金書鐵契)를 만들어 종묘(宗廟)에 간직해 두는 것이니 자손은 만대(萬代)가 되도록 감히 어기지 말 것이다. 신(神)은 이를 듣고 이에 흠향하고 복을 주시옵소서."
맹세가 끝나자 폐백(幣帛)을 단 북쪽에 묻고 맹세한 글은 신라의 대묘(大廟)에 간직해 두었다. 이 맹세하는 글은 대방도독(帶方都督) 유인궤(劉仁軌)가 지은 것이다(위에 있는 <당사唐史>의 글을 상고해 보면, 소정방蘇定方이 의자왕義慈王과 태자太子 융隆 들을 당唐나라 서울에 보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부여왕扶餘王 융隆을 만났다고 했으니, 당唐나라 황제皇帝가 융隆의 죄를 용서하고 돌려보내서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때문에 맹문盟文에도 분명히 말했으니 이것으로 증거가 된다).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총장(總章) 원년(元年) 무진(戊辰; 668, 총장總章 무진戊辰이라면 이적李勣의 일이니 하문下文에 소정방蘇定方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만일 정방定方의 일이라면 연호는 용삭龍朔 2년 임술壬戌에 해당하며 평양平壤을 포위했을 때의 일이다)에 신라에서 청한 당나라 군사가 평양 교외에 주둔하면서 글을 보내 말하기를, '급히 군자(軍資)를 보내 달라'고 했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묻기를, '고구려에 들어가서 당나라 군사가 주둔한 곳으로 간다는 것은 그 형세가 몹시 위험하다. 그러나 우리가 청한 당나라 군사가 양식이 떨어졌는데 군량을 보내 주지 않는다는 것도 옳지 못하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했다. 이에 김유신이 아뢰었다. '신 등이 군자(軍資)를 수송하겠사오니 대왕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했다. 이에 유신(庾信)·인문(仁問) 등이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국경 안에 들어가 곡식 2만 곡(斛)을 갖다주고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했다. 또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사와 합하고자 할 때 유신이 먼저 연기(然起)·병천(兵川) 두 사람을 보내서 그 합세할 시기를 물었다. 이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종이에 난새[鸞]와 송아지[犢]의 두 그림을 그려 보냈다. 신라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사람을 보내서 원효법사(元曉法師)에게 물었다. 원효는 해석하기를, '속히 군사를 돌이키라는 뜻이니 송아지와 난새를 그린 것은 두 물건이 끊어지는 것을 뜻한 것입니다' 했다. 이에 유신은 군사를 돌려 패수(浿水)를 건너려 할 때 명(命)을 내려 '뒤떨어지는 자는 베이리라' 했다. 이리하여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반쯤 건너자 고구려 군사가 쫓아와서 아직 건너지 못한 자를 잡아 죽였다. 그러나 이튿날 유신은 고구려 군사를 반격하여 수만명을 잡아 죽였다."
<백제고기(百濟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부여성(扶餘城)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로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말에 의자왕과 여러 후궁(後宮)들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이르기를, '차라리 자살해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고 서로 이끌고 여기에 와서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했다. 때문에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岩)이라고 하나 이것은 속설(俗說)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 다만 궁녀(宮女)들만이 여기에 떨어져 죽은 것이오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사(唐史)>에 명문(明文)이 있다.
