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삼국유사 - 13

영지니 2008. 1. 13. 20:07

심지계조(心地繼祖)

중 심지(心地)는 진한(辰韓) 제41대 헌덕대왕(憲德大王) 김씨(金氏)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깊고 천성이 맑고 지혜가 있었다.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서 불도(佛道)에 부지런했다. 중악(中岳; 지금의 공산公山)에 가서 살고 있는데 마침 속리산(俗離山)의 심공(深公)이 진표율사(眞表律師)의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해 받아서 과정법회(果訂法會)를 연다는 말을 듣고, 뜻을 결정하여 찾아갔으나 이미 날짜가 지났기 때문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에 땅에 앉아서 마당을 치면서 신도(信徒)들을 따라 예배하고 참회했다. 7일이 지나자 큰 눈이 내렸으나 심지(心地)가 서 있는 사방 10척 가량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그 신기하고 이상함을 보고 당(堂)에 들어오기를 허락했으나 심지는 사양하여 거짓 병을 칭탁하고 방 안에 물러앉아 당을 향해 조용히 예배했다. 그의 팔꿈치와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려 마치 진표공(眞表公)이 선계산(仙溪山)에서 피를 흘리던 일과 같았는데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매일 와서 위문했다. 법회가 끝나고 산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옷깃 사이에 간자(簡子) 두 개가 끼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가지고 돌아가서 심공(深公)에게 아뢰니 영심(永深)이 말하기를, "간자는 함 속에 들어 있는데 그럴 리가 있는가."하고 조사해 보니 함은 봉해 둔 대로 있는데 열고 보니 간자는 없었다. 심공이 매우 이상히 여겨 다시 간자를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다. 심지가 또 길을 가는데 간자가 먼저와 같았다. 다시 돌아와서 아뢰니 심공이 말하기를, "부처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받들어 행하도록 하라"하고 간자를 그에게 주었다. 심지가 머리에 이고 중악으로 돌아오니 중악의 신이 선자(仙子) 둘을 데리고 산꼭대기에서 심지를 맞아 그를 인도하여 바위 위에 앉히고는 바위 밑으로 돌아가 엎드려서 공손히 정계(正戒)를 받았다. 이때 심지가 말했다. "이제 땅을 가려서 부처님과 간자를 모시려 하는데, 이것은 우리들만이 정할 일이 못되니 그대들 셋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서 간지를 던져 자리를 점치도록 하자." 이에 신들과 함께 산마루로 올라가서 서쪽을 향하여 간자를 던지니, 간자는 바람에 날아간다. 이때 신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막혔던 바위 멀리 물러가니 숫돌처럼 평평하고,
낙엽이 날아 흩어지니 앞길이 훤해지네.
불골(佛骨) 간자(簡子)를 찾아 얻어서,
깨끗한 곳 찾아 정성드리려네.

노래를 마치자 간자를 숲속 샘에서 찾아 곧 그 자리에 당(堂)을 짓고 간자를 모셨으니, 지금 동화사(桐華寺) 첨당(籤堂)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이것이다.
본조(本朝) 예종(睿宗)이 일찍이 부처의 간자를 맞아 대궐 안에서 예배했는데, 갑자기 아홉 번째 간자 하나를 잃어 아간(牙簡)으로 대신하여 본사(本寺)에 돌려보냈더니, 지금은 이것이 점점 변해서 같은 빛이 되어 새것과 옛것을 분별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바탕은 상아도 옥도 아니다.

<점찰경(占察經)> 상권(上卷)을 상고해 보면 189개 간자(簡子)의 이름이 있는데 이러하다. 1은 상승(上乘)을 구해서 불퇴위(不退位)를 얻은 것이요, 2는 구하는 과(果)가 마땅한 증(證)을 나타내는 것이요, 제3과 제4는 중승(中乘)과 하승(下乘)을 구해서 불퇴위(不退位)를 얻은 것이요, 5는 신통력(神通力)을 구해서 성취함이요, 6은 사범(四梵)을 구해서 성취함이요, 7은 세선(世禪)을 닦아 성취함이요, 8은 받고 싶은 묘계(妙戒)를 얻음이요, 9는 일찍이 받은 구계(具戒)를 얻음이요(이 글을 가지고 고정考訂한다면, 미륵보살彌勒菩薩이 말한, '새로 얻은 계戒'는 금세今世에 처음 얻는 계戒를 말하는 것이요, '옛날 얻은 계戒'는 과거세過去世에 일찍이 받았다가 금세今世에 또 더 받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생본유修生本有의 신구新舊를 말한 것이 아님을 알겠다), 10은 하승(下乘)을 구하며 아직 신심(信心)에 살지 않는 것이요, 다음은 중승(中乘)을 구하여 아직 신심에 살지 않음이다. 이와 같이 해서 제172까지는 모두 과거세(過去世)나 현세(現世) 사이에 혹 착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고, 혹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 일들이다. 제173은 몸을 버려 이미 지옥에 들어감이요(이상은 모두 미래未來에의 과果이다), 제174는 죽은 후에 축생(畜生)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귀(餓鬼)·수라(修羅)·인(人)·인왕(人王)·천(天)·천왕(天王)에까지 미치고, 불법(佛法)을 들음, 출가(出家), 성승(聖僧)을 만남,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남, 정토(淨土)에 태어남, 부처를 찾아뵘, 하승(下乘)에 머무름, 중승에 머무름, 상승에 머무름, 해탈(解脫)을 얻음의 제189 등이 이것이다(위에서는 하승下乘에 머무름에서부터 상승上乘에서 불퇴전不退轉함을 얻음까지 말했고, 이제 상승上乘에서 해탈解脫을 얻음 등을 말함은 이것으로 분별된다). 이들은 모두 삼세(三世)의 선악과보(善惡果報)의 차별의 모습이다.

