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9>

영지니 2010. 4. 15. 19:28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9>

용(龍)에 관한 보고서



[
들어가는 글]

(龍)은 상상의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멀지 않은 과거에도 사실 용이 단순히 상상의 동물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용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람은 바로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劉邦)입니다. 즉 중국사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용의 아들로 불리는 사람은 바로 유방이라는 얘기죠.

한고조 유방의 고향은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북부의 패(沛)현 사람입니다. 하루는 유방의 어머니가 못가에서 쉬고 있는데 깜빡 잠이 든 모양입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천둥번개가 내리쳤습니다. 갑자기 날씨가 험악해지니 걱정이 된 남편이 아내를 찾아 여기저기를 헤매다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제방에서 정신없이 자고 있는 아내 가까이 교룡(蛟龍)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태기(胎氣)를 느끼고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유방이라고 합니다. 바로 용의 아들이죠.

일본의 국사(國師)라고 불리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이 광경에 대하여 교룡이 제방 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방의 어머니와 정(情)을 통하고 있었으며, 그 교룡이라는 것은 보나마나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온 건달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유방이 태어난 곳이 패(沛)현인데, 이 패(沛)라는 말이 바로 늪지대라는 뜻입니다. 늪이 많은 곳이다 보니 여기저기에 많은 갈대밭도 있을 것이고 사람들이 은신하기도 좋아서 바람피우기도 좋은 곳이기도 한 모양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유방의 아버지가 유방을 좋아했을 리가 없지요. 유방은 막둥이로 태어나 집에 정도 붙이지 못하고 문제아로 전전하다가 나이 30이 넘어서 하급공무원이 됩니다. 나이 40이 지나서 항우의 삼촌인 항량(項梁)의 진영에 참가하면서 군인으로서 출세가도에 접어들고 후일 한나라의 시조가 됩니다.

어쩌면 유방의 일생은 가장 드라마틱합니다. 마치 ‘절망은 없다’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 같습니다. 참담한 역경 속에서 굴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고난을 오히려 인생의 기회로 바꾸고 인생의 쓰라린 경험들을 바탕으로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드디어 중원 천하의 주인이 됩니다. 역설적으로 가장 문제 많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그것을 제대로만 극복하면 가장 위대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마치 더러운 뻘밭에 연꽃이 피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용으로 형상화된 것은 아닐까요?


(1) 용이 되고 싶은 사람들

(龍)이란 상상의 동물인데 생긴 모양으로 보건대 파충류인 듯하고 모양은 큰 뱀과 같고 몸에는 비늘이 있으며 두 개의 뿔과 네 개의 발, 그리고 눈과 귀가 있고 날개가 있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용은 비룡(飛龍)ㆍ조룡(鳥龍)ㆍ교룡(蛟龍)ㆍ사룡(蛇龍) 등의 5종류가 있고 용이 주로 사는 곳은 못이나 바다 속이며, 때로는 공중을 날기도 하고 비ㆍ구름ㆍ바람 등을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용을 숭배하는 것에 대하여 고대 인도인들의 부족 가운데 일부가 용을 숭배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아시아 일대에 퍼졌다고 하기도 합니다. 나관중 ‘삼국지’에 바로 이 용(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관중 ‘삼국지’에서 가장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부분입니다.

