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2>

영지니 2010. 4. 15. 19:33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2>

미스터리 : 원소 손자, 위 황제 되다(?)


[
들어가는 글]

조조는 ‘삼국지’의 시대 최고의 시인이었습니다. 아래의 시는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적벽대전을 앞두고 조조가 창을 옆에 끼고 불렀던 시로, 이 시를 노래할 때 유복이 불길하다고 하자 창으로 그를 찔러 죽인 것으로 묘사되어있지요. 흔히 이 시를 횡삭부시(橫?賦詩 : 창을 옆에 끼고 부른 시)라고 하기도 하고, 악부의 곡조명을 따서 단가행(短歌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삼국연의’ 연구가 유지점(劉知漸)은 이 시는 대체로 조조가 북방정벌을 끝낸 서기 207년경에 지은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시의 내용을 보면 북방 정벌이 마무리되었을 때 연회석상에서 즉흥적으로 지은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 시가 불길하다고 유복을 찔러 죽인 건 더욱 아닙니다. 


          술을 앞에 두었으니 
         
마땅히 노래도 해야겠지 對酒當歌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사나 人生幾何 

          인생은 아침이슬 譬如朝露 
          지난날 생각하면 
          괴로움만 쌓이는데 去日苦多 

         
마음은 괴롭고 슬픈데 慨當以慷  
         
어이해 이 근심
          항상 내 곁에 있어 幽思難忘 
          날마다 나는 何以解憂 
          술잔으로 시름을 비우나 惟有杜康 
 

          
 … 중 략 … 

          밝은 달빛 따라 
          마음 가득히 젖어드는 서러움 憂從中來 
          어쩌면 이렇게 
          끝이 없을까? 不可斷絶 

          내 마음 
          멀고 먼 길
         
님 찾아가네 越 度阡 

          그리운 님 
          함께 하며 枉用相存 

          오랜만에 
          벌어진 잔치 
          옛 얘기 함께 나누니 契闊談? 

          내 마음 
          옛 정만 그리워진다. 心念舊恩

          달이 밝아 별은 드문데 月明星稀 


          남으로 
          날아 가는 까치야 烏鵲南飛 
          이 나무 
          저 나무 
          돌아본 들 무엇하나 繞樹三? 
          쉬어갈 가지 
          하나 없는데 何枝可依 

          산은 너무 높고 山不厭高 
          물은 너무 깊구나 海不厭深


이 시는 그 내용이 처연하여 죽은 벗들의 외로운 영혼들을 애도하고 위로하면서 스스로를 피할 수 없었던 살생(殺生)에 대한 회한을 담고 있습니다. 한 잔의 술을 마시며 조조는 죽어간 수많은 영혼들에 대한 그리움과 마음의 괴로움을 특유의 시적인 감수성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마 술 취한 조조의 눈앞에 자신의 가까운 벗이자 선배였던 죽은 원소와 그 아들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지 않았을까요?


(1) 황제의 비밀  

중국의 역사에서 황제의 출생과 관련해서 세 가지의 비밀이 떠돈다고 합니다.

첫째는 삼국지 시대가 끝나고 다시 혼란기가 왔을 때 한(漢)나라를 다시 건국한 유연(劉淵)의 출신에 관한 문제입니다. 원래 유연은 흉노(대쥬신?) 출신인데 그가 한족(漢族)일 가능성이 있다는 그런 류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삼국지 평설’에서는 유연이 유선(촉황제)의 외손자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둘째는 원나라 순제가 남송의 공제(恭帝) 조현의 아들이라는 전설입니다. 1276년 남송(南宋)이 원나라에 의해 멸망한 후 마지막 황제 조현이 사로잡혀갔는데, 원나라 순제의 아버지인 명종(明宗)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명종이 슬하에 아들이 없어 근심하니 조현이 자신의 어린 아들을 양자로 보낸 것이라는 전설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아이러니지요. 송나라의 마지막 황제의 아들이 칭기즈칸의 원나라 황제가 되었다니 말입니다.