이것으로 점을 쳐 보면, 마음이 행하려고 한 일과 간자가 서로 맞으면 감응(感應)하고 그렇지 못하면 지극한 마음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이것을 허류(虛謬)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8과 9의 두 간자는 오직 189개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송전(宋傳)>에서는 다만 108 첨자(籤子)라고만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필경 저 백팔번뇌(百八煩惱)의 명칭으로 알고 말한 것 같다. 그리고 또 경문(經文)을 상고해 보지도 않은 것 같다.
또 상고해 보면, 본조(本朝)의 문사(文士)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 2권에 신라 말년의 고승(高僧) 석충(釋沖)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진표율사(眞表律師)의 가사 한 벌과 계간자(戒簡子) 189개를 바쳤다고 써 있다. 이것이 지금 동화사(桐華寺)에 전해 오는 간자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알 수 없다.

찬(讚)해 말한다.

금규(金閨) 속에서 자랐건만 일찍 속박을 벗어났고,
부지런함과 총명함 하늘이 주었네.
뜰에 가득 쌓인 눈 속에서 간자를 뽑아,
동화산(桐華山) 높은 봉우리에 갖다 놓았네.



현유가(賢瑜가), 해화엄(海華嚴)

유가종(瑜伽宗)의 조사(祖師) 고승(高僧) 대현(大賢)은 남산(南山) 용장사(茸長寺)에 살았다. 그 절에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의 돌로 만든 장육상(丈六像)이 있었다. 대현이 항상 이 장육상을 돌면 장육상도 역시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 대현은 슬기롭고 분명하고 정밀하고 민첩해서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이 명백했다. 대개 법상종(法相宗)의 전량(銓量)은 그 뜻과 이치가 그윽하고 깊어서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다. 때문에 중국의 명사 백거이(白居易)도 일찍이 이것을 연구하다가 다 알지 못하고 말했다. "유식(唯識)은 뜻이 그윽하여 알기 어렵고, 인명(因明)은 분석해도 열리지 않는다." 그러니 학자들이 배우기 어려운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대현은 홀로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잠시 동안에 그윽하고 깊은 뜻을 터득하여 회회유인(恢恢游刃)하였다. 이리하여 동국(東國)의 후진(後進)들은 모두 그 가르침에 따랐고, 중국의 학사(學士)들도 간혹 이것을 얻어 안목(眼目)으로 삼았다.

경덕왕(景德王) 천보(天寶) 12년 계사(癸巳; 753) 여름에 가뭄이 심하니 대현을 대궐로 불러들여 <금광경(金光經)>을 강(講)하여 단비를 빌게 했다. 어느날 재를 올리는데 바라를 열어 놓고 한참 있었으나 공양하는 자가 정수(淨水)를 늦게 올리므로 감리(監吏)가 꾸짖었다. 이에 공양하는 자가 말했다. "대궐 안 우물이 말랐기 때문에 먼 곳에서 떠오느라고 늦었습니다." 대현은 그 말을 듣고 말했다. "왜 진작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낮에 강론할 때 대현은 향로를 받들고 잠자코 있으니 잠깐 사이에 우물물이 솟아나와서 그 높이가 일곱 길이나 되어 찰당(刹幢)의 높이와 가지런하게 되니, 궁중(宮中)이 모두 놀라서 그 우물을 금광정(金光井)이라 했다. 대현은 일찍이 스스로 청구사문(靑丘沙門)이라 일컬었다.

찬(讚)해 말한다.

남산(南山)의 불상(佛像)을 도니 불상도 따라 얼굴 돌려,
청구(靑丘)의 불교가 다시 중천(中天)에 떠올랐네.
궁중 우물을 솟구치게 한 것이,
향로 한 줄기 연기에서 시작될 줄 누가 알리.

그 이듬해 갑오(甲午; 754)년 여름에 왕은 또 고승 법해(法海)를 황룡사(黃龍寺)로 청해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게 하고, 친히 가서 향을 피우고 조용히 말했다. "지난해 여름에 대현법사(大賢法師)는 <금광경(金光經)>을 강론하여 우물물을 일곱 길이나 솟아나오게 했소. 그대의 법도(法道)는 어떠하오." 법해가 말한다. "그것은 특히 조그만 일이어서 족히 칭찬할 것이 못됩니다. 이제 창해(滄海)를 기울여서 동악(東岳)을 잠기게 하고, 서울을 물에 떠내려가게 하는 것도 또한 어렵지 않습니다." 왕은 믿지 않고 농담으로만 여겼다. 오시(午時)에 강론하는데 향로를 안고 고요히 있노라니 잠깐 사이에 궁중에서 갑자기 우는 소리가 나고, 궁리(宮吏)가 달려와서 보고한다. "동쪽 연못이 이미 넘쳐서 내전(內殿) 50여 칸이 떠내려갔습니다." 왕이 멍하니 어쩔 줄을 몰라하니 법해가 웃으면서 말한다. "동해가 기울고자 수맥(水脈)을 먼저 불린 것뿐입니다." 왕은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절을 했다. 이튿날 감은사(感恩寺)에서 아뢰었다. "어제 오시(午時)에 바닷물이 넘쳐흘러서 불전(佛殿)의 뜰 앞까지 밀려 왔다가 저녁때에 물러갔습니다." 이 일로 해서 왕은 더욱 법해를 믿고 공경했다.

찬(讚)해 말한다.