<신라고전(新羅古傳)>에는 이러하다.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토벌하고 또 신라마저 치려고 머물러 있었다. 이때 유신이 그 뜻을 알아채고 당나라 군사를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모두 쓸어 묻었다. 지금 상주(尙州) 지경에 당교(唐橋)가 있는데 이것이 그들을 묻은 곳이다."(<당사唐史>를 상고하건대 그 죽은 까닭은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했으니 무슨 까닭일까? 감추기 위한 것인가. 향전鄕傳이 근거가 없는 것인가. 만일 임술壬戌년 고구려高句麗 싸움에 신라 사람이 정방定方의 군사를 죽였다면 그 후일後日인 총장總章 무진戊辰에 어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보면 향전鄕傳의 근거 없음을 알 수가 있다. 다만 무진戊辰에 고구려를 멸한 후에 唐나라에 신하로서 섬기지 않고 만대로 그 땅을 소유所有한 일은 있었으나 소정방蘇定方·이적李勣 두 공公을 죽이기까지 한 일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간 뒤에 신라 왕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의 남은 군사를 쫓아서 잡게 하고 한산성(漢山城)에 주둔하니 고구려·말갈(靺鞨)의 두 나라 군사가 와서 포위하여 서로 싸웠으나 끝이 나지 않아 5월 11일에 시작해 6월 22일에 이르니 우리 군사는 몹시 위태로웠다. 왕이 듣고 여러 신하와 의논했으나 장차 어찌할 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유신이 달려와서 아뢴다. "일이 급하여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고, 오직 신술(神術)이라야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하고 성부산(星浮山)에 단(壇)을 모드고 신술을 쓰니 갑자기 큰 독만한 광채가 단 위에서 나오더니 별이 북쪽으로 날아갔다(이 일로 해서 성부산星浮山이라고 하나 산의 이름에 대해서는 다른 설說도 있다. 산山은 도림都林 남쪽에 있는데 솟은 한 봉우리가 이것이다. 서울에서 한 사람이 벼슬을 구하려고 그 아들을 시켜 큰 횃불을 바라보고 모두 말하기를, 그곳에 괴상한 별이 나타났다고 했다. 王이 이 말을 듣고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사람을 모아 기도하게 했더니 그 아버지가 거기에 응모應募하려 했다. 그러나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별로 괴상한 일이 아니옵고 다만 한 집에 아들이 죽고 아비가 울 징조입니다" 했다. 그래서 드디어 기도를 그만두었다. 이날 밤 그 아들이 산에서 내려오다가 범에게 물려 죽었다). 한산성 안에 있던 군사들은 구원병이 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서로 보고 울 뿐이었는데 이때 적병이 이를 급히 치고자 하자 갑자기 광채가 남쪽 하늘 끝으로부터 오더니 벼락이 되어 적의 포석(砲石) 30여 곳을 쳐부쉈다. 이리하여 적군의 활과 화살과 창이 부서지고 군사들은 모두 땅에 자빠졌다가 한참 만에야 깨어나서 모두 흩어져 달아나니 우리 군사는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이 처음 왕위에 오르자, 어떤 사람이 돼지를 바쳤는데 머리는 하나요 몸뚱이는 둘이요, 발은 여덟이었다. 의론하는 자가 이것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반드시 육합(六合)을 통일할 상서(祥瑞)입니다." 이 왕대(王代)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衣冠)과 아홀(牙笏)을 쓰게 되었는데 이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 황제에게 청해서 가져온 것이었다.
신문왕(神文王) 때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서 말했다. "나의 성고(聖考) 당태종(唐太宗)은 어진 신하 위징(魏徵)·이순풍(李淳風)들을 얻어 마음을 합하고 덕을 같이하여 천하를 통일했다. 그런 때문에 이를 태종황제(太宗皇帝)라고 했다. 너의 신라는 바다 밖의 작은 나라로서 태종(太宗)이란 칭호(稱號)를 써서 천자(天子)의 이름을 참람되이 하고 있으니 그 뜻이 충성되지 못하다. 속히 그 칭호를 고치도록 하라." 이에 신라왕은 표(表)를 올려 말했다.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지만 성스러운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했으므로 태종(太宗)이라 한 것입니다." 당나라 황제가 그 글을 보고 생각하니, 그가 태자로 있을 때에 하늘에서 허공에 대고 부르기를, "삼삼천(三三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태어나서 김유신이 되었느니라" 한 일이 있어서 책에 기록해 둔 일이 있는데, 이것을 꺼내 보고는 놀라고 두려움을 참지 못했다. 다시 사신을 보내어 태종의 칭호를 고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
처음에 백제 군사와 황산에서 싸울 때 장춘랑(長春郞)과 파랑(波浪)이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그 뒤 백제를 칠 때 그들은 태종(太宗)의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신 등이 옛날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쳤고, 이제 백골(白骨)이 되어서도 나라를 완전히 지키려고 종군(從軍)하여 게으르지 않습니다. 하오나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의 위엄에 눌려서 남의 뒤로만 쫓겨다니고 있습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우리에게 적은 군사를 주십시오."