셋째는 청나라 건륭제에 대한 이야기로 건륭제는 옹정제의 아들이 아니라 옹정제와 매우 친밀하게 지냈던 한족 진세관(陳世官)의 아들이라는 전설입니다. 건륭제는 황제에 등극 후 네 번씩이나 진씨의 집에 묵었고 진씨 가문에 친필로 ‘애일당(愛日堂)’, ‘춘휘당(春暉堂)’이라는 글을 써주었는데 이것은 모두 자식이 부모를 공경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물론 위의 세 가지의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실은 아닙니다. 중국은 정통으로 꼽히는 25사(二十五史) 4,022권의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역사서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에서도 기록된 바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말 그대로 전설이자 야사(野史)입니다. 특히 청나라의 옹정제는 슬하에 열 명의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진씨 집안의 아이를 데려올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모두 이민족 국가의 황제가 한족 출신으로 결국은 계승되게 되었다는 이야기죠. 다시 생각해 보면, 이민족 지배를 받아야만 했던 중국인들이 나름대로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심리적인 저항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황제라는 지위가 워낙 하늘이 내린 지위라 황제에 대한 수많은 전설이 만들어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를 것입니다. 황제가 되기 위해 수십만~수백만 명을 죽이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황제의 출생에 대한 비밀, 삼국지에는 없을까요? 제가 보기에 청나라 건륭제나 원나라 순제 이상의 미스터리가 ‘삼국지’에는 숨어 있습니다. 이것을 추적하기 전에 위나라 황제들의 계보를 먼저 기억해둡시다(특히 이름들이 비슷하여 구별하기가 쉽지 않고 황제의 명칭도 무제·문제·명제 등으로 복잡합니다). 


          조조(曹操 : 155-220 : 조숭의 아들, 무제) 
          조비(曹丕 : 187-226 : 조조의 아들, 문제) 
          조예(曹睿 : 205-239 : 조비의 아들, 명제)  
          조방(曹芳 : 231-274 : 조예의 양자, 제왕) 
          조모(曹? : 241-260 : 조비의 손자, 고귀향공) 
          조환(曹奐 : 246-302 : 조비의 손자, 상도향공)


정사 삼국지 위서 제왕기(齊王紀)에 다음과 같은 이상한 말이 있습니다.

“명제(明帝 : 조예, 205-239)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제왕(齊王 : 조방)과 진왕(秦王 : 조순)을 길렀다. 궁중의 일이란 비밀에 속하는 것이므로 그들이 어느 곳에서 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기 239년 12월 명제의 병세가 심해지자 명제는 제왕을 황태자로 삼았고 명제(조예)가 죽자 제위에 올랐습니다. 이 때 제왕의 나이는 8세였습니다. 제왕은 4세에 제왕으로 옹립이 되었고 4년 만에 제위에 오른 것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명제는 원래부터 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유아일 때 죽었기 때문에 아들이 없었던 셈입니다(조예의 딸도 일찍 죽어 조예는 심리적으로 많은 충격을 받았고, 아마도 심각한 정도의 우울증에 빠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아들이 없으면 종친(宗親 : 조조의 친가)으로부터 얼마든지 양자를 들이면 됩니다. 즉 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조방이 폐위되고 난 뒤에는 종친들 가운데 가장 혈통적으로 가까운 사람을 황제로 옹립을 하듯이 말이지요.

만약 조방이 종친이라면 굳이 숨길 이유는 없습니다. 즉 조예(명제)의 아버지인 조비(문제)에게는 아들이 여러 명이 있었는데, 그들의 아들들(즉 조비의 손자) 가운데 한 사람을 양자로 삼아서 황제위를 물려주면 되겠지요. 그럴 경우 조예가 그것을 비밀로 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 조예는 왜 제왕(조방)의 출생을 비밀로 했을까요? 더구나 제왕 즉 조방(曹芳)은 칙서에서 다음과 같이 납득하기 힘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보잘 것 없는 몸으로 대업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나는 혈혈단신이어서 슬프고, 고통스러워도 누구에게 말할 상대조차 없다. 대장군과 태위는 선제의 유명을 받들어 나를 보좌하라.”

그런데 조예(曹睿 : 명제)는 죽으면서 자신이 가장 신뢰했던 사마의(司馬懿)의 손을 잡으며 “뒷일을 그대에게 부탁하오. 조상과 짐의 어린 자식을 잘 보살펴주시오. 짐은 그대를 보았으니, 어떤 유한도 없구려.”라고 말합니다.

