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삼국유사 - 14

영지니 2008. 1. 13. 20:33

진신수공(眞身受供)

장수(長壽) 원년 임진(壬辰; 692)에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하여 처음으로 망덕사(望德寺)를 세워 당나라 제실(帝室)의 복을 받들려 했다. 그 후 경덕왕(景德王) 14년(755)에 망덕사 탑이 흔들리더니 이 해에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났다. 신라 사람들은 말했다. "당나라 제실을 위하여 이 절을 세웠으니 마땅히 그 영험이 있을 것이다."

8년 정유(丁酉)에 낙성회(落成會)를 열고 효소왕이 친히 가서 공양하는데, 한 비구(比丘)가 몹시 허술한 모양을 하고 몸을 움츠리고 뜰에 서서 청했다. "빈도(頻度)도 또한 이 재(齋)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여 말석(末席)에 참여하게 했다. 재가 끝나자 왕은 그를 희롱하여 말했다. "그대는 어디 사는가." 비구승이 대답한다. "비파암(琵琶암)에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이제 가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라." 중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폐하께서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 진신(眞身) 석가(釋迦)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치자 몸을 솟구쳐 하늘로 올라가 남쪽을 향하여 갔다. 왕이 놀랍고 부끄러워 동쪽 언덕에 달려 올라가서 그가 간 곳을 향해 멀리 절하고 사람을 시켜 찾게 하니 남산(南山) 삼성곡(參星谷), 혹은 대적천원(大적川源)이라고 하는 돌 위에 이르러 지팡이와 바리때를 놓고 숨어 버렸다. 사자가 와서 복명(復命)하자 왕은 드디어 석가사(釋迦寺)를 비파암 밑에 세우고, 또 그 자취가 없어진 곳에 불무사(佛無寺)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때를 두 곳에 나누어 두었다. 두 절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나 지팡이와 바리때는 없어졌다.

<지론(智論)> 제4에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계빈(계賓)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아란야법(阿蘭若法)을 행하여 일왕사(一王寺)에 이르니 절에서는 큰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문지기는 그의 옷이 추솔한 것을 보고 문을 막고 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 번 들어가려 했건만 옷이 추하다 해서 번번이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문득 방편(方便)을 써서 좋은 옷을 빌어 입고 가니 문지기가 보고 들어가게 하고 막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그 자리에 나아가,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을 얻어 옷에게 먼저 주니 여러 사람들이 물었다. "어찌해서 그렇게 하는가." 그는 대답했다.

"내가 여러 번 왔으나 매번 들어올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 옷 때문에 이 자리에 오게 되어 여러 가지 음식을 얻었으니 마땅히 이 옷에게 음식을 주어야 할 것이다." 아마 이것도 같은 사례인가 한다.

찬(讚)해 말한다.

향을 사르고 부처님을 가려 새 그림을 보았고,
음식 만들어 중을 대접하고 옛 친구 불렀네.
이제부터 비파암 위의 달은,
때때로 구름에 가려 못에 더디게 비치리.



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

경덕왕(景德王) 19년 경자(庚子; 790) 4월 초하루에 해가 둘이 나란히 나타나서 열흘 동안 없어지지 않으니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인연 있는 중을 청하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조원전(朝元殿)에 단을 정결히 모으고 임금이 청양루(靑陽樓)에 거둥하여 인연 있는 중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월명사(月明師)가 긴 밭두둑 길을 가고 있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서 그를 불러 단을 열고 기도하는 글을 짓게 하니 월명사가 아뢴다. "저는 다만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해 있기 때문에 겨우 향가(鄕歌)만 알 뿐이고 성범(聲梵)에는 서투릅니다." 왕이 말했다. "이미 인연이 있는 중으로 뽑혔으니 향가라도 좋소." 이에 월명이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바쳤는데 가사는 이러하다.

오늘 여기 산화가(散花歌)를 불러, 뿌린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령을 부림이니, 미륵좌주(彌勒座主)를 모시게 하라.

이것을 풀이하면 이렇다.

용루(龍樓)에서 오늘 산화가(散花歌)를 불러, 청운(靑雲)에 한 송이 꽃을 뿌려 보내네,
은근하고 정중한 곧은 마음이 시키는 것이어니, 멀리 도솔대선(兜率大僊)을 맞으라.

지금 민간에서는 이것은 산화가(散花歌)라고 하지만 잘못이다. 마땅히 도솔가(兜率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산화가(散花歌)는 따로 있는데 그 글이 많아서 실을 수 없다. 그런 후에 이내 해의 변괴가 사라졌다. 왕이 이것을 가상히 여겨 품다(品茶) 한 봉과 수정염주(水晶念珠) 108개를 하사했다. 이때 갑자기 동자(童子) 하나가 나타났는데 모양이 곱고 깨끗했다. 그는 공손히 다(茶)와 염주(念珠)를 받들고 대궐 서쪽 작은 문으로 나갔다. 월명(月明)은 이것을 내궁(內宮)의 사자(使者)로 알고, 왕은 스님의 종자(從子)로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알고 보니 모두 틀린 추측이었다. 왕은 몹시 이상히 여겨 사람은 시켜 쫓게 하니, 동자는 내원(內院) 탑속으로 숨고 다와 염주는 남쪽의 벽화(壁畵) 미륵상(彌勒像) 앞에 있었다. 월명의 지극한 덕과 지극한 정성이 미륵보살을 소가(昭假) 시킴이 이와 같은 것을 알고 조정이나 민간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왕은 더욱 공경하여 다시 비단 100필을 주어 큰 정성을 표시했다.

