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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昌德宮,사적)

영지니 2007. 5. 13. 23:31

 

창덕궁( 昌德宮,사적)

창덕궁은 태종 5년(1405) 정궁인 경북궁에 이어 두번째로 지어진 조선의 궁궐이다. 임진왜란 (1592~1598)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탄후, 경북궁은 불길하다는 이유로 고종2년(1865)까지 폐허로 방치되었으나 창덕궁은 광해군(1608~1623) 때 곧바로 재건되어가장 오래동안 실질적인 조선의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창덕궁은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중 그 원형이 가장많이 남아있는점과 자연의조화로운 배치가 뛰어난 점이 인정되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돈화문 (敦化門,보물)

창덕궁의 정문으로 태종 12년(1412)처음 지어졌고 광해년 원년(1609)에 중건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의 정문중 가장 오래되었다 "돈화" 는 백성을 가르치어 감화시킨다는 뜻이다

 

 

인정전(仁政殿,국보)

창덕궁의 으뜸되는 건물이다.신하들의 하례.외국 사신의접경 등 왕의 공식적인 행사를 거행하던 의식공간이다. 인정전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조성할때 세워진후 임진왜란으로 불타 광해군 1년(1609)에 복원되었다. 현재의 인정전은  순조 3년(1803)의 화재로 그 이듬해에 재건된 것이다. 순종1년(1908) 내부의 일부가 서양식으로 고쳐 졌다.

 

 

 

 

선정전(보물)

선정전은 임금의 집무실이다. '선정' 이란 정치를 베푼다는 뜻이다. 선정전이 처음 지어진 것은 세조7년(1461)이다.
임진왜란을 포함한 여러 차례의 화재로 불타 인조 25년(1647)에 재건되었다.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선정전 앞마당에는 임금님의 자동차 보관소가 있다.

 

 

 

 

 

 

동인문(同仁門)

 

 

 

장락문(長樂門)

 

 

낙선재(樂善齋)

 

 

 

 

부용정(芙蓉亭)
부용정은 肅宗 33년(1707) 건립되었다. 당시의 이름은 澤水齋였으나, 正祖 16년(1792)에 부용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正祖임금은 이곳 부용정에 대신들과 그 가족들을 초청해 詩를 읊고, 酒宴을 베풀면서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밖에서 볼 때 부용지와 부용정 일대가 한 폭의 그림과도 같고, 부용정 안에 앉아 창문을 활짝 열면
부용지 일대의 자연풍광이 또한 병풍처럼 펼쳐지며 부용정 안으로 들어온다. 부용정과 부용지 일대는 한국의 전통 정원 가운데 경관이 매우 뛰어난 곳으로, 18세기 이후 宮闕 後苑의 白眉로 손꼽힌다.

 

 

 

 

 

어수문(魚水門)
 
宙合樓, 奎章閣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수문을 지나야 한다. 어수문은 일주문 형태로 화려한 단청이 돋보인다. 魚水門에는 임금을 물에, 臣下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여 君臣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 있다. 신하들은 어수문 옆 작은 狹門을 통해 들어갔으며 王은 어수문을 통해 奎章閣에 들어갔다.

 

 

 

 

영화당(暎花堂)
 
부용지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곳은 역대 왕들이 연회를 베풀기도 했지만 군사훈련이나 활쏘기도 행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당은 과거시험을 보던 科場으로 유명했다. 暎花堂 懸板은 英祖의 御筆이다.

 

 

금마문

 

 

불로문(不老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충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문화재명 : 창덕궁(비원포함) (昌德宮(秘苑包含))
지정내용 : 사적 제122호 (지정일 1963.01.18)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시대 : 조선시대   조선시대 사적 보기
위치 :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579,319㎡)

 

 

출처 : 동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