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귀족들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오만한 계층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군주나 법관, 그외 다양한 기관이 귀족들을 다스리고 그들의 권력을 견제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귀족들이 너무 많아서 아무리 내분이 잦아도
자신들의 특권을 옹호하고 확대하기 위해서라면 놀라운 단결력을 보인다.
그래서 백성들도 관리들도 심지어는 왕조차도 그들의 권위에 대항해 싸울수가 없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정치인들의 모습과도 흡사한듯 -_-;;)
. . . 한국에서는 다른 아시아국가에서처럼
풍속이 극도로 부패해 있고 그 당연한 결과로 여성들의 일상적 지위는 충격적일 정도로 경멸과 열등함의 대상이다.
. . . 한국여성은 사회에서도 가족내에서도 하등의 대접을 받지 못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존중의 대상이 된다.
여성들에게는 항상 경어체로 말하며 하녀에게 말할 때 외에는 이 원칙이 항상 지켜진다.
길에서는 모든 정숙한 여자들, 심지어는 서민의 아녀자에게도 길을 양보한다.
여자들의 거처는 침범할 수가 없다. 정부의 관리들도 그곳에 발을 들여놓을수 없으며 이곳으로 몸을 숨긴 귀족은 절대 강제로 잡혀갈수 없다.
--- 샤를르 달레
한반도의 역사는 아시아 연보에서도 가장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오늘날 매우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점하고 있기에 극동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중 하나로 손꼽힌다.
--- 레옹 드 로니
한국은 아직 경제발전을 이루지 못한 단계이다.
한국은 여전히 농업국이며 사냥하기 좋은 방대하고 풍요로운 숲이 있다.
말들과 우수한 품종의 소들이 있고 해안에는 물고기들과 식용해초들이 넘친다. 한국에서는 석탄과 금이 난다.
. . . 한국의 경제적 전망은 매우 밝다고 할수있다.
다만 한국인들이 악덕을 개혁하고 서구문명에서 유용한 것을 취할줄 알고
생산수단과 빠르고 저렴한 통신수단, 더 평등한 사법제도, 더 엄격하고 정확한 금융제도를 갖추어야 할것이다.
또한 무기경쟁으로 빈약한 자원을 바닥내는 일은 외국인들에게 맡기고 강대국보다는 벨기에나 스위스 같은 나라를 본으로 삼아야 할것이다.
--- 모리스 쿠랑
협곡들은 점점더 평형상태를 되찾아 산봉우리의 경사는 더욱 완만해진다.
우리의 아래위로는 광활한 논이 펼쳐져 있다.
산을 가로로 잘라 끝없이 이어져 있으며 꼭 진한 초록색의 물줄기로 포석을 깔아놓은 거대한 계단같아 보인다.
물은 정교하게 파놓은 작은 도랑을 따라 흘러 들어간다.
한국에서만큼 논의 관개가 잘 정비된 나라는 없을것이다.
이 인간의 대업적은 이곳에서는 나무랄데 없이 수행되고 있었다.
한뙈기의 땅도 버려진 곳이 없다.
이와 같은 경작방식을 오베르뉴같이 수확이 높지않은 프랑스 지역에서 활용한다면, 프랑스의 농업생산량은 급증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샤를르 바라
한국이 정지상태를 집요하게 고집해서 필연적으로 쇠퇴했지만
한때는 전통예술을 수용해 훌륭하게 보존 계승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때는 예술산업이 발달한 시기도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천, 도자기, 그림, 회화, 조각등은 이를 잘 증명해준다. 7~8세기무렵 한국인은 일본인에게 예술을 전수해주기도 했다.
지금은 정지한 것처럼 보이는 한민족이 찬란한 문학이 있었고, 10세기 이전에 목판인쇄술을 보유하고 있었고 1403년 분리활자를 발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적잖이 놀라게 된다.
이는 사람을 첫인상으로 판단해서는 안되며,
조선이라는 작은 왕국은 외부에 알려질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 에밀 부르다레
19C 서양에 비친 한국의 의,식,주
고기를 구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너무 늙어서 일할수 없는 소만 잡아먹으니까요.
송아지를 죽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양과 염소도 없습니다.
돼지고기도 매우 귀하고 돼지들은 크기도 매우 작습니다. 돼지고기는 잔치가 있을때에나 사는데 그나마 고기를 구할수 있거나 돈이 있을때뿐입니다.
. . . 과일도 매우 귀한데, 저는 아직까지 체리도 배도 사과도 보지 못했습니다.
야채들은 야생으로 자라는데 일종의 야생 양배추 같은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 . . 이곳의 옷들은 현지에서 만든 면직이나 마직으로 지었는데 모두 흰색입니다.
정말 어떻게 설명드려야 할지… 이건 직접와서 보셔야 합니다.
