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삼국유사 - 7

영지니 2008. 1. 13. 19:53

  김부대왕(金傅大王)

재56대 김부대왕(金傅大王)의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 927) 9월에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해서 고울부(高蔚府)에 이르니, 경애왕(景哀王)은 우리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령하여 강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구하게 했으나 구원병(救援兵)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그 해 11월에 신라 서울로 쳐들어갔다. 이때 왕은 비빈(妃嬪) 종척(宗戚)들과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열고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과 비(妃)는 달아나 후궁(後宮)으로 들어가고 종척(宗戚) 및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며, 귀천(貴賤)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노비(奴婢)가 되기를 빌었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공사간(公私間)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王宮)에 들어가서 거처했다. 이에 좌우 사람을 시켜 왕을 찾게 하니 왕은 비첩(婢妾)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군중(軍中)으로 잡아다가 왕은 억지로 자결(自決)해 죽게 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嬪妾)들을 모두 욕보였다. 왕의 족제(族弟)인 부(傅)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운 셈이 되었다. 왕위(王位)에 오르자 전왕(前王)의 시체를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다. 이 때 우리 태조(太祖)는 사신(使臣)을 보내서 조상했다.

이듬해 무자(戊子; 928)년 봄 3월에 태조(太祖)는 50여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신라 서울에 이르니 왕은 백관(百官)과 함께 교외에서 맞아 대궐로 들어갔다. 서로 대하여 정리와 예의를 다하고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열었다. 술이 얼근하자 왕은 말했다.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해서 화란(禍亂)을 불러일으켰고, 견훤으로 하여금 불의(不義)한 짓을 마음껏 행하게 해서 우리 나라를 망쳐 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이내 눈물을 흘리면서 우니 좌우 사람들도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태조 역시 눈물을 흘렸다. 태조는 여기에서 수십일을 머무르다가 돌아갔는데 부하 군사들은 엄숙하고 정제해서 조금도 침범하지 않으니 서울의 사녀(士女)들이 서로 경하(慶賀)해 말했다. "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王公)이 온 것은 부모를 만난 것 같다."

8월에 태조는 사자를 보내서 왕에게 금삼(錦衫)과 안장 없는 말을 주고 또 여러 관료(官僚)와 장사(將士)들에게 차등을 두어 물건을 주었다.

청태(淸泰) 2년 을미(乙未; 935) 10월에 사방 땅이 모두 남의 나라 소유가 되고 나라는 약하고 형세가 외로우니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었으므로 여러 신하들과 함께 국토(國土)를 들어 고려 태조(太祖)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분분하여 끝나지 않는지라 왕태자(王太子)가 말했다. "나라의 존망(存亡)은 반드시 하늘의 명에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忠臣)·의사(義士)들과 함께 민심(民心)을 수습해서 힘이 다한 뒤에야 그만둘 일이지 어찌 1,000년의 사직(社稷)을 경솔하게 남에게 내주겠습니까?" 왕은 말한다. "외롭고 위태롭기가 이와 같으니 형세는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간뇌도지(肝腦塗地)케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시켜서 국서(國書)를 가지고 태조에게 가서 항복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태자는 울면서 왕을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서 삼베 옷을 입고 풀을 먹다가 세상을 마쳤다. 그의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華嚴宗)에 들어가 중이 되어 승명(僧名)을 범공(梵空)이라 했는데 그 뒤로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있었다 한다.

태조는 신라의 국서를 받자 태상(太相) 왕철(王鐵)을 보내서 맞게 했다. 왕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로 돌아가니, 향거보마(香車寶馬)가 30여 리에 뻗치고 길은 사람으로 꽉 차고, 구경꾼들이 담과 같이 늘어섰다. 태조는 교외에 나가서 영접하여 위로하고 대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주고, 장녀(長女)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그의 아내로 삼았다. 왕이 자기 나라를 작별하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았다 해서 이를 난조(鸞鳥)에 비유하여 공주의 칭호를 신란공주(神鸞公主)라고 고쳤으며, 시호(諡號)를 효목(孝穆)이라 했다. 왕을 봉(封)해서 정승(正承)을 삼으니 자리는 태자(太子)의 위이며 녹봉(祿俸) 1,000석을 주었다. 시종(侍從)과 관원(官員)·장수들도 모두 채용해서 쓰도록 했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여 이를 경순왕(敬順王)의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고 항복해 오자 태조는 무척 기뻐하여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사람을 시켜 말했다. "이제 왕이 내게 나라를 주시니 주시는 것이 매우 큽니다. 원컨대 왕의 종실(宗室)과 혼인을 해서 구생(舅甥)의 좋은 의(誼)를 길이 하고 싶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우리 백부(伯父) 억렴(億廉; 왕王의 아버지 효종각간孝宗角干은 추봉追封된 신흥대왕神興大王의 아우이다)에게 딸이 있는데 덕행(德行)과 용모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고는 내정(內政)을 다스릴 사람이 없습니다." 태조가 그에게 장가를 드니 이가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金氏)이다(우리 왕조王朝 등사랑登仕郞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에 이와 같은 말이 있다. "신성왕후神成王后 이씨李氏는 본래 경주慶州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수俠州守로 있을 때 태조太祖가 그 고을에 갔다가 그를 왕비王妃로 맞았다. 그런 때문에 그를 협주군俠州君이라고도 한다 했다. 그의 원당願堂은 현화사玄化寺이며, 3월 25일이 기일忌日로, 정릉貞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하나를 낳으니 안종安宗이다." 이 밖에 25 비주妃主 가운에 김씨金氏의 일은 실려 있지 않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신史臣의 의론을 봐도 역시 안종安宗을 신라의 외손外孫이라 했다. 그러니 마땅히 사전史傳을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

태조의 손자 경종(景宗) 주(주)는 정승공(政承公)의 딸을 맞아 왕비를 삼으니, 이가 헌승황후(憲承皇后)이다. 이에 정승공(政承公)을 봉해서 상부(尙父)를 삼았다.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 무인(戊寅; 978)에 죽으니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했다. 상부(尙父)로 책봉하는 고명(誥命)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칙(詔勅)을 내리노니 희주(姬周)가 나라를 처음 세울 때는 먼저 여상(呂尙)을 봉했고 유한(劉漢)이 나라를 세울 때에는 먼저 소하(蕭何)를 봉했다. 이로부터 온 천하가 평정되었고 널리 기업(基業)이 열렸다. 용도(龍圖) 30대를 세우고 섭린(섭麟)은 400년을 이으니 해와 달이 거듭 밝고 천지가 서로 조화되었다. 비록 무위(無爲)의 군주(君主)로서 시작되었으나 역시 보좌(輔佐)하는 신하로 해서 일을 이루었던 것이다.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정승 식읍팔천호 김부(觀光順化 衛國功臣 上柱國 樂浪王政承 食邑八千戶 金傅)는 대대로 계림(鷄林)에 살고 있어서 벼슬은 왕의 작위(爵位)를 받았고, 그 영특한 기상은 하늘을 업신여길 만하고 문장(文章)은 땅을 진동할 만한 재주가 있었다. 부(富)는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귀(貴)는 모토(茅土)에 거(居)했으며 육도삼략(六韜三略)은 가슴 속에 들어 있고 칠종오신(七縱五申)을 손바닥으로 잡아 쥐었다. 우리 태조는 비로소 이웃 나라와 화목하게 지내는 우호(友好)를 닦으시니 일찍부터 내려오는 풍도를 알아서 이내 부마(駙馬)의 인의(姻誼)를 맺어 안으로 큰 절의(節義)에 보답했다. 이미 나라가 통일되고 군신(君臣)이 완전히 삼한(三韓)으로 합쳤으니 아름다운 이름은 널리 퍼지고 올바른 규범(規範)은 빛나고 높았다. 상부도성령(尙父都省令)의 칭호를 더해 주고 추충신의 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 崇德守節功臣)의 호(號)를 주니 훈봉(勳封)은 전과 같고 식읍(食邑)은 전후를 합쳐서 1만 호(戶)가 되었다. 유사(有司)는 날을 가려서 예(禮)를 갖추어 책명(冊命)하는 것이니 일을 맡은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개보(開寶) 8년(975) 10월 일."

"대광내의령 겸 총한림 신 핵선(大匡內議令 兼 摠翰林 臣 핵宣)은 받들어 행하여 위와 같이 칙령(勅令)을 받들고 직첩(職牒)이 도착하는 대로 봉행(奉行)하라. 개보(開寶) 8년 10월 일."

