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건국
668년 고구려 평양성이 함락되고 698년 발해라는 새 나라가 건국할때까지 30년의 공백 기간동안,고구려인들은 국가 재건을 위한 많은 노력을 하였다.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나.당 연합군은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여 고구려 전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하지만 당시 고구려는 중앙 정부만 무너졌지 지방 정부나 각 성들은 독립적으로 당과 전쟁을 계속한다.
669년 당나라 장군 이적이 당 고종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압록강 이북 성중에 당군에게 투항한 성은 11개, 당군이 공격하여 점령한 성은 3개에 지나지 않고 그 외에 아직 투항하지 않고 교전 중인 성은 11개, 당군을 피해 백성들이 이동한 성은 7개라고 보고하고 있다.하지만 이 보고는 압록강 이북 고구려 성중에 적은 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고,당군이 압록강 이북에서 장악한 성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알수 있다.사실 전쟁터인 요동 지역과 평양성,남부 지역을 제외한 만주와 동북부 지역은 당군의 손이 전혀 미치지 못한 사실을 알수 있으며,이 지역은 말갈과 -예전 세력만큼은 안되지만- 고구려인들에 의해서 자치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후에 이들 지역의 세력은 대조영 집단이 건국하는데 여러모로 지원을 해주는 배후 세력이 된다. 압록강 이남 지역의 고구려 성들은 치열하게 당군과 접전을 벌이며,고구려 재건을 위한 노력을 하였다.역사 기록에 남아있는 몇개 지방의 전투를 보면 671년 7월 안시성 전투,672년 백빙산 전투,673년 5월 호로하(임진강)전투등이 있는데,이들 전투는 규모가 큰 전투로 양쪽의 전사자가 수천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호로하 전투 이후로 고구려인들의 재건 노력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남쪽에서는 귀족 고안승이 왕에 올라 고구려국을 선포하고 신라와 함께 대당 전쟁에 참가하지만 이것은 신라가 고구려인들을 이용한 책략에 불과한 것을 알수 있다.676년 신라는 대당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짓지만 그들이 약속한 -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국가 성립을 도와준다는 약속 - 은 신라의 배신으로 끝나버리고 이에 격분한 고구려인들은 폭동을 일으키지만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와 같이 여러 지역에서 고구려인들은 노력하지만,조직적인 투쟁의 실패와 지배층의 강제 이주, 신라의 배신등으로 실패에 이르게 되었다. 남부 지역에서 국가 부흥을 달성하지 못한 고구려인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북으로 들어가게 된다. 696년 영주에서 이진충 난(거란인으로 거란국을 세우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1년 만에 실패한다.)이 일어난다.이들 지역은 여러 민족이 생활하는 곳이라 한족에 대한 반발 심리가 많았다.특히 강제 이주된 고구려인 3만여호가 살고 있었고,고구려와 함께 대당 전쟁에 참가한 말갈족들도 포로나 노예로 잡혀와 있는 사람이 많았다.당시 이진충의 난은 성공적이었고,당을 압박하는 분위기였다.