한국사람이 프랑스에 가면 그곳에서 가장 별나게 차려입은 희극배우보다 더 눈길을 끌것입니다.
. . . 선교사가 외출을 할때는 짙은 색의 길다란 겉옷을 입는데 이것은 우리의 보자기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비둘기집 지붕같이 생긴 원뿔모양의 모자를 쓰는데
50센티미터 높이에 지름이 1미터 50센티미터는 됩니다.
이 이상한 모자의 테두리가 팔꿈치까지 내려옵니다.
이것은 한국인이 초상때 입는 옷이라고 하는데 선교사들은 이옷을 입기로 했습니다.(서양인임을 들키지 않기위해서)
--- 뤼크 마르탱 위엥 신부, 19세기말
이러한 건축풍은 본래 중국에서 온것이며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도 이를 모방했다.
서쪽의 제국과 동쪽의 제국은 모두 가장 방대하고 웅장한 건물들을 지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그 특유의 천재적 예술성으로 변형을 시도하고 측면도를 다양화하면서
시대나 장소에 따라 소박하거나 풍요롭거나 장식적인 건물들을 건축한 반면,
한국은 중국의 건축풍에 일종의 엄격함과 상당히 우아한 취향을 유지했다.
게다가 한국의 건축은 나름대로 항상 다양함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건축물들이 주변경관을 너무도 능란하게 활용하기 때문에
풍경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기념물로 보이기도 하고 풍경이 의도적으로 기념물을 부각시키려고 있는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예로 궁전입구의 문을 지키는 두마리의 환상적 동물이 북악산 기슭에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그렇다.
또한 험한 돌로 지은 성채들이 산꼭대기에 있는 모습, 그 성벽은 폭포와 키 큰 나무사이로 사라져 있는 모습이 그렇다.
--- 모리스 쿠랑, 19세기 말
19C 서양에 비친 한국인의 외양, 성격, 사상
한국인의 가장큰 덕목은 인류애를 존중하는 선천적인 마음과 그것을 매일 실행하는 자세이다.
앞서 우리는 다양한 모임들, 특히 가족이 얼마나 협심해 서로 지키고 격려하고 밀어주고 도와주는지를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우의는 친척이나 단체의 경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상호부조와 모든이들을 극진하게 대접하는 자세는 한국인의 성격의 주요특징을 이루는데
이는 현대문명의 이기주의에 빠져 침략을 감행한 우리민족보다 한국인들을 우위에 서게 만드는 그들의 장점인 것이다.
. . . 그러나 이세상의 모든 좋은것에는 나쁜측면도 있게 마련이다.
앞서 설명한 가부장적인 습관들로 인해 몇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그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수많은 사람이 다른이들의 호의에 기대어 이곳 저곳 어슬렁거리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산다는 것이다.
--- 샤를르 달레 ‘한국 교회사’ ?1874년 출간
그들의 민첩함은 실로 놀랍다. 이는 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산에서 뛰어다니고 종종 산의 정상에서 모임을 하면서 얻어진 능력인 듯하다.
. . . 글을 읽을줄 모르는 사람은 매우 드물고 다른 이들의 멸시를 받기 쉽다. 문맹인에 대해 그토록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면 프랑스에는 멸시받을 사람이 상당히 많을것이다.
. . . 이들은 민첩하고 지칠줄 모르는 산인들이다. 한국의 자연적 여건 때문에 끝없이 산에 올라야 하고 그곳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셔서 폐가 그토록 발달한 것 같다.
. . . 최소한 초보적 교육은 널리 보급되어 있는 듯하다.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종이와 책은 갖추고 있다.
--- 앙리 주베르 ‘한국원정’ 1870년
지식에 권력이 수반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를 존중하는 일반인들의 태도는
우리 서구에 만연되어있는 개탄할만한 사조와는 대조적이며 한국인들에게 독립적인 사상이 있음을 보여준다.
. . . 이들은 겉치장없는 정직함만을 따를려는 본능적인 소박함과 투박함이 있으며
겉으로는 야만스럽게 보이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매우 여리고 섬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 . 한국의 사회조직은 중국이나 일본의 이론을 토대로 하지만 이곳주민들은 타타르족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 . . 최소한 내가만난 한국인들은 매우 크고 다혈질이며 예민하고 건장하다.
이들의 외모는 잔꾀많은 중국인이나 경박한 일본인보다는 야성적인 몽골인들을 연상케 한다.
짐꾼들은 누더기를 걸치고 있고 뻣뻣하고 건조한 머리가 이마 양쪽으로 내려와 있는데,
이는 사나운 사람의 외모처럼 보이게 한다.
이들은 용감하고 사려가 깊은데 중국인들은 용기라는 덕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려깊은 것은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볼수없다.