"시중(侍中) 서명(署名), 내봉령(內奉令) 서명(署名), 군부령(軍部令) 서명(署名), 군부령(軍部令) 무서(無署), 병부령(兵部令) 무서(無署), 병부령(兵部令) 서명(署名), 광평시랑(廣坪(評)侍郞) 서명(署名), 광평시랑(廣坪(評)侍郞) 무서(無署), 내봉시랑(內奉侍郞) 무서(無署), 내봉시랑(內奉侍郞) 서명(署名), 군부경(軍部卿) 무서(無署), 군부경(軍部卿) 서명(署名), 병부경(兵部卿) 무서(無署), 병부경(兵部卿) 서명(署名),

추충신의 숭덕수절공신 상부도성령 상주국 낙랑군왕 식읍일만호 김부(推忠愼義 崇德守節功臣 尙父都省令 上柱國 樂浪郡王 食邑一萬戶 金傅)에게 고(告)하노니 위와 같이 칙령(勅令)을 받들고 부신(符信)이 도착하는 대로 봉행(奉行)하라.

주사(主事) 무명(無名), 낭중(郎中) 무명(無名), 서령사(書令史) 무명(無名), 공목(孔目) 무명(無名). 개보(開寶) 8년 10월 일에 내림.”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新羅)의 박씨(朴氏)와 석(昔氏)는 모두 알에서 나왔다. 김씨는 황금(黃金) 궤 속에 들어서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한다. 혹은 황금으로 된 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더욱 황당해서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서로 전하여 사실이라고 한다. 이제 다만 그 시초를 살펴보건대 위에 있는 이는 그 몸을 위해서는 검소했고 남을 위해서는 너그러웠다. 그 관직을 설치하는 것은 간략히 했고 그 일을 행하는 것은 간소하게 했다. 성심껏 중국(中國)을 섬겨서 조빙(朝聘)하는 사신이 제항(梯航)으로 연락불절하여 항상 자제(子弟)들을 중국에 보내어 숙위(宿衛)하게 하고 국학(國學)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했다. 이리하여 성현(聖賢)의 풍화를 이어받고 오랑캐의 풍속을 개혁시켜서 예의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또 중국 군사의 위엄을 빌어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평정하고, 그 땅을 취하여 군현(郡縣)을 삼았으니 가히 장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불법(佛法)을 숭상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는 마을마다 탑과 절을 즐비하게 세워 백성들은 모두 중이 되어 군대(軍隊)니 농민(農民)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나라가 날로 쇠퇴해 가니 어찌 어지러워지지 않을 것이며 또 망하지 않겠는가. 이 때에 경애왕(景哀王)은 더욱 음란하고 놀기에만 바빠 궁녀(宮女)들과 좌우 근신(近臣)들과 더불어 포석정(鮑石亭)에 나가 술자리를 베풀고 즐겨 견훤(甄萱)이 오는 것도 몰랐으니, 저 문 밖의 한금호(韓擒虎)나 누각(樓閣) 위의 장려와(張麗華)와 다를 것이 없었다. 경순왕(敬順王)이 태조(太祖)에게 귀순(歸順)한 것은 비록 할 수 없이 한 일이기는 하나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다. 만일 힘껏 싸우고 죽기로 지켜서 고려 군사에게 반항했더라면 힘은 꺾이고 기세는 다해서 반드시 그 가족을 멸망시키고 죄없는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고명(告命)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府庫)를 봉하고 군현(郡縣)의 이름을 기록하여 귀순했으니 조정에 대해서는 공로가 있고 백성들에 대해서는 덕이 있는 것이 매우 크다 하겠다. 옛날 전씨(錢氏)가 오월(吳越)의 땅을 송(宋)나라에 바친 일을 소자첨(蘇子瞻)은 충신(忠臣)이라고 했으니, 이제 신라의 공덕(功德)은 그보다 훨씬 크다고 하겠다. 우리 태조는 비빈(妃嬪)이 많고 그 자손들도 또한 번성했다.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外孫)으로서 왕위(王位)에 올랐으며, 그 뒤에 왕통(王統)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었다. 이것이 어찌 그 음덕(陰德)이 아니겠는가."

신라가 이미 땅을 바쳐 나라가 없어지자 아간(阿干) 신회(神會)는 외직(外職)을 내놓고 돌아왔는데 도성(都城)이 황폐한 것을 보고 서리리(黍離離)의 탄식함이 있어 이에 노래를 지었으나 그 노래는 없어져서 알 수가 없다.

남부여(南扶餘)와 전백제(前百濟)와 북부여(北扶餘; 北扶餘는 이미 위에 나와 있다)

부여군(扶餘郡)은 전 백제(百濟)의 도읍이니, 혹 소부리군(所夫里郡)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의 성왕(聖王) 26년 무오(戊午) 봄에 도읍을 사자(泗차)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했다" 하고, 주(注)에 "그 지명(地名)은 소부리(所夫里)이니 사자(泗차)는 지금의 고성진(古省津)이요 소부리는 부여의 딴 이름이다" 했다.

또 양전장부(量田帳簿)에 의하면, "소부리군은 농부의 주첩(柱貼)이다" 했으니 지금 말하는 부여군이란 옛 이름을 되찾은 셈이다. 백제 왕의 성(姓)이 부씨(扶氏)였으므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혹 여주(餘州)라고도 말하는 것은, 군(郡)의 서쪽에 있는 자복사(資福寺) 고좌(高座)에 수놓은 장막이 있는데 그 수놓은 글에 말하기를, "통화(統和) 15년 정유(丁酉; 997) 5월 일 여주 공덕대사(功德大寺)의 수장(繡帳)이다" 했다. 또 옛날에는 하남(河南)에 임주자사(林州刺史)를 두었는데 그때 도적(圖籍) 중에 여주라는 두 글자가 있었으니 임주(林州)는 지금의 가림군(佳林郡)이고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다.

<백제지리지(百濟地理志)>에는 <후한서(後漢書)>에 있는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삼한(三韓)이 대개 78개 국인데 백제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북사(北史)>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百濟)는 동쪽으로는 신라(新羅)에 접하고 서남쪽은 큰 바다에 접하며, 북쪽은 한강(漢江)을 경계로 했다. 그 도읍은 거발성(居拔城) 또는 고마성(固麻城)이라고 하며, 이 밖에 다시 오방성(五方城)이 있다.'

<통전(通典)>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다.'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또 이렇게 말했다. '백제는 부여의 딴 종족이다. 동북쪽은 신라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서 월주(越州)에 이르며 남쪽은 바다를 건너서 왜국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이다. 그 왕이 거처하는 곳에 동서(東西)의 두 성이 있다.'

<신당서(新唐書)>를 보면 이러하다. '백제는 서쪽으로 월주(越州)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왜국인데 모두 바다를 건너게 된다. 북쪽은 고구려이다.'

<삼국사(三國史)> 본기(本紀)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溫祚)요,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雛牟王)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니, 그는 북부여(北扶餘)에서 난리를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왔었다. 그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다만 딸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둘째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부여주(扶餘州)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이고 다음은 온조(溫祚)다. 그들은 후에 태자(太子)에게 용납되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드디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여 명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들도 이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서 살 만한 곳이 있는가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가서 살자고 하자 열 명의 신하들은 간하기를 "이 하남(河南)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가 흐르며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했고, 남쪽으로 기름진 못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가로놓여 있어서 천험(天險)과 지리(地利)가 좀체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했다. 그러나 비류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雛忽)에 가서 살았다. 한편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여 열 명의 신하를 보필(輔弼)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으니, 이 때는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佳(嘉))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이란 곳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히 살고 있으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해서 죽었다. 이에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 백성들이 올 때에 기뻐했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씨(氏)를 해(解)라고 했다. 그 뒤 성왕(聖王) 때에 도읍을 사비(泗차)로 옮겼으니 이것이 지금의 부여군이다(미추홀彌雛忽은 인주仁州이고 위례慰禮는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고전기(古典記)>에 의하면 이러하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아들 온조(溫祚)는 전한(前漢) 홍가(鴻佳) 3년 계유(癸酉)(묘卯; 前 18)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慰禮城)으로 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丙辰)에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으며, 13세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元年; 371)에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北漢城; 지금의 양주楊洲)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22세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던 원휘(元徽) 3년 을묘(乙卯; 475)에는 도읍을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公州)으로 옮겨 63년을 지내고, 26세 성왕(聖王) 대에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여 31세 의자왕(義慈王)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

당(唐)나라 현경(顯慶) 5년(660)은 의자왕이 왕위에 있던 20년으로 신라 김유신(金庾信)이 소정방(蘇定方)과 백제를 쳐서 평정하던 해이다. 백제에는 본래 다섯 부(部)가 있어 37군(郡)·200성(城)·76만호(戶)로 나뉘었었다. 그런데 당에서는 그 땅에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蓮)·덕안(德安) 등 다섯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그 추장(酋長)들로 도독부(都督府), 자사(刺史)를 삼았는데 얼마 안 되어 신라가 그 땅을 모두 병합했다. 그리고 거기에 웅주(熊州)·전주(全州)·무주(武州) 등 세 주(州)와 여러 군현(郡縣)을 두었다.