당시 사마의는 요동에 있었는데 조예(명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낙양으로 옵니다. 사마의가 돌아올 때까지 조예는 눈을 감지 못하다가 사마의를 보고 조방(제왕)의 장래를 부탁하면서 편하게 눈을 감지요. 물론 임종을 앞둔 조예에게는 국가의 장래도 큰 걱정이었을 것입니다. 명제는 대단히 총명했던 사람으로 기록돼 있지요.

제가 보기에 조방은 분명히 명제의 양자였지만 친자식 이상으로 명제의 사랑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조방에 대한 조예(명제)의 사랑이 지극하여 그저 단순히 양자로 데려온 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친 혈육과 같은 정도의 사랑을 보이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들에게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었을까요? 이들의 관계를 설명하거나 짐작할만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이 비밀을 파헤쳐 갑니다.


(2) 미운 오리 새끼 조예  

조비(曹丕 : 문제)는 자기의 아들 조예(견황후 소생)를 매우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이상한 일은 조비의 아버지 조조(曹操 : 무제)는 조예를 끔찍이 사랑하여 항상 자신의 곁에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끔씩 옆에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조예는 조조와 조비와는 달리 수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고, 조조는 각종 연회에 조예를 데리고 다니면서 자랑했습니다. 조조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행동이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조비(문제)는 조예(명제)를 싫어하여 장자인 조예를 태자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로 든 것은 조예의 친모인 견씨(견황후)가 주살 당하였으므로 그 아들이 제위를 계승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견씨가 죽은 것은 221년으로 그 때 조예(曹睿)의 나이는 이미 16세였습니다. 과거로 치면 다 장성한 나이입니다. 그렇다면 조비는 자신의 제위 기간 동안 태자를 세우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리에 맞지 않지요. 그러다가 자신의 병세가 위독해지니 그 때는 곧바로 조예를 태자로 삼습니다. 이 때 조예의 나이는 스물 한 살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조비는 조예를 싫어했을까요? 또 조조는 왜 그토록 조예를 사랑했을까요? 한 아이를 두고 부자간에 전혀 다른 행태를 보이고 있죠. 저는 조조의 경우는 몰라도 조비가 조예를 싫어한 것은 조예가 친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조예가 조비와 견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합니다. 견씨(甄氏)는 잘 아시겠지만 원소의 둘째 아들 원희(袁熙 : ?-207))의 아내였던 사람인데 조조가 원소를 정벌할 때 같이 참전했던 조비가 견씨를 보자 반해버렸고 그녀를 아내로 삼은 것이죠.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때 견씨가 이미 조예를 임신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당시의 원희는 유주 태수로 나가 있었고 견씨는 시어머니(원소의 아내 유씨)를 모시기 위하여 업도에 머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희가 업도를 잠시 다녀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약 견씨가 조비를 만날 당시 조예를 이미 임신하였다면 조예는 원희의 아들로 원소의 손자가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위나라의 역사나 ‘삼국지’는 모두 다시 쓰여져야 합니다. 즉 조조가 세운 위(魏)나라는 원소(袁紹)의 후손(後孫)에 의해 계승되는 셈이 되죠.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예는 205년에 태어났고 견씨의 남편 원희는 207년에 사망합니다. 조조가 원담(袁譚)을 죽이고 원희를 공격한 것은 205년 말이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원희(袁熙)는 아내인 견씨와 부부(夫婦) 사이였던 것이죠. 구체적으로 조조가 원소의 근거지인 업도(?都)를 함락한 것은 204년 가을이었는데, 이 때 조비가 견씨와 결혼했다면 조예가 205년 출생할 수 있지만 정사에는 이 부분에 관한 기록은 없습니다. 설령 조비가 견씨와 204년 겨울에 결혼했다고 하더라도 조예가 205년 출생한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죠.  