월명은 또 일찍이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서 재를 올렸는데 향가를 지어 제사지냈었다. 이때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더니 지전(紙錢)을 불어서 서쪽으로 날려 없어지게 했다. 향가는 이러하다.

죽고 사는 길이, 여기 있으니 두려워지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하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과 같이,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은 모르는구나.
아, 미타찰(彌타刹)에서 너를 만나볼 나는,
도를 닦아 기다리련다.

월명은 항상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어느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다. 월명사(月明師)도 또한 이 일 때문에 이름을 나타냈다.

월명사는 곧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인데 신라 사람들도 향가를 숭상한 자가 많았으니 이것은 대개 시(詩)ㆍ송(頌) 같은 것이다. 때문에 이따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찬(讚)해 말한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죽은 누이동생의 노자를 삼게 하고,
피리는 밝은 달을 일깨워 항아(姮娥)가 그 자리에 멈추었네.
도솔천(兜率天)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萬德花) 그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선율환생(善律還生)

망덕사(望德寺) 중 선율(善律)은 시주받은 돈으로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이루고자 했다. 공사가 아직 끝나기 전에 갑자기 음부(陰府)의 사자에게 쫓겨서 명부(冥府)에 이르니 명사(冥司)가 물었다. "너는 인간 세계에 있을 때에 무슨 일을 했느냐." 선율이 말한다. "저는 만년에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만들려 하다가 공사를 마치지 못하고 왔습니다." 명사는 "너희 수록(壽록)에 의하면 네 수는 이미 끝났지만 가장 좋은 소원을 마치지 못했다니 다시 인간 세상에 돌아가서 보전(寶典)을 끝내어 이루도록 하라." 하고 놓아 보냈다. 돌아오는 도중에 여자 하나가 울면서 그의 앞에 와 절을 하며 말했다. "나도 역시 남염주(南閻州)의 신라 사람이온데 부모가 금강사(金剛寺)의 논 1무(畝)를 몰래 빼앗은 일에 연루되어 명부(冥府)에 잡혀 와서 오랫동안 몹시 괴로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법사께서 고향으로 돌아가시거든 이 일을 우리 부모에게 알려서 속히 그 논을 돌려 주도록 해 주십시오. 또 제가 세상에 있을 때에 참기름을 상 밑에 묻어 두었고, 곱게 짠 베도 이불 틈에 감추어 둔 것이 있습니다. 법사께서 부디 그 기름을 가져다가 불등(佛燈)에 불을 켜고, 그 베는 팔아 경폭(經幅)으로 써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황천에서도 또한 은혜를 입어 제 고뇌(苦惱)를 벗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율이 말했다. "그대의 집은 어디 있는가." "사량부(沙梁部) 구원사(久遠寺) 서남쪽 마을입니다." 선율이 이 말을 듣고 곧 떠나서 도로 살아났다.

그 때는 선율이 죽은 지 이미 열흘이 되어 남산 동쪽 기슭에 장사 지냈으므로 무덤 속에서 사흘 동안이나 외치니, 지나가던 목동(牧童)이 이 소리를 듣고 절에 가서 알렸다. 절의 중이 와서 무덤을 파고 그를 꺼내니 선율은 그 동안의 일을 자세히 말하고, 또 그 여자의 집을 찾아갔는데 여자는 죽은 지가 15년이나 되었으나 참기름과 베는 완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 선율이 여자가 말한 대로 명복을 빌어 주니 여자의 영혼이 찾아와서 말한다. "법사의 은혜를 입어 저는 이미 고뇌를 벗어났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놀라고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리하여 <반야경(般若經)>을 서로 도와서 완성시켰다. 그 책은 지금 동도(東都) 승사서고(僧史書庫) 안에 있는데 매년 봄과 가을에는 그것을 펴서 전독(轉讀)하여 재앙을 물리쳤다.

찬(讚)해 말한다.

부럽도다. 우리 스님 좋은 인연 따라,
영혼이 돌아와서 옛 고향에서 노니시네.
부모님이 나의 안부(安否) 물으시거든,
나 위해서 빨리 그 논을 돌려 주라 하시오.



김현감호(金現感虎)

신라 풍속에 해마다 2월이 되면 초파일(初八日)에서 15일까지 서울의 남녀가 다투어 흥륜사(興輪寺)의 전탑(殿塔)을 도는 복회(福會)를 행했다.

원성왕(元聖王) 때에 김현(金現)이라는 낭군(郞君)이 있어서 밤이 깊도록 혼자서 탑을 돌기를 쉬지 않았다. 그때 한 처녀가 염불을 하면서 따라 돌다가 서로 마음이 맞아 눈을 주더니 돌기를 마치자 으슥한 곳으로 이끌고 가서 정을 통하였다. 처녀가 돌아가려 하자 김현이 따라가니 처녀는 사양하고 거절했지만 김현은 억지로 따라갔다. 길을 가다가 서산(西山) 기슭에 이르러 한 초가집으로 들어가니 늙은 할머니가 처녀에게 물었다. "함께 온 자는 누구냐." 처녀가 사실대로 말하자 늙은 할머니는 말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이어서 나무랄 수도 없으니 은밀한 곳에 숨겨 두거라. 네 형제들이 나쁜 짓을 할까 두렵다." 하고 김현을 이끌어 구석진 곳에 숨겼다. 조금 뒤에 세 마리 범이 으르렁 거리며 들어와 사람의 말로 말했다. "집에서 비린내가 나니 요깃거리가 어찌 다행하지 않으랴." 늙은 할머니와 처녀가 꾸짖었다.