또 호암사(虎암寺)에는 정사암(政事암)이란 바위가 있는데, 나라에서 장차 재상(宰相)감을 의논할 때에 뽑힐 사람 3, 4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봉해서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열어 보아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 자리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있다.

또 사자하(泗차河) 가에는 바위 하나가 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그 바위 위에 앉아서 물고기와 용을 낚았다 하여 바위 위에는 용이 꿇어앉았던 자취가 있으므로 그 바위를 용암(龍巖)이라고 한다.

또 고을 안에는 산이 세 개가 있어서 그곳을 일산(日山)·오산(吳山)·부산(浮山)이라고 하는데 백제가 전성(全盛)하던 때에 신(神)들이 그 산 위에 살면서 서로 날아 왕래하기를 조석으로 끊이지 않았다.

사자수(泗차水) 언덕에는 또 돌 하나가 있는데 10여 명이 앉을 만하다. 백제 왕이 왕흥사(王興寺)에 가서 부처에게 예(禮)를 드리려 할 때면 먼저 그 돌에서 부처를 바라보고 절을 하면 그 돌이 저절로 따뜻해졌다 해서 그 돌을 환석(煥石)이라고 한다.

또 사자하(泗차河)의 양쪽 언덕은 마치 그림 병풍과 같아서 백제 왕이 매양 그곳에서 잔치를 열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겼다. 그런 때문에 지금도 이곳을 대왕포(大王浦)라고 일컫는다.

또 시조(始祖) 온조왕은 동명왕(東明王)의 셋째아들로서 몸이 장대하고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고, 말 타기와 활 쏘기를 잘했다. 또 다루왕(多婁王)은 너그럽고 관후했으며 위엄과 인망이 있었다. 또 사비왕(沙沸王; 혹은 사이왕沙伊王)은 구수왕(仇首王)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려서 정사를 보살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즉시 이를 폐하고 고이왕(古爾王)을 세웠다. 혹은 말하기를, 낙초(樂初) 2년 기미(己未)에 사비왕(沙沸王)이 죽고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무왕(武王;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百濟에는 무강武康이 없다)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寡婦)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던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薯여]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生業)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이름지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혹은 선화善化)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이내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그것은 이러하다.

선화공주(善化公主)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薯童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童謠)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대궐 안에까지 들리자 백관(百官)들이 임금에게 극력 간해서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하여 장차 떠나려 하는 데 왕후(王后)는 순금(純金) 한 말을 주어 노자로 쓰게 했다. 공주가 장차 귀양지에 도착하려는데 도중에 서동이 나와 공주에게 절하면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저 우연히 믿고 좋아하니 서동은 그를 따라가면서 비밀히 정을 통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동요가 맞는 것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모후(母后)가 준 금을 꺼내 놓고 살아 나갈 계획을 의논하자 서동이 크게 웃고 말했다. "이게 무엇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이니 이것을 가지면 백 년의 부를 누릴 것입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덩이처럼 쌓아 두었소."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그것은 천하의 가장 큰 보배이니 그대는 지금 그 금이 있는 곳을 아시면 우리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소이다." 이에 금을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이것을 실어 보낼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말한다. "내가 신통(神通)한 힘으로 보낼 터이니 금을 이리로 가져 오시오." 이리하여 공주가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금을 사자사(師子寺) 앞에 갖다 놓았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동안에 그 금을 신라 궁중으로 보내자 진평왕(眞平王)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해서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서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어느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龍華山) 밑 큰 못 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한다.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곧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像)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塔)과 낭무(廊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 <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했다)라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들을 보내서 그 역사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삼국사三國史>에는 이 분을 법왕法王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 보면 이러하다.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함통(咸通) 8년 정해(丁亥; 867)에 났다. 근본 성(姓)은 이(李)였는데 뒤에 견(甄)으로 씨(氏)를 고쳤다. 아버지 아자개(阿慈개)는 농사지어 생활했었는데, 광계(光啓) 연간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상주尙州)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將軍)이라 했다. 아들이 넷이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데 그 중에 견훤(甄萱)은 남보다 뛰어나고 지략(智略)이 많았다.

<이제가기(李제家記)>에 보면 이렇게 말했다. 진흥대왕(眞興大王)의 비(妃)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융부인(白융夫人)이다. 그 셋째아들 구륜공(仇輪公)의 아들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의 아들 각간(角干) 작진(酌珍)이 왕교파리(王咬巴里)를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元善)을 낳으니 이가 바로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요, 둘째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으니 그 맏아들이 상부(尙父) 훤(萱)이요, 둘째아들이 장군 능애(能哀)요, 셋째아들이 장군 용개(龍盖)요, 넷째아들이 보개(寶盖)요, 다섯째아들이 장군 소개(小盖)이며, 딸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부자 한 사람이 있어 모양이 몹시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관계하고 갑니다"하자 아버지는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하여 그 말대로 시행했다. 날이 밝아 그 실이 간 곳을 찾아보니 북쪽 담 밑에 있는 큰 지렁이 허리에 꽂혀 있다. 이로부터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甄萱)이라 일컬었다. 경복(景福) 원년(元年) 임자(壬子; 892)에 이르러 왕이라 일컫고 완산군(完山郡)에 도읍을 정했다. 나라를 다스린지 43년 청태(淸泰) 원년(元年) 갑오(甲午; 934)에 견훤의 세 아들 즉 신검(神劒)·용검(龍劒)·양검(良劒)이 즉위하여 천복(天福) 원년(元年) 병신(丙申; 936)에 고려 군사와 일선군(一善郡)에서 싸워서 패하니 후백제(後百濟)는 아주 없어졌다.

처음에 견훤이 나서 포대기에 싸였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밥을 가져다 주려고 아이를 수풀 아래 놓아 두었더니 범이 와서 젖을 먹이니 마을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아이가 장성하자 몸과 모양이 웅장하고 기이했으며 뜻이 커서 남에게 얽매이지 않고 비범했다. 군인이 되어 서울로 들어갔다가 서남의 해변으로 가서 변경을 지키는데 창을 베개삼아 적군을 지키니 그의 기상(氣象)은 항상 사졸(士卒)에 앞섰으며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당(唐)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원년(元年)은 신라 진성왕(眞聖王)의 재위 6년이다. 이때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곁에 있어서 국권(國權)을 농간하니 기강(紀綱)이 어지럽고 해이하였으며, 기근(饑饉)이 더해지니 백성들은 떠돌아다니고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은 남몰래 반역할 마음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의 서남 주현(州縣)들을 공격하니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 달 동안에 무리는 5,000이나 되었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하게 왕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스스로 신라서남도통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국개국공(新羅西南都統 行全州刺史 兼 御史中承上柱國 漢南國開國公)이라 했으니 용화(龍化) 원년(元年) 기유(己酉; 889)였다. 이것을 혹 경복(景福) 원년(元年) 임자(壬子; 892)의 일이라고도 한다.

이때 북원(北原)의 오둑 양길(良吉)의 세력이 몹시 웅대하여 궁예(弓裔)는 자진해서 그 부하가 되었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직책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巡行)하여 완산주(完山州)에 이르니 고을 백성들이 영접하면서 위로했다. 견훤은 민심을 얻은 것이 기뻐서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백제가 나라를 시작한 지 600여 년에 당나라 고종(高宗)은 신라의 요청으로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서 수군(水軍) 13만 명이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은 있는 군사를 거느리고 황산(黃山)을 거쳐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으니 어찌 감히 도읍을 세워 옛날의 분함을 씻지 않겠는가." 드디어 스스로 후백제 왕이라 일컫고 벼슬과 직책을 나누었으니 이는 당나라 광화(光化) 3년이요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900)이다.