당시 유비는 동승과 조조 암살모의에 가담했지만 심히 걱정스러웠겠지요. 황제가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조조가 유비를 융숭하게 대접하고 있고 또 그만큼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비는 도처에 있는 조조의 심복들이 눈치 챌 것을 두려워하여 일부러 채소밭을 만들어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 작은 농사를 짓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가운데 조조가 사람을 보내어 유비에게 술 파티(주연: 酒宴)를 열지요.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였는데 갑자기 하늘에 검은 구름이 하늘 한편에서 일어나더니 삽시간에 하늘 전체로 퍼졌습니다. 하늘은 바람이 거세게 불어 마치 금방이라도 장대 같은 소나기가 퍼부을 듯한 기세였는데 술 심부름하던 하인 하나가 하늘을 가리키며 용(龍)이 하늘로 오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조조와 유비가 하늘을 바라보니 마침 검은 구름 사이로 굵고 새카만 용의 모습이 하늘로 오르고 있었죠. 이 때 조조는 유비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용은 그 몸의 크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영물이요. 뿐만 아니라 자유자재로 숨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지요. 용이 몸집을 커졌을 때는 하늘의 안개를 토해낼 정도이고, 아주 작아졌을 때에는 물고기의 작은 비늘만큼 밖에 안 되오. 용이 한번 하늘을 오르면 우주 사이를 종횡무진 날아다니기도 하고, 자기 몸을 감출 때는 파도 속으로 잠겨버리기도 합니다. 지금은 한창 봄철이라 용이 운신하기가 가장 좋은 계절인가 보오.”

이 말은 조조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용에 대한 중국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정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요. 일단 용의 특성은 주로 날씨의 변화가 심한 봄철에 나타난다는 점, 우주를 종횡 무진할 정도로 빠르다는 점, 변신을 자유자재로 한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용에 비유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혼란기에 나타나며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사람이겠지요. 그러면서도 온 천하를 다니면서 지지 세력을 모으는 그런 사람이겠지요.

제가 말씀 드린 대로 이 부분은 나관중 ‘삼국지’에서 가장 신비한 부분이라고 했는데 이 부분은 정사의 기록과 거의 내용적으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다만 당시 조조가 유비와 함께 술을 마시는데 용이 나왔다는 말만 없을 뿐이지요. 그러나 당시 조조와 유비는 천하의 영웅들, 즉 누가 용이 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지요. 그러니 나관중 ‘삼국지’의 편찬자들은 이 대목을 매우 드라마틱하게 꾸미기 위해 용을 등장시킨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조조와 유비는 용이 되려고 하던 사람이었는데 조조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숨길 필요가 없었고, 유비는 용이 되고 싶은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가는 암살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조가 “천하의 영웅은 그대와 나밖에 없소” 라고 하자 유비는 자기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수저를 땅에 떨어뜨립니다. 유비가 조조의 말을 멋모르고 인정하다가는 살아남기가 어렵기 때문에 순간적인 기지(機智)를 발휘한 것입니다. 이것은 유비가 분명히 용의 기상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내용은 정사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양고약허(良賈若虛), 즉 정말 장사꾼은 절대로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는 법이 없다는 말이지요. 마치 유비가 속으로는 경멸하면서도 여포를 따뜻하게 대하여 여포가 홀딱 빠진 것을 보면 참으로 변화무쌍한 용의 기상이 유비에게 보입니다(그러나 저는 이런 사람을 친구로 두고 싶지는 않네요). 용은 또한 비바람 속에 나타나 결정적인 순간 하늘로 오르듯이 자기에게 온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지요. 마치 유비가 황제에 오를 기회가 생기자 앞뒤를 보지도 않고 황제에 오르는 것과도 같습니다.

세상에는 용이 되고 싶어하면서 용의 기상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매우 드물게 용이 되고 싶은 욕망과 기상을 모두 가진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삼국지’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용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지만 제가 보기에 용의 기상을 가진 사람은 가히 조조와 유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어, 용(龍)이 상상의 동물이 아니네요

그런데 나관중 ‘삼국지’는 소설이니 상상의 동물인 용(龍)이 나올 수도 있는데, 문제는 정사에도 용의 이야기가 다수 나온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당시 사람들은 용을 단순히 상상의 동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는 말도 됩니다. 정사에 나타난 용에 대한 기록들을 먼저 봅시다.

위서에 나타난 기록들입니다.