법해(法海)의 물결 움직임을 보니 법계(法界)는 넓기도 해라,
사해(四海)를 늘이고 줄이는 것도 어려울 것 없네.
높은 수미(須彌)를 크다고만 말하지 말라,
모두 우리 스님의 한 손가락 끝에 있느니.(이것은 석해石海가 말한 것이다)


                                                                 ***

                                                               제 5 권

국존 조계종 가지산하 인각사 주지 원경충조대선사 일연찬

國尊 曹溪宗 迦智山下 麟角寺 住持 圓鏡沖照大禪師 一然撰
삼국유사 제 5권
신주 제 6
신주(神呪) 제 6

밀본최사(密本최邪)

선덕왕(善德王) 덕만(德慢)이 병이 들어 오랫동안 낫지 않자, 흥륜사(興輪寺)의 승려 법척(法척)이 임금의 부름을 받아 병을 치료했으나 오래 되어도 효력이 없었다. 이때 밀본법사(密本法師)의 덕행(德行)이 나라 안에 소문이 퍼져서 좌우 신하들이 바꾸기를 청했다. 왕은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이니 밀본은 신장(宸仗) 밖에서 약사경(藥師經)을 읽었다. 경을 다 읽고 나자 가졌던 육환장(六環杖)이 침실 안으로 날아 들어가더니 늙은 여우 한 마리와 중 법척(法척)을 찔러서 뜰 아래에 거꾸로 내던지니 왕의 병은 이내 나았다. 이때 밀본의 이마 위에 오색의 신비스러운 빛이 비쳐 보는 사람이 모두 놀랐다.

또 승상(丞相) 김양도(金良圖)가 어렸을 때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굳어져서 말도 못하고 수족도 놀리지 못했다. 항상 보면, 큰 귀신 하나가 작은 귀신을 데리고 와서 집 안에 있는 음식을 모조리 맛보는 것이었다. 혹 무당이 와서 제사를 지내면 귀신들의 무리가 서로 다투어가며 욕했다. 양도가 귀신들에게 물러가라고 명하고 싶었지만 입이 붙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이름은 전하지 않는 법류사(法流寺)의 중을 청해다가 불경을 외게 했더니, 큰 귀신이 작은 귀신에게 명하여 쇠망치로 승려의 머리를 때려 땅에 넘어뜨리니 피를 토하고 죽었다. 며칠 후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밀본을 맞아오도록 하니 사자가 돌아와서 말한다. "밀본법사가 우리 청을 받아들여 장차 오신다고 했습니다." 여러 귀신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얼굴빛이 변하니 작은 귀신이 말한다. "법사가 오면 이롭지 못할 것이니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큰 귀신은 거만을 부리고 태연스럽게 말한다. "무슨 해로운 일이 있겠느냐." 이윽고 사방에서 대력신(大力神)이 온 몸에 쇠갑옷과 긴 창으로 무장하고 나타나더니 모든 귀신들을 잡아 묶어 가지고 갔다. 다음에 무수한 천신(天神)들이 둘러서서 기다렸다. 조금 있더니 밀본이 도착하여, 경문(經文)을 펴기도 전에 양도의 병은 나아서 말도 하고 몸도 움직였다. 그리하여 지나간 사실을 자세히 말했다. 양도는 이 일로 해서 불교를 독실히 믿어 한평생 게을리하지 않았다. 흥륜사(興輪寺) 오당(吳堂)의 주불(主佛)인 미타존상(彌타尊像)과 좌우 보살(菩薩)을 소상(塑像)으로 만들고, 또 그 당(堂)에 금으로 벽화를 그렸다.

밀본은 일찍이 금곡사(金谷寺)에서 살았었다. 또 김유신(金庾信)은 일찍이 늙은 거사(居士) 한 사람과 교분(交分)이 두터웠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 때 유신공(庾信公)의 친척인 수천(秀天)이 오랫동안 나쁜 병에 걸렸으므로 공이 거사를 보내서 진찰해 보도록 했다. 때마침 수천의 친구 인혜사(因惠師)라는 이가 중악(中岳)에서 찾아왔다가 거사를 보더니 업신여겨 말했다. "그대의 형상과 태도를 보니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인데 어찌 남의 병을 고치겠는가." 이에 거사는 말했다.

"나는 김공(金公)의 명을 받고 마지못해서 왔을 뿐이오." 이에 인혜(因惠)가 말했다.

"그대는 내 신통력을 좀 보라" 하더니 향로를 받들어 향을 피우고는 주문을 외니, 이윽고 오색 구름이 이미 위를 두르고 천화(天花)가 흩어져 떨어졌다. 거사가 말한다. "스님의 신통력은 불가사의합니다. 저에게도 역시 변변치 못한 기술이 있어서 시험해 보고 싶으니, 청컨대 스님께서는 잠깐 동안 제 앞에 서 계십시오." 인혜는 하라는 대로 했다. 거사가 손가락을 한번 튀기자 인혜는 공중으로 거꾸로 올라가는데 그 높이가 한 길이나 된다. 한참 만에야 서서히 거꾸로 내려와 머리가 땅에 박힌 채 말뚝과 같이 우뚝 섰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밀고 잡아당겨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사가 그곳에서 나가 버리니, 인혜는 거꾸로 박힌 채 밤을 새웠다. 이틑날 수천이 사람을 시켜 이 사실을 김공(金公)에게 알리니, 김공은 거사에게 가서 인혜를 풀어주게 했다. 그 뒤로 인혜는 다시는 재주를 부리는 체하지 않았다.
찬(讚)해 말한다.

붉은빛 자줏빛이 분분해 몇 번이나 주색(朱色)을 어지럽히니,
슬프다, 어목(漁目)도 어리석은 사람 속였네.
거사가 손가락 가볍게 튀기지 않았더면,
건상(巾箱)속에 무부(무부)를 얼마나 담았을까.


