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1>

영지니 2010. 4. 15. 19:32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1>

사실과 소설 : 나관중 '삼국지' 만들기


[
들어가는 글]


유리( )에 가면

 

노태맹(1962~)

 

그대 유리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지

먼지처럼 가볍게 만나

부서지는 햇살처럼 살자던 그대의 소식 다시 오지 않고

유리에 가면 그대 만날 수 있을까,

봄이 오는 창가에 앉아 오늘은

대나무 쪼개어 그대 만나는 점도 쳐보았지

유리 기억 닿는 곳마다 찔러오던 그 시퍼런 댓바람,

피는 피하자고 그대는 유리로 떠나고

들풀에 허리를 묶고 우리 그때 바람에 흔들리며 울었었지,

배고픈 우리 아이들

바닷가로 몰려가 모래성 쌓고

빛나는 태양 끌어 묻어 다독다독 배불렀었고,

그대, 지금도 유리에 가면 그대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이제 아프지 않고 절망하지도 않아

물 마른 강가에 앉아 있다던 그대와

맑은 물이 되어 만날 수도 있을 텐데

어쩌면 그대는 유리를 떠나고

유리엔 우리가 살아서 

오늘은 그대가 우리를 만나러 오는

시퍼런 강이 되기도 하겠지만



‘유리()’란 삼천백 여 년 전 은(殷)의 폭군 주왕(紂王)이 문왕(文王)을 가둔 감옥입니다. 문왕은 주(周)를 건국한 무왕(武王)의 아버지로 유리에서 복희(伏羲)씨가 그린 ‘팔괘(八卦)’를 처음으로 연역(演易)‘하였는데 이것이 주역(周易)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 세계를 봅니다. 우리는 그 지식을 통해서 지식을 만들어 내지요. 그러나 우리가 찾는 진리가 그 지식 밖에 있을지, 그 안에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찾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뫼비우스의 띠 속을 맴도는 것은 아닐까요? 많지 않은 기록으로 사실을 규명해 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중국인들의 시각으로 기록되어있다는 사실, 이것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것은 때로 우리를 관념 속의 유리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우리가 유리 밖으로 뛰쳐나와도 또 다른 유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죠. 차라리 우리 의식의 유리를 깨뜨리는 것은 어떨까요? 


(1) 사실과 소설 

최근 들어서 우리나라에서는 사극(史劇)의 인기가 높았습니다. 사극은 역사적인 이야기에 기반을 두되, 상당한 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사극을 보며 종종 실제 역사라고 오해한다는 점이죠.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등장인물들이 과거에 실존했던 사람들이고, 상당한 부분이 실제 있었던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중들에게는 TV 사극 드라마가 역사책이나 전문서적보다는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저와 같이 항상 책으로부터 탈출하기 힘든 사람들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은 책으로 보다는 재미있는 영화나 TV 드라마를 통하여 지식을 쌓기도 할 것입니다. 만약에 중국의 유명 사극 ‘포청천’이 같은 이름의 논문으로 나왔더라면 누가 보기라도 하겠습니까? 

최근 TV 사극이 대중들의 역사 지식과 인식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점을 우려하여 역사전공 교수들이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그분들에 의하면 “사극이란 애당초 허구적인 상상력이 허용되는 문학의 세계에 속한 것인데, 사극이 펼치는 역사를 객관적 사실로 믿는 사람이 많다는 현실은 절망적”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요즘만의 일일까요? 과거에는 더욱 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즘은 자기가 관심만 가지면 이것저것 찾아보고 비교할 수도 있지만 과거에는 글도 모르는 사람이 95%가 넘었을 것인데 역사적 진실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나는 사건들의 사실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물론 진수의 ‘삼국지’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후한서(後漢書)’, ‘진서(晉書)’, 사마광의 ‘자치통감’ 등이 2차적인 자료입니다. 그 나머지는 다만 참고로 할 수 있을 정도이지 그것이 사실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지요. 설령 다른 책들에서 어떤 내용들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2차 자료나 진수의 삼국지에서 검정을 받지 못하면 그것은 사실로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이들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2) 나관중 ‘삼국지’ 만들기 

나관중 ‘삼국지’는 소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단순히 소설로 읽지 않게 된 이유는 수백 년에 걸쳐서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소설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 대단히 정교하고 치밀하게 소설화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일반인들이 보았을 때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청나라 때 역사학자인 장학성(章學誠)은 사실과 소설을 혼동하는 부분에 우려하면서 “삼국지는 70%는 사실, 30%는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독자들이 이것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그러면 나관중 ‘삼국지’는 어떤 방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소설화했는지를 알아봅시다. 