220년 황룡이 초현에 출현하자 은등(殷登)은 단양(單?)의 말이 증명되었다고 말했다. (즉 176년 황룡이 초현에 출현하자 태사령 단양이 왕이 출현할 것이며, 50년 후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 위서, 문제기

256년 정월 24일 청룡이 지현의 우물 속에 나타났다. - 위서, 삼소제기

256년 6월 20일 청룡이 원성현(元城縣)에 나타났다. - 위서 삼소제기

257년 2월 청룡이 온현(溫縣)의 우물에 나타났다. - 위서 삼소제기

259년 황룡 두 마리가 영릉현 우물 속에서 나타났다. - 위서, 삼소제기

260년 12월 6일 황룡이 화음현의 우물 속에 나타났다. - 위서 삼소제기

다음으로 촉서와 오서에 나타난 기록들입니다.

220년 태부 허정 등이 상소를 올려 말했다. 최근 무양현(武陽縣) 적수(赤水)에 황룡이 출현했다가 9일 만에 사라졌습니다. - 촉서, 선주전

229년 4월 하구와 무창에서 황룡과 봉황이 출현했다. - 오주전

정사는 아시는 바와 같이 엄정한 사실을 토대로 사관이 편찬한 것인데도 용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에는 용이 상상의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당시 사람들이 어떤 현상을 보면서 용의 존재를 보았을까요? 만약 용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지금도 우리는 용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보기에 용의 기록이 나타난 것은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상상의 동물인 용의 형상과 유사한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옛날 사람들이 용을 생각하게 된 것은 깊은 바다나 호수 속의 대형 어류나 또는 봄철이나 바다에서 일기의 불순으로 나타나는 ‘용오름 현상’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래에서 용오름 현상에 대한 사진을 먼저 보시죠.

어떻습니까? [그림]을 보면 용이 하늘로 오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용오름 현상은 땅 위로 좁고 길게 뻗쳐 마치 깔때기 모양으로 보이는 공기의 강한 소용돌이입니다. 이 소용돌이는 땅이나 바다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아래의 물체를 사정없이 빨아올려 땅에서는 먼지와 쓰레기 등이 바다에서는 물방울이 위로 솟구쳐 용의 형상이 더욱 강해지게 되는 것이죠.

용오름도 육지에서 발생한 것은 토네이도(tornado), 바다에서 발생하는 것을 워터스파우트(waterspout)라고 구분합니다. 이 신비한 자연현상은 태풍이 접근할 때나 한랭 전선이 통과할 때, 뇌우가 몰아칠 때 등 대기층이 급격히 불안정한 상태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대기가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일부 지역에서만 대기층이 강하게 소용돌이치면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죠. 평원에서 발생하면 주로 황룡으로 보이겠고, 바다에서 발생하면 주로 청룡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특히 바람은 거세기 때문에 가까이 갈 수 없으니 용을 보았다고 한들 과거에는 반론하기가 어렵겠지요.

용이 우물에서 나타났다는 기록들은 아마도, 우물은 대개 마을 가운데 있는데 용오름 현상 자체가 강한 상승기류이므로 이것이 우물을 지나게 되면 물이 밖으로 솟구치고, 주변의 나뭇잎이나 흙먼지들이 위로 오르니 사람들은 용이 하늘로 오르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정사에 나타난 용의 기록은 우리를 의아하게 합니다. 단순히 용을 보았으니 그렇게 기록한 것일까요?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 용의 기록이 나타난 시기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사에 나타나는 용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왕조가 바뀔 때(나라를 새로 건국할 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지요. 즉 위나라를 건국한 조비가 등극한 것은 220년인데 이 때 황룡이 출현하고 있죠. 그리고 사마염이 진(晋)나라를 건국하는 것은 265년인데 이 시기를 전에 지속적으로 용들이 나타나지요. 촉의 경우도 유비가 황제에 등극하는 해(221) 바로 전에 용이 나타납니다. 오나라의 경우도 손권이 황제를 칭할 때(229) 용이 나타납니다.