이 모든 징후들로 보아 한국인들은 몽골과 가까운 혈족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 역사학자들이 들려주는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는 별로 놀랄일도 아니다.
--- 모리스 잠텔
한국인은 아리안족과 몽골족의 후예이다.
아리안족에게서는 흰피부와 큰키, 건장한 체형, 노란머리칼과 수염을 물려받았다.
한국인은 자신의 육체적 우수성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런 자만심은 그들의 용기를 한층 자극한다.
날카로운 눈매, 유연한 몸동작은 몽골족으로부터 물려받았다. --- 이폴리트 프랑댕
오래도록 고집스레 스스로를 고립시켰지만, 평화롭고 손님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부드러운 면모를 지닌다.
굳건하면서도 생기없는 민족, 가난하기 짝이 없지만 비옥한 땅이 자아내는 기대하지 못했던 광경을 목격할수있다.
--- 마르셀 모니에
한국, 은둔의 땅! 슬픔에 찬 유형자, 현대생활에서 길을 잃고 놀라운 새 환경에서
실수를 반복한 듯 한국인의 표정은 더욱더 어리둥절해 보인다.
한국동쪽에 위치한 낮선 불교사찰과 은자의 동굴이 숨겨져 있는 바위투성이의 공오산(금강산)에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은둔하고 있는가!
이곳 한국인의 얼굴에는 존경심이 우러나는 금욕적 기품이 묻어있다.
평온과 슬픔, 내면적인 먼곳으로 돌린 시선에 묻어나는 무력한 눈빛은 많은 것을 감추고 있다.
. . . 한국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겉모습과는 달리 용감하고 부드럽고 관대하고 순진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순박하고 천진난만한 첫인상에도 불구하고,
이해력이 부족하고 느린성격은 이따금 신경을 거슬리게도 한다.
오늘날 아시아 열강들의 관심이 자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요에 집중되어 있음에도 정작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무관심하다.
--- 주옹 데 롱그레
--- 벨로네가 로즈에게 보낸 서신 중---
저는 이미 공태자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전쟁의 선포를 알리고 한국을 중국과 결별하도록하고 왕권을 박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우리의 성스런 군주이신 황제의 의향에 따라 한국과 그 왕권을 결정할수 있게 될것임을 통지했습니다.
한국의 수도와 폐위된 왕, 죽은 왕의 어머니인 섭정자가 제 손에 들어오기전에는 로즈소장께서는 한국내의 어떤 권력도 인정하지 마시고 누구와도 조약을 맺지 마시기 바랍니다. . . .
--- 벨로네가 공태자에게 보낸 서신 중 ---
. . . . 한국의 왕이 우리 가엾은 동포들에게 손을 댄 순간이 바로 그가 한국을 통치한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폐위를 선포한 것이며 나도 오늘 경건히 그의 폐위를 선포합니다.
며칠후면 우리군대는 한국정복에 나설것이며, 이제부터는 프랑스황제만이 한국의 왕위에 대한 권리와 권력을 가지게 될것입니다.
중국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한국에 대해 어떤 권한도 없으며 행동도 하지않을것임을 밝혔고,
이러한 핑계로 텐진조약의 시행을 거부했으며,
우리 선교사들이 요구한 여권의 발급을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입장을 인식했고, 이제 우리도 중국이 한국에 대해 어떠한 권리도 없다는 것을 알리는 바입니다.
--- 로즈가 본국의 담당부처로 보낸 서신 중 ---
장관님,
며칠후면 저는 한국해안으로 직접 탐사를 떠날것이며 무력개입이 쉽고 안전하게 이루어질수 있는지를 검토할 것입니다.
저는 절대로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리며
만일 상황의 어려움이 제 능력을 넘어선다면 저는 지시를 기다린 후에 행동할 것입니다.
저는 며칠전 대리공사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는 저와는 상의도 없이 한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왕의 폐위를 선언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성급한 조치는 북경정부에 알려졌으며 중국은 이를 비밀로 하지않을것입니다.
. . . . 한국은 독립국가이며 중국과 어떤 주종관계도 없습니다. 이는 공태자 자신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해외대표도 둔적없는 나라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대리공사의 권한범위에서 벗어나는 일일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의 국익에 따라 문제해결을 위해 행동할 권리와 의무는 현지에 파견되는 해군사령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 . . .
--- 프랑스 해군부 장관이 로즈에게 보낸 서신 중 ---
본인은 해군소장께서 한국에서 행하려는 행위에 대해 많은 우려를 하고있습니다.