정사에는 204년 음력 8월 “조조는 원소 진영의 수도인 업도(?都)를 함락한 후 원소(袁紹)의 묘(墓)에 가서 제사(祭祀)를 지내고 원소의 부인을 위로했다(위서, 무제기)”는 것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조예가 자신의 후사로 삼은 조방(曹芳 : 231~274)의 출생에 대하여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습니다. 말씀 드린 대로 조방이 종친의 아들이었다면 굳이 숨길 이유가 없기 때문에 조씨(曹氏)는 아닐 가능성이 높지요. 그리고 조예(명제)가 죽은 후에라도 조방이 자신의 생부(生父)ㆍ생모(生母)에 관해 침묵할 이유가 없지요. 예를 들면 조방을 계승한 조모(曹?)의 경우나 마지막 황제 조환(曹奐)의 경우도 종친임을 밝힙니다.  

만약에 조방이 지위가 낮은 궁녀(宮女)와 조예 사이의 자식이라고 해도 그것을 숨길 하등의 이유는 없습니다. 즉 그 궁녀는 황은(皇恩)을 입은 몸이라 이내 서열이 높아져 후궁(後宮)의 반열에 오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조방은 조예와 궁녀 사이에 난 자식도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조예가 외가인 견씨(甄氏) 일족의 여인과 사통(私通)을 해서 낳은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손(孫)이 귀한 상태에서 조예가 그것을 숨길 하등의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조방는 누구의 후손일까요?  

제가 판단하건데 조방은 원희의 후손(後孫)으로 견씨(甄氏) 집안의 친척들 가운데서 비밀리에 양육(養育)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즉 조방은 원희 집안의 숨겨진 아이인데 전란이 발생하자 원소-원희의 가족들은 대부분 몰살(沒殺)당했겠지만, 원희의 아들 중 일부가 안전한 외가인 견씨(甄氏 : 견황후)의 집안에 양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들은 조예의 친형이 됩니다(이것은 조예가 원희의 아들이라고 가정한 경우입니다). 이 비밀은 견씨와 그의 혈족들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239년 조방이 8세를 전후로 하여 제위에 오르는 것으로 보아 살아남은 원희(袁熙)의 아들의 아들, 즉 원희(袁熙)의 손자(孫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만약 그렇다면 조방은 조예와는 삼촌과 조카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조예에게는 자식들이 어려서 죽었으므로 자신의 친조카에 대한 사랑은 자식이나 별로 다를 바 없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자식이 귀한 집안에서는 말이죠.  

참고로 원희는 원소의 둘째 아들로 성격이 무던한 편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원희는 조조(曹操)에게 여러 번 패하자 원상과 함께 요동 공손강(公孫康)에게 의지하러 갔으나 도리어 공손강의 손에 참수되어 그 수급(首級)은 조조에게 보내어집니다. 원희의 아내 견씨(甄氏)는 후일 조비의 아내가 되어 위나라의 황후로 책봉되었다가 투기가 심하다고 하여 주살 당합니다. 남자의 사랑, 믿을만한 것이 못되지요.  


(3) 조예의 외가 사랑  

조예의 출생과 관련하여 더욱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조예는 239년 1월 1일에 죽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가 태어난 해가 205년이므로 환산해보면 34세여야 하는데 정사에서는 까닭을 알 수 없게 조예가 36세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사 주석에서도 이것은 계산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의 나이를 실수로 기록할 수가 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록상의 잘못일 수가 있고, 다른 하나는 실제로 조예의 나이가 36세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만약에 조예가 36세의 일기로 죽었다면, 조예는 203년 출생으로 확실히 원희의 아들이죠. 만약 이것이 사실이면 조비가 견씨의 미모에 혹하여 앞뒤를 가리지 않고 갓난 아기를 주변에 숨기고 견씨와 결혼하였을 가능성이 있지요. 당시 조조는 북방을 정벌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비가 조조를 속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즉 조조는 요동반도 가까이 진군하고 있고 조비는 주로 허도(허창)에 머물러 있었다면 가능한 일이죠.