실제의 사건을 추론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이 부분은 소설가들의 권리이기도 합니다. 실제의 사건이 있을 때 그것의 전후 관계를 추론하여 독자들에게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자주 쓰는 수법이죠. 대표적인 것이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桃園結義)나 적벽대전 당시 황개(黃蓋)의 고육지책(苦肉之計) 등입니다. 황개의 고육지계는 다른 기회에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도원결의에 대해 상세히 알아봅시다. 

도원결의는 매우 유명한 사건으로 ‘삼국지’하면 으레 도원결의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봄이 무르익고 복사꽃이 만발하여 흐드러져 있고 여기저기 바람 따라 복사 잎들이 날릴 때 검은 소와 흰말을 제물로 하여 세 사나이는 제단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향을 피운 후 미리 준비한 축문을 읽습니다. 그 축문의 대체적인 내용은 “우리 세 사람은 피는 나누지 않았지만 형제의 의를 맺으니 마음을 같이하고 나라를 구할 것이니 천지신명(天地神明)이여, 굽어 살피소서.” 입니다. 

그러나 정사(관우전·장비전·유엽전)에서 장비가 관우를 형으로 대접하였다거나,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특히 신뢰하여 세 사람은 마치 형제와 같았다거나, 때에 따라서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 같았다는 등으로 되어있지요. 유비ㆍ관우ㆍ장비는 긴 세월을 함께 했으며 대체로 비슷한 환경의 불우한 청년들이었던 까닭에 의기가 투합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쟁터를 함께 누비면서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는 점이 중요하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전쟁터에서 생사를 같이 한 전우(戰友)는 가족 이상의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도원결의라는 의식을 통해서 이들의 우정이 유지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오히려 부족하죠. 전쟁터에서는 누가 말려도 가족 이상의 존재가 되기 쉽지요. 특히 어려움이 많을수록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드라마는 드라마 아니겠습니까?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도원결의라는 형식을 보여줌으로써 더욱 이 소설에 빠지게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의 최후도 이에 결부시키려 하고 있지요.  

의형제를 맺는 관습은 북방 유목민들 사이에서 뚜렷하지요. 아마도 살기가 어려운 환경에서 의형제를 맺게 되는가 봅니다. 이것을 ‘의제가족(擬製家族)’이라고 하는데 요즘도 많이 있지요. 제가 보기에 의제가족은 안정된 직장인들에게서 보다는 주로 연예계나 정치판과 같은 변화무쌍한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송나라ㆍ원나라 대에 나관중 ‘삼국지’의 전신이 되는 이야기들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 시기에 군인이나 도적·상인들 사이에 의형제를 맺는 일이 널리 퍼져있었다고 합니다. 이 시대에는 북방의 유목민들이 집중적으로 중국으로 남하하는데 의형제를 맺는 관습들은 이들에 의해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중국에서도 의형제를 맺는 경우는 정사에도 나타납니다(위서, 공손찬전 인용문). 재미있는 것은 중국인들은 나관중 ‘삼국지’ 때문에 의형제와 같은 의제가족 문화가 더욱 발달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도 그 행위자를 바꿔치기 하는 방법을 사용하거나 잘 만들어진 등장인물의 이미지에 맞지 않으면 빼기도 합니다 

행위자를 바꿔치기하는 경우는 매우 많지만 대표적인 경우를 들자면 유비가 중앙에서 파견 나온 감찰관을 혼내는 부분입니다. 즉 나관중 ‘삼국지’에는 유비가 안희현 현위로 재직 중에 장비가 중앙 감찰관을 두들겨 패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도 사실은 유비가 한 행위지요. 정사에 “유비는 중앙감찰관이 공무로 왔을 때 유비가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거절 당하자 유비는 직접 안으로 들어가 그를 묶고 곤장 2백대를 때렸다”고 합니다(촉서, 선주전). 유비의 도덕군주적인 속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나관중 ‘삼국지’의 편집 의도이기도 한데 유비가 중앙감찰관을 패는 장면은 맞지 않으므로 이를 장비가 대신하는 형태로 바꾼 것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미지에 맞지 않은 부분을 뺀 것은 관우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관우는 충의지사에 도덕군자의 이미지가 강한데 정사의 관우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지요. 예를 들면, 정사의 주석에서 인용한 촉기(蜀記)에 “(관우는 유비가 조조군에 합류하여 여포를 궤멸시킨 후) 관우는 조조에게 여포의 부하 중의 하나인 진의록(秦宜祿)을 구해달라고 하고 진의록의 처를 자기에게 달라고 조르자 조조가 이를 허락했다(촉서, 관우전 : 布使秦宜祿行求救, 乞娶其妻, 公許之)”는 말이 있습니다. 이 대목은 요즘 가치관과는 완전히 다르고 여성 독자들에게는 심히 불편한 말이지만 당시에는 여성들이 전쟁의 전리품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당시 관우의 행위 자체가 부도덕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관우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니 내용에서 뺀 것이죠.  

