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할한국사

대륙에 존재했던 왜의 실체는?

영지니 2007. 12. 30. 23:09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한조(韓條)에서 왜의 위치를 추측해 보자.


“마한(馬韓)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다. 변진(弁辰)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 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http://www.chess-cat.com/what_09.htm, 왜는 일본열도가 아닌, 한반도에 있었다) (馬韓在西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이 역시 韓半島를 염두에 두고 날조한 대목이다. 朝鮮의 管境 중 서쪽에 있었던 것은 番朝鮮이다. 3 차 三韓의 馬韓은 중국 대륙 동부에 있었다. 1 차, 2 차, 3 차 그 어떤 馬韓도 남으로 倭와 접한 적이 없다. 弁辰 12 國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12 國을 거느린 것은 1 차 番韓과 馬韓 이었다. 3 차 辰韓은 3 차 弁韓 서쪽에 있었다.

邪馬台(일본이 야마다이國이라고 주장하는 촌락)가 列島에 있었다면, 중국은 물론이고 高句麗, 百濟, 新羅, 伽倻도 그 존재를 알 수 없었다. 高句麗, 百濟, 新羅, 伽倻가 해상무역 국가였다면, 列島 역시 무역 상대국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일정한 수준의 문명을 이식 받아야 했다. 그러나 列島는 5 세기 까지도 벌거벗고 산 미개 땅이었다. 先住民 외에 韓半島人들이 개별적으로 이주했을 뿐, 百濟가 식민지를 건설한 4 세기 말까지 列島는 그 어떤 나라도 관심을 보인 적이 없는 未知의 땅이었다.

송서(宋書) 왜국전(倭國傳)은 “왜국은 고려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倭國在高驪東南大海中)”
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중국 남북조 송나라(420∼479) 때에는 왜가 한반도를 벗어나 일본열도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이후에 발간된 중국측 문헌들은 모두 왜가 일본열도에 자리잡고 있다고 기록했다. (http://www.chess-cat.com/what_09.htm, 왜는 일본열도가 아닌, 한반도에 있었다)

이름이 같은데 착안해서 中國倭를 列島倭에다 포개버린 대목이다. 원래 中國倭는 바다와 중국 대륙에 흩어져 있었다. 점차 구축되어 마지막 순간에는 中國倭가 해상에 있었고, 다음 순간 海上마저 정복 되었다. 이때가 8 세기였다.

高麗와 高句麗는 朱元璋이 역사날조 하면서 고의적으로 섞어 썼다. 朱元璋과 李成桂 등이 高麗 영토를 권모술수로 나눠가진 탓에 高麗가 대제국이라는 사실을 감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宋은 420 년에서 479 년까지 있던 中土의 날조 南朝의 하나다. 中奴는 역사를 바꾸면서 연대를 일치 시키지 않았다. 그러니까 宋 때 倭가 海上으로 밀려 났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 倭는 廣開土境好太皇에게 정복된 이후 5 세기 초부터 말까지 조공을 한 끝에 모든 倭를 아우르는 倭王의 칭호를 받았는데, 海上으로 밀려난 후에도 倭王의 칭호에 집착했다는 것은 우습다. 高麗의 동남쪽 큰 바다는 東支那海와 南支那海이다. 高句麗는 百濟를 중국 대륙 남부에서 완전히 구축한 504 년 이후 중국 남해안 및 동해안 일부를 차지했다. 그러므로 倭國이 高麗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는 것은 504 년 이후 倭가 뭍에서 해상으로 밀려났다는 뜻이다.

倭를 海上으로 몰아낸 것은 新羅이다. 文咨好太烈帝 이후 黃山江 이남으로 수도까지 이전 당하자, 新羅가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오직 倭를 정복하는 것 뿐이었다. 倭가 뭍에서 쫓겨나자, 臺灣이 유일한 倭의 근거지가 되었다. 新羅는 375 년에 韓半島까지 침공한 나라이다. 그런 新羅에게 대만 정복쯤은 간단했다. 그러므로 三國遺史의 皇龍寺9層塔도 날조됐다. 우선 皇龍寺塔을 세웠다는 643 년에는 중국 대륙에 4 國(高句麗, 百濟, 新羅, 唐)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皇龍寺塔을 643 년에 세웠다고 날조한 것은 당시 新羅를 여왕이 다스리고 있었다는데 착안한 것이다.