흔하지는 않겠지만 자연에서 나타날 수 있는 용오름 현상을 굳이 황제의 등극을 전후로 하여 사관들이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홍보용으로 정부 기관이 공식적으로 퍼뜨린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정치적 격변기나 혼란기에는 평소에 보더라도 별다른 생각을 가지 않던 자연현상에 대하여 사람들이 이슈화하는 경우가 많지요. 평소에 용오름 현상을 보았으면 “그래, 봄이면 저런 일이 있더군.”라고 할 것을 국가적 대사를 앞둔 상태에서는 용이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니 새로운 천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현재의 경우에도 이런 식의 여론 조작들은 많이 있을 수 있죠). 요즘 같으면 TV로 각종 방송국들이 달려들어서 야단법석을 떨면서 취재하겠지만 과거에는 주로 입소문에 의지하기 때문에 ,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지장이 없겠지요. 위서(魏書)의 경우를 보면 매우 띄엄띄엄 용의 기록들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은 신왕조(사마염의 진나라) 개창이 쉽지는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한 마디로 용의 출현이 황제의 등극을 홍보하기 위한 고도의 계산된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용과 이무기

일단 용(龍)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용에 대해서 좀 알아봅시다. 용이란 주로 천자, 즉 황제를 말합니다. 황제(皇帝)는 시황제가 최초로 사용한 말로서 중원(中原)을 점령한 천하의 주인을 지칭하는 말이라 우리나라는 구한말까지 황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했지요. 만약 우리나라 임금님이 황제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이것은 중국이 주도하고 있는 천하질서에 대한 정면도전이 되므로 중국과의 한판의 싸움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게 좋은 것이려니 하고 그대로 인정하며 살았던 것이죠.

중국 역사에 나타난 황제는 모두 406명으로 매우 많습니다만, 성군으로 꼽히는 황제는 열 손가락 정도에 불과합니다. 특히 한족의 오랜 숙원으로 세운 명나라는 227년간 16명의 황제가 있었는데 태조와 성조를 제외하면 성군으로 불리는 사람이 없습니다(이 명나라는 조선의 선비들이 오매불망 따르고자 했던 왕조지요). 용의 진정한 의미는 용 노릇을 잘해야 하는데, 거죽만 용이고 그 내용은 뱀장어나 미꾸라지보다 못한 황제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얘기지요.

용이든 미꾸라지든 황제는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어 경우에 따라서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당나라 소종(昭宗: 재위 901~903)은 술에 만취하면 궁녀를 한 명씩 죽이고 살해한 뒤 태연히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고 합니다. 더욱 무서운 일은 자신의 비빈을 순장(殉葬)한 황제도 비일비재했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아, 순장제라면 청동기 시대의 고대국가에서 있었던 것을 말입니까?” 하시겠지요. 아닙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청동기 시대가 아니라 바로 4백~5백 년 전의 일입니다. 원래 순장제는 2천년 전 진(秦)나라 이후 없어졌는데 명나라 태조가 자기의 비빈(妃嬪) 46명을 함께 매장하라고 유언(遺言)한데서 다시 시작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명나라 영락제가 죽은 후(1424년) 궁인 30여명이 순장되었다. 이 날 궁 안은 울음소리로 천지가 진동했다. 궁 안의 뜰에 작은 나무 받침이 놓여지고 궁인들은 그 위에 서서 목에 밧줄을 걸었다. 목을 걸면 이내 나무 받침이 치워지고 곧 목이 매달려 죽었다. 죽은 궁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조선에서 왔던 한비(韓妃)였는데, 그녀는 죽기 전에 유모에게 ‘유모, 그러면 난 갈께.’ 라고 하기 무섭게 그녀의 목이 걸리고 이내 숨이 끊어졌다(세종실록).”