유비의 경우에도 이 같은 일은 비일비재하지요. 다만 독자들이 접하기 어려운 부분 중에 하나만 골라서 말씀 드리죠. 유비가 촉(蜀漢)을 세우고 황제로 등극할 때의 일입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객관적인 정세가 유비가 황제로 등극하기에는 무리였습니다. 왜냐하면 겨우 한 주 정도가 되는 지역을 차지했고 한나라 헌제도 살아있는 마당에 중원 땅도 아니고 첩첩 두메산골에서 황제로 등극한다는 것이 좀 심하지 않습니까?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이 대목이 멋있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유비의 신하들은 열화같이 유비가 황제에 올라야 한다고 주청을 하자, 유비는 “내 비록 경제의 후손이라 해도 아직까지 덕을 펴지 못했소. 그러고서 황제에 오른다면 역적들과 무엇이 다르겠소?” 하지만 결국 신하들에 떠밀려서 황제에 오릅니다(나관중 ‘삼국지’). 그러나 당시 전부사마(前部司馬) 비시(費詩)는 상소를 올려 “지금 강대한 적을 아직도 이기지 못하고 있는데 즉위하시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 쉽지 않습니까? 옛날 한 고조께서는 초(楚)와 약정을 하여 진나라를 격파시킨 사람을 왕으로 칭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전하께서는 문 앞으로 나가지도 않고 황제에 오르려 하십니까? (촉서, 비시전)” 라고 합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비시는 좌천되었지요(그래도 죽이지 않은 것은 진수의 말처럼 유비의 도량이 컸기 때문이겠죠?). 이 대목이 나관중 ‘삼국지’에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정확한 사망 원인의 기록이 없을 때는 적당히 주인공의 묘사에 사용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양수(楊脩)와 유복(劉馥), 왕랑(王郞)의 예입니다. 나관중 ‘삼국지’에 묘사된 내용과 사실을 봅시다. 

219년 여름 조조는 유비와 한중에서 대치하고 있는데 조조가 한중을 점령하자니 실익이 없는 땅이고, 버리자니 아까워서 그날 밤 암호를 ‘닭갈비(鷄肋)’라고 정했습니다. 양수는 조조의 마음을 읽고 철수 준비에 들어갔으나, 이를 들은 조조는 격노하여 양수를 군대를 혼란 시켰다는 죄명으로 목을 베어버립니다(나관중 ‘삼국지’).  

그러나 실제에 있었던 일은 조조가 한중으로 간 것은 219년 3월의 일이고 5월에 철수합니다. 그런데 양수는 제후들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죄명으로 219년 가을에 죽임을 당합니다. 즉 양수와 닭갈비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애기죠. 조조는 양수같이 자기의 마음을 다 읽을 수 있는 똑똑한 사람들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식으로 묘사하여 조조의 고약한 심성을 부각시키려 한 것이죠.  

208년 적벽대전 전날 밤, 조조는 술자리를 열어 문무관원들을 모으고 긴 창을 들고 술을 마시며 유명한 시를 읊습니다. 이 시를 횡삭부시(橫?賦詩)라고 합니다. 이 술 자리에서 유복은 그 시구 가운데 “달빛은 밝고 별빛은 사라지니 까마귀 울며 남으로 날고, 세 바퀴나 나는데 둥지 틀 가지도 없구나.”가 불길하다고 말하자, 조조는 “네놈이 감히 나의 흥을 깨려 드는구나.”하고 손에 든 창으로 유복을 찔러 죽입니다(나관중 ‘삼국지’).

그런데 정사에는 유복이 조조를 따라 적벽을 간 내용은 없을 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했다는 말도 없지요. 다만 208년에 죽었을 뿐이지요(위서, 유복전). 그런데 공교롭게도 죽은 해가 적벽대전과 일치하여 나관중 ‘삼국지’의 편찬자들이 유복을 끌어들여 조조의 잔인성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229년 제갈량이 처음으로 위나라를 공격할 때 위나라는 대장군 조진을 대도독에, 왕랑을 군사(軍師)로 각각 임명하여 기산에서 대치합니다. 군사회의 석상에서 왕랑은 자기가 단 한마디로 제갈량을 투항시키겠다고 큰소리칩니다. 그런데 제갈량이 “너희는 한실을 배반한 역적놈들이다. 네놈이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한나라 스물 네 분의 황제를 보겠느냐?” 라고 꾸짖으니 왕랑은 분노와 수치로 가슴이 막혀 말에서 떨어져 죽습니다(나관중 ‘삼국지’).  