그러나 이 같은 추정은 많은 무리가 따르기도 합니다. 조조는 조비가 견씨를 만날 당시 조예가 갓난 아기로 살아있었다면 적장 원희의 자식이니 결코 살려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성적인 조조가 내버려 둘리 없지요. 그러나 조비의 입장은 어떨까요? 이제 막 사랑과 성(性)에 눈을 뜬 18세의 소년 조비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견씨를 보고서 견씨의 모든 약점까지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조비는 정치가이기도 하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조비가 주변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견씨를 정실부인으로 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여자는 일종의 전리품 취급을 당하여 자신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이 없었지만, 조비가 견씨를 굳이 자신의 정실부인으로 삼으려 했던 것은 당시 조비가 견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조비는 힘으로 견씨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깊은 사랑으로 견씨를 항복시키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관례에 어긋나는 것이죠. 견씨는 이미 결혼한 여자이고, 남편 원희도 아직 살아있으며, 나이도 조비보다는 5~6세 가량이 많은 연상이었기 때문에 조조는 처음에는 이 결혼을 반대하였겠지요. 조조의 신하들은 더욱 심하게 반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비의 확고한 의지를 알고서 그냥 허락하였을 것입니다. 조비가 견씨에 대하여 이 정도의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면 2살 또는 그 이하의 어린 견씨의 자식(원희의 아들)을 과연 죽일 수가 있었을까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조예와 조방의 비밀을 추적하기 위해 정사를 뒤지다 보면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 있습니다. 조예와 조방은 모두 견씨(甄氏) 가문과의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정도의 긴밀도(緊密度)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죠. 조예가 견씨 가문과의 유대를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끔찍이 아끼던 조조도 죽고 어머니 견씨 또한 비극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자신이 의지할만한 곳은 외가(外家) 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죠.

조예는 자신의 외조부였던 견일(甄逸)의 가문에 대해서는 온 정성을 다해 아끼고 보호합니다. 이것은 조방(曹芳)대에 이르렀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견일의 가문은 견일(甄逸)-견상(甄像)-견창(甄暢)-견소(甄紹) 등으로 이어질 동안 조예(曹睿)ㆍ조방(曹芳)의 부자(父子)는 이들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이것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정사 ‘삼국지’ 위서 후비전「문소견황후전(文昭甄皇后傳)」에 있습니다. 가장 극적인 일이 있습니다. 조예는 자기가 사랑했던 딸 조숙(曹淑)이 죽자 이미 죽은 종손(從孫) 견황(甄黃)과 영혼결혼(靈魂結婚)을 시키고 열후(列侯)에 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방은 공식적으로 견씨와 친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조방 역시 조예와 마찬가지로 견씨 집안을 보살피고 나중에는 견씨 집안의 딸을 황후로 맞습니다. 제가 보아도 지나칩니다. 아마 조방의 비(妃)였던 견씨는 243년에 황후로 책봉되어 251년 죽을 때까지 조씨 집안과 견씨 집안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의 논의로 보면 조예는 원희의 자식이며, 조방 또한 원희의 손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보면, 원희와 견씨(甄氏) 부부의 삶은 하나의 비극적 드라마입니다. 원희는 아내를 원수(怨讐)의 자식(조비)에게 보냈고, 그 원수의 아들이 데리고 살다가 죽인 여인의 남편이었던 셈이죠(그러나 견씨에 대한 불 같은 사랑이 식자, 조비는 오히려 견씨와 조예를 증오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알릴 수도 없고 답답했겠지요). 그런데 그 원수의 아들과의 사이에 난 아들[조예(曹操) : 위나라 명제]이 원수의 나라의 황제(?)가 됩니다.  


(4) 조조, 어떤 남자였을까요?  

앞의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왜 조조는 유난히 조예를 사랑했을까요? 이 의문은 두 가지 방향에서 추적이 가능합니다. 즉 조조가 조예의 출생 비밀을 알았을 경우와 몰랐을 경우입니다.

첫째, 조조가 조예의 출생 비밀에 대해서 전혀 몰랐을 경우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조조는 조예를 친손자로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조조가 조예를 끔찍이 사랑한 것은 당연합니다. 손자에 대한 사랑은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 깊을 수가 있기 때문이죠. 특히 조예는 태자인 조비의 아들이니 사실상 장손(長孫)이 아닙니까? 이것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죠.