과연 황제의 권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황제가 불합리하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순장은 아마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만행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건국 시조를 제외한 대부분의 황제들은 주색잡기(酒色雜技)로 세월을 보내어 황제들의 평균 수명은 마흔(40)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는 명나라의 만력 황제는 후궁에 칩거하여 20여 년을 보내면서 국사(國事)에 신경을 쓴 일이 없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일은 중국을 지배한 여러 왕조 가운데 우리 민족과 인종적으로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청나라의 경우, 성군(聖君)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 그 원인은 한족과 같이 장자(長子: 맏아들)나 적손(嫡孫)에 의해 황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황제들이 ‘덕이 있는 사람’이 황제에 오른다는 원칙만 있었고 건륭제 이전까지는 황태자를 결정하지 않은 채 황제가 사망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옹정제 때에는 황제가 황자들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비밀리에 친필로 황태자의 이름을 써서 황궁의 가장 높은 곳에 보관해두었다가 황제가 죽으면 개봉을 하는 황태자 비밀결정제도가 채택됩니다. 쉽게 말하면 예비 용들을 완전 경쟁시킨 것이죠. 청나라의 강력한 힘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2004년 미국에는 용들의 싸움이 한창입니다. 대통령 선거의 해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용들의 싸움을 보면서 우리가 배울 점이 참으로 많다고 생각합니다. 용이 정말 용같이 싸우고, 지면 이슬처럼 깨끗이 사라져간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새로운 용을 중심으로 대단결하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부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이 미국의 저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이 제 때를 잘 만나 하늘로 오르지 못하면 이무기(?)가 됩니다. 문제는 용이 구름과 비, 바람을 거느리고 있듯이 군주이거나 또는 예비 군주인 용(龍)은 항상 무리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원래 정치라는 것이 실질적인 생산부문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판의 절반은 실업자 또는 예비 실업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 무리들은 용이든 이무기든 상관이 없지요. 무슨 수를 쓰든지 이무기를 다시 하늘로 올릴 수 있다고 광고도 해야 하고, 신화도 만들면서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밥벌이도 해야 합니다.

그러니 용 자체보다도 용이 거느리는 이 무리들로 인하여 나라는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정치적 명분의 내면에는 결국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깔려있는 것이죠. 만약에 한 나라에 예비 용이 세 마리면 나라는 세 개로 나뉠 것이고, 10마리이면 나라가 10개로 나뉠 수밖에 없지요. 다시 말해서 용 또는 이무기가 많을수록 세상이 시끄러워진다는 얘기지요. 제가 보기에 이무기(예비용)들은 한 나라에 두 마리 정도가 적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용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모일 필요가 있지요. 예비용이 세 마리면 정치 세력의 안정성이 강화되어 국가의 분열이 장기화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승천(昇天)에 실패한 용은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4) 황제를 위하여

이제 용이 탄생하는 과정을 이 분야의 유명 저서인 엄가기(嚴家其)의 ‘수뇌론(首腦論)’을 토대로 재구성하여 간단히 살펴봅시다. 용은 기본적으로 시련(출생문제, 빈곤) → 정치 입문 단련 기회 포착 용이 되기 위한 조건 확보 상징선택 용의 일상(정보의 홍수) → 통치예술 단계 용의 계승 등의 과정을 거칩니다. 중국의 역사에서 이 과정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완벽하게 살아간 사람은 유방(劉邦)과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이었습니다. 모택동은 현대의 유방인 셈이죠(이것은 다른 기회에 다루지요).

용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황실의 혈통을 가졌거나 실력이 있거나, 뛰어난 정보 통제 능력이 있거나 아니면 자기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정확하게 잡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혈통적으로 용이 되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일단은 능력을 최고화하고 행동에 주의해야죠. 진(秦)나라의 재상이었고 진시황의 실제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여불위가 찬집한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지요.

“용은 맑은 물을 먹으며 맑은 물에서 놀고, 이무기(?)는 맑은 물을 먹고 흐린 물에서 논다. 용은 분명히 맑은 물에서 태어나 맑은 물에서 놀지만, 그가 다스리는 수많은 물고기(魚)는 흐린 물에서 태어나 흐린 물에서 먹고 흐린 물에서 논다(龍食乎淸而游乎淸 ?食乎淸而游乎濁 魚食乎濁而游乎濁).”