혜통황룡(惠通降龍)

중 혜통(惠通)은 그 씨족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백의(白衣)로 있을 때 그의 집은 남산 서쪽 기슭인 은천동(銀川洞) 어귀(지금의 남간사南澗寺 동리東里)에 있었다. 어느날 집 동쪽 시내에서 놀다가 수달[獺] 한 마리를 잡아 죽이고 그 뼈를 동산 안에 버렸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에 그 뼈가 없어졌으므로 핏자국을 따라 찾아가니 뼈는 전에 살던 굴로 되돌아가서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다. 혜통이 바라보고 한참이나 놀라고 이상히 여겨 감탄하고 망설이다가, 마침내 속세를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혜통으로 바꿨다.

당나라에 가서 무외삼장(無畏三藏)을 뵙고 배우기를 청하니 삼장이, "우이(우夷)의 사람이 어떻게 법기(法器)가 될 수 있겠는가" 하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나 혜통은 쉽게 물러가지 않고 3년 동안이나 부지런히 섬겼다. 그래도 무외(無畏)가 허락하지 않자 혜통은 이에 분하고 애가 타서 뜰에 서서 불동이를 머리에 이고 있었다. 조금 후에 정수리가 터지는데 소리가 천둥과 같았다. 삼장(三藏)이 이 소리를 듣고 와서 보더니 물동이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터진 곳을 만지면서 신주(神呪)를 외니 상처는 이내 아물어서 전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흉터가 생겨 왕자(王字) 무늬와 같으므로 왕화상(王和尙)이라고 하여 그의 인품을 깊이 인정하여 인결(印訣)을 전했다.

이때 당나라 황실에서는 공주가 병이 있어 고종(高宗)은 삼장에게 치료해 달라고 청하자 삼장은 자기 대신 혜통을 천거했다. 혜통이 가르침을 받고 딴 곳에 거처하면서 횐 콩 한 말을 은그릇 속에 넣고 주문을 외니, 그 콩이 변해서 횐 갑옷을 입은 신병(新兵)이 되어 병마(病魔)들을 쫓았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에 다시 검은 콩 한 말을 금그릇에 넣고 주문을 외니, 콩이 변해서 검은 갑옷 입은 신병(新兵)이 되었다. 두 빛의 신병이 함께 병마를 쫓으니 갑자기 교룡(蛟龍)이 나와 달아나고 공주의 병이 나았다. 용은 혜통이 자기를 쫓은 것을 원망하여 신라 문잉림(文仍林)에 와서 인명을 몹시 해쳤다 당시 정공(鄭恭)이 당에 사신으로 갔다가 혜통에게 말했다. "스님이 쫓아낸 독룡(毒龍)이 본국에 와서 해(害)가 심하니 빨리 가서 없애 주십시오." 혜통은 이에 정공과 함께 인덕(麟德) 2년 을축(乙丑; 665)에 본국에 돌아와 용을 쫓아 버렸다. 용은 또 정공을 원망하여 이번에는 버드나무로 변해서 정씨의 문밖에 우뚝 섰다. 정공은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무성한 것만 좋아하여 무척 사랑했다. 신문왕(神文王)이 죽고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하여 산릉(山陵)을 닦고 장사지내는 길을 만드는데, 정씨 집 버드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 유사(有司)가 베어 버리려 하자 정공이 노해서 말했다. "차라리 내 머리를 벨지언정 이 나무는 베지 못한다." 유사가 이 말을 왕에게 아뢰니 왕은 몹시 노해서 법관(法官)에게 명령했다. "정공이 왕화상의 신술(神術)만 믿고 장차 불손(不遜)한 일을 도모하려 하여 왕명을 업신여기고 거역하여, 차라리 제 머리를 베라고 하니 마땅히 제가 좋아하는 대로 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를 베어 죽이고 그 집을 흙으로 묻어 버리고 나서 조정에서 의론했다. "왕화상이 정공과 매우 친하여 반드시 연루(連累)된 혐의가 있을 것이니 마땅히 먼저 없애야 할 것입니다." 이에 갑옷 입은 병사를 시켜 그를 잡게 했다.

혜통이 왕망사(王望寺)에 있다가 갑옷 입은 병사가 오는 것을 보고 지붕에 올라가서 사기 병과 붉은 먹을 찍은 붓을 가지고 그들에게 소리쳤다. "내가 하는 것을 보라"하고 병의 목에다 한 획을 그으면서 말한다." 너희들은 모두 너희들의 목을 보라." 목을 보니 모두 붉은 획이 그어져 있으므로 서로 보면서 놀랐다. 혜통은 또 소리친다. "내가 만일 이 병의 목을 자르면 너희들의 목도 잘려질 것이다. 어찌 하려느냐." 병사들이 달려와서 붉은 획이 그어진 자기네 목을 왕에게 보이니 왕이 말하기를, "화상의 신통력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겠느냐" 하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왕녀(王女)가 갑자기 병이 나자 왕은 혜통을 불러서 치료하게 했더니 병이 나았으므로 왕은 크게 기뻐했다. 혜통은 이것을 보고 말했다. "정공은 독룡의 해를 입어서 죄없이 국가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후회했다. 이에 정공의 처자에게는 죄를 면하게 하고 혜통을 국사(國師)로 삼았다. 용은 이미 정공에게 원수를 갚자 기장산(機張山)에 가서 웅신(熊神)이 되어 해독을 끼치는 것이 더욱 심하여 백성들이 몹시 괴로워했다. 혜통은 산속에 이르러 용을 달래어 불살계(不殺戒)를 주니 그제야 웅신의 해독이 그쳤다.