"너희 코가 잘못이다. 무슨 미친 소리냐." 이때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이 즐겨 생명을 해치는 것이 너무 많으니, 마땅히 한 놈을 죽여 악을 징계하겠노라." 세 짐승은 이 소리를 듣자 모두 근심하는 기색이었다. 처녀가 "세 분 오빠께서 만약 멀리 피해 가서 스스로 징계하신다면 내가 그 벌을 대신 받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모두 기뻐하여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치며 달아나 버렸다. 처녀가 들어와 김현에게 말했다. "처음에 저는 낭군이 우리 집에 오시는 것이 부끄러워 짐짓 사양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숨김없이 감히 진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저와 낭군은 비록 종족은 다르지만 하루저녁의 즐거움을 얻어 중한 부부의 의를 맺었습니다. 세 오빠의 악함은 하늘이 이미 미워하시니 한 집안의 재앙을 제가 당하려 하오나, 보통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어찌 낭군의 칼날에 죽어서 은덕을 갚는 것만 하겠습니까. 제가 내일 시가(市街)에 들어가 몹시 사람들을 해치면 나라 사람들은 저를 어찌 할 수 없어서, 임금께서 반드시 높은 벼슬로써 사람을 모집하여 저를 잡게 할 것입니다. 그 때 낭군은 겁내지 말고 저를 쫓아 성 북 쪽의 숲속까지 오시면 제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현은 말했다. "사람이 사람과 사귐은 인륜의 도리지만 다른 유(類)와 사귐은 대개 떳떳한 일이 아니오. 그러나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진실로 하늘이 준 다행인데 어찌 차마 배필의 죽음을 팔아 한 세상의 벼슬을 바라겠소." 처녀가 말했다. "낭군은 그 같은 말을 하지 마십시오. 이제 제가 일찍 죽는 것은 대개 하늘의 명령이며, 또한 저의 소원이요 낭군의 경사이며, 우리 일족의 복이요 나라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한 번 죽어 다섯 가지 이로움을 얻을 수 있는 터에 어찌 그것을 마다하겠습니까. 다만 저를 위하여 절을 짓고 불경(佛經)을 강론하여 좋은 과보(果報)를 얻는데 도움이 되게 해 주신다면 낭군의 은혜, 이보다 더 큼이 없겠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 울면서 작별했다. 다음날 과연 사나운 범이 성안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몹시 해치니 감히 당해 낼 수 없었다. 원성왕(元聖王)이 듣고 영을 내려, "범을 잡는 사람에게 2급의 벼슬을 주겠다."고 하였다. 김현이 대궐에 나아가 아뢰었다. "소신이 잡겠습니다." 왕은 먼저 벼슬을 주고 격려하였다. 김현이 칼을 쥐고 숲속으로 들어가니 범은 변하여 낭자(娘子)가 되어 반갑게 웃으면서, "어젯밤에 낭군과 마음속 깊이 정을 맺던 일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내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흥륜사의 간장을 바르고 그 절의 나발(螺鉢) 소리를 들으면 나을 것입니다."하고는, 이어 김현이 찬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고꾸라졌다. 김현이 숲속에서 나와서, "범은 쉽게 잡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연유는 숨기고, 다만 범에게 입은 상처를 그 범이 시킨 대로 치료하니 모두 나았다. 지금도 민가에서는 범에게 입은 상처에는 역시 그 방법을 쓴다.

김현은 벼슬에 오르자, 서천(西川) 가에 절을 지어 호원사(虎願寺)라 하고 항상 범망경(梵網經)을 강론하여 범의 저승길을 인도하고 또한 범이 제 몸을 죽여 자기를 성공하게 해 준 은혜에 보답했다. 김현은 죽을 때에 지나간 일의 기이함에 깊이 감동하여 이에 붓으로 적어 전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비로소 듣고 알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름은 논호림(論虎林)이라 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렇게 일컬어 온다.