영락(永樂) 10 년 삼가라(三加羅)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任那)에 통일 되었으니, 열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聯政) 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烈帝)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다(永樂十年三加羅盡歸我自是海陸諸倭悉統於任那分治十國號爲聯政然直轄於高句麗非烈帝所命不得自專也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倭人은 百濟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倭人百濟之介也 太白逸史) 中國倭는 원래 지리상 百濟에 접한 관계로 百濟의 지배를 받다가 廣開土境好太皇의 중국 대륙 정복으로 高句麗의 지배를 받았다.

倭는 燕에 속하지 않았다. 燕이 倭 옆에 없었기 때문이다. 北燕, 後燕, 西燕, 前燕, 南燕 모두 옛 長江(怒江) 너머(中土 西部)에 있었고, 春秋戰國 時代의 燕 하나만 옛 長江 남안 즉 淮垈 이남에 있었다.

倭는 燕에 속한다. 이 말은 中奴가 현 揚子江 이남으로 기어나온 明 때 고친 날조기사이다. 이 당시에는 春秋戰國時代의 燕이 중국 남부에 있다고 날조했다. 淮垈 너머에 燕이 있었기 때문이다. 黃河 이남으로 中土가 확대되자, 淮垈는 揚子江 하류와 黃河 하류 사이가 되었다. 종이 위에서 燕이 倭와 접하자, 倭는 燕에 속한다(倭屬燕 山海經)고 날조한 것이다.

◀ 정상두개골과 편두

그러나 한편으로는 倭는 中國에 속했다. “본래 倭人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本非倭人世居地 太白逸史)."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倭人은 어디서 왔을까. 列島에서 오지는 않았다. 列島 최초의 나라가 성립한 것은 395 년. 日本은 9 세기 까지도 중국을 안전하게 오고갈 항해술이 없었다고, 일본 역사책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럼 동남아에서 왔던가. 아니다. 倭人이 남방계 아시아인이면, 이질적인 생김새라고 명시해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三國志에서 고작 “편두(褊頭)하고 文身한다”고 했을 뿐이다. 褊頭는 인위적으로 만든다. 요컨대 倭人은 남방계 아시아인이 아니라 북방계 아시아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아니다. “옛부터 구주(仇州)와 대마도(對島)는 곧 三韓이 나누었던 땅으로 본래 倭人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自古仇州對島乃三韓分治之地也本非倭人世居地 太白逸史)."고 했다.

 

 


「삼국지」

「후한서」

진한·변한

변진(변한)

진한

변진(변한)

신체

문신

왜와 가까우므로 남녀는 역시 문신을 한다.



그 나라가 왜와 가까이 있어 문신한 사람이 조금 있다(其國近倭 故頗有文身者).

편두

아이가 태어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려 한다. 지금의 진한인은 모두 편두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납작하게 되도록 하려고 모두 돌로 눌러놓는다(兒生欲令其頭扁 皆桇之以石).


체격


그 사람들의 형체는 모두 크다.


그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신체가 장대하다(其人形皆長大).

두식

(漢人이)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고 노예가 된지 3년이나 되었다.

머리카락이 길다.


머리카락이 아름답다(美髮).

의복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같다.

의복은 깨끗하다.


변진은 진한과 섞여 살며 성곽과 의복은 모두 같다(弁辰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

의복은 깨끗하다(衣服潔淸).

직물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는 법을 알아 겸포(唨布)를 짠다.

또 광폭세포(廣幅細布)를 짠다.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줄을 알고 겸포를 짠다(知蠶桑 作唨布).


三韓의 복식에 대한 연구(경남대 최혜경 교수에서 발췌) 

 



 

 

 

 

 

 

 

 

 

 

 

 

 

 

 

 

 

 

 

 

 

 

 

 

 

 

 

 

 

 

 

 

 

 

 

 

 

 

 

 

 

 

 

 

 

 

 

 

 

 

倭人은 中土에서 왔던 것이다. 褊頭는 華夏族의 풍습이다. 전술 했다시피 褊頭는 노예식별 표시이기 때문에 中土에서 벗어난 倭人들은 더 이상 褊頭를 할 필요가 없는데, 오랜 관습이라 한 것일까. 물론 이주 당대에는 倭人도 褊頭였다.