처음에 신문왕이 등창이 나서 혜통에게 치료해 주기를 청하므로 혜통이 와서 주문을 외니, 그 자리에서 병이 나았다. 이에 혜통이 말했다. "폐하께서 전생에 재상의 몸으로 장인(臧人) 신충(信忠)이란 사람을 잘못 판결하여 종으로 삼으셨으므로 신충이 원한을 품고 윤회환생(輪廻還生)할 때마다 보복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등창도 역시 신충의 탈이오니 마땅히 신충을 위해서 절을 세워 그 명복을 빌어서 원한을 풀게 하십시오." 왕이 옳다고 생각하여 절을 세워 이름을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라고 했다. 절이 다 이루어지자 공중에서 노래하는 소리가 났다. "왕이 절을 지어 주셨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났으니, 원한은 이미 풀렸습니다."(어떤 책에는 이 사실이 진표眞表의 전기傳記에 실려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또 노래부른 곳에 절원당(折怨堂)을 지었는데 그 당(堂)과 절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보다 앞서 밀본 법사(密本法師)의 뒤에 고승(高僧) 명랑(明郞)이 있었다.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신인(神人; 범서梵書엔 문두루文豆蔞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신인神人이라고 했다)을 얻어 신유림(神遊林; 지금의 천왕사天王寺)를 처음 세우고, 여러 번 이웃 나라가 침입해 온 것을 기도로 물리쳤다. 이에 화상은 무외삼장(無畏三藏)의 골자(骨子)를 전하고, 속세를 두루 다니면서 사람을 구제하고 만물을 감화(感化)시켰다, 또 숙명(宿明)의 밝은 지혜로 절을 세워 원망을 풀게 하니 밀교(密敎)의 풍도가 이에 크게 떨쳤다. 천마산(天磨山) 총지암(總持암)과 무악(毋岳)의 주석원(呪錫院) 등은 모두 그 지류(支流)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혜통의 세속 이름은 존승각간(尊勝角干)이라고 하는데 각간은 곧 신라의 재상과 같은 높은 벼슬이니, 혜통이 벼슬을 지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또 어떤 사람은 시랑(豺狼)을 쏘아 잡았다고 하지만 모두 자세히 알 수 없다.

찬(讚)해 말한다.

산도(山桃)와 계행(溪杏)이 울타리에 비쳤는데,
한 지경 봄이 깊어 두 언덕 꽃이 피었네.
혜통이 수달을 한가로이 잡은 때문에,
마귀(魔鬼)와 외도(外道)를 모두 서울에서 멀리했네.


명랑신인(明朗神印)

〈금광사(金光寺) 본기(本記)〉를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법사 명랑(明朗)이 신라에 태어나서 당나라도 건너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데 바다의 용의 청에 의해,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秘法)을 전하고, 황금 1,000냥(혹은 1,000근 이라고도 함)을 보시(布施)받아 가지고 땅 밑을 잠행(潛行)하여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용왕(龍王)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佛像)을 장식하니 유난히 광채가 났다. 그런 때문에 절 이름을 금광사(金光寺)라고 했다."(〈승전僧傳〉에는 금우사金羽寺라고 했지만 잘못이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이요, 자는 국육(國育)이며, 신라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으로서 혹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하는데, 소판(蘇判) 무림(戊林)의 딸 김씨(金氏)로서 즉 자장(慈藏)의 누이 동생이다. 재량(才良)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맏이는 국교대덕(國敎大德)이요, 다음은 의안대덕(義安大德)이며, 법사는 막내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꿈에 푸른빛이 나는 구슬을 입에 삼기고 태기가 있었다.

신라 선덕왕(善德王)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貞觀) 9년 을미(乙未; 635)에 돌아왔다. 총장(總章) 원년 무신(戊辰; 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대병을 거느리고 신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남은 군사를 백제(百濟)에 머물러 두고 장차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 했다. 신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설방(薛邦)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 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이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법사를 청해다가 비법을 써서 빌어서 이를 물리치게 했다(이 사실은 문무왕전文武王傳속에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신인종(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

우리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울 때 또한 해적이 와서 침범하니, 이에 안혜(安惠)ㆍ낭융(朗融)의 후예인 광학(廣學)ㆍ대연(大緣) 등 두 고승(高僧)을 청해다가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쳐 진압했으니, 모두 명랑의 계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법사를 합하여 위로 용수(龍樹)에 이르기까지를 구조(九祖)로 삼았다. (본사기本寺記에는 삼사三師가 율조律祖가 되었다고 했으나 자세히 알 수 없다) 또 태조가 글들을 위해 현성사(現聖寺)를 세워 한 종파(宗派)의 근본을 삼았다.

또 신라 서울 동남쪽 20여 리 되는 곳에 원원사(遠原寺)가 있으니 세상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이 절은 안혜 등 네 대덕(大德)이 김유신(金庾信)ㆍ김의원(金義元)ㆍ김술종(金述宗) 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운 것이며, 네 대덕의 유골이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혔으므로 사령산(四靈山) 조사암(祖師岩)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네 고승은 모두 신라 때의 유명한 중이라 하겠다.

돌백사(돌白寺) 주첩주각(柱貼注脚)에 씌어 있는 것을 상고하여 보면 이러하다. 경주(慶州) 호장(戶長) 거천(巨川)의 어머니는 하지녀(河之女)이고, 이 하지녀의 어머니는 명주녀(明珠女)이다. 명주녀의 어머니인 적리녀(積利女)의 아들은 광학대덕(廣學大德)과 대연삼중(大緣三重; 예전의 이름은 선회善會)이다. 이들 형제 두 사람이 모두 신인종(神印宗)에 귀의했다. 장흥(長興) 2년 신묘(辛卯; 931)에 태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서 임금의 행차를 따라다니며 분향하고 수도(修道)하니, 그 수고로움을 상 주어 두 사람의 부모의 기일보(忌日寶)로 전답 몇 결(結)을 돌백사에 주었다 한다. 이렇게 보면 광학ㆍ대연 두 사람은 성조(聖祖)를 따라 서울로 들어왔으며 안사(安師) 등은 김유신 등과 함께 원원사를 세운 사람이라 하겠다. 광학 등 두 사람의 뼈가 또 여기에 와서 안치(安置)되었을 뿐이고, 네 고승이 모두 원원사를 세웠다는 것은 아니며, 또 성조(聖祖)를 따라온 것도 아니다. 이것은 좀더 자세히 알아야 할 것이다.