정명(貞明) 4년 무인(戊寅; 918)에 철원경(鐵原京)의 민심이 졸지에 변하여 우리 태조(太祖)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견훤은 이 소식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서 경하(慶賀)하고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智異山)의 죽전(竹箭) 등을 바쳤다. 견훤은 우리 태조에게 겉으로는 화친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시기하였다. 그는 태조에게 총마(총馬)를 바치더니 3년 겨울 10월에는 기병(騎兵) 3,000을 거느리고 조물성(曹物城; 지금의 어딘지 자세히 알 수 없음)까지 오자 태조(太祖)도 역시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와서 싸웠으나 견훤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勝負)를 결단할 수가 없었다. 이에 태조는 일시적으로 화친하여 견훤의 군사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려고 글을 보내서 화친할 것을 요구하고 종제(從弟)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내니 견훤도 역시 그 사위 진호(眞虎)를 보내서 교환했다. 12월에 견훤은 거서(居西; 지금의 어딘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등 20여 성을 쳐서 차지하고 사자를 후당(後唐)에 보내서 번신(藩臣)이라 일컬으니 후당에서는 그에게 검교태위 겸 시중판백제군사(檢校太尉 兼 侍中判百濟軍事)의 벼슬을 주고, 전과 같이 도독행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都督行全州刺史 海東西面都統指揮兵馬判置等事 百濟王)이라 하고 식읍(食邑) 2,500호를 주었다. 4년에 진호가 갑자기 죽자 견훤은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해서 즉시 왕신을 가두고 사람을 보내서 전년에 보낸 총마를 돌려보내라고 하니 태조는 웃고 그 말을 돌려보냈다.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 927) 9월에 견훤은 근품성(近品成; 지금의 산양현山陽縣)을 쳐 빼앗아 불을 질렀다. 이에 신라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자 태조는 장차 군사를 내려는데 견훤은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울주蔚州)를 쳐서 취하고 족시림(族始林; 혹은 계림鷄林 서쪽 들이라고 했다)으로 진군하여 졸지에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이때 신라 왕은 부인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나가 놀고 있었으므로 더욱 쉽게 패했다. 견훤은 왕의 부인을 억지로 끌어다가 욕보이고 왕의 족제(族弟) 김부(金傅)로 왕위를 잇게 한 뒤에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사로잡고, 나라의 귀한 보물과 무기와 자제(子弟)들, 그리고 여러 가지 공인(工人) 중에 우수한 자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 태조는 정예(精銳)한 기병(騎兵) 5,000을 거느리고 공산(公山)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서 크게 싸웠으나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은 죽고 모든 군사가 패했으며, 태조만이 겨우 죽음을 면했을 뿐 대항하지 못했기 때문에 견훤은 많은 죄악을 짓게 되었다. 견훤은 전쟁에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성(大木城)과 경산부(京山府)와 강주(康州)를 노략하고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했는데 의성부(義成府)의 태수(太守) 홍술(洪述)은 대항해 싸우다가 죽었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말했다. "나는 오른손을 잃었다."

42년 경인(庚寅: 930)에 견훤은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안동부安東府)을 치려고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석산(石山)에 영채를 마련하니 태조는 백보(百步) 가량을 공격해서 고을 북쪽 병산(甁山)에 영채를 마련했다. 여러 번 싸웠으나 견훤이 패하여 시랑(侍郞) 김악(金渥)이 사로잡혔다. 다음날 견훤이 군사를 거두어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하니 성주(城主) 원봉(元逢)은 막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밤에 도망했다. 태조는 몹시 노하여 그 고을을 낮추어 하지현(下枝縣; 지금의 풍산현豊山縣. 원봉元逢이 본래 순주성順州城 사람인 까닭이다)을 삼았다.

신라(新羅)의 군신(君臣)들은 망해 가는 세상에 다시 일어날 수가 없으므로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좋은 의(誼)를 맺어서 자기들을 후원해 주도록 했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또다시 신라 서울에 들어가 나쁜 짓을 하려 하는데, 태조가 먼저 들어갈까 두려워해서 태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전일에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장차 그대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는 것과 같으며, 종달새가 매의 죽지를 찢으려 드는 것과 같으니, 반드시 백성들을 도탄(塗炭)에 빠뜨리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빈 터전으로 만들 것이오. 나는 이 때문에 먼저 조적(祖적)의 채찍을 가지고 홀로 한금호(韓擒虎)의 도끼를 휘둘러 백관(百官)들에게 맹세하기를 백일(白日)과 같이 했고, 육부(六部)를 의리 있는 풍도로 설유(說諭)했더니 뜻밖에 간신(奸臣)은 도망하고 임금[경애왕景哀王]은 세상을 떠났소. 이에 경명왕(景明王)의 외종제(外從弟)인 헌강왕(憲康王)의 외손(外孫)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해서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없는 임금을 다시 있게 만들었소. 그런데 그대는 내 충고(忠告)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흘러 다니는 말만을 듣고 온갖 계교로 왕위를 엿보고 여러 가지로 나라를 침노했으나 오히려 내가 탄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내 쇠털 하나도 뽑지 못했소. 이 겨울 초순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陣) 밑에서 손을 묶어 항복했고, 또 이달 안에는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전사(戰死)했소. 이밖에 죽인 것도 많고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았소. 그 강하고 약한 것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질 것은 알 만한 일이오. 내가 바라는 일은 활을 평양성(平壤城) 문루(門樓)에 걸고 말에게 패강(浿江)의 물을 먹이는 일이오. 그러나 지난달 7일에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국왕(國王)의 조서(詔書)를 전하기를, '경(卿)은 고려와 오랫동안 좋은 화의(和誼)를 통하고 함께 이웃 나라의 맹약(盟約)을 맺은 줄 알았었소. 그런데 인질로 간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 드디어 화친(和親)하던 옛 뜻을 잃어버리고 서로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이 쉬지 않게 되었소. 이제 일부러 사신을 경의 고을로 보내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내어 마땅히 각각 서로 친목해서 길이 평화를 도모하도록 한 것이오.' 내가 생각하는 의리는 왕실을 높이는 데에 독실하고 마음은 큰 나라를 섬기는 데 깊었었소. 이제 오월왕(吳越王)이 조칙(詔勅)을 타이르는 것을 듣고 즉시 받들어 행하고자 하나, 다만 그대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고 국경에 있으면서도 싸우려는 것을 걱정하는 바요. 이제 그 조서(詔書)를 베껴서 보내는 터이니 청컨대 유의해서 자세히 살피시오. 또 토끼와 사냥개가 다 함께 지치고 보면 마침내는 반드시 남의 조롱을 받는 법이오.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다가는 역시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오. 마땅히 미복(迷復)을 경계하여 후회하는 일을 스스로 불러오지 말도록 하시오."