고구려인 부대를 지휘한 대걸걸중상(대조영의 아버지)과 대조영,말갈인의 추장 걸사비우가 이 반란에 참가한다.그들은 요동 지역을 근거지로 삼을려고 노력했으나 이진충의 난 실패로 빠르게 동으로 이동하면서 각지에 흩어진 고구려인들과 말갈인을 수습한다.그들은 고구려.당 전쟁의 피해가 없었던,당과 멀리 떨어진 만주의 동북부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당나라는 그들의 후환을 없애기 위해 이진충의 난을 진압한 후 투항한 거란족 출신 이해고를 대장으로 수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이들을 추적한다. 처음으로 전투을 개시한 부대는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인 부대였는데 병력의 엄청난 차이로 부대는 괴멸되고 추장인 걸사비우는 전사한다. 이런 와중에 대조영의 아버지 대걸걸중상도 죽어,대조영은 혼자서 패전된 말갈인 부대를 수습하고,전열을 보강해 당과 일대 격전을 벌인다. 당의 이해고는 앞 전투의 승리에 자신을 가지고 고구려인 부대를 얕잡아 보지만 천문령 에서 매복한 고구려인 부대에 기습당하여 부대가 완전히 괴멸된다. 이 전투가 '천문령 전투'이다.대조영은 소규모 부대로 대 부대인 당의 대군을 전멸시키고 이해고는 수천기의 기병만 이끌고 후퇴한다.당은 더 이상 군사력 부족으로 인하여 대조영 세력을 인정할수 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이 천문령 전투는 발해국 성립과 직접 연결된 가장 의의 깊은 전투로 더 이상 대조영은 외부 세력에 위험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당시 한반도의 동북부 지역과 만주 지역은 힘의 공백 상태에 놓여 있었다.당도 신라도 어떠한 세력도 미치지 못한 이 지역에, 대조영 집단은 고구려 멸망후에도 고구려인들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는 이들 지역에 정치적 구심점 역할을 한다. 중앙 통치 집단이 생기자,각 지역의 고구려인들은 대조영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모여 대조영 시대가 끝나기 전에 대다수 옛 고구려 고토는 완전히 회복되었고,중앙 정부 역시완성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고구려인들은 새로운 나라에서 나라 없는 슬픔을 더 이상 느끼지 않고 예전의 고구려 시대만큼 강한 나라에서 사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 서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 영토의 일부는 신라의 지배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나머지의 방대한 영토는 당(唐)나라의 지배 밑에 들어가서 안동도호부 관할 하에 놓였다. 당은 고구려의 유민을 회유하기 위하여 그 마지막 왕인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군왕'으로 삼았고, 후에는 그 아들을 요동도독으로 보내어 고구려를 재건, 계승시킨다는 모양새를 갖추려 하였다. 이 괴뢰정권을 소위 '소고구려국'이라 부르는 것이다. ▶ 한편 당은 고구려의 왕족이나 그에 협력한 말갈족의 족장들을 영주(營州)라는 곳으로 강제이시주 시켰다. 그곳에는 고구려 뿐 아니라 당에 의해 멸망된 타민족의 부족이나 족장들도 이주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불우하고 불만스런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7세기 말에 이르자 이 유배지에 누적되어있던 불만이 마침내 폭발하였다. 696년, 거란족 출신인 이진충(李盡忠)이 당의 영주도독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때 고구려 왕족의 혈통인 걸걸중상(乞乞仲象)과 말갈족의 수장이라고 하는 걸사비우(乞四比羽)가 각각 그들의 세력을 이끌고 반란에 참가하였다. ▶ 이 과정에서 반란의 중심이었던 이진충은 사망하였지만, 당나라는 반기를 든 소위 '오랑캐' 무리들을 진압하기 위해 거란족 출신의 장군인 이해고(李偕固)를 대장군으로 삼아 토벌하게 하였다. 이해고는 걸사비우의 말갈족을 물리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내륙 깊숙이 들어가 지리적 이점을 안고 저항하는 걸걸중상에게는 크게 패하여 겨우 도망쳐갈 수밖에 없었다. 당의 원정군을 물리치고 의기충천한 반란군은 천험의 요새인 동모산(東牟山) 기슭의 분지를 도읍지로 하여 새나라 진(震)을 세운 것이다. 이 진나라가 바로 뒤에 '발해'로 이름불리게 되는 나라인 것이다. ▶ 발해의 건국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 698-700년 사이의 일로 추정된다. 건국자는 걸걸중상의 장남인 대조영(大祚榮)으로 알려져 있다. 대조영은 고구려의 부흥을 외치며 점차 지배지역을 넓혀 나갔다. 발해의 초기 근거지는 정확히 동모산의 동쪽 기슭으로, 현재의 길림성 돈화현 근처였다. 이곳은 당나라의 군사력이 미치기 힘든 천연의 요새였는데, 이 곳을 근거지로 하여 719년에는 옛 고구려 땅의 북반부를 영토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시대에 정치,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터전이었던 요동지방과, 평양을 포함한 반도 북서부 지방은 지배권에 넣지 못하였다. 발해의 국명이 '진(震)'에서 '발해(渤海)'로 바뀐 것은 당나라가 대조영을 '좌해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左駭衛員外大將軍 渤海郡王)'으로 책봉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대조영이 책봉 과정에서 주어진 내키지 않는 칭호를 감수한 것도 따지고보면 고구려의 영토였던 요동지역을 되찾고자 하는 의욕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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