대왕(大王)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두 혼(魂)을 위하여 하룻동안 모산정(牟山亭)에서 불경(佛經)을 외고 또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壯義寺)를 세워 그들의 명복(冥福)을 빌게 했다.
삼국유사 제 2권
기이 제 2
제 2권
기이(紀異) 제2
문호왕(文虎(武)王) 법민(法敏)
왕이 처음 즉위한 용삭(龍朔) 신유(辛酉; 661)에 사자수(泗차水) 남쪽 바닷속에 한 여자의 시체(屍體)가 있는데, 키는 73척, 발의 길이는 6척, 음문(陰門)의 길이가 3척이었다. 혹은 말하기를 키가 18척이며 건봉(乾封) 2년 정묘(丁卯; 667)의 일이라고 했다.
총장(總章) 무진(戊辰; 668)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흠순(欽純) 등과 함께 평양(平壤)에 이르러 당(唐)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은 고장왕(高藏王)을 잡아가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왕王의 성姓이 고高씨이므로 고장高藏이라 했다. <당서唐書> 고종기高宗紀를 상고해 보면, 현경現慶 5년 경신庚申(660)에 소정방蘇定方 등이 백제百濟를 정벌하고 그 뒤 12월에 대장군大將軍 계여하契如何로 패강도浿江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을, 또 소정방蘇定方으로 요동도遼東道 대총관大摠管을 삼고, 유백영劉伯英으로 평양도平壤道 대총관大摠管을 삼아서 고구려를 쳤다. 또 다음해 신유辛酉 정월正月에는 소사업蕭嗣業으로 부여도扶餘道 총관摠管을 삼고, 임아상任雅相으로 패강도浿江道 총관摠管을 삼아 군사 35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했다. 8월 갑술甲戌에 소정방蘇定方 등은 고구려와 패강浿江에서 싸우다가 패해서 도망했다. 건봉乾封 원元년 병인丙寅(666) 6월에 방동선龐同善·고임高臨·설인귀薛仁貴·이근행李謹行 등으로 이를 후원케 했다. 9월에 방동선龐同善이 고구려와 싸워서 패했다. 12월 기유己酉에 이적李勣으로 요동도遼東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을 삼아 육총관六摠管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했다. 총장總章 원元년 무진戊辰(668) 9월 계사癸巳에 이적李勣이 고장왕高藏王을 사로잡았다. 12월 정사丁巳에 포로를 황제에게 바쳤다. 상원上元 원년元年 갑술甲戌(674) 2월에 유인궤劉仁軌로 계림도鷄林道 총관摠管을 삼아서 신라를 치게 했다. 우리 나라 <고기古記>에는 "당唐나라가 육로장군陸路將軍 공공孔恭과 수로장군水路將軍 유상有相을 보내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문仁問과 흠순欽純 등의 일만 말하고 유신庾信은 없으니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때 당나라의 유병(游兵)과 여러 장병(將兵)들이 진(鎭)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 신라(新羅)를 치려고 했으므로 왕이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쳤다. 이듬해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인문(仁問) 등을 불러들여 꾸짖기를, "너희가 우리 군사를 청해다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이제 우리를 침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하고 이내 원비(圓扉)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훈련하여 설방(薛邦)으로 장수를 삼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이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유학(留學)하러 당나라에 갔다가 인문을 찾아보자 인문은 그 사실을 말했다. 이에 의상이 돌아와서 왕께 아뢰니 왕은 몹시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것을 막아 낼 방법을 물었다.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이 말했다. "요새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비법(秘法)을 배워 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명랑이 말했다. "낭산(狼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道場)을 개설(開設)하면 좋겠습니다." 그때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보고한다. "당나라 군사가 무수히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돌고 있습니다." 왕은 명랑을 불러 물었다.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명랑이 말한다. "여러 가지 빛의 비단으로 절을 가설(假設)하면 될 것입니다." 이에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고 풀[草]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瑜伽)의 명승(明僧) 열두 명으로 하여금 명랑을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文豆婁)의 비밀한 법(法)을 쓰게 했다. 그때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아직 교전(交戰)하기 전인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서 당나라 군사는 모두 물속에 침몰(沈沒)되었다. 그 후에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하여 지금까지 단석(壇席)이 없어지지 않았다(<국사國史>에는 이 절을 고쳐 지은 것이 조로調露 원년元年 기묘己卯(679)의 일이라고 했다).