천성(天成) 2년(927) 정월에 태조는 회답을 보냈다. "오월국(吳越國)의 통화사(通和使) 반상서(班尙書)가 전한 조서(詔書) 한 통을 받들고, 겸하여 그대가 보낸 긴 편지도 받아 보았소. 화초부사(華초膚使)가 조서를 가지고 왔고, 척소호음(尺素好音)과 겸해서 가르침도 받았소. 지검(芝檢)을 받아 비록 감격은 더했지만 편지를 펴 보고 의심스러운 마음을 없애기 어려웠소. 이제 돌아가는 사신에게 부탁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려 하오. 나는 위로 하늘의 명령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들의 추대에 못 이겨서 외람되이 장수의 직권(職權)을 맡아서 천하를 경륜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오. 저번에 삼한(三韓)이 액운(厄運)을 당하고 모든 국토에 흉년이 들어 황폐해져서 백성들은 모두 황건(黃巾)에 소속되고, 논밭은 적토(赤土)가 아닌 땅이 없었소. 난리의 시끄러움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앙을 구하려 하여 이에 스스로 선린(善隣)의 우호(友好)를 맺으니 과연 수천 리 되는 국토가 농상(農桑)으로 생업(生業)을 즐기고, 사졸(士卒)은 7,8년 동안 한가롭게 쉬었소. 그러던 것이 계유(癸酉)년 10월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교전(交戰)하게 되었소. 그대가 처음에는 적을 가볍게 여겨 곧장 전진해 와서 마치 당랑(螳螂)이 수레바퀴를 막는 것 같이 하더니,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용감히 물러가서 마치 모기가 산을 짊어진 것과 같이 했소. 그리고 손을 모아 공손한 말로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길이 화목하며, 혹시라도 이 맹세를 어긴다면 신(神)이 벌을 줄 것이라'하였소. 이에 나도 전쟁을 중지하는 무(武)를 숭상하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인(仁)을 기약하여 드디어 여러 겹 포위했던 것을 풀어 피로한 군사들을 쉬게 했으며, 인질 보내는 것도 거절하지 않고 다만 백성만을 편안하게 하려 했으니, 이것은 곧 내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德)을 베푼 것이었소. 그런데 맹약(盟約)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흉악한 세력이 다시 일어나 봉채(蜂채)의 독이 생민(生民)을 침해하고 미친 이리와 호랑이가 서울땅을 가로막아 금성(金城)이 군색하고 황옥(黃屋)을 몹시 놀라게 할 줄 어찌 생각했겠소? 큰 의리에 의거해서 주(周)나라 왕실을 높이는 것이 그 누가 환공(桓公)·문공(文公)의 패업(패業)과 같겠는가. 기회를 타서 한(漢)나라를 도모한 것은 오직 왕망(王莽)·동탁(董卓)의 간사함을 볼 뿐이오. 왕의 지극히 높은 지위로서 몸을 굽혀 그대에게 자(子)라고 하게 하여 높고 낮은 차서를 잃게 하였으니 상하(上下)가 모두 조심해서 원보(元輔)의 충순(忠純)이 아니면 어찌 사직(社稷)을 편안케 할 수 있으랴 했소, 나의 마음에는 악한 것이 없고 뜻은 왕실(王室)을 높이는 데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해서 나라를 위태로운 데서 구해 내려 했소. 그대는 터럭만한 작은 이익을 보고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저버려 임금을 죽이고 대궐을 불사르며 대신(大臣)들을 죽이고 사민(士民)을 도륙했소. 궁녀(宮女)들은 잡아서 수레에 실어 가고 보물은 빼앗아서 짐 속에 실었으니 그 흉악함은 걸왕(桀王)·주왕(紂王)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경짐승[경]과 올빼미보다 더 심했소. 나는 붕천(崩天)의 원한과 각일(却日)의 깊은 정성으로, 매가 참새를 쫓듯이 국가에 대해 견마(犬馬)의 수고로움을 다하려 했소. 그리하여 두 번째 군사를 일으켜 2년이 지났는데, 육로(陸路)로 진격하는 데는 천둥과 번개처럼 빨리 달렸고, 수로(水路)로 치는 데는 범과 용처럼 용맹스러워 움직이면 반드시 공을 세우고 일을 하는 데 헛일이 없었소. 윤경(尹卿)을 바닷가로 쫓으면 쌓인 갑옷이 산더미 같았고, 추조(雛造)를 성 가에서 잡았을 때에는 시체가 들을 덮었소. 연산군(燕山君)에서는 길환(吉奐)을 군전(軍前)에서 베었고, 마리성(馬利城; 아마 이산군伊山郡인 듯싶다) 가에서는 수오(隨晤)를 깃발 아래서 죽였소. 임존성(任存城; 지금의 대흥군大興郡)을 함락시키던 날에는 형적(刑積) 등 수백 명이 목숨을 버렸고, 청천현(淸川縣; 상주尙州 영내領內의 현縣 이름)을 깨칠 때에는 직심(直心) 등 4, 5 무리가 머리를 바쳤소. 동수(桐藪; 지금의 동화사桐華寺)는 깃발만 바라보고 도망해 흩어졌고, 경산(京山)은 구슬을 입에 물고 항복했소.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귀순해 왔고, 나부(羅府)는 서쪽에서 와서 소속되었소. 공격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수복(收復)될 날이 어찌 멀겠소? 반드시 저수(지水)의 영채에서 장이(張耳)의 묵은 원한을 씻고, 오강(烏江) 기슭에서 한왕(漢王)의 한번 승전(勝戰)한 마음을 이룩해서 마침내 바람과 물결을 쉬게 하여 길이 천하를 맑게 할 것이오. 이는 하늘이 돕는 바이니 천명(天命)이 어디로 돌아가겠소? 더구나 오월왕(吳越王) 전하의 덕은 포황(包荒)에도 흡족하고 인(仁)은 어린 백성에게도 깊어 특히 대궐에서 명령을 내려 우리 나라에서 난리를 그치라고 효유하였소.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받들어 행하지 않겠소? 만일 그대도 이 조서(詔書)를 받들어 흉악한 싸움을 그친다면, 다만 오월국의 어진 은혜에 보답할 뿐만 아니라 또한 동방(東方)의 끊어진 대(代)도 이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만일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이오."(이 글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었다)

장흥(長興) 3년(932)에 견훤의 신하 공직(공直)이 용맹스럽고 지략(智略)이 있었는데 태조(太祖)에게로 와서 항복하니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잡아서 다리 힘줄을 지져서 끊었다. 9월에 견훤은 일길(一吉)을 보내어 수군(水軍)을 이끌고 고려 예성강(禮成江)으로 들어가 3일 동안 머무르면서 염주(鹽州)·백주(白州)·진주(眞州) 등 세 주(州)의 배 100여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돌아갔다.

청태(淸泰) 원년(元年) 갑오(甲午; 934)에 견훤은 태조가 운주(運州; 자세히 알 수 없다)에 주둔해 있다는 말을 듣고 갑옷 입은 군사를 뽑아 욕식(욕食)시켜 빨리 가게 하였는데, 미처 영채에 이르기 전에 장군(將軍) 유금필(庾黔弼)이 강한 기병(奇兵)으로 쳐서 3,000여 명을 목베니 웅진(熊津) 이북(以北)의 30여 성은 이 소문을 듣고 자진해서 항복하였으며, 견훤의 부하였던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사(醫師) 지겸(之謙), 용장(勇將) 상봉(尙逢)·최필(崔弼) 등도 모두 태조에게 항복했다.

병신(丙申; 936)년 정월에 견훤은 그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신라말(新羅末)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어 군사는 북쪽의 고려 군사보다 배나 되는데도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 필경 하늘이 고려를 위하여 가수(假手)하는 것 같다. 어찌 북쪽 고려 왕에게 귀순해서 생명을 보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그 아들 신검(神劍)·용검(龍劍)·양검(良劍) 등 세 사람은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제가기(李제家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견훤에게는 아들 아홉이 있으니, 맏이는 신검(神劍), 둘째는 태사(太師) 겸뇌(謙腦), 셋째는 좌승(佐承) 용술(龍述), 넷째는 태사(太師) 총지(聰智), 다섯째는 대아간(大阿干) 종우(宗祐), 여섯째는 이름을 알 수 없고, 일곱째는 좌승(佐承) 위흥(位興), 여덟째는 태사(太師) 청구(靑丘)이며, 딸 하나는 국대부인(國大夫人)이니 모두 상원부인(上院夫人)의 소생(所生)이다." 또 말하기를, "견훤은 처첩(妻妾)이 많아서 아들 10여 명을 두었는데, 넷째아들 금강(金剛)은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 견훤이 특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려 하니 그 형 신검·양검·용검 등이 알고 몹시 근심했다. 이때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있고, 홀로 신검만이 견훤의 곁에 있었다. 이찬(伊飡) 능환(能奐)이 사람을 강주와 무주에 보내서 양검 등과 모의했다. 청태(淸泰) 2년 을미(乙未; 935) 3월에 이들은 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을 권해서 견훤을 금산(金山) 불당(佛堂)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서 금강을 죽이고 신검이 자칭 대왕이라 하고 나라 안의 모든 죄수들을 사면(赦免)해 주었다"고 한다.

처음에 견훤이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멀리 대궐 뜰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므로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신검이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왕께서는 늙으시어 군국(軍國)의 정사(政事)에 어두우시므로 장자(長子) 신검이 부왕(父王)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해서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는 소리입니다." 조금 후에 아버지를 금산사(金山寺) 불당(佛堂)으로 옮기고 파달(巴達) 등 30 명의 장사(壯士)를 시켜서 지키게 하니, 동요(童謠)에 이렇게 말했다.


가엾은 완산(完山) 아이
아비를 잃어 울고 있네.