                                                                 ***

                                                        삼국유사 제 5권


감통 제 7
감통(感通) 제7

선도성모(仙桃聖母) 수희불사(隨喜佛事)

진평왕(眞平王) 때 지혜(智惠)라는 비구니(比丘尼)가 있어 어진 행실이 많았다. 안흥사(安興寺)에 살았는데 새로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어느날 꿈에 모양이 아름답고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그를 위로해 말했다. "나는 바로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인데 네게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여 금 10근을 주어 돕고자 한다. 내가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서 주존(主尊) 삼상(三像)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오삼불(五三佛) 육류성중(六類聖衆) 및 모든 천신(天神)과 오악(五岳)의 신군(神君; 신라 때의 오악五岳은 東의 토함산吐含山, 南의 지리산智異山, 西의 계룡산鷄龍山, 北의 태백산太伯山, 중앙中央의 부악父岳, 또는 공산公山이다)을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널리 모든 함령(含靈)을 위해서 점찰법회(占擦法會)를 베푸는 것으로써 일정한 규정을 삼도록 하라(본조本朝 굴암지屈弗池의 용이 황제皇帝의 꿈에 나타나 영취산靈鷲山에 낙사도장樂師道場을 영구히 열어 바닷길이 편안할 것을 청한 일이 있는데 그 일도 역시 이와 같다).

지혜가 놀라 꿈에서 깨어 무리들을 데리고 신사(神祀) 자리 밑에 가서, 황금 160냥을 파내어 불전 수리하는 일을 완성했으니, 이는 모두 신모(神母)가 시키는 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적은 남아 있지만 법사(法事)는 폐지되었다.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며,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術法)을 배워 해동(海東)에 와서 머물러 오랫동안 돌아 가지 않았다. 이에 부황(父皇)이 소리개 발에 매달아 그에게 보낸 편지에 말했다. "소리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 사소는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놓아 보내니, 이 선도산(仙桃山)으로 날아와서 멈추므로 드디어 거기에 살아 지선(地仙)이 되었다. 때문에 산 이름은 서연산(西鳶山)이라고 했다.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서 살면서 나라를 진호(鎭護)하니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나라가 세워진 뒤로 항상 삼사(三祀)의 하나로 삼았고, 그 차례도 여러 망(望)의 위에 있었다.

제 54대 경명왕(景明王)이 매사냥을 좋아하여 일찍이 여기에 올라가서 매를 놓았다가 잃어버렸다. 이 일로 해서 신모에게 기도했다. "만일 매를 찾게 된다면 마땅히 성모(聖母)께 작(爵)을 봉해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매가 날아와서 책상 위에 앉으므로 성모를 대왕(大王)에 봉작(封爵)하였다. 그가 처음 신한(辰韓)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東國)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필경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의 두 성군(聖君)을 낳았을 것이다. 때문에 계룡(鷄龍)ㆍ계림(鷄林)ㆍ백마(白馬) 등으로 일컬으니 이는 닭이 서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성모는 일찍이 제천(諸天)의 선녀에게 비단을 짜게 해서 붉은빛으로 물들여 조복(朝服)을 만들어 남편에게 주었으니, 나라 사람들은 이 때문에 비로소 신비스러운 영험을 알게 되었다.


또 <국사(國史)>에 보면, 사신(史臣)이 말했다. "김부식(金富軾)이 정화(政和) 연간에 일찍이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우신관(佑神館)에 나갔더니 한 당(堂)에 여선(女仙)의 상(像)이 모셔져 있었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보)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의 신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 했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옛날에 어떤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辰韓)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더니 그가 해동의 시조가 되었고, 또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길이 선도산(仙桃山)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여인의 상입니다.' 했다."

또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이 우리 조정에 와서 동신성모(東神聖母)를 제사지낼 때에 그 제문에, "어진 사람을 낳아 비로소 나라를 세웠다."는 글귀가 있었다. 성모가 이제 황금을 주어 부처를 받들게 하고, 중생을 위해서 향화법회(香火法會)를 열어 진량(津梁)을 만들었으니 어찌 다만 오래 사는 술법(術法)만 배워서 저 아득한 속에만 사로잡힐 것이랴.

찬(讚)해 말한다.

서연산(西鳶山)에 와서 몇십 년이나 지냈는가.
천제(天帝)의 여인 불러 예상(霓裳)을 짰었네.
길이 사는 법도 이상한 일 없지 않았는데,
금선(金仙) 뵙고 옥황(玉皇)이 되었네.


욱면비 염불 서승(郁面婢 念佛 西昇)


경덕왕(景德王) 때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晉州, 또는 강주康州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의 순안順安이다)의 남자 신도 수십 명이 뜻을 서방(西方)에 구해서 고을의 경계에 미타사(彌陀寺)를 세우고 만일을 기약하여 계(契)를 만들었다. 이때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집에 계집종 하나가 있었는데 이름을 욱면(郁面)이라 했다. 그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마당에 서서 중을 따라 염불(念佛)했다. 그 주인은 그녀가 그 직분에 맞지 않는 짓을 하는 것을 미워하여 매양 곡식 두 섬을 주어 하룻밤 동안에 다 찧으라 했더니, 계집종은 초저녁에 다 찧어 놓고 절에 가서 염불하여(속담에 말하기를, "내 일이 바빠서 주인 집 방아 바삐 찧는다" 한 것은 대개 여기에서 나온 말인 듯싶다)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뜰 좌우에 길다란 말뚝을 세워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 위에 메고는 합장(合掌) 하면서 좌우로 흔들어 자기를 격려했다. 그 때 하늘에서 부르는데, "욱면랑(郁面娘)은 당(堂)에 들어가 염불하라" 하였다. 절의 중들이 듣고 계집종을 권해서 당에 들어가 전처럼 정진(精進)하게 했다. 얼마 안 되어 하늘의 음악소리가 서쪽에서 들려 오더니 욱면은 몸을 솟구쳐 집 대들보를 뚫고 올라가 서쪽으로 교외(郊外)에 가더니 해골(骸骨)을 버리고 부처의 몸으로 변하여 연화대(蓮化臺)에 앉으서 큰 광명을 발사하면서 서서히 가버리니, 음악소리는 한참 동안 하늘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당(堂)에는 지금도 구멍이 뚫어진 곳이 있다고 한다(이상은 향전鄕傳에 있는 말이다).