그 후 신미년(辛未; 671)에 당나라는 다시 조헌(趙憲)을 장수로 하여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므로 또 그전의 비법을 썼더니 배는 전과 같이 침몰되었다. 이때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은 인문을 따라 옥중에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문준을 불러서 묻는다. "너희 나라에는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병(大兵)을 내었는데도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느냐." 문준이 아뢰었다. "배신(陪臣)들은 상국(上國)에 온 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저희 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恩德)을 갚으려고 낭산(狼山) 남쪽에 새로 천왕사(天王寺)를 짓고 황제의 만년 수명(萬年壽命)을 빌면서 법석(法席)을 길이 열었다는 일뿐입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郞) 낙붕귀(樂鵬龜)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도록 했다. 신라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이 절을 사신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새 절을 지어 놓고 기다렸다. 사신이 와서 청한다. "먼저 황제의 수(壽)를 비는 천왕사에 가서 분향(焚香)하겠습니다." 이에 새로 지은 절로 그를 안내하자 그 사신은 절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군요"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국인(國人)들이 금 1,000냥을 주었더니 그는 본국에 돌아가서 아뢰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天王寺)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壽)를 축원할 뿐이었습니다"했다. 이때 당나라 사신의 말에 의해 그 절을 망덕사(望德寺)라고 했다(혹 효소왕孝昭王 때의 일이라고 하나 잘못이다).
신라 왕은 문준이 말을 잘해서 황제도 그를 용서해 줄 뜻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강수(强首) 선생에게 명하여 인문의 석방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지어 사인(舍人) 원우(遠禹)를 시켜 당나라에 아뢰게 했더니 황제는 표문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인문을 용서하고 위로해 돌려보냈다. 인문이 옥중에 있을 때 신라 사람은 그를 위하여 절을 지어 인용사(仁容寺)라 하고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열었는데 인문이 돌아오다가 바다 위에서 죽었기 때문에 미타도량(彌陀道場)으로 고쳤다. 지금까지도 그 절이 남아 있다. 대왕(大王)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인 영륭(永隆) 2년 신미(辛未; 681)에 죽으니 유명(遺命)에 의해서 동해중(東海中)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왕은 평시(平時)에 항상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했다. "나는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용(龍)이 되어 불법을 숭봉(崇奉)해서 나라를 수호하려 하오." 이에 법사가 말했다. "용은 짐승의 응보(應報)인데 어찌 용이 되신단 말입니까." 왕이 말했다. "나는 세상의 영화(榮華)를 싫어한 지가 오래되오. 만일 추한 응보로 내가 짐승이 된다면 이야말로 내 뜻에 맞는 것이오."