정사에 따르면, 왕랑은 조진의 군사를 지낸 적도 없으며 제갈량과 대진한 적도 없지요. 문제는 그가 208년에 사망했다는 것이죠(위서 : 명제기, 왕랑전). 왕랑은 다만 일찍이 조조의 아들 조비에게 황제위에 오를 것을 권했는데, 이것이 나관중 ‘삼국지’ 편찬자들을 격노하게 만들어 저렇게 볼썽사납게 객사(客死)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렇지만 만화같이 꾸민 것은 좀 심하지요.  

역사적 사실의 전후 관계를 적당히 바꿈으로써 사실과 소설의 구분을 곤란하게 만들어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묘사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환원을 해보면 엉망진창이 되어버립니다.  

대표적인 예가 관우의 오관참장 이야기 입니다. 오관참장이 있었던 것은 관도대전 중이었지요. 그러면 이 시기를 전후로 한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난 사건들의 개요를 봅시다.


원소는 관도대전을 결정.

여양과 백마에서 대치하다 조조는 허도로 돌아감.  

동승의 반역사건 탄로로 동승의 죽음.  

조조의 유비 정벌과 관우 생포.  

관우, 안량과 문추의 목을 벰.  

관우 두 형수를 모시고 5관을 통과.


그러나 실제의 사건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동승의 반역사건 탄로로 동승의 죽음(200년 1월).  

조조의 유비 정벌과 관우 생포(200년 1월).  

원소는 관도대전을 결정(200년 2월경).  

관우, 안량의 목을 벰(200년 4월~7월).  

관우, 두 형수를 모시고 5관을 통과 (관우의 탈출 : 200년 7월).  

여양과 백마에서 대치하다 조조는 허도로 돌아감(200년 8월~10월).


이 두 가지 즉 사실과 소설을 비교해보면 순서가 뒤죽박죽입니다. ⓒⓓⓔⓕ를 중심으로 적절히 엮어 놓았음을 볼 수 있죠.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여러 사건들이 마무리 된 후 관우가 조조를 떠나고 있지만(오관참장 이야기), 실제의 사실은 전쟁 중이던 관우가 엉뚱하게 형수들을 모시고 관도의 격전장 쪽으로 유람하듯이 가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복잡한 실제 사건과 맞물려 오관참장을 적당히 짜 맞춤으로써 관우가 오관참장을 한 전후의 사정을 매우 그럴듯하게 묘사하고 있죠. 그래서 오관참장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의심할 겨를이 없게 만드는 것이죠. 무엇보다도 원소가 관도대전을 결행한 시점을 먼저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그 관도전쟁에서 안량과 문추를 죽인 것이 가장 중요한 공적인양 보여준 것이죠. 이것으로 관우가 조조를 떠나는 부분도 매끄럽게 묘사할 수 있었겠죠.  

실제로 있었던 사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을 때는 원래의 편집 의도에 맞게끔 이야기를 왜곡 서술합니다. 이런 경우는 나관중 ‘삼국지’에 매우 많이 나타나지만 대표적인 경우가 적벽대전과 맹획(제갈량의 남만정벌), 초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극단적으로 적벽대전이 없었다는 연구가들도 있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문제가 된 것은 정사의 본기(本紀)에 해당되는 위서 무제기에 나타난 적벽대전의 기록이 세 줄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즉 “조조는 적벽에 도착하여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해졌다. 이 때 역병이 크게 유행하여 관리와 병사들이 많이 죽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유비는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乃走。公至赤壁,與備戰,不利。於是大疫,吏士多死者,乃引軍還。備遂有荊州、江南諸郡 : 위서, 무제기)”라고 합니다.  