정원(貞元) 9년에 신도징(申屠澄)이 야인(野人)으로서 한주(漢州) 십방현위(十방縣尉)에 임명되어 진부현(眞符縣)의 동쪽 10리 가량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눈보라와 심한 추위를 만나 말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므로 길 옆의 초가집으로 들어가니 그 안에 불이 피워 있어 매우 따뜻했다. 등불 밑에 나가 보니 늙은 부모와 처녀가 화롯가에 둘러앉았는데, 그 처녀의 나이는 바야흐로 14, 5세쯤 되어 보였다. 비롯 머리는 헝클어지고 때묻은 옷을 입었으나 눈처럼 흰 살결과 꽃같은 얼굴이며 동작이 아름다웠다. 그 부모는 신도징이 온 것을 보고 급히 일어나서 말했다. "손님은 심한 한설(寒雪)을 만났으니 앞으로 오셔서 불을 쬐시오." 신도징이 한참 앉아 있으니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눈보라는 그치지 않았다. 신도징은 "서쪽으로 현(縣)에 가려면 길이 아직 머니 여기서 좀 재워 주십시오" 하고 청했다. 부모는 말했다. "누추한 집안이라도 관계치 않으신다면 감히 명을 받겠습니다." 신도징이 마침내 말안장을 풀고 침구를 폈다. 그 처녀는 손님이 묵는 것을 보자 얼굴을 닦고 곱게 단장을 하고는 장막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한아(閑雅)한 태도는 처음 볼 때보다 훨씬 나았다. 신도징이 말했다. "소낭자(小娘子)는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아직 미혼이면 감히 혼인하기를 청하니 어떠하오." 그 아버지는 말했다. "기약치 않는 귀한 손님께서 거두어 주신다면 어찌 연분이 아니겠습니까." 신도징은 마침내 사위의 예를 행하고 타고 온 말에 여자를 태워 가지고 길을 나섰다. 임지(任地)에 이르러 보니 봉록(俸祿)이 매우 적었으나 아내는 힘써 집안 살림을 돌보았으므로 모두 마음에 즐거운 일 뿐이었다. 그 후 임기가 끝나 돌아가려 할 때는 이미 1남1녀를 두었는데 또한 총명하고 슬기로워 그는 아내를 더욱 공경하고 사랑했다.

일찍이 아내에게 주는 시를 지었는데 이러했다.

한 번 벼슬하니 매복(梅福)이 부끄럽고,
3년이 지나니 맹광(孟光)이 부끄럽구나.
이 정을 어디다 비길까,
냇물 위에 원앙새 떠 있구나.

그의 아내는 종일 이 시를 읊어 속으로 화답하는 것 같았으나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신도징이 벼슬을 그만두고 가족을 데리고 본가로 돌아가려 하자, 아내는 문득 슬퍼하면서 말했다. "요전에 주신 시 한 편에 화답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읊었다.


금슬(琴瑟)의 정이 비록 중하나,
산림(山林)에 뜻이 스스로 깊도다.
시절이 변할까 항상 걱정하며,
백년해로 저버릴까 허물하도다.

드디어 함께 그 여자의 집에 갔더니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아내는 사모하는 마음이 지나쳐 종일토록 울었다. 문득 벽 모퉁이에 한 장의 호피(虎皮)가 있는 것을 보고 아내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물건이 아직도 여기에 있는 것을 몰랐구나." 마침내 그것을 뒤집어쓰니 곧 변하여 범이 되었는데, 어흥거리며 할퀴다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신도징이 놀라서 피했다가 두 아이를 데리고 간 길을 찾아 산림을 바라보며 며칠을 크게 울었으나 끝내 간 곳을 알지 못했다.

아! 신도징(申屠澄)과 김현(金現) 두 사람이 짐승과 접했을 때 그것이 변하여 사람의 아내가 된 것은 똑같다. 그러나 신도징의 범은 사람을 배반하는 시를 주고 으르렁거리고 할퀴면서 달아난 것이 김현의 범과 다르다. 김현의 범은 부득이 사람을 상하게 했지만 좋은 약방문을 가르쳐 줌으로써 사람들을 구했다. 짐승도 어질기가 그와 같은데, 지금 사람으로서도 짐승만 못한 자가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이 사적의 처음과 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절을 돌 때 사람을 감동시켰고, 하늘에서 외쳐 악을 징계하려 하자 스스로 이를 대신했으며, 신효한 약방문을 전함으로써 사람을 구하고 절을 지어 불계(佛戒)를 강론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다만 짐승의 본성이 어질기 때문만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대개 부처가 사물에 감응함이 여러 방면이었던 까닭에 김현공(金現公)이 능히 탑을 돌기에 정성을 다한 것에 감응하여 명익(冥益)을 갚고자 했을 뿐이다. 그 때에 복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찬(讚)해 말한다.

산가(山家)의 세 오라비 죄악이 많아,
고운 입에 한 번 승낙 어떻게 할까.
의리의 중함 몇 가지니 죽음은 가벼운데,
숲속에서 맡긴 몸 낙화(落花)처럼 져 갔도다.


융천사(融天寺) 혜성가(慧星歌) 진평왕대(眞平王代)

제5 거열랑(居烈郞), 제6 설처랑(實處郞; 혹은 돌처랑突處郞이라고도 씀), 제7 보동랑(寶同郞) 등 세 화랑의 무리가 풍악(風岳)에 놀러 가려고 하는데 혜성(慧星)이 심대성(心大星)을 범하였다. 낭도(郎徒)들은 이를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그 여행을 중지하려고 했다. 이때에 융천사(融天寺)가 노래를 지어 부르자 별의 괴변은 즉시 사라지고 일본(日本) 군사가 제 나라로 돌아가니 도리어 경사가 되었다. 임금이 기뻐하여 낭도(郎徒)들을 보내어 풍악에서 놀게 했으니, 노래는 이렇다.

옛날 동해(東海)가에 건달파(乾達婆)가 놀던 성을 버리고,
'왜군(倭軍)이 왔다'고 봉화를 든 변방이 있어라.
세 화랑은 산 구경 오심을 듣고 달도 부지런히 등불을 켜는데,
길 쓰는 별을 바라보고 '혜성(慧星)이여' 하고 말한 사람 있구나.
아아, 달은 저 아래로 떠갔거니, 보아라, 무슨 혜성(慧星)이 있으랴.



