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할한국사

고주몽과 박혁거세의 관계

영지니 2007. 12. 30. 23:01

東支那海, 南支那海라 이름 붙인 것은 朱元璋 때다. 朱元璋이 중국 대륙 전체로 지명을 옮긴 후 秦이 黃河 이남을 통일한 것으로 날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秦은 中土(티벳고원 북부)를 통일하지 못했다. 中土 서쪽은 기원전 19 세기 이래로 유목민의 땅이었다.


 

東支那海가 伽倻海니까 加羅海의 北岸은 揚子江口에서 杭州灣이다. 협보(俠父)는 浿水를 따라 내려와 海浦로 부터 항해해 加羅海의 북안에 이르렀다. 浿水는 丹江 이니까, 海浦는 金城(武漢) 내에 있었다. 金城의 항구 海浦에서 揚子江을 따라 揚子江口로 나와 杭州灣으로 갔던 것이다. 杭州灣 남쪽에 구야한국(狗邪韓國)이 있었다(陝父......浿水而下由海浦而潛航直到狗邪韓國乃加羅海北岸也).

廣開土境好太皇 당시, 倭는 10 개국으로 그 가운데 3 국은 臺灣에 있고, 7 국은 뭍에 있었으니까, 육지의 倭가 차지한 면적이 더 컸다. 揚子江口와 그 주변에는 伽倻가 있었으니까, 육지의 倭가 차지한 땅은 선하령(仙霞嶺) 산맥과 무이산맥(武夷山脈) 일대에서 구룡강(九龍江)이나 한강(韓江)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아소산(阿蘇山)은 仙霞嶺山脈이나 武夷山脈에 있었을 것이다. 九龍은 九州에서 바꾼 이름이 분명하다. 오늘날은 江 이름만 남았지만, 그 옛날에는 倭가 사는 뭍 전체를 九州라고 했다.

“辰韓은 倭와 가까운 지역이다(辰韓......南與近倭......南與倭接).” 三國志의 저 구절은 이름이 같은 것을 기화로 해서 朝鮮의 管境 三韓을 3 차 三韓에다 포개어 놓은 것이다. “辰韓은 옛 辰國이다(辰韓者古之辰國也)”라며 최초의 三韓, 즉 朝鮮의 管境 三韓을 슬쩍 집어 넣었다. 三韓은 “帶方의 남쪽”이 아니라, 서쪽에 있었다.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다(韓在帶方之南).”는 날조 漢四郡에 따른 기술이다.

帶方은 朝鮮, 漢 전쟁 이후 高豆莫汗이 협(劦)장군에게 봉토로 준 岷江 이서의 일부이다. 조그만 지역이라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韓在帶方之南)”다는 식의 기준으로 삼을 만한 지명도 못된다. 더구나 高句麗가 樂浪을 멸망시킨 大武神烈帝 이전에 帶方은 멸망했다.

 



新羅가 건국한 辰韓은 54 제후국을 거느린, 朝鮮의 통치자 檀君이 직접 다스리는 辰韓(辰國,眞國))이 아니다. 新羅는 현 武漢에서 건국했고, 辰國은 薩水가 남해안 이었다. 12 제후국을 거느린 辰韓은 없다. 3 차 三韓은 朝鮮의 三韓이 사라진 후에 생긴 지명이다. “진한 6부(辰韓六部)”라고 했다(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新羅의 辰韓은 단일국가이지, 여러 나라로 나누어져 있지 않았다. 赫居世가 왕이 되자, 辰韓이 斯盧로 개명했다. “도읍을 서라벌(徐羅伐)에 세우고 나라를 辰韓으로 하고, 또한 사로(斯盧) 라고도 하였다(立都徐羅伐稱國辰韓亦曰斯盧 太白逸史)." 전쟁없이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辰韓 6部”가 행정구역이지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朴赫居世가 나라를 세울 때는 이미 高鄒牟가 제위에 올라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군사적 재능으로 檀君의 사위가 되고, 大統까지 이어받은 高鄒牟가 정벌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을까. 新羅의 시조 朴赫居世가 “부여제실(夫餘帝室)의 딸 파소(婆蘇)”의 아들이기 때문이다(斯盧始王仙桃山聖母之子也 昔有夫餘帝室之女婆蘇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朴赫居世는 13 세에 왕이 되었는데, 이때가 기원전 57 년이다.