이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용이 되려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 합니다. 구체적으로 이무기들은 큰 뜻을 품어야 하지만 온갖 어려움과 고초를 겪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많은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면 용이 될 수 없지요. 일단 용이 되면 이무기(예비용)처럼 정치 자금을 모은다거나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굽실거릴 필요가 없어지지요. 그러나 용이 되고 난 뒤에는 그만큼 도덕성을 지닌 공인(公人)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유럽이나 미국같이 성도덕(性道德)이 문란한 사회에서도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에 대한 외도(外道)는 용납이 안 되는 것은 적어도 용이 되려면 고도의 절제력을 가져야만 한다는 말이죠.

용이 된 사람들 가운데는 혹독한 시련을 거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방의 경우나 주원장(명 태조)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엘리자베스 1세도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라는 엉터리 죄명으로 참수된 뒤 궁정의 복잡한 세력다툼의 와중에서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고, 이후 반란 혐의를 받아 런던탑에 유폐(1554년)되는 등 고난의 소녀 시절을 보냈지요. 약간은 다른 얘기지만 악명 높은 히틀러도 20살 되던 해의 크리스마스 때 완전히 홈리스(homeless: 노숙자)가 되었고, 마지막 옷을 전당포에 잡힌 채 넋을 잃고 방랑자의 수용소로 갔다고 합니다.

용이 되기 위한 조건은 ㉠ 정치에 종사한 경험이 있어야 하고, ㉡ 전국적 명성을 얻어야 하며, ㉢ 확고한 의지와 행동력 등을 들 수 있죠. 유비의 경우에는 아무런 자산이 없는 상태에서 이 세 가지를 훌륭하게 소화해냅니다. 유비는 하급 직위지만 지속적으로 정치가로서의 경력을 쌓았고 ‘한실중흥’이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패배를 내심으로는 결코 인정하지 않는 불패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은 용(龍)이 될 것이라는 확고한 의지를 가졌죠.

용이 되려면 일정한 기반을 잡고 난 뒤 자기 자신이 전국적인 명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상징(Symbol: 홍보 심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아이젠하워는 전쟁영웅을 선택한 것이죠. 이것이 전국적인 지지를 모을 수 있는 마지막 단계입니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려면 그 나라의 어느 시골 장터에 가서라도 땅바닥에 물건을 파는 아낙에게 이름을 말해도 알 수 있어야 하는 단계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유비는 한실부흥이라는 상징이 있었고 조조ㆍ조비는 중원통일이라는 상징이 있었지만, 손권은 별 달리 상징을 선택하지 못했죠. 그러니 황제 등극도 10년이 뒤지게 됩니다. 정치적 명분이 없었던 것이죠(우리나라는 동서화합?깨끗한 정치ㆍ지역균형발전ㆍ신시대의 비전 등을 추천할 만합니다).

전쟁에는 정치전(政治戰: 정치적 명분 싸움), 군사전(軍事戰: 군사적인 전쟁) 등의 두 범주가 있습니다. 정치전의 승리는 군사전의 승리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베트남 전쟁이죠. 유비의 경우에는 군사전에서는 도저히 조조를 이기기 힘들므로 정치전에 집중하였고, 이것이 당대의 일부 지식인들과 후세 중국인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죠. 용이 되려면 자신이 군사전(물량전)에 강한지 정치전에 강한지를 먼저 냉정히 봐야 하겠지요.

대개의 경우 어렵게 용이 되는데 용이 된 후에도 매우 어려운 날이 계속됩니다. 황제들은 이전과는 달리 정보의 홍수, 사람의 장막 속에서 살아야 하는데 누구의 말이 맞는지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지요. 그래서 젊은 날 경험과 학식을 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조조는 자신이 공부하여 참모들의 의견을 듣는 편이었고 유비나 손권은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죠. 황제(용) 노릇을 제대로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를 명나라 태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짐은 매일 편안히 기거하지만, 천하의 일을 생각하니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마치 실을 만지는 일과 같다. 실 한 오라기가 잘못되면 민중의 분란이 일어난다. 그러니 정책을 시행할 때는 깊이 생각하고 검토하여 행하고 이 일을 소홀히 하면 백성들에게는 재앙이 되고 만다. [태조보훈(太祖寶訓)]”

실제로 용이 되는 것보다도 용이 되고 난 뒤의 용 노릇을 제대로 하기가 더욱 어려운 법입니다. 세상의 군주 가운데는 정권을 잡을 줄만 알았지 그 정치를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는 않는 듯합니다.