정수사(正秀師) 구빙녀(九氷女)

제 40대 애장왕(哀莊王) 때, 중 정수(正秀)는 황룡사(皇龍寺)에 머물러 있었다. 겨울날 눈은 많이 쌓이고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삼랑사(三郞寺)에서 돌아오다가 천엄사(天嚴寺) 문밖을 지나게 되었다. 그 때 한 여자 거지가 아이를 낳고 누워서 얼어 죽게 되었는데, 스님이 보고 불쌍히 여겨 그를 안아 주었더니 한참 후에 깨어났다. 이에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벌거벗은 채 본사(本寺)에 달려와서 거적 풀로 몸을 덮고 밤을 세웠다. 한밤중에 하늘에서 궁정 뜰로 외치는 소리가 났다. "황룡사(皇龍寺)의 중 정수(正秀)를 마땅히 임금의 스승에 봉할지니라." 급히 사람을 시켜 조사하게 하니, 그 사실이 모두 왕에게 알려졌다. 왕은 위의를 갖추고 그를 대궐 안으로 맞아들여 국사(國師)를 삼았다.

                                                                 ***

                                                          삼국유사 제 5권



피은 제 8
피은(避隱) 제 8


낭지승운(朗智乘雲), 보현수(普賢樹)

삽량주(삽良州) 아곡현(阿曲縣)의 영취산(靈鷲山; 삽량삽良은 지금의 양주梁州. 아곡阿曲의 곡曲은 서西로도 쓰며 혹은 구불球佛 또는 굴불屈佛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울주蔚州에 굴불역屈佛驛을 두었으나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있다)에 이상한 중이 있었다. 암자에 살기 수십 년이 되었어도 고을에서 모두 그를 알지 못하였고, 스님도 또한 성명을 말하지 않았다. 항상 <법화경(法華經)>을 강론하여 신통력이 있었다.

용삭(龍朔) 초년에 지통(智通)이란 중이 있었는데, 그는 본래 이량공(伊亮公)의 집 종이었다. 일곱 살에 출가했는데, 그 때 까마귀가 와서 울면서 말했다. "영취산(靈鷲山)에 가서 낭지(朗智)의 제자가 되어라." 지통이 그 말을 듣고 이 산을 찾아가서 골짜기 안 나무 밑에서 쉬는데 문득 이상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인데 너에게 계품(戒品)을 주려고 왔다."하고는 계를 베풀고 사라졌다. 이때 지통은 정신이 활달해지고 지증(智證)이 문득 두루 통해졌다. 그는 다시 길을 가다가 한 중을 만났다. 그가 낭지 스님은 어디 계시냐고 물으니 중이 말했다. "어째서 낭지(郎智)를 묻느냐." 지통이 신기한 까마귀의 일을 자세히 말하자 중은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바로 낭지다. 지금 집 앞에 또한 까마귀가 와서 알리기를, 거룩한 아이가 장차 스님에게로 올 것이니 마땅히 나가서 영접하라 하므로 와서 맞이하는 것이다."하고 손을 잡고 감탄하여 말했다. "신령스런 까마귀가 너를 깨우쳐 내게 오게 하고, 내게 알려서 너를 맞게 하니 이 무슨 상서로운 일인가. 아마 산신령의 은밀한 도움인 듯하다. 전하는 말에, 산의 주인인 변제천녀(辯才天女)라고 한다." 지통이 이 말을 듣고 울면서 감사하고 스님에게 귀의했다. 이윽고 계를 주려 하니 지통이 말했다. "저는 동구 나무 밑에서 이미 보현보살에게 정계(正戒)를 받았습니다." 낭지는 감탄해서 말했다. "잘했구나. 네가 이미 친히 보살의 만분지계(滿分之戒)를 받았으니 내 너에게 아득히 미치지 못하는구나." 말을 마치고 도리어 지통에게 예했다. 이로 인해서 그 나무를 이름하여 보현수(普賢樹)라 했다. 지통이 "법사께서 여기에 거주하신 지가 오래된 듯합니다."하고 말하자 낭지는, "법흥왕(法興王) 정미년(丁未年; 572)에 처음으로 여기에 와서 살았는데 지금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지통이 이 산에 온 것이 문무왕(文武王) 즉위 원년(661)이니, 계산해 보면 135년이 된다.

지통은 후에 의상(義湘)의 처소에 가서 고명하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 불교의 교화에 이바지하였다. 이가 곧 <추동기(錐洞記)>의 작자(作者)이다.

원효(元曉)가 반고사(磻高寺)에 있을 때에는 항상 낭지(郎智)에게 가서 뵈니 그는 원효에게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하게 했다. 원효가 짓기를 마친 후에 은사(隱士) 문선(文善)을 시켜 책을 받들어 보내면서 그 편미(篇尾)에 게구(偈句)를 적었으니, 이러하다.

서쪽 골에 중의 머리 조아려, 동쪽 봉우리 상덕(上德) 고암(高巖) 앞에 예하노라(반고사磻高寺는 영취산靈鷲山의 서북西北쪽에 있으므로 서쪽 골짜기의 중은 바로 자신을 일컫는 것이다).

