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할한국사

천부삼인, 일본3보물

영지니 2007. 3. 11. 21:26

소설가 박대중님의 글 - 펌

 

 

환인이 환웅에게서 천부삼인<검,거울,북>을 내려주었고 이것은 천제의 아들로써의 증표가 되었다는 것을 알수있다.
이건 일본삼신기의 내용과 부합되는 내용이다.

태백일사-환인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때 풍백은 백검<伯劍>으로 호위하고 운사는 천부경이 새겨진 거울을 앞세웠으며 우사는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갔다...로 나와있다.
환웅의 배달국에서 조선으로 바뀔 무렵에도 이와같은 절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부터 검과 거울과 북에 대한 역사기록상의 추적을 하겠다.
환단고기와 삼국사기 그리고 삼국유사를 참고로 하였다.
역사기록상으로 천부삼인중 백검<伯劍>에 비견될 검은 고열가단군으로 인해 대부여가 망하고 대부여 다음 북부여기의 해모수 기록에는 해모수가 용광<龍光>의 검을 차고 다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리고 고두막한<고열가단군의 후손이라고 추측>부여의 정권을 다시잡고 부여는 동부여와 북부여로 나뉜다.
그리고 고주몽이 북부여의 사위가 되면서 정권자체를 이어받는다.
단군에게 아들이 없어 후사를 줄 수 없었기에 주몽에게 넘겨준 것은 당연할것이다.

그럼 자연히 천제의 상징인 검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주몽이 초대 고구려의 왕이 되고 소서노여왕의 아들중에 온조와 비류에게 왕위를 물려 주어야 했지만 동부여에서 유리가 오는 바람에 소서노는 두아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떠난다.
이때 소서노여왕은 아들들의 왕권을 버리는 대신 천부삼인을 들고 나올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천부삼인중 거울의 자료는 거의 불분명해서 추론 할수가 없었다.
다만 백제와 낙랑이 많이 싸웠다는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편에 나왔으므로 천부삼인중의 한개를 빼앗겼을 가능성을 생각해냈다.

낙랑에는 자명고라는<적이오면 스스로 울리는 북>있었기 때문이다.
난 이 자명고가 천부삼인의 하나라고 생각되어진다.

이제 일본의 삼신기에 대한 것을 알아보자..
일본에는 쿠사나기의 검(草雉劍)과 야타의 거울(八咫鏡) 그리고 야사카니의 곡옥(八坂璟玉)
이있다.
일단 일본삼신기와 천부삼인이 틀린이유는 바로 북과 곡옥의 차이다.

내가 추론한 바로는 일본이 곡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낙랑국이 고구려에게 망할때 자명고를 찢어졌기 때문이고 곡옥은 북에 달려있는 장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주변에 작은 돌이나 옥을 매다는 풍습은 알타이문명에서 흔히 볼수있는 장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주술적인 요소도 포함된다.
아니면 곡옥이 북을 스스로 울리게 하는 장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봤다.

야사카니의 곡옥은 둥근 테 형식으로 된 구슬목걸이라고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의 곡옥은 아닌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삼신기에는 북이 존재하지 않는것이다.

검은 분명 백제가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지만 일본측의 기록에서는 천총운검이 도모검으로 고주몽의 검이었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에 무시할수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나중에 백제의 온조왕이 이검을 찾아 후에 이세신궁에 의해 보관되어졌다는데...
온조왕후에 이야기는 백제가 멸망한 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백제왕자 부여풍이 백제부흥운동을 펼치다가 내분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기록에는 백제왕자 부여풍의 보검을 빼앗았다는 말이 나오는 대목은 그 보검이 백제와 같은 의미를 지닌 검이기에 가능할거 같다..아무런 가치가 없는 검이라면 이 대목을 넣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백제의 국가적 보물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풍왕자는 이검이 백제의 상징임으로 백제를 부활하기 위해 일본으로 들어갔을거 같다.
낙랑은 고구려에 멸망했기 때문에 고구려에 곡옥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그럼 거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냥 추측이지만 거울은 신라가 가지고 있을것으로 생각된다.
박제상의 저서 징심록이라는 책이 있는데 세종대왕은 이 징심록에 있는 글자를 취해 한글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김시습의 징심록추기에 실려있기 때문이다.

환웅시대 글은 녹두문이었고 당연히 단군시대 가림토문자를 만들면서 천부경을 해독해서 따로 만들었을 가능성이있다.
그걸 기록하고 연구하기 위해선 그 거울이 필요했으리라본다...박제상은 그글을 이거울에서 봤을것이다.

난 가림토나 녹두문의 문장이나 쓰임새가 당시의 귀족들 아니면 특권층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글자가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글이랑 귀중한 주술적의미를 두기 때문에 역으로 침략국에게는 좋지 않을것으로 생각되어진다.

극히 일부만 글을 알았고 나라가 망하면서 주술적인 의미의 글을 모두 없애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아직 출토가 되지 않을 수도 있고....뭐 추측이니..

박제상이 일본으로 간 이후는 히미코가 받아온 거울과 곡옥이 실제로 천부삼인의 증표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으로 여행을 감행한것으로 생각되어졌다.
사실 번외적인 이야기지만 삼신기중 거울과 곡옥은 중국에서 히미코여왕이 받아온 것이라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왕은 이런 박제상의 행동을 발견 그비밀을 알기 위해서 계속 나라에 남아있으라는 말을 남긴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하지만 그비밀은 선대때부터 내려오는 비기였기에 자살했을것으로 생각된다...

그후는 더 생각중...재밌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의 오류가 있으면 알려주세요..수정하게.


 

출처 : 역사, 천부경과 홍익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