. . . . 그들의 죽음에 대한 보복을 하기위해 결과를 알수없는 모험속으로 우리나라를 던져넣어야 한다면,
해군소장님, 그 경우에는 단순히 우리의 감정이 이끄는대로 행동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 . . . 이미 발생한 일에 대한 리델신부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백건대, 수도까지 원정대를 파견할 구실로 삼기에는 불충분합니다.
이미 한국의 잘 알려지지 않은 해안에서 두척의 함대를 잃은 것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 . . . 귀하의 책임과 저자신의 책임은 황제의 정부로 하여금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력을 필요로하는 계획에 가담할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단순한 해상탐사의 경우에는 성공을 하건 실패를 하건 큰 부작용이 없겠지만,
한 국가내에서의 군사작전은 성격이 달라서, 실패할 경우에는 보복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 한국원정에 함께 오게된 리델신부의 기록 ---
. . . . 언덕에는 대포소리를 듣고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이들은 나들이옷을 차려입고 서양선박의 모습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의복은 흰색, 푸른색, 붉은색으로 다양했고 초록빛 언덕과 함께 정말 아름다운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마치 여기저기 커다란 꽃바구니를 놓아둔 것 같았습니다.
. . . . 우리는 갑판 가까이 가서 탄피가 스쳐지나간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위뒤 간 양편으로 주민들이 모두 모여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배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도 우린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착하고 단순하고 순진한 주민들인가”라고 해군소장이 말했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교전이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는듯,
아니 실제로 그사실을 모르고 있던 주민들은 우리에게 애정어린 기쁨의 표현을 하며 신뢰감 가득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 . . . 성벽이 나타나자 소장은 척후병을 보냈습니다.
곧 작은 배 네척이 언덕정상으로 올라가기위해 성벽에 접근했습니다.
. . . . 드 샤반대위가 칼을 허리에 차고 두손을 주머니에 넣은채 성벽에 나타나서 소리쳤습니다.
“모두 전진하라. 도시에는 아무도 없다.” 소장은 전진명령을 내렸고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황제만세를 외치며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 . . . 이 책들이 발견된 왕실의 도서관(외규장각)은 매우 잘 관리된 듯 질서정연했습니다.
2절지 크기의 두툼한 왕가연보, 공자의 책들, 의술관련서적, 그리고 4절지 크기의 60권짜리 한국사 서적등이 있었습니다.
전부 합하면 수천권은 되어 보였습니다.
우리는 이 책들의 뛰어난 인쇄상태에 감탄했고
양피지처럼 만든종이, 접합장식이나 고리, 구리로 된 모퉁이 장식이 달린 책들을 보고 놀랐습니다.
금글자를 새겨넣은 수많은 서적들은 얇은 대리석판을 구리로 된 접합장식으로 이어붙여 비단천으로 덮은 병풍처럼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서적은 붉은색이나 금색으로 칠한 나무상자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 건물들 가운데 하나에는 거대한 도서관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책들말고도 이상한 물건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이 물건들은 보관에 들인 정성으로 보아 매우 귀한것인 듯 했습니다.
금글씨를 새긴 대리석판, 대리석으로 된 작은 거북상, 이모든것을 비단주머니로 정성스레 싼 다음 두세겹의 상자속에 넣고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향기나는 주머니도 넣어두었습니다.
서적의 관리도 소홀했던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도서는 2절지 크기의 두꺼운 책이었으며, 제본부분은 녹슨 청동으로 장정해 놋쇠고리로 이어놓았습니다. 커다란 지도들과 현판들, 그리고 이상한 그림들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물건들은 목록을 작성한 다음 가능하면 프랑스로 보낼것입니다.
. . . . 한국은 거칠면서도 아름답고 풍요롭습니다.
장교들과 병사들은 그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에 감탄했고 우리는 이런 감탄사를 수없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기후, 얼마나 풍요로운 나라인가! 우리가 코친차이나가 아닌 이곳에 자리를 잡았더라면….!”
---샤를르 달레의 ‘한국교회사’, 1874년 ---
사실 로즈해군소장의 원정이후로 한국은 그 어느때보다도 세상과 단절되었다.
1867년 외교사절들의 이동로인 영은문에서 열리던 국제박람회가 취소되었다.
일본 나룻배들이 여느때처럼 해안으로 낚시를 하러 왔는데 배 밑바닥까지 수색을 한 다음, 체류허가를 하지않고 돌려보냈다.
그다음해인 1868년 무슨 구실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이들 나룻배중 70척 이상이 불에 탔고 사공들 3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선박들도 한둘정도 같은 운명을 겪게되자 미국은 1871년 원정을 시도했는데, 1866년 프랑스원정만큼이나 소득이 없었다.
그이후로 한국해안에서 중국인들의 청어잡이가 금지되었고 중국인들도 더 이상 한국해안에 접근하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천성적으로 외국인들에게 적대적이지는 않다.
출처 : | 낙송의 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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