가는 티끌 불어 보내 영취산(靈鷲山)에 보태고, 잔 물방울 날려 용연(龍淵)에 던지도다.
산 동쪽에 대화강(大和江)이 있는데 이는 곧 중국 대화지(大和池)의 용의 복을 빌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용연(龍淵)이라 한 것이다. 지통과 원효는 모두 큰 성인(聖人) 이었다. 두 성인이 스승으로 섬겼으니 낭지 스님의 도(道)가 고매함을 알 수 있다.
스님은 일찍이 구름을 타고 중국 청량산(淸凉山)으로 가서 신도들과 함께 강의를 듣고 조금 후에 돌아오곤 했다. 그곳 중들은 그를 이웃에 사는 사람이라고 여겼으나 사는 곳을 알지 못했다.

어느날 여러 중들에게 명령했다. "항상 이 절에 사는 자를 제외하고 다른 절에서 온 중은 각기 사는 곳의 이름난 꽃과 기이한 식물을 가져다가 도량(道場)에 바쳐라." 낭지는 그 이튿날 산중의 기이한 나무 한 가지를 꺽어 가지고 돌아와 바쳤다. 그 곳의 중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이 나무는 범명(梵名)으로 달리가라 하고 여기서는 혁(赫)이라 한다. 오직 서천축(西天竺)과 해동(海東)의 두 영취산(靈鷲山)에만 있는데 이 두 산은 모두 제 10 법운지(法雲地)로서 보살(菩薩)이 사는 곳이니, 이 사람은 반드시 성자(聖者)일 것이다." 마침내 행색을 살펴 그제야 해동 영취산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스님을 다시 보게 되었고 이름이 안팎에 드러났다. 나라 사람들이 그 암자를 혁목암(赫木庵)이라 불렀는데 지금 혁목사(赫木寺)의 북쭉 산등성이에 옛 절터가 있으니 그 절이 있던 자리이다.
<영취사기(靈鷲寺記)>에 "낭지가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암자자리는 가섭불(迦葉佛) 때의 절터로서 땅을 파서 등항(燈缸) 두 개를 얻었다'고 하였다. 원성왕(元聖王) 때에는 고승(高僧) 연회(緣會)가 이 산속에 와서 살면서 낭지 스님의 전기(傳記)를 지었다. 이것이 세상에 유행했다."고 기록 되어 있다.
<화엄경(華嚴經)>을 살펴보면 제10 법운지(法雲池)라 했다. 지금 스님이 구름을 탄 것은 대개 부처가 삼지(三指)로 꼽고, 원효가 100몸으로 분신되는 따위인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생각하니 산속에서 수도(修道)한지 100년 동안에,
고매한 이름 일찍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산새의 한가로운 지저귐 막을 길 없어,
구름 타고 오가는 것 속절없이 누설되었네.


연회도명(緣會逃名), 문수점(文殊岾)

고승(高僧) 연회(緣會)는 일찍이 영취산(靈鷲山)에 숨어 살면서 언제나 <연경(蓮經)>을 읽어 보현보살(普賢菩薩)의 관행법(觀行法)을 닦았다. 정원의 연못에는 언제나 연꽃 두 세 떨기가 있어 사시에 시들지 않았다(지금의 영취사靈鷲寺 용장전龍藏殿이 바로 연회緣會의 옛 거처임).

국왕 원성왕(元聖王)이 그 상서롭고 기이함을 듣고 그를 불러 국사(國師)를 삼으려 하니 스님이 그 소식을 듣자 암자를 버리고 도망했다. 서쪽 고개 바위 사이를 넘는데 한 노인이 밭을 갈고 있다가 스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므로 스님이 말했다. "내 들으니 나라에서 잘못 듣고 나를 벼슬로써 얽매려 하므로 피해 가는 것입니다." 노인은 듣고 말했다. "여기에서도 가히 팔 수가 있을 텐데 어째서 수고로이 멀리 팔려고 하십니까. 스님이야말로 이름 팔기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연회(緣會)는 그가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이라 생각하고, 듣지 않고 마침내 몇 리쯤을 더 갔다. 시냇가에서 한 노파를 만났는데, 스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므로 연회는 먼저처럼 대답하니, 노파가 말했다. "앞에서 사람을 만났습니까." 연회가 말했다. "한 노인이 있는데 나를 업신여김이 심하기에 불쾌해서 또 오는 것입니다." 노파는 말했다.

"그분이 문수보살이신데, 그분 말을 듣지 않았으니 어찌 하겠습니까." 연회(緣會)는 이 말을 듣자 곧 놀라고 송구스러워 급히 노인에게 되돌아가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성인의 말씀을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이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하온데 그 시냇가의 노파는 어떤 사람입니까." 노인이 말했다. "그는 변재천녀(辯才天女)이니라." 말을 마치자 마침내 사라져 버렸다. 연회(緣會)가 이에 암자로 돌아오자, 조금 후에 왕의 사자가 명을 받들고 와서 부르니 연회는 진작 받아야 될 것임을 알고 임금의 명을 받아 대궐로 가니 왕은 그를 국사(國師)로 봉했다.(<승전(僧傳)>에는 헌안왕(憲安王)이 이조왕사(二朝王師)로 삼아 희(熙)라 호(號)하고 감통(感通) 4년에 죽었다고 했으니 원성왕(元聖王)의 연대(年代)와 서로 다르다.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스님이 노인에게 감명받은 곳을 이름하여 문수점(文殊岾)이라 하고, 여인을 만나본 곳을 아니점(阿尼岾)이라 했다.