당시 견훤은 후궁과 나이 어린 남녀 두 명, 시비(侍婢) 고비녀(古比女), 나인(內人) 능예남(能乂男) 등과 함께 갇혀 있었다. 그러다가 4월에 이르러 견훤은 술을 빚은 뒤에 지키는 장사 30명에게 먹여 취하게 하고는 고려로 도망해 왔다. 이에 태조는 소원보향예(小元甫香乂)·오염(吳琰)·충질(忠質) 등을 보내서 수로(水路)로 가서 맞아오게 했다. 고려에 이르자 태조는 견훤의 나이가 10년 위라고 하여 높여서 상부(尙父)라 하여 남궁(南宮)에 편안히 있게 하고 양주(楊洲)의 식읍(食邑)·전장(田莊)과 노비 40명, 말 아홉 필을 주고, 먼저 항복해 와 있는 신강(信康)으로 아전(衙前)을 삼았다. 견훤의 사위 장군 영규(英規)가 비밀히 그 아내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나라를 위해서 애쓰신 지 40여 년에 공업(功業)이 거의 이루어지려 하는데 하루아침에 집안 사람의 화(禍)로 나라를 잃고 고려에 따르니, 대체로 정녀(貞女)는 두 남편을 모시지 않고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오. 만일 내 임금을 버리고 반역한 아들[神劍]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義士)들을 본단 말이오. 더구나 고려의 왕공(王公)은 인후근검(仁厚勤儉)하여 민심을 얻었다 하니 이는 아마 하늘의 계시(啓示)로, 필경 삼한(三韓)의 임금이 될 것이니 어찌 글을 올려 우리 임금을 위안하고, 겸해서 왕공에게 은근히 하여 뒷날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소?" 그 아내가 말했다. "당신의 말씀이 바로 저의 뜻입니다." 이에 천복(天福) 원년(元年) 병신(丙申; 936) 2월에 사람을 보내서 태조에게 자기의 뜻을 말했다. "왕께서 의기(義旗)를 드시면 저는 내응(內應)하여 고려 군사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는 기뻐하여 사자에게 예물을 후히 주어 보내고 영규에게 치사했다. "만일 그대의 은혜를 입어 한번 합세해서 길에서 막히는 일이 없게 한다면 곧 먼저 장군께 뵙고, 다음에 올라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받들어 반드시 끝까지 후하게 보답하겠소. 천지와 귀신은 모두 이 말을 들을 것이오."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말했다. "노신(老臣)이 전하께 항복해 온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반역한 자식을 죽이기 위한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대왕은 신병(神兵)을 빌어 적자난신(賊子亂臣)을 죽이시면 신이 비록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말했다. "그들을 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오." 이에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10만을 거느려 천안부(天安府)로 나가게 하고, 9월에 태조는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천안(天安)에 이르러 군사를 합하여 일선군(一善郡)으로 진격해 나가니 신검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았다. 갑오일(甲午日)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니 고려 군사는 동북방을 등지고 서남쪽을 향해 진을 쳤다. 태조는 견훤과 함께 군대를 사열하는데, 갑자기 칼과 창 같은 흰 구름이 일어나 적군(敵軍)을 향해 가므로 북을 치고 나가자 후백제의 장군 효봉(孝奉)·덕술(德述)·애술(哀述)·명길(明吉) 등은 고려 군사의 형세가 크고 정돈된 것을 바라보고 갑옷을 버리고 진 앞에 나와 항복했다. 태조는 이를 위로하고 장수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은 말한다. "원수(元帥) 신검(神劍)은 중군(中軍)에 있습니다." 태조는 장군 공훤(公萱) 등에게 명하여 삼군을 일시에 진군시켜 협격(挾擊)하니 백제군은 무너져 달아났다. 황산(黃山) 탄현(炭峴)에 이르자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富達)·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했다. 태조는 항복을 받고 나머지는 모두 위로하여 처자(妻子)와 함께 서울로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태조가 능환(能奐)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비밀히 모의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네 꾀이니, 신하된 의리(義理)에 이래야 마땅하단 말이냐."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한다. 태조는 명하여 이를 베어라 했다. 신검이 참람되이 왕위를 빼앗은 것은 남의 위협으로, 그의 본심이 아니었으며 또 항복하여 죄를 빌어 특히 그 죽음을 용서하였더니, 견훤은 분하게 여겨 등창이 나서 수일만에 황산(黃山) 불사(佛舍)에서 죽으니 때는 9월 8일이고 나이는 70이었다.



태조는 군령(軍令)은 엄하고 분명해서 군사들이 조금도 범하지 않아 주현(州縣)이 편안하여 늙은이와 어린이가 모두 만세를 불렀다. 태조는 영규(英規)에게, "전왕(前王)이 나라를 잃은 후에 그의 신하된 사람으로서 한 사람도 위로해 주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경(卿)의 내외만이 천리 밖에서 글을 보내서 성의를 보였고, 겸해서 아름다운 명예를 나에게 돌렸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소."하고 좌승(左承)이란 벼슬과 밭 1,000경(頃)을 내리고, 역마(驛馬) 35필을 빌려 주어 가족들을 맞게 했으며 그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景福) 원년(元年; 892)에 나라를 세워 진(晉)나라 천복(天福) 원년(元年; 936)에 이르니, 45년 만인 병신(丙申)년에 망했다.

<사론(史論)>에 이렇게 말했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올바른 도리를 잃어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이 돌아갈 곳이 없이 되었다. 이에 뭇 도둑이 틈을 타서 일어나서 마치 고슴도치의 털과 같았다. 그 중에서도 강한 도둑은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두 사람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제 나라를 원수로 삼아 심지어는 선조의 화상(畵像)을 칼로 베었으니 그 어질지 않은 것이 너무 심했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으로 태어나서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 화심(禍心)을 품어 나라의 위태로움을 기화로 신라의 도읍을 쳐서 임금과 신하를 마치 짐승처럼 죽였으니 참으로 천하의 원흉(元兇)이다. 때문에 궁예는 그 신하에게서 버림을 당했고, 견훤은 그 아들에게서 화(禍)가 생겼으니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인데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비록 항우(項羽)·이밀(李密)의 뛰어난 재주로도 한(漢)과 당(唐)이 일어나는 것을 대적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궁예와 견훤 같은 흉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를 대항할 수 있었으랴.

가락국기(駕洛國記; 고려高麗 문종조文宗朝 대강大康 연간年間에 김관지주사金官知州事 문인文人이 지은 것이니 그 대략을 여기에 싣는다)

천지(天地)가 처음 열린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또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럴 때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이 있었다. 이들 추장(酋長)들이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戶)로서 7만 5,000명이었다. 이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 3월 계욕일(계浴日)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귀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를 말함이니, 마치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무엇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양이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한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한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또 말한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귀지(龜旨)입니다." 또 말한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구간(九干)들은 이 말을 좇아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아 있다. 그 노끈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배(百拜)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 두고 여러 사람은 각기 흩어졌다. 이런 지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그 합을 여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했다.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했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은(殷)나라 천을(天乙)과 같고 얼굴은 용과 같아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같다. 눈썹이 팔자(八字)로 채색이 나는 것은 당(唐)나라 고조(高祖)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虞)나라 순(舜)과 같았다. 그가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했다. 혹은 수릉(首陵; 수릉首陵은 죽은 후의 시호諡號다)이라고도 했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이는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3척이었다.

즉위 2년 계묘(癸卯; 43)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하고는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沓坪; 이는 옛날부터 묵은 밭인데 새로 경작耕作했기 때문에 신답평新畓坪이라 했다. 답자沓字는 속자俗字다)에 나가 사방의 산악(山嶽)을 바라보다가 좌우 사람을 돌아보고 말한다.

"이 땅은 협소(狹小)하기가 여뀌[蓼] 잎과 같지만 수려(秀麗)하고 기이하여 가위 16나한(羅漢)이 살 만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그 3에서 7을 이루니 7성(聖)이 살 곳으로 가장 적합하다. 여기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여기에 1,500보(步)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당(殿堂) 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와 곡식 창고를 지을 터를 마련한 뒤에 궁궐로 돌아왔다. 두루 나라 안의 장정과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틈을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甲辰; 44)년 2월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이 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요 머리 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하니 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命)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술법(術法)으로 겨뤄 보려는가?"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 것이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한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聖人)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문득 왕께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대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건무(建武) 24년 무신(戊申; 48)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말씀드렸다. "대왕께서 강림(降臨)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셨으니 신들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일진대,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왕은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해서 경주(輕舟)와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 망산도望山島는 서울 남쪽의 섬이요, 승점乘岾은 경기京畿 안에 있는 나라다)으로 가게 했더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오므로 신귀간은 이것을 바라보다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보내어 목연(木蓮)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했다. "나는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게 여겨 유사(有司)를 데리고 행차해서,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 밖에 대종(待從)한 잉신(잉臣)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데리고 온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인데,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패물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계신 곳에 가까워 오니 왕은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왔다. 잉신(잉臣) 이하 여러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들을 안내하게 하고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말을 마치고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도 주고 군인들을 많이 내어 보호하게 했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드니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한다. "저는 아유타국(阿踰타國)의 공주인데,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 왕은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라 이들에게 각각 살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나란히 수레를 탔으며, 중국에서 나는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가까웠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했다. 그리고 날마다 물건을 풍부하게 주고, 그들이 싣고 온 보배로운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어서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했다. 어느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구간(九干)들은 여러 관리의 어른인데, 그 지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小人)이나 농부들의 칭호이니 이것은 벼슬 높은 사람의 명칭이 못된다. 만일 외국사람들이 듣는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리하여 아도(我刀)를 고쳐서 아궁(我躬)이라 하고, 여도(汝刀)를 고쳐서 여해(汝諧), 피도(彼刀)를 피장(彼藏),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이라 하고,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유덕(留德)이라 하고 신천(神天)을 고쳐서 신도(神道), 오천(五天)을 고쳐서 오능(五能)이라 했다. 신귀(神鬼)의 음(音)은 바꾸지 않고 그 훈(訓)만 신귀(臣貴)라고 고쳤다. 또 계림(鷄林)의 직제(職制)를 취해서 각간(角干)·아질간(阿叱干)·급간(級干)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의 관리는 주(周)나라 법과 한(漢)나라 제도를 가지고 나누어 정하니 이것은 옛것을 고쳐서 새것을 취하고, 관직(官職)을 나누어 설치하는 방법이다. 이에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정돈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敎化)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陽)에게 음(陰)이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 공은 도산(塗山)이 하(夏)를 돕고, 당원(唐媛)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己巳; 189)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여 귀지봉(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하고,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 하여 처음 배에서 내리던 도두촌(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잉신(잉臣)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등은 이 나라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그들 내외는 1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밖의 노비의 무리들도 이 나라에 온 지 7,8년이 되는데도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모두 죽었으므로, 그들이 거처하던 빈관(賓館)은 텅 비고 아무도 없었다.

