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한민족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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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은 한민족의 순수한 정신맥을 이어받고, 고구려 말의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초연히 일어선 당대 동북아 희대의 대영걸(大英傑)이었다.
피끓는 마음으로 응원하는 붉은 도깨비(붉은 악마)의 열정을 그의 이름에서 느낄 수 있다. 붉은 도깨비(붉은 악마)는 축구에서 승리하기 위함이었으나, 연개소문의 열정은 민족을 구하기 위한 길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 후 고구려가 신라 사신의 당나라 조공을 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협박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했다. 태종은 다시 장엄(莊儼)을 보내 최후통첩을 했으나 연개소문은 오히려 사신을 토굴에 가두었다. 이로써 양국의 외교적 타협은 결렬된 것이다. 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이정(李靖)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으려고 하자 이정은 “제가 일찍이 태원(太原)에 있을 때 연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워 그 뒤로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함이 다 그 병법의 힘을 입었음인즉, 오늘날 신이 어찌 감히 전날에 사사하던 개소문을 치리까”라고 사양했다는 것이다. 스승에 대한 기본 예법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다. 단재는 이 병법서와 관련해 노상운(盧象雲) 선생이라는 노인의 구전(口傳)을 ‘조선상고사’에 소개하고 있다. 그 이 정이 저술한 ‘이위공병법’은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로 치는 바, ‘이위공병법’의 원본에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를 자세히 썼다. 그 뿐 아니라 연개소문을 숭앙(崇仰)한 어구가 많으므로 당나라 때 사람들이 연개소문과 같은 외국인에게 병법을 사사해 명장이 됨은 실로 중국의 큰 수치라고 하여 드디어 그 병법서를 모두 없애 버렸다. 오늘날 유행하는 ‘이위공병서’는 후인의 위작인 고로, 이는 원본이 아니다.” 국조삼신{한인, 한웅, 한검(단군)}은 민족과 국가의 기틀로서 어찌 중요하게 받들지 않았을 것인가? 즉 조의선인은 민족과 진리를 수호하는 것을 지상 목적으로 한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으로, 한민족 역사 개창의 주역들이었다. 특히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앞서서 나라를 구한 용사들이었다. 수나라의 130만 대군을 격파한 이들도 고구려의 조의선인 20만이었다. 이들은 신교의 종교정신으로 무장한 군대였던 것이다. |
민족을 구한 의기 그런데 고성제가 보장제의 위를 이어 열제의 위에 오르자, 화친을 넘어서 역사의 전통을 중히 여기는 고구려인이라면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굴욕적인 외교를 펼친다. 전통적으로 고구려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중국과 전투하였는데 고구려의 지도를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를 침투할 수 있는 길을 알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631년에는 당의 사신의 요청에 따라 평양의 경관(京觀)을 허물어 버렸다. 경관은 수나라와의 전쟁 때의 전몰장병의 유해를 묻은 기념묘지․탑과 같은 것으로 고구려인의 자부심이 담긴 성역이다. 당태종은 도교를 장려했는데, 그 이유는 노자의 성(姓)이 당태종의 성씨와 같은 이(李) 씨란 것 때문이었다. 고구려가 도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당의 정신세계에 스스로 동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명을 거역하기는 힘들었다. 이에 연개소문이 도교 강론을 파하도록 하고 장성 부역을 그만두도록 간언하자 황제는 그를 죽이려 하였다. 조의선인은 뜨거운 혈심으로서 국가보전과 국통수호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연개소문이 고성제를 폐위했다는 것은, 연개소문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대당온건파에 대한 대당강경파에 의한 반정(反政)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이 황제를 잔인하게 살해했다하나 태백일사에는 몰래 송양(松壤)으로 피신한 황제에 백성들이 동조하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붕어했다고 한다. 80년대까지는 민주화가 덜 되어서 독재정권의 밑에서 숨도 함부로 쉬지 못하고 살았다. 90년대에 와서는 놀랍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 젊은이들의 대다수는 그러한 고통이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리려는 위기에 처해있다. 과학문명이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정신세계의 풍요로움보다 육체적인 편안함을 추구하고, 생명을 소비하여 쾌락을 추구하는 문화로 가는 시대정신의 숨결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대세를 맨손으로 부여잡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 모두 위기의식은 공유를 해야 하지 않는가 싶다. 한민족의 평화의 민족이다. 그래서 국민의 대다수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쟁이 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나라의 높은 분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지만 말이다. 전쟁의 위협에 의해서 정권을 유지했던 과거 군사정권과 지금은 다르지 않는가? 불과 10년 전에만 해도 드러나지 않던 전쟁위기의 물결은 지금 엄청난 속도로 한반도에 몰려오고 있다. “동아시아 균형자”가 될 것인가? “낙동강 오리알”이 될 것인가? 문제는 위기의식을 공유하지 않는 일반 시민들의 안전불감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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