 

"진한(秦韓)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秦나라가 망해서 도망해온 사람으로 피난가는 것이 고역이다. 韓國의 馬韓 땅이 적당할 것 같아 馬韓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秦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秦韓이라고 하였다(秦韓耆老自言 秦之亡人來避苦役適韓國 而馬韓割東界地以與之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後漢書)? 하필이면 인구 밀집지역인 韓半島 남부의 동쪽 땅이 적당할 것 같았다고? 馬韓 동쪽에는 辰韓 말고 弁韓까지 우겨 넣었다. 馬韓 땅이 원래 ⼚자처럼 생겼다는 날조다. 동쪽 끄트머리만 弁韓 땅이었다는 날조다. 秦나라 유민이 동쪽으로 도망치다 곧장 黑龍江으로 가지 않고, 방향을 바꾸어 韓半島로 빠졌다고?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이 순순히 제 땅을 내줬다고?

저 날조기사에 나오는 秦韓은 1 차 辰韓이다. 秦나라가 망한 해는 기원전 207 년이다. 北夫餘 1 世 檀帝 解慕漱 때이다. 馬韓의 동쪽에 있는 辰韓 역시 1 차 辰韓이다. 解慕漱가 직접 통치하는 眞朝鮮이다. 그 어떤 馬韓도 倭와 접한 적 없다고 했다. 倭는 伽倻 남쪽에 있었다. 3 차 馬韓과는 弁韓과 東夫餘에 의해 뚝 떨어져 있었다. 3 차 辰韓 동쪽에 있었다.

新羅가 일어난 3 차 辰韓은 平壤을 공격하기 딱 좋은 지역이다. 비록 北夫餘의 皇城은 아니지만, “戊申 2 년(B.C.193) 檀帝께서 上將 연타발(延佗勃)을 파견하여 平壤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 떼와 衛滿의 무리에 대비케 했(戊申二年帝遣上將延佗勃設城柵於平壤以備賊滿 北夫餘紀)“을 정도로 요충지다. 우리나라는 慈烏支 한웅 이후 高麗 末까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곳에 도읍했다. 그러니까 위험천만한 中奴들을 우리나라 깊숙이 그것도 핵심지역 가까이에 살게 할 리가 없다.

壬辰 31 년(B.C. 209) 진승(陳勝)이 군대를 일으키자,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 사람들이 番朝鮮으로 도망쳐온(壬辰三十一年陳勝起兵秦人大亂燕齊趙民亡歸番朝鮮者數萬口 北夫餘紀) 적도 있다. 중국에서 귀순하는 자들을 番朝鮮에 살게 한 것은 檀帝가 다스리는 辰(眞)朝鮮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209 년 番朝鮮의 上下 운장(雲障)에 나눠 살게 한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 사람(秦이 中土를 통일 했으므로 이미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 등은 망했다. 秦의 中土 통일 후에도 燕나라인, 齊나라인, 趙나라인들은 자신들을 秦나라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는 中土의 행정구역이나 마찬가지였다)들도 衛滿과 결탁해 番朝鮮을 빼앗았다.

이 당시 莫朝鮮은 멸망하고 없었다. 설령 莫朝鮮이 존속 한다고 해도 莫朝鮮은 中土人을 받아줄 수 없었다. 莫朝鮮이 무너지면 辰朝鮮이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 중국왜의 이주경로



이미 秦나라인(燕나라, 齊나라, 趙나라 출신자) 수 만명이나 와서 番朝鮮에서 살고 있었다. 이들을 감독하기 위해 장수까지 파견했다. 番朝鮮으로 도망친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 출신자도 수 만명인 것으로 봐서 中土를 통일했다는 秦나라가 망한 후 도망친 秦나라인들은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 이상 받아주면, 감독 자체가 곤란하니까, 秦나라 유민까지 받아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秦나라 遺民들은 어디로 갔을까. 대륙 끝까지 갔다. 그래서 “피난가는 것이 고역이다(避苦役)”고 했던 것이다. 바로 중국 대륙의 南東海岸 으로 後代에 이들을 일러 倭라고 불렀다. 倭의 실체는 바로 중국이다. 바로 萬里長城을 쌓았다는 秦始王의 백성이다. 중국이 倭라고 하면, 중국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니까, “秦나라가 秦韓”이라 날조한 것이다. “지금 辰韓 사람 모두 편두(褊頭)이고, 倭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역시 文身을 하기도 한다(今辰韓人皆褊頭南與近倭亦文身 三國志 魏書).”며 중국과는 무관한 듯이 날조기술 했지만, 中國倭의 실체는 華夏였던 것이다.


 

출처 : 넘버원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