왕이 처음 즉위했을 때 남산(南山)에 장창(長倉)을 설치하니, 길이가 50보(步), 너비가 15보(步)로 미곡(米穀)과 병기(兵器)를 여기에 쌓아 두니 이것이 우창(右倉)이요, 천은사(天恩寺) 서북쪽 산 위에 있는 것은 좌창(左倉)이다. 다른 책에는, "건복(建福) 8년 신해(辛亥; 591)에 남산성(南山城)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2,850보(步)다"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덕왕대(眞德王代)에 처음 쌓았다가 이때에 중수(重修)한 것이다. 또 부산성(富山城)을 처음으로 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마치고 안북하변(安北河邊)에 철성(鐵城)을 쌓았다. 또 서울에 성곽(城郭)을 쌓으려 하여 이미 관리(官吏)를 갖추라고 명령하자 그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이 말을 듣고 글을 보내서 아뢰었다.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시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 성이라 해도 백성들은 감히 이것을 넘지 않을 것이며, 재앙을 씻어 깨끗이 하고 모든 것이 복이 될 것이나, 정교(政敎)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다 하더라도 재화(災禍)를 없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왕은 이 글을 보고 이내 그 역사(役事)를 중지시켰다.
인덕(麟德) 3년 병인 (丙寅;666) 3월 10일에 어떤 민가(民家)에서 길이(吉伊)라는 종이 한꺼번에 세 아들을 낳았다. 총장(總章) 3년 경오(庚午; 670) 정월 7일에는 한기부(漢岐部)의 일산급간(一山級干; 혹은 성산아간成山阿干)의 종이 한꺼번에 네 아이를 낳았는데 딸 하나에 아들 셋이었다. 나라에서 상으로 곡식 200석(石)을 주었다. 또 고구려를 친 뒤에 그 나라 왕손(王孫)이 귀화(歸化)하자 그를 진골(眞骨)의 지위에 두게 했다.
어느날 왕은 그의 서제(庶弟) 차득공(車得公)을 불러서 말하기를, "네가 재상이 되어 백관(百官)들을 고루 다스리고 사해(四海)를 태평하게 하라"하니 차득공은 말한다. "폐하께서 만일 소신(小臣)을 재상으로 삼으시려 하신다면 신은 원컨대 남몰래 국내를 돌아다니면서 민간부역(民間賦役)의 괴롭고 편안한 것과, 조세(租稅)의 가볍고 무거운 것과, 관리(官吏)의 청렴하고 재물을 탐하는 것을 알아 보고 난 뒤에 그 직책을 맡을까 합니다." 왕은 그 말을 좇았다. 공(公)은 승의(僧衣)를 입고 비파(琵琶)를 들어 마치 거사(居士)의 모습을 하고 서울을 떠났다.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州)·우수주(牛首州; 지금의 춘주春州)·북원경(北原京; 지금의 충주忠州)을 거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해양海陽)에 이르러 두루 촌락(村落)을 돌아다니노라니 무진주의 관리 안길(安吉)이 그를 이인(異人)인 줄 알고 자기 집으로 청해다가 정성을 다해서 대접했다. 밤이 되자 안길은 처첩(妻妾) 세 사람을 불러 말했다. "오늘밤에 거사(居士) 손님을 모시고 자는 자는 내가 몸을 마치도록 함께 살 것이오." 두 아내는, "차라리 함께 살지 못할지언정 어떻게 남과 함께 잔단 말이오"했다. 그 중에 아내 한 사람이 말한다. "그대가 몸을 마치도록 함께 살겠다면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이튿날 일찍 떠나면서 거사는 말했다. "나는 서울 사람으로서 내 집은 황룡사(皇龍寺)와 황성사(皇聖寺) 두 절 중간에 있고, 내 이름은 단오(端午; 속언俗言에 단오端午를 차의車衣라고 함)요. 주인이 만일 서울에 오거든 내 집을 찾아 주면 고맙겠소." 그 뒤에 차득공(車得公)은 서울로 돌아와서 재상이 되었다. 나라 법에 해마다 각 고을의 향리(鄕吏) 한 사람을 서울에 있는 여러 관청에 올려 보내서 지키게 했으니 이것이 곧 지금이 기인(其人)이다. 이때 안길이 차례가 되어 서울로 왔다. 두 절 사이로 다니면서 단오거사(端午居士)의 집을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안길은 길 가에 오랫동안 서 있노라니 한 늙은이가 지나다가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말한다. "두 절 사이에 있는 집은 대내(大內)이고 단오란 바로 차득공(車得公)이오. 그가 외군(外郡)에 비밀히 돌았을 때 아마 그대는 어떠한 사연과 약속이 있었던 듯하오." 안길이 그 사실을 말하자, 노인은 말한다. "그대는 궁성(宮城) 서쪽 귀정문(歸正門)으로 가서 출입하는 궁녀(宮女)를 기다렸다가 말해 보오." 안길은 그 말을 좇아서 무진주의 안길이 뵈러 문밖에 왔다고 했다. 차득공이 이 말을 듣고 달려 나와 손을 잡아 궁중으로 들어가더니 공(公)의 비(妃)를 불러내어 안길과 함께 잔치를 벌였는데 음식이 50가지나 되었다. 이 말을 임금께 아뢰고 성부산(星浮山; 혹은 성손평산星損平山) 밑에 있는 땅을 무진주 상수(上守)의 소목전(燒木田)으로 삼아 백성들의 벌채(伐採)를 금지하여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니 안팎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산 밑에 밭 30무(畝)가 있는데 씨 3석(石)을 뿌리는 밭이다. 이 밭에 풍년이 들면 무진주가 모두 풍년이 들고, 흉년이 들면 무진주도 또한 흉년이 들었다 한다.