둘째, 조조가 조예의 출생 비밀을 알았을 경우입니다. 실제로 세상의 경험이 풍부하고 영명한 군주였던 조조가 조예의 출생의 비밀을 모를 리가 있을까요? 그리고 조조의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정보전에 능통한 조조가 조예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알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 문제가 생기죠. 만약 조조는 조예가 자기 손자가 아니라 원소의 손자라는 것을 알고서도 조예를 끔찍이 사랑했을까요? 참으로 어려운 일이겠죠. 실제로 조조에게는 많은 손자가 있었는데도 유독 이 손자를 그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조조의 성품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그럴 수가 있다는 것이죠. 제가 보기엔 조조는 조예의 출생 비밀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조조와 원희(원소의 둘째 아들)나 원담(원소의 맏아들)의 관계는 단순히 적과 아군이라는 관계가 아닐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구체적으로 봅시다.

조조와 원소는 오랜 동지(同志)이자 친구(親舊) 사이였습니다. 원소의 출생 연도가 알려져 있진 않지만 원소는 조조보다도 나이가 많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사에 따르면 “원소는 풍모가 빼어나고 위엄스런 용모가 있었으며 지위가 낮은 선비들에게도 허리를 굽혀 존경하였으므로 수많은 선비가 그에게 귀의했다. 조조도 젊었을 때 그와 가깝게 지냈다.”고 되어있지요.  

아마 조조와 원소가 수도(首都 : 낙양)에서 근무할 때 이 두 사람은 형님-아우님 하면서 지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원소와 조조는 장래가 촉망된 차세대(次世代) 선두 주자(走者)로서 한나라 조정의 최고 엘리트(elite) 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남자들처럼 휴일이면 같이 술도 마시고 집들이도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장래 문제나 가족들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기도 하고 자식 걱정도 함께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후일 이들은 천하를 두고 운명의 승부를 하게 되지요. 그것이 관도대전입니다.





이 관도대전의 결과, 조조는 불가피하게 원소의 집안을 멸하게 됩니다. 조조가 원소 일가를 몰살한 것은 원소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 아닙니다. 용(龍)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다른 용의 씨를 남겨서는 안 되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사람은 감정의 동물인데 아무런 마음이 동요가 없을 수가 없지요. 원상과 원희의 수급이 조조에게 왔을 때 안도감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조조는 여러 복잡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조조는 당대 최고의 시인(詩人)으로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전혀 모르는 남도 아니고 형님-아우 하다가 그 형님이 되는 집안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을 때 조조는 어떤 감정을 가졌을까요? 조조는 아마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저미도록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황제가 꼭 되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가 엄습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젊은 날 조조는 원소의 자식들에게 마치 ‘삼촌’처럼 가깝게 지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때로 청년 조조는 원담이나 원희를 죽마(竹馬)에 태우고 끌고 다녔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 원희의 아내를 자기의 아들인 조비가 말려도 안 될 정도로 사랑을 하고 있었죠. 그런 와중에서 원희의 수급이 보내어져 왔을 때 조조의 심경은 어떠하였을지 여러분도 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정사에는 이 같은 조조의 심정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조조가 업도를 함락하고 난 뒤, “원소(袁紹)의 묘(墓)에 가서 제사(祭祀)를 지내고, 원소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곡(哭)을 하고 원소의 부인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원소의 부인에게 심부름꾼들과 보물을 보내주고 각종 비단과 솜을 하사(下賜)했으며 관청에서 양식을 제공하도록 했다(위서, 무제기).”고 합니다.

만약 조예가 원소의 손자인 것을 알고서도 조조가 끔찍이 사랑했다면 그것은 옛 친구이자 선배(원소)에 대한 하나의 속죄(贖罪)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예가 태어나서 한창 재롱을 떨 즈음 조조의 나이도 50대에 들어서게 됩니다. 요즘 같으면 별로 많은 나이가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50세를 살기가 어려웠으니 이제는 죽을 날이 성큼 가까워진 나이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며 조조는 얼마나 많은 회한(悔恨)을 느꼈을까요. 특히 늘상 옆에 있는 재롱을 떠는 조예를 보면서 원소에 대한 생각을 더욱 많이 하였을 것입니다.

제가 본대로 만약 조예가 원소의 손자인 줄을 알면서도 조조가 끔찍이 사랑했다면, 조조는 참으로 바다같이 마음이 넓고 깊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조조는 괜찮은 남자지요.


출처 : 올드뮤직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