婆蘇는 기원전 70 년 내지 69 년에 朴赫居世를 임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70 년 내지 69 년 당시의 檀君은 高豆莫으로 기원전 108 년 부터 檀君으로 있었다. 그 당시는 일찍 혼인 했음에도 혼전임신이니, 婆蘇는 15 세쯤에 朴赫居世를 임신 했다고 가정하면, 일단 高豆莫의 딸일 가능성은 없다. 高鄒牟와 혼인한 於瑕羅는 北夫餘 6 世 檀君 高無胥의 둘째 공주이다. 婆蘇는 高無胥의 첫째 공주였던 것이다. 高豆莫은 49 년간 제위에 있었다. 高豆漠의 아들 無胥는 제위에 오르기 위해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고, 그 때문에 제위에 고작 2 년 있었다.

高鄒牟는 北夫餘 1 世 檀君 解慕漱의 후손이고, 朴赫居世세는 北夫餘 6 世 檀君의 외손자다. 혈통으로 따진다면, 朴赫居世가 제위 적격자 였으나 나이가 어렸다. 이미 제국은 해체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제후국들은 저마다 독립을 획책했다.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年十三 嶷夙成有聖德 高句麗國本紀)”었다고 해도 12 세의 어린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高鄒牟는 제국의 영광을 재현할 역량을 이미 확인 시켜준 22 세의 성인 이었다. 高鄒牟가 제위를 계승해도 결국은 자신의 혈통으로 이어진다는 계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이 이미 혼인 했다는 사실을 高鄒牟가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高無胥가 高鄒牟에게 帝位를 물려 주었으나, 朴赫居世가 있었기에 모두가 순순히 따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高鄒牟는 해결책으로 高無胥의 외손자에게 나라 한 쪽을 떼어 주었을 것이다[伽倻 건국은 기원전 42 년 이라고 한다. 기원전 42 년은 高鄒牟가 정복활동을 완료한 때로 高句麗 영토 한 쪽에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방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伽倻의 시조 首露王의 출생에 대한 기술은 남아 있지 않지만, 高鄒牟의 정벌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首露王 역시 高無胥의 혈통(高無胥에게 셋째 딸이 없었다는 기록은 없다)이 아니라면, 新羅 땅에서 일어난 나라일 것이다].

“高矢氏의 후예들만이 동남쪽에 넓게 거처하다가 더욱더 이동하여 진변(辰弁)의 뭇 부족들이 되었으니, 후에 三韓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그의 후손들 이다(高矢氏後裔 廣處東南 轉流爲辰弁諸族 後之所謂三韓者皆其孫也 揆園史話 太始紀)"에서 三韓은 3 차 三韓이다. 高矢氏를 비롯, 蚩尤氏, 神誌氏에게 봉토를 하사한 神人王儉은 1 차 辰韓을 다스렸다.

1 차 辰韓의 남해안(薩水 ; 현 丹江)에서 倭 까지의 거리는 위도 5° 가량 차이난다. 500km 정도 떨어진 거리다. “개마국(蓋馬國)은 일명 웅심국(熊心國)이라 하니 개마대령(蓋馬大嶺)의 북쪽에 있으며 구다국(勾茶國) 으로부터 거리가 200 리다. 勾茶國은 옛날에는 독로국(瀆盧國)이라 칭했고 북개마대령(北蓋馬大嶺)의 서쪽에 있는 나라다. 월지국(月漬國)은 그 북쪽 500 리에 있다(蓋馬國一云熊心國在蓋馬大嶺之北距勾茶國理百里勾茶國舊稱瀆盧國在北蓋馬大嶺之西月漬國在其北五百里 太白逸史 桓國本紀)"고 했다. 蓋馬大嶺은 오늘날의 秦嶺山脈 이니까, 北蓋馬大嶺이 될 수 있는 것은 陰山山脈 뿐이다. 陰山山脈 북쪽에 주인씨(朱因氏)의 후손을 봉한 蓋馬國이 있었다. 勾茶國(瀆盧國)은 陰山山脈 서쪽에 있었으니까, 倭로 부터 천 수백 km나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瀆盧國은 倭와 경계가 접해 있다(其瀆盧國與倭接界).”는 三國志의 기사도 사실이 아니다.

월지국(月漬國)은 그 북쪽 500 리에 있었으니까 蒙古高原 남단이다. 箕準이 衛滿의 꾐에 속아 난창강(瀾滄江)을 따라 들어가자 “제가(諸加)의 무리들이 上將 卓大를 받들어 모두 함께 길을 떠나 월지(月支)에 이르러 세운(諸加之衆奉上將卓大擧登程直到月支立國 北夫餘紀)" 나라가 後三韓이다 (蓋馬大嶺이 오늘날의 秦嶺山脈 이고, 北蓋馬大嶺이 陰山山脈 이므로, 대파산맥(大巴山脈)은 南蓋馬大嶺으로 부른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3 차 三韓과는 거리가 더욱 벌어진다.

 

倭는 3 차 三韓의 辰韓 (및 弁韓) 옆에 있었다. 그래서 新羅가 倭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상선약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