만파식적(萬波息笛)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 성은 김씨(金氏)이다. 개요(開耀) 원년(元年) 신사(辛巳; 681) 7월 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東海) 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이렇게 말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왜병倭兵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 창건創建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龍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왕위王位에 올라 개요開耀 2년(682)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金堂 뜰 아래에 동쪽을 향해서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으니 용龍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遺言으로 유골遺骨을 간직해 둔 곳은 대왕암大王岩이고, 절 이름은 감은사感恩寺이다. 뒤에 용龍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 이듬해 임오(壬午) 5월 초하루(다른 책에는 천수天授 원년元年이라 했으나 잘못)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飡)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속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합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 혹은 춘일春日)을 명하여 점을 치게 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龍)이 되어 삼한(三韓)을 진호(鎭護)하고 계십니다. 또 김유신공(金庾信公)도 삼삼천(三三天)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계에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聖人)이 덕(德)을 함께 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달 7일에 이견대(利見臺)로 나가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살펴보도록 했다. 산 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는데 산 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 사자(使者)가 와서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는데 이튿날 점심 때 보니 대나무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데, 천지(天地)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 그 달 16일에 가니 용 한 마리가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어 바친다. 왕은 용을 맞아 함께 앉아서 묻는다.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용이 대답한다. "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성왕(聖王)께서는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五色) 비단과 금(金)과 옥(玉)을 주고는 사자(使者)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때 산과 용은 갑자기 모양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지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太子) 이공(理恭; 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는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玉帶)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한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이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오." 이에 옥대의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금시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으니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불렀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천존고(月城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敵兵)이 물러가고 병(病)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는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國寶)로 삼았다.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 천수(天授) 4년 계사(癸巳; 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온 이상한 일로 해서 다시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했다. 자세한 것은 그의 전기(傳記)에 실려 있다.