왕후가 죽자 왕은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난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23일에 죽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여 왕후가 죽던 때보다 더했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우니 높이가 한 길이면 둘레가 300보(步)인데 거기에 장사 지내고 이름을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했다.

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대손인 구충왕(仇衝王)까지 이 사당에 배향(配享)하고, 매년 정월(正月)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과 15일에 푸짐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신라 제30대 법민왕(法敏王)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 3월에 왕은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伽耶國) 시조(始祖)의 9대손 구형왕(仇衡王)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잡간(庶云잡干)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시조 수로왕은 어린 나에게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지낸 사당은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宗廟)에 합해서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리라." 이에 그 옛 터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사당에 가까운 상전(上田) 30경(頃) 공영(供營)의 자(資)로 하여 왕위전(王位田)이라 부르고 본토(本土)에 소속시키니, 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갱世級干)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여 해마다 명절이면 술과 단술을 마련하고 떡과 밥·차·과실 등 여러 가지를 갖추고, 제사를 지내어 해마다 끊이지 않게 하고, 그 제삿날은 거등왕이 정한 연중(年中) 5일을 변동하지 않으니, 이에 비로소 그 정성어린 제사는 우리 가락국에 맡겨졌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己卯; 199)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뒤로부터 구형왕(仇衡王) 말년에 이르는 330년 동안에 사당에 지내는 제사는 길이 변함이 없었으나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부터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에 이르는 60년 사이에는 이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가끔 빠뜨리기도 했다. 아름답도다, 문무왕(文武王; 법민왕法敏王의 시호)이여! 먼저 조상을 받들어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지냈으니 효성스럽고 또 효성스럽도다.

신라 말년에 충지잡간(忠至잡干)이란 자가 있었는데 높은 금관성(金官城)을 쳐서 빼앗아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이에 영규아간(英規阿干)이 장군의 위엄을 빌어 묘향(廟享)을 빼앗아 함부로 제사를 지내더니, 단오(端午)를 맞아 고사(告祠)하는데 공연히 대들보가 부러져 깔려죽었다. 이에 장군(將軍)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행히 전세(前世)의 인연으로 해서 외람되이 성왕(聖王)이 계시던 국성(國城)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마땅히 나는 그 영정(影幀)을 그려 모시고 향(香)과 등(燈)을 바쳐 신하된 은혜를 갚아야겠다."하고, 삼척(三尺) 교견(鮫絹)에 진영(眞影)을 그려 벽 위에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촛불을 켜 놓고 공손히 받들더니, 겨우 3일 만에 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서 땅 위에 괴어 거의 한 말이나 되었다. 장군은 몹시 두려워하여 그 진영을 모시고 사당으로 나가서 불태워 없애고 곧 수로왕의 친자손 규림(圭林)을 불러서 말했다. "어제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어찌해서 이런 일들이 거듭 생기는 것일까? 이는 필시 사당의 위령(威靈)이 내가 진영을 그려서 모시는 것을 불손(不遜)하게 여겨 크게 노하신 것인가보다. 영규(英規)가 이미 죽었으므로 나는 몹시 두려워하여, 화상도 이미 불살라 버렸으니 반드시 신(神)의 베임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왕의 진손(眞孫)이니 전에 하던 대로 제사를 받드는 것이 옳겠다."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내 오다가 나이 88세에 죽으니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계속해서 제사를 지내는데 단오날 알묘제(謁廟祭) 때 영규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발광(發狂)하여, 사당으로 와서 간원(間元)이 차려 놓은 제물을 치우고 자기가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는데 삼헌(三獻)이 끝나지 못해서 갑자기 병이 생겨서 집에 돌아가서 죽었다. 옛 사람의 말에 이런 것이 있다. "음사(淫祀)는 복(福)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 먼저는 영규가 있고 이번에는 준필이 있으니 이들 부자(父子)를 두고 한 말인가.

또 도둑의 무리들이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이 있다고 해서 와서 그것을 도둑질해 가려고 했다. 그들이 처음에 왔을 때는,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에 살을 당긴 한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오더니 사면을 향해서 비오듯이 화살을 쏘아서 7,8명이 맞아 죽으니, 나머지 도둑의 무리들은 달아나 버렸다. 며칠 후에 다시 오자 길이 30여 척이나 되는 눈빛이 번개와 같은 큰 구렁이가 사당 옆에서 나와 8,9명을 물어 죽이니 겨우 살아 남은 자들도 모두 자빠지면서 도망해 흩어졌다. 그리하여 능원(陵園) 안에는 반드시 신물(神物)이 있어 보호한다는 것을 알았다.

건안(建安) 4년 기묘(己卯; 199)에 처음 이 사당을 세운 때부터 지금 임금께서 즉위하신 지 31년 만인 대강(大康) 2년 병진(丙辰; 1076)까지 도합 878년이 되었으나 층계를 쌓아 올린 아름다운 흙이 허물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았고, 심어 놓은 아름다운 나무도 시들거나 죽지 않았으며, 더구나 거기에 벌여 놓은 수많은 옥조각들도 부서진 것이 없다. 이것으로 본다면 신체부(辛替否)가 말한 "옛날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와 파괴되지 않은 무덤이 있겠느냐."고 한 말은, 오직 가락국(駕洛國)이 옛날에 일찍이 망한 것은 그 말이 맞았지만 수로왕(首露王)의 사당이 허물어지지 않은 것은 신체부(辛替否)의 말을 믿을 수 없다 하겠다.

이 중에 또 수로왕을 사모해서 하는 놀이가 있다. 매년 7월 29일엔 이 지방 사람들과 서리(胥吏)·군졸(軍卒)들이 승점(乘岾)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논다. 이들이 동서쪽으로 서로 눈짓을 하면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뉘어서 망산도(望山島)에서 말발굽을 급히 육지를 향해 달리고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 위로 서로 밀면서 북쪽 고포(古浦)를 향해서 다투어 달리니, 이것은 대개 옛날에 유천간(留天干)과 신귀간(神鬼干) 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수로왕에게 아뢰던 옛 자취이다.

가락국이 망한 뒤로는 대대로 그 칭호가 한결같지 않았다. 신라 제31대 정명왕(政明王;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한 개요(開耀) 원년 신사(辛巳; 681)에는 금관경(金官京)이라 이름하고 태수(太守)를 두었다. 그 후 259년에 우리 고려 태조(太祖)가 통합(統合)한 뒤로는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임해현(臨海縣)이라 하고 배안사(排岸使)를 두어 48년을 계속했으며, 다음에는 임해군(臨海郡) 혹은 김해부(金海府)라고 하고 도호부(都護府)를 두어 27년을 계속했으며, 또 방어사(防禦使)를 두어 64년 동안 계속했다.