군자(君子)는 남을 책망함에 있어서는 인(仁)으로써 하고, 자신을 책망함에 있어서는 의(義)로써 한다(君子責人則以仁 自責則以義)라고 합니다(‘여씨춘추’). 즉 정치가는 타인에게는 관대하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한 도덕률을 적용하라는 말이지요. 이런 자질과 함께 용이 되려는 자는 물이 한없이 맑으면 고기가 없다, 즉 ‘수지청(水至淸則無魚)의 원리’도 깨달아야 합니다. 즉 용(龍)은 물고기들에게도 지나치게 맑은 물에서 놀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애기지요. 보통 폭군들은 반대로 합니다. 자기는 엄청 타락해 있으면서 국민들에게는 도덕을 강조하죠.

물고기처럼 살아 온 사람이 용이 되려고 하면 자기도 죽고 나라도 망치게 되지요. 대표적인 경우가 ‘삼국지’의 원술(袁術)의 경우이고 근세사에서는 원세개(위안스카이, 袁世凱: 1859~1916년)입니다.

용이 되려면 하염없이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데 원술은 그러지를 못하였지요. 사실 원술은 당대 최고 명문의 자손이었지요. 원술은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의로운 협객의 기질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기 192년 원술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합니다. 후궁 수백 명이 모두 화려한 옷을 입었고 매우 많은 식량을 낭비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병사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강회(江淮) 지역 일대에서는 식량이 떨어져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위서, 원술전).

이 당시에는 한황제가 있었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원술의 행위는 명백한 반역이었고, 결국은 모든 제후의 공동의 적이 되어버립니다. 많은 용들이 보이면 머리를 꼿꼿이 들지 않는 것이 길하다(見群龍無首 吉 : 周易 乾卦)는 것이죠. 즉 여러 명의 이무기(예비 용)들이 싸울 때는 먼저 표적이 되는 것은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정치 명문가에 태어난 사람이 큰 정치인이 되기 힘든 이유도 바로 이것이지요. 여러 마리의 이무기가 있을 때 누구든지 그 상황을 좀더 단순하게 바꾸어 가려고 할 것이고, 한 명이라도 문제를 가장 크게 일으키는 공동의 적에 대하여 나머지 이무기들이 집중 공격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동탁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제후들의 집중 포화를 받은 원술은 여포에게도 패하고 조조에게도 패하여 투항하려 했으나 거부당하고 결국 도로에서 죽고 맙니다.

청나라 말기 내각총리대신이었던 원세개는 손문(孫文)의 혁명파와 교섭하여 황제를 퇴위시키고 자신이 임시 대총통에 오릅니다. 손문이 중국의 안정을 위해 양보를 한 것인데 원세개는 오히려 손문을 탄압하고 자기가 황제에 오르려고 획책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반민족적 밀약(1915년)을 맺습니다. 다음해는 원세개는 황제에 취임하였다가 국민적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자기도 화병으로 죽지요.

이와 같이 용이 되려는 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가지고 민심(民心)에 대해 항상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쉼 없이 갈고 닦아야 하지요. 이 점에 있어서 조조나 유비, 손권은 용이 되기 위해서 상당히 모범적인 수련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용들에 대한 많은 복잡한 얘기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용(龍)과는 거리가 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만델라, 케말파샤, 김구(金九), 세종대왕, 호지명(胡志明), 손문(孫文), 간디, 워싱턴(Washington)은 될 수 없을지라도, 이런 분들을 민족 지도자나 대통령으로 추대하면 되는 일입니다. 왜 굳이 ‘내’가 해야 할까요? 오로지 ‘나’만이 용이 돼야 한다는 아집을 가진 사람치고 용 노릇 제대로 하는 경우를 보기 어렵지요.


출처 : 올드뮤직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