<승전(僧傳)>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중 팔진(八珍)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현신(現身)으로서 무리들을 모으니 1,000명이나 되었는데,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노력을 다했고, 한 패는 정성껏 도를 닦았다. 그 노력하는 무리들 중에 일을 맡아 보던 이가 계(戒)를 얻지 못해서 축생도(畜生道)에 떨어져서 부석사(浮石寺)의 소가 되었다. 그 소가 어느날 불경을 등에 싣고 가다가 불경의 힘을 입어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집 계집종으로 태어나서 이름을 욱면(郁面)이라고 했다. 욱면이 일이 있어 하가산(下柯山)에 갔다가 꿈에 감응해서 드디어 불도를 닦을 마음이 생겼다. 아간의 집은 혜숙법사(惠宿法師)가 세운 미타사(彌陀寺)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아간이 항상 그 절에 가서 염불하는데 욱면도 따라 뜰에서 염불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기를 9년, 을미년(乙未年) 정월 21일에 부처에게 예배하다가 집의 대들보를 뚫고 올라가 소백산(小伯山)에 이르러 신 한 짝을 떨어뜨려 그곳에 보리사(菩提寺)를 짓고 산 밑에 이르러 그 육신(肉身)을 버렸으므로 그곳에 제2 보리사를 짓고 그 전당(殿堂)에 방(榜)을 써붙여, '욱면(욱面) 등천지전(登天之殿)'이라 했다. 집 마루에 뚫린 구멍이 열 아름이나 되었는데 아무리 폭우(暴雨)나 세찬 눈이 내려도 집 안은 젖지 않았다. 그 뒤에 호사자(好事者)들이 금탑(金塔) 하나를 만들어 그 구멍에 맞추어서 승진(承塵) 위에 모셔 그 이상한 사적을 기록했으니, 지금도 그 방(榜)과 탑(塔)이 아직 남아 있다. 욱면(욱面)이 간 뒤에 귀진도 또한 그 집이 신이(神異)한 사람이 의탁해 살던 곳이라 해서,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어 법왕사(法王寺)라 하고 토지를 바쳤는데 오랜 뒤에 절은 없어지고 빈 터만 남았다.

대사(大師) 회경(懷鏡)이 승선(承宣) 유석(劉碩), 소경(小卿) 이원장(李元長)과 함께 발원(發願)하여 절을 중건(重建)했는데, 회경이 친히 토목 일을 맡았다. 재목을 처음 운반할 때, 노부(老父)가 삼으로 삼은 신과 칡으로 삼은 신을 각각 한 켤레씩 주었다. 또 옛 신사(神社)에 가서 불교의 이치를 개유(開諭)하였으므로 신사 옆 재목을 베어다가 5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또 노비들을 더 주니 매우 융성하여 동남 지방에 있어서의 이름있는 절이 되었다. 사람들은 회경을 귀진의 후신(後身)이라 했다.

의론해 말한다. 고을 안의 고전(古傳)을 살펴보면, 욱면은 바로 경덕왕 때의 일이다. 징(徵; 필경 진珍인 듯싶다. 아래도 역시 같다)의 본전(本傳)에 의하면 이는 원화(元和) 3년 무자(戊子; 808) 애장왕(哀莊王) 때의 일이라 했다. 경덕왕 이후에 혜공왕(惠恭王)ㆍ선덕왕(宣德王)ㆍ원성왕(元聖王)ㆍ소성왕(昭聖王)ㆍ애장왕(哀莊王) 등 5대까지는 도합 60여 년이나 된다. 귀징(貴徵; 珍)이 먼저이고 욱면이 뒤이기 때문에 그 선후가 향전(鄕傳)과 어긋난다. 여기에는 이 두 가지를 다 실어서 의심이 없게 한다.

찬(讚)해 말한다.

서쪽 이웃 옛 절에 불등(佛燈)이 밝았는데,
방아 찧고 절에 오니 이경(二更)이네.
한 마디 염불마다 부처가 되려하여,
손바닥 뚫어 노끈 꿰니 그 몸도 잊었네.