효소왕대(孝昭王代)의 죽지랑(竹旨郞; 죽만竹曼 또는 지관智官이라고도 한다)
제32대 효소왕(孝昭王) 때에 죽만랑(竹曼郞)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 혹은 득곡得谷) 급간(級干)이 있어서 풍류황권(風流黃卷)에 이름을 올려 놓고 날마다 나오고 있었는데, 한 번은 10일이 넘도록 보이지 않았다. 죽만랑은 그의 어머니를 불러 그대의 아들이 어디 있는가를 물으니 어머니는 말한다. "당전(幢典) 모량부(牟梁部)의 익선아간(益宣阿干)이 내 아들을 부산성(富山城) 창직(倉直)으로 보냈으므로 빨리 가느라고 미처 그대에게 인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죽만랑이 말한다. "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간 것이라면 찾아볼 필요가 없겠지만 이제 공사(工事)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대접해야겠소." 이에 떡 한 그릇과 술 한 병을 가지고 좌인(左人; 우리말에 개질지皆叱知라는 것이니 이는 노복奴僕을 말한다)을 거느리고 찾아가니 낭(郎)의 무리 137명도 위의(威儀)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실(得烏失)이 어디 있는가고 물으니 문지기는 대답한다. "지금 익선(益宣)의 밭에서 예(例)에 따라 부역(賦役)을 하고 있습니다." 낭은 밭으로 찾아가서 가지고 간 술과 떡을 대접했다.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여 함께 돌아오려 했으나 익선은 굳이 반대하고 허락하지 않는다. 이때 사리(使吏)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 능절(能節)의 조(租) 30석(石)을 거두어 싣고, 성안으로 가고 있었다. 죽만랑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는 풍미(風味)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고집불통을 비루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면서 휴가를 주도록 함께 청했으나 그래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번엔 진절(珍節) 사지(舍知)의 말안장을 주니 그제야 허락했다. 조정의 화주(花主)가 이 말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서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럽고 추한 것을 씻어 주려 하니, 익선은 도망하여 숨어 버렸다. 이에 그의 맏아들을 잡아갔다. 때는 중동(仲冬) 몹시 추운 날인데 성안에 있는 못[池]에서 목욕을 시키자 얼어붙어 죽었다.
효소왕(孝昭王)이 그 말을 듣고 명령하여 모량리(牟梁里) 사람으로 벼슬에 오른 자는 모조리 쫓아내어 다시는 관청에 붙이지 못하게 하고, 승의(僧衣)를 입지 못하게 하고, 만일 중이 된 자라도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칙사(勅使)가 간진(侃珍)의 자손을 올려서 칭정호손(秤定戶孫)을 삼아 남달리 표창했다. 이때 원측법사(圓測法師)는 해동(海東)의 고승(高僧)이었지만 모량리(牟梁里) 사람인 때문에 승직(僧職)을 주지 않았다.
처음에 술종공(述宗公)이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가 되어 임지(任地)로 가는데, 마침 삼한(三韓)에 병란(兵亂)이 있어 기병(騎兵) 3,000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했다. 일행이 죽지령(竹旨嶺)에 이르니 한 거사(居士)가 그 고갯길을 닦고 있었다. 공(公)이 이것을 보고 탄복하여 칭찬하니 거사도 공의 위세가 놀라운 것을 보고 좋게 여겨 서로 마음 속에 감동한 바가 있었다. 공이 고을의 임소(任所)에 부임한 지 한 달이 지나서 꿈에 거사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공의 아내도 같은 꿈을 꾸었다. 더욱 놀라고 괴상히 여겨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그곳 사람들이 "거사는 죽은 지 며칠 되었습니다" 한다. 사자(使者)가 돌아와 고하는데 그가 죽은 것은 꿈을 꾸던 것과 같은 날이었다. 이에 공이 말한다. "필경 거사는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다." 공은 다시 군사를 보내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 돌로 미륵(彌勒)을 하나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워 놓았다. 공의 아내는 그 꿈을 꾸던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죽지(竹旨)라고 했다. 이 죽지랑(竹旨郞)이 커서 벼슬을 하게 되어 유신공(庾信公)과 함께 부수(副師)가 되어 삼한을 통일했다. 진덕(眞德)·태종(太宗)·문무(文武)·신문(神文)의 4대에 걸쳐 재상으로서 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 득오곡(得烏谷)이 죽만랑(竹曼郞)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으니 이러하다.
간 봄 그리워하니, 모든 것이 시름이로세.
아담하신 얼굴, 주름살 지시려 하네.
눈 돌릴 사이에나마, 만나뵙도록 기회 지으리라.
낭(郎)이여! 그리운 마음에, 가고 오는 길.
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