순화(淳化) 2년(991)에 김해부(金海府)의 양전사(量田使)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은 조사해서 보고했다. "수로왕의 능묘(陵廟)에 소속된 밭의 면적이 많으니 마땅히 15결(結)을 가지고 전대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나머지는 부(府)의 역정(役丁)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일을 맡은 관청에서 그 장계(狀啓)를 가지고 가서 보고하자, 그때 조정에서는 명령을 내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화해서 성군(聖君)이 되었고 이내 왕위(王位)에 올라 나이 158세나 되셨으니 자 삼황(三皇) 이후로 이에 견줄 만한 분이 드물다. 수로왕께서 붕(崩)한 뒤 선대(先代)부터 능묘(陵廟)에 소속된 전답을 지금에 와서 줄인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하고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量田使)가 또 거듭 아뢰자 조정에서도 이를 옳게 여겨 그 반은 능묘에서 옮기지 않고, 반은 그곳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게 했다. 절사(節使; 양전사量田使)는 조정의 명을 받아 이에 그 반은 능원(陵園)에 소속시키고 반은 부(府)의 부역하는 호정(戶丁)에게 주었다. 이 일이 거의 끝날 무렵에 양전사(量田使)가 몹시 피곤하더니 어느날 밤에 꿈을 꾸니 7,8명의 귀신이 보이는데 밧줄을 가지고 칼을 쥐고 와서 말한다. "너에게 큰 죄가 있어 목베어 죽여야겠다. 양전사는 형(刑)을 받고 몹시 아파하다가 놀라서 깨어 이내 병이 들었는데 남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해 가다가 그 병이 낫지 않아서 관문(關門)을 지나자 죽었다. 이 때문에 양전도장(量田都帳)에는 그의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 그 뒤에 사신이 와서 그 밭을 검사해 보니 겨우 11결(結) 12부(負) 9속(束)뿐이며 3결(結) 87부(負) 1속(束)이 모자랐다. 이에 모자라는 밭을 어찌했는가를 조사해서 내외궁(內外宮)에 보고하여, 임금의 명령으로 그 부족한 것을 채워 주게 했는데 이 때문에 고금(古今)의 일을 탄식하는 사람이 있었다.

수로왕(首露王)의 8대손 김질왕(金질王)은 정치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일을 매우 숭상하여 시조모(始祖母) 허황후(許皇后)를 위해서 그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했다. 이에 원가(元嘉) 29년 임진(壬辰; 452)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혼인하던 곳에 절을 세워 절 이름을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절 근처에 있는 평전(平田) 10결(結)을 측량해서 삼보(三寶)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

이 절이 생긴 지 500년 후에 장유사(長遊寺)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밭이 도합 300결(結)이나 되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綱)이, 왕후사(王后寺)가 장유사의 밭 동남쪽 지역 안에 있다고 해서 왕후사를 폐해서 장사(莊舍)를 만들어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을 기르고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세조(世祖) 이하 9대손의 역수(曆數)를 아래에 자세히 기록하니 그 명(銘)은 이러하다.

처음에 천지가 열리니, 이안(利眼)이 비로소 밝았네.
비록 인륜(人倫)은 생겼지만, 임금의 지위는 아직 이루지 않았네.
중국은 여러 대를 거듭했지만, 동국(東國)은 서울이 갈렸네.
계림(鷄林)이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駕洛國)이 뒤에 경영(經營)되었네.
스스로 맡아 다스릴 사람 없으면, 누가 백성을 보살피랴.
드디어 상제(上帝)께서, 저 창생(蒼生)을 돌봐 주었네.
여기 부명(符命)을 주어, 특별히 정령(精靈)을 보내셨네.
산 속에 알을 내려보내고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었네.
속은 오히려 아득하고, 겉도 역시 컴컴했네.
바라보면 형상이 없는 듯 하나 들으니 여기 소리가 나네.
무리들은 노래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치네.
7일이 지난 후에, 한때 안정되었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푸른 하늘이 텅 비었네.
여섯 개 둥근 알이 내려오니, 한 오리 자줏빛 끈이 드리웠네.
낯선 이상한 땅에, 집과 집이 연이었네.
구경하는 사람 줄지었고, 바라보는 사람 우글거리네.
다섯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있었네.
같은 때 같은 자취는, 아우와 같고 형과 같았네.
실로 하늘이 덕을 낳아서,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네.
왕위(王位)에 처음 오르니, 온 세상은 맑아지려 했네.
궁전 구조는 옛법을 따랐고, 토계(土階)는 오히려 평평했네.
만기(萬機)를 비로소 힘쓰고, 모든 정치를 시행했네.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으니, 오직 하나이고 오직 정밀했네.
길 가는 자는 길을 양보하고, 농사짓는 자는 밭을 양보했네.
사방은 모두 안정해지고, 만백성은 태평을 맞이했네.
갑자기 풀잎의 이슬처럼, 대춘(大椿)의 나이를 보전하지 못했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가 모두 슬퍼했네.
금과 같은 그의 발자취요, 옥과 같이 떨친 그 이름일세.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사당의 제사가 오직 향기로웠네.
세월을 비록 흘러갔지만, 규범(規範)은 기울어지지 않았네.

거등왕(居登王) 아버지는 수로왕(首露王), 어머니는 허황후(許皇后). 건안(建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13일에 즉위(卽位), 치세(治世)는 39년으로 가평(嘉平) 5년 계유(癸酉; 253) 9월 17일에 죽음. 왕비(王妃)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이며 태자(太子) 마품(麻品)을 낳음. <개황력(開皇曆)>에는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시조(始祖)가 금란(金卵)에서 난 까닭으로 김으로 성을 삼았다."고 했음.

마품왕(麻品王) 마품(馬品)이라고도 하며, 김씨(金氏). 가평(嘉平) 5년 계유(癸酉; 253)에 즉위. 치세(治世)는 39년으로, 영평(永平) 원년 신해(辛亥; 291) 1월 29일에 죽음. 왕비(王妃)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孫女) 호구(好仇)로 태자(太子) 거질미(居叱彌)를 낳음.

거질미왕(居叱彌王)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金氏). 영평(永平) 원년에 즉위. 치세 56년, 영화(永和) 2년 병오(丙午; 346) 7월 7일에 죽음. 왕비는 아궁아간(阿躬阿干)의 손녀 아지(阿志)로, 왕자(王子) 이시품(伊尸品)을 낳음.

이시품왕(伊尸品王) 김씨(金氏). 영화(永和) 2년에 즉위. 치세는 62년, 의희(義熙) 3년 정미(丁未; 407) 4월 10일에 죽음.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으로, 왕자 좌지(坐知)를 낳음.

좌지왕(坐知王) 김질(金叱)이라고도 함. 의희(義熙) 3년(407)에 즉위. 용녀(傭女)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의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니 국내가 시끄러웠다. 계림(鷄林)이 꾀를 써서 치려 하므로, 박원도(朴元道)라는 신하가 간했다. "유초(遺草)를 보고 또 보아도 역시 털이 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늘이 망하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어느 곳에서 보전하오리까. 또 점쟁이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괘사(卦辭)에 '소인(小人)을 없애면 군자(君子)가 와서 도울 것이다'했으니 왕께선 역(易)의 괘를 살피시옵소서." 이에 왕은 사과하여 옳다고 하고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荷山島)로 귀양보내고,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치세는 15년으로, 영초(永初) 2년 신유(辛酉; 421) 4월 12일에 죽음. 왕비는 도령대아간(道寧大阿干)의 딸 복수(福壽)로, 아들 취희(吹希)를 낳음.

취희왕(吹希王) 질가(叱嘉)라고도 함. 김씨(金氏). 영초(永初) 2년에 즉위. 치세는 31년 동안, 원가(元嘉) 28년 신묘(辛卯; 451) 2월 3일에 죽음. 왕비는 진사각간(進思角干)의 딸 인덕(仁德). 왕자(王子) 질지(질知)를 낳음.

질지왕(질知王) 김질왕(金질王)이라고도 함. 원가(元嘉) 28년에 즉위. 이듬해에 시조(始祖)와 허황옥 왕후(許黃玉王后)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始祖)와 만났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쓰게 함. 치세는 42년. 영명(永明) 10년 임신(壬申; 492) 10월 4일에 죽음. 왕비는 김상사간(金相沙干)의 딸 방원(邦媛). 왕자 겸지(鉗知)를 낳음.

겸지왕(鉗知王)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함. 영명(永明) 10년에 즉위. 치세 30년, 정광(正光) 2년 신축(辛丑; 521) 4월 7일에 죽음. 왕비는 출충각간(出忠角干)의 딸 숙(淑). 왕자 구형(仇衡)을 낳음.

구형왕(仇衡王) 김씨(金氏). 정광(正光) 2년에 즉위. 치세는 42년.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어서 대전(對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이叱今)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長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이叱)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으니, 첫째는 세종각간(世宗角干), 둘째는 무도각간(茂刀角干), 셋째는 무득각간(茂得角干)이다. <개황록(開皇錄)>에 보면, "양(梁)나라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신라에 항복했다."고 했다.

논평해 말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상고하건대 구형왕(仇衡王)

 

출처 ; http://www.suns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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