찬(讚)해 말한다.

도시에선 어진 이가 오래 숨지 못하는 것,
주머니 속 송곳 끝을 감추기가 어렵네.
뜰 아래 연꽃으로 세상에 나갔지,
운산(雲山)이 깊지 않은 탓은 아닐세.



혜현구정(惠現求靜)

중 혜현(惠現)은 백제 사람이다. 어려서 중이 되어 애써 '뚯을 모아 <법화경(法華經)>을 외는 것으로 업을 삼았으며 부처께 기도하여 복을 청해서 영험한 감응이 실로 많았다. 삼론(三論)을 배우고 도를 닦아서 신명(神明)에 통하였다.

처음에 북부 수덕사(修德寺)에 살았는데 신도가 있으면 불경을 강론하고 없으면 불경을 외었으므로 사방의 먼 곳에서도 그 풍격을 흠모하여 문밖에 신이 가득했다. 차츰 번거로운 것이 싫어서 마침내 강남(江南) 달라산(達拏山)에 가서 살았는데 산이 매우 험준해서 내왕이 힘들고 드물었다.

혜현(惠現)은 고요히 앉아 생각을 잊고 산속에서 인생을 마치니 동학(同學)들이 그 시체를 운반하여 석실(石室) 속에 모셔 두었더니 범이 그 유해를 다 먹어 버리고 다만 해골과 혀만 남겨 두었다. 추위와 더위가 세 번 돌아와도 혀는 오히려 붉고 연하였다. 그 후 변해서 자줏빛이 나고 단단하기가 돌과 같았다. 중이나 속인들이 공경하여 이를 석탑(石塔)에 간직했다. 이때 나이 58세였으니 즉 정관(貞觀) 초년이었다. 혜현(惠現)은 중국으로 가서 배운 일이 없고 고요히 물러나 일생을 마쳤으나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지고 전기(傳記)가 씌어져 당나라에서도 그 명성이 높았다.
또 고구려의 중 파약(波若)은 중국 천태산(天太山)에 들어가 지자(智者)의 교관(敎觀)을 받았는데 신이(神異)한 사람으로 산중에 알려졌다가 죽었다. <당승전(唐僧傳)>에도 또한 실려 있는데 자못 영험한 가르침이 많다.

찬(讚)해 말한다.

주미(주尾)로 설법(說法)함도 한바탕 수고를 느껴,
지난날 불경 외던 소리 구름 속에 숨었어라.
세간(世間)의 청사(靑史)에 길이 이름을 남겨,
사후(死後)엔 연꽃처럼 혀가 꽃다웠네.


신충괘관(信忠掛冠)

효성왕(曉成王)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더불어 궁정(宮庭)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면서 일찍이 말하기를 "훗날 만약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라고 하니 신충이 일어나서 절했다. 몇 달 뒤에 효성왕이 왕위에 올라 공신(功臣)들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을 잊고 차례에 넣지 않았다. 신충이 원망하여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더니 나무가 갑자기 말라 버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했더니 노래를 얻어다 바쳤다. 왕은 크게 놀라서 말했다. "정무(政務)가 복잡하고 바빠 각궁(角弓)을 거의 잊을 뻔했구나." 이에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니 잣나무가 그제야 다시 살아났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뜰의 잣나무가 가을에 시들지 않았는데 너를 어찌 잊으랴' 하시던 우러러 뵙던 얼굴 계시온데,
달 그림자가 옛 못의 가는 물결 원망하듯이,
얼굴사 바라보니, 누리도 싫은지고.

후구(後句)는 없어졌다. 이로써 신충에 대한 총애는 양조(兩朝)에 두터웠었다.
경덕왕(景德王; 왕은 곧 효성왕曉成王의 아우임) 22년 계묘(癸卯)에 신충은 두 친구와 서로 약속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악(南岳)에 들어갔다. 두 번을 불렀으나 나오지 아니하고 머리 깍고 중이 되었다. 그는 왕을 위하여 단속사(斷俗寺)를 세우고 거기에 살았는데, 평생을 구학(丘壑)에서 마치면서 대왕의 복을 빌기를 원했으므로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임금의 진영(眞影)을 모셔두었는데 금당 뒷벽에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남쪽에 속휴(俗休)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와전되어 소화리(小花里)라고 한다(<삼화상전三和尙傳>을 살펴보면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가 있는데 이것과 서로 혼동된다. 따져보면 신문왕神文王 때는 경덕왕景德王과 100여 년이나 되는데, 하물며 신문왕神文王과 신충信忠이 숙세宿世의 인연이 있다는 사실은 이 신충信忠이 아님이 분명하다. 자세히 살펴야 할 일이다).

또 별기(別記)에는 이러하다. 경덕왕 때에 직장(直長) 이준(李俊; <고승전高僧傳>에는 이순李純이라고 하였다)이 일찍이 소원을 빌었더니 나이 50이 되면 중이 되어 절을 세우게 되리라 했다. 천보(天寶) 7년 무자(戊子)에 50세가 되자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고쳐지어 큰 절을 만들고 단속사(斷俗寺)라 하고, 자신도 삭발하고 법명(法名)을 공굉장로(孔宏長老)라 했다. 이준은 절에 거주한 지 20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는 앞의 <삼국사(三國史)>에 실린 것과 같지 않으나 두 가지 설(說)을 다 실어 의심나는 점을 덜고자 한다.