만약 한문으로 치면 보시다시피 단 한 줄에 불과하죠. 이 때문에 살판이 난 것은 소설가들이죠. 어차피 없는 내용이니 어떻게 쓰더라도 누가 제재를 가할 사람도 없는 것이죠. 사실 여부를 누가 증명합니까? 당시에 시중에 떠돌던 이야기를 모았다고 하면 시비를 걸 사람도 없지요. 물론 오서나 촉서에서는 적벽대전에 대한 기록들(오서, 주유전)이 있습니다만, 나관중 ‘삼국지’는 정사의 내용에 대하여 과장과 왜곡이 심하고 적벽대전과 별 상관이 없었던 사람까지 모두 등장시켜 판타지(Fantasy)같은 이야기들을 줄줄이 엮어 놓았다는 것이죠. (이 부분은 다른 기회에 상세히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맹획에 대해서도 정사 본문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정사에는 “225년 봄 제갈량은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정벌하러 나서 이 해 가을 전부 평정시켰다(三年春, 亮率軍南征 其秋悉平)”고 합니다. 다만 ‘한진춘추(漢晉春秋)’에 맹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진춘추’는 ‘삼국지’ 시대 당대가 아닌 동진(東晋) 시대의 습착치(習鑿齒)가 편찬한 것으로 후한(後漢)의 역사에서 서진(西晋) 시대까지 281년의 역사를 기록한 책인데 현존하는 책이 아니라 그 전모를 알 수 없지요.  

‘한진춘추’는 특이하게도 당시로서는 드물게 유비의 촉한을 정통으로 삼았고 위나라를 역모의 무리로 보고 있습니다(연호도 진나라 이전까지는 촉의 연호를 씁니다). 주희의 ‘통감강목’은 이 책을 계승한 것이죠(참고로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정통이 어느 나라인지를 밝히지는 않고 다만 시간을 표시할 때는 위나라 연호를 사용했죠). 뿐만 아니라 설령 맹획의 존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관중 ‘삼국지’에 나오는 식은 될 수가 없지요. 봄에서 가을까지 그 먼 원정길을 가서 9개월 안에 맹획을 일곱 번씩이나 잡았다 놓아준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가고 오는 데만 3개월 이상이 걸릴 텐데 말이죠. 그리고 이 부분은 갈수록 그 표현도 심해져서 마치 엽기 소설 서유기(西遊記)를 보는 듯합니다.

초선의 경우도 정사에는 다음과 같은 말밖에는 없지요.

"여포는 동탁의 시비와 사통하였는데 이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했다"(布與卓侍婢私通, 恐事發覺 : 위서, 여포전)  

즉 초선에 대한 이야기는 ‘布與卓侍婢私通’라는 구절이 전부입니다. 이 일곱 글자로 소설의 반 권이 되는 초선을 만들어낸 것이죠. 그런데 이미 다른 강의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이 시비(侍婢)를 동탁이 알았는지도 의문이지요. 왜냐하면 시비가 수십~수백 명이나 되는데 동탁이 그녀를 알 까닭도 없지요. 단지 문제는 그 시비가 동탁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죠. 특히 동탁의 성질이 거칠어서 심사가 뒤틀리면 여포에게 창을 던지기도 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여포에게만 심각한 사안이었을 가능성이 높지요. 그런데 초선은 나관중 ‘삼국지’를 통하여 반 권짜리의 소설로 다시 태어나고 중국의 4대 미인이 되었으며 여포와 동탁의 인신공격에 철저히 이용됩니다.  

서로 다른 사건들을 하나의 사건으로 솜씨 있게 묶어냅니다. 대표적인 사건은 삼고초려 부분이죠. 나관중 ‘삼국지’의 삼고초려는 삼국지 마니아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명장면 중의 하나입니다. 유비가 채모의 추격을 피하여 도망 가다가 사마휘를 방문, 제갈량(복룡)과 방통(봉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서서를 만납니다. 그리고 서서가 유비 휘하에서 유비를 돕다가 유비 곁을 떠나자, 유비가 삼고초려하는 과정이 나오지요.

그러나 이 사건들은 모두 별 개의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비가 채모의 추격을 피한 일은 정사 촉서(선주전)에 나타나 있고 사마휘를 방문한 것도 나타나있지요(촉서, 제갈량전, 주석). 서서가 유비의 참모로 섬긴 것은 사실이지만 사마휘와는 별 상관이 없었지요. 그리고 서서가 제갈량을 추천한 것도 서서가 유비의 곁을 떠나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지요. 즉 제갈량과 서서는 대개 1년 이상을 함께 유비를 섬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조조가 편지를 위조하여 서서의 어머니를 억류하여 서서가 돌아간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서서의 어머니가 자살한 것도 아니지요. 아마도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는 과정에서 서서의 어머니가 위군(魏軍)에 사로잡힌 듯합니다. 어쨌든 이 복잡한 여러 가지 과정을 솜씨 있게 하나로 묶어낸 것이 나관중 ‘삼국지’의 삼고초려 및 제갈량의 등장 부분입니다.

이상으로 사실과 소설이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소설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소설가들의 권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설가들은 역사상 실존 인물을 그리게 되면 그에 따른 책임도 만만치가 않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