광덕(廣德)과 엄장(嚴莊)

문무왕(文武王) 때에 중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아 밤낮으로 약속했다. "먼저 안양(安養)으로 돌아가는 자는 모름지기 서로 알리도록 하지." 광덕은 분황(芬皇) 서리(西里; 혹은 황룡사皇龍寺에 서거방西去方이 있다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에 숨어 살면서 신 삼은 것으로 업을 삼아, 처자를 데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나무를 베어 불태우고 농사를 지었다.
어느날 해 그림자가 붉은빛을 띠고 소나무 그늘이 고요히 저물었는데, 창밖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이미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 살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라." 엄장이 문을 밀치고 나가 보니 구름 밖에 천악(天樂) 소리가 들리고 밝은 빛이 땅에 드리웠다. 이튿날 광덕이 사는 곳을 찾아갔더니 광덕은 과연 죽어 있다. 이에 그의 아내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호리(蒿里)를 마치고 부인에게 말했다.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어떻겠소." 광덕의 아내도 좋다고 하고 드디어 그 집에 머물렀다. 밤에 자는데 관계하려 하자 부인은 이를 거절한다. "스님께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구하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엄장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물었다. "광덕도 이미 그러했거니 내 또한 어찌 안 되겠는가." 부인은 말했다. "남편은 나와 함께 십여 년을 같이 살았지만 일찍이 하룻밤도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거늘, 더구나 어찌 몸을 더럽히겠습니까. 다만 밤마다 단정히 앉아서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렀습니다. 또 혹은 십륙관(十六觀)을 만들어 미혹(迷惑)을 깨치고 달관(達觀)하여 밝은 달이 창에 비치면 때때로 그 빛에 올라 가부좌(跏趺坐)하였습니다. 정성을 기울임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가지 않으려고 한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체로 천릿길을 가는 사람은 그 첫걸음부터 알 수가 있는 것이니, 지금 스님의 하는 일은 동방으로 가는 것이지 서방으로 간다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엄장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물러나 그 길로 원효법사(元曉法師)의 처소로 가서 진요(津要)를 간곡하게 구했다. 원효는 삽관법(삽觀法)을 만들어 그를 지도했다. 엄장은 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쳐 스스로 꾸짖고, 한 마음으로 도를 닦으니 역시 서방정토로 가게되었다. 삽관법은 원효법사의 본전(本傳)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속에 있다.

그 부인은 바로 분황사의 계집종이니, 대개 관음보살 십구응신(十九應身)의 하나였다. 광덕에게는 일찍이 노래가 있었다.

달아, 서방까지 가시나이까,
무량수불(無量壽佛) 앞에 말씀(우리말로 보언報言을 말함) 아뢰소서.
다짐 깊은 부처님께 두손모아,
원왕생(願往生) 그리워하는 사람 있다고 아뢰소서.
아아, 이 몸 남겨 두고 사십팔원(四十八願)이 이루어질까.



경흥우성(憬興遇聖)

신문왕(神文王) 때의 고승(高僧) 경흥(景興)의 성은 수씨(水氏)로서 웅천주(熊川州) 사람이다. 18세에 중이 되어 삼장(三藏)에 통달하니 명망(名望)이 한 시대에 높았다. 개요(開耀) 원년(681), 문무왕(文武王)이 장차 세상을 떠나려 할 때 신문왕에게 부탁했다. "경흥법사는 국사가 될 만하니 내 명을 잊지 말라." 신문왕이 즉위하여 국로(國老)로 책봉하고 삼낭사(三郎寺)에 살게 했는데 갑자기 병이 들어 한 달이나 되었다. 이때 여승 하나가 와서 그에게 문안하고 <화엄경(華嚴經)> 속의 '착한 벗이 병을 고쳐 준다'는 말을 얘기하고 말했다. "지금 스님의 병은 근심으로 해서 생긴 것이니, 기쁘게 웃으면 나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열한 가지 모습을 지어 저마다 각각 우스운 춤을 추게 하니, 그 모습은 뾰족하기도 하고 깍은 듯도 하여 그 변하는 형용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어 모두들 우스워서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이에 법사의 병은 자기도 모르게 씻은 듯이 나았다. 여승은 드디어 문을 나가 남항사(南巷寺; 이 절은 삼랑사三郎寺 남쪽에 있다)에 들어가서 숨었고, 그가 가졌던 지팡이는 새로 꾸민 불화(佛畵) 십일면원통상(十一面圓通像) 앞에 있었다.

경흥이 어느날 대궐에 들어가려 하자 시종하는 이들이 동문(東門) 밖에서 먼저 채비를 차리니 말과 안장은 매우 화려하고 신과 갓도 제대로 갖추었으므로 길 가던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 그 때 거사(居士; 혹은 사문沙門이라고도 했다) 한 사람이 모습은 몹시 엉성한데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등에는 광주리를 지고 와서 하마대(下馬臺) 위에서 쉬고 있는데, 광주리 속을 보니 마른 물고기가 있었다. 시종하는 이가 그를 꾸짖었다. "너는 중의 옷을 입고 어찌 깨끗하지 못한 물건을 지고 있느냐." 중이 말했다. "산 고기(馬)를 두 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것보다 삼시(三市)의 마른 고기를 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말을 마치자 일어나 가 버렸다. 경흥은 문을 나오다가 그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를 쫓게 하니 남산(南山) 문수사(文殊寺) 문밖에 이르러 광주리를 버리고 숨었는데 짚었던 지팡이는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 앞에 있고, 마른 고기는 바로 소나무 껍질이었다. 사자가 와서 고하자 경흥은 이를 듣고 탄식했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와서 내가 말타고 다니는 것은 경계한 것이구나." 그 뒤로 경흥은 몸이 마치도록 말을 타지 않았다.
경흥이 뿌린 덕의 향기와 남긴 맛은 중 현본(玄本)이 엮은 삼랑사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일찍이 보현장경(普賢章經)을 보니 미륵보살이 말했다. "나는 내세에는 염부제(閻浮提)에 나서 먼저 석가의 말법(末法) 제자들을 먼저 제도(濟度)할 것이다. 그런데 다만 말탄 비구승(比丘僧)만은 제외시켜서 그들에게는 부처를 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경계하지 않겠는가.

찬(讚)해 말한다.

옛 어진 이가 모범은 보인 것은 뜻한 바 많았는데,
어찌하여 자손들은 절차(切磋) 하지 않는가.
마른 고기 등에 진 건 오히려 옳은 일이나,
다음날 용화(龍華) 저버릴 일 어찌 견딜까.

 

출처 ; http://www.suns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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