찬(讚)해 말한다.

공명(功名)은 다하지 못했는데 귀밑 털이 먼저 세고,
임금의 총애 비록 많으나 한평생이 바쁘도다.
언덕 저 편 산이 자주 꿈 속에 드니,
가서 향화(香火)를 피워 왕의 복을 비오리.


포산이성(包山二聖)

신라 때에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성사(聖師)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함께 포산(包山; 나라 사람들이 소슬산所瑟山이라 함은 범음梵音이니 이는 포包를 이름이다)에 숨어 살았는데,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지었고, 도성은 북쪽 굴에 살았다. 서로 10여 리쯤 떨어졌으나,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항상 서로 왕래했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자 하면 산 속의 수목이 모두 남쪽을 향해서 굽혀 서로 영접하는 것 같으므로 관기는 이것을 보고 도성(道成)에게로 갔다. 또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고자 하면 역시 이와 반대로 나무가 모두 북쪽으로 구부러지므로 도성도 관기에게로 가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해를 지났다. 도성은 그가 살고 있는 뒷산 높은 바위 위에 늘 좌선(坐禪)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바위 사이로 몸을 빼쳐 나와서는 온몸을 허공에 날리면서 떠나갔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혹 수창군(壽昌郡; 지금의 수성군壽城郡)에 가서 죽었다는 말도 있다. 관기도 또한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지금 두 성사(聖師)의 이름으로써 그 터를 명명(命名)했는데 모두 유지(遺址)가 있다. 도성암(道成암)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후인들이 그 굴 아래에 절을 지었다.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 임오(壬午)에 중 성범이 처음으로 이 절에 와서 살았다. 만일미타도랑(萬日彌陀道場)을 열어 50여 년을 부지런히 힘썼는데 여러 번 특이한 상서(祥瑞)가 있었다. 이때 현풍(玄風)의 신도 20여 명이 해마다 결사(結社)하여 향나무를 주워 절에 바쳤는데, 언제나 산에 들어가 향나무를 채취해서 쪼개어 씻어서 발[箔] 위에 펼쳐 두면 그 향나무가 밤에 촛불처럼 빛을 발하였다. 이로부터 고을 사람이 그 향나무에게 보시(布施)하고 빛을 얻은 해라 하여 하례하였다. 이는 두 성사의 영감(靈感)이요 혹은 산신(山神)의 도움이었다. 산신의 이름은 정성천왕(靜聖天王)으로 일찍이 가섭불(迦葉佛) 때에 부처님의 부탁을 받았으니 그 본서(本誓)에 말하기를, 산중에서 1,000명의 출세(出世)를 기다려 남은 과보(果報)를 받겠다고 했다.

지금 산중에 9성(聖)의 유사(遺事)를 기록한 것이 있는데 자세하지는 않으나 9성(聖)은 관기(觀機)ㆍ도성(道成)ㆍ반사(반師)ㆍ첩사(첩師)ㆍ도의(道義; 백암사栢岩寺 터가 있음)ㆍ자양(子陽)ㆍ성범(成梵)ㆍ금물녀(今勿女)ㆍ백우사(白牛師) 들이다.

찬(讚)해 말한다.

서로 지나가다 달빛을 밟고 운천(雲泉)을 희롱하던,
두 노인의 풍류(風流) 몇 백 년이 지났는고.
연하(烟霞) 가득한 구령엔 고목(古木)만이 남았는데,
어긋버긋 찬 그림자 서로 맞는 모양일레.

반(반)은 음이 반(般)인데 우리말로는 피나무라 하고, 첩(첩)은 음이 첩(牒)인데 우리말로는 갈나무(떡갈나무)라 한다.이 두 성사(聖師)는 오랫동안 산골에 숨어 지내면서 인간 세상과 사귀지 않고 모두 나뭇잎을 엮어 옷으로 입고 추위와 더위를 겪었으며 습기를 막고 하체를 가릴 뿐이었다. 그래서 반사(반師)ㆍ첩사(첩師)로 호를 삼았던 것인데, 일찍이 들으니 풍악(風岳)에도 이런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옛 은자(隱者)들의 운치가 이와 같은 것이 많았음을 알겠으나 다만 답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일찍이 포산(包山)에 살 때에 두 스님이 남긴 미덕(美德)을 쓴 것이 있기에 이제 여기 아울러 기록한다.

자모(紫茅)와 황정(黃精)으로 배를 채웠고, 입은 옷은 나뭇잎,

누에 치고 베짠 것 아닐세.
찬바람 쏴 쏴 불고 돌은 험한데, 해 저문 숲속으로 나무 해 돌아오네.
밤 깊고 달 밝은데 그 아래 앉았으면, 반신(半身)은 시원히 바람따라 나는 듯.
떨어진 포단(蒲團)에 가로 누워 잠이 들면 꿈 속에도 속세에는 가지 않노라.
운유(雲遊)는 가 버리고 두 암자만 묵었는데, 산사슴만 뛰놀뿐 인적은 드물도다.

 

출처 ; http://www.sunslife.com


 


'고 서적 , 역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비교   (0) 2008.01.13
삼국유사 - 15   (0) 2008.01.13
삼국유사 - 13   (0) 2008.01.13
삼국유사 - 12   (0) 2008.01.13
삼국유사 - 11   (0) 2008.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