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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발전과 전개

영지니 2007. 12. 30. 18:55
 
 
발해의 발전과 전개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후인 698년 경에 건국되어 926년에 거란에 의해 멸망당하기까지 약 230년 가량 존속했던 나라이다. 당시 발해의 남쪽에는 통일신라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최근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발해는 제 1대 왕인 고왕 대조영이 건국을 하고 기틀을 다진 뒤, 2대 무왕 대무예가 왕위에 올라 본격적인 정복활동을 통하여 영토를 크게 넓혔다. '무왕(武王)'이라는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재위기간 동안 모든 말갈족을 그의 지배하에 넣으려고 동분서주하였다. 그 결과 발해의 판도는 크게 확장되고 국위도 널리 선양되었다.

그러나 송화강 북쪽에 뿌리를 둔 흑수말갈(黑水靺鞨)만은 끝내 무왕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당나라에게 보호를 요청하였다. 이에 무왕은 732년 9월에 발해가 군대를 보내서 해로와 육로로 당나라를 침범하였다. 이처럼 우리가 중국을 공격한 사례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었다. 당나라는 이에 신라를 끌어들여 발해와 대립시키는 이른마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법을 썼지만, 이 전쟁은 서로 별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무왕의 정복사업과는 달리, 그의 뒤를 이은 문왕 대흠무는 국가의 역량을 결집시켜 주요 통치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그의 시호에서 보여지듯이, 그는 문치의 시대로 향하는 문을 연 왕이었다. 그는 무려 57년간이나 재위에 있으면서 당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였고, 유학과 불교도 수용하였다. 당시에는 동아시아 전체가 평화의 무드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전란이 없었는데, 이런 시대적 배경 또한발해의 내적 발전을 가져다주었다고 할 수 있다.

8세기 말엽에 문왕이 사망하자, 그 후 9세기 초까지 25년간 무려 6명의 왕이 난립하였다. 그것은 왕족과 귀족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계보가 다른 선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왕권이 강화되어 중흥을 이루기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14대 왕까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해동성국'이란 바로 9세기 발해의 융성에 대해 당나라에서 일컬은 말이다.

여기서 한가지 아쉬운 것은, 9세기 중반 이후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서 이 시기의 역사적 사실들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발해가 거란족에 멸망당한 이후, 거란 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의 어느 왕조에서도 발해 왕조에 관한 기록을 남겨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전 왕조에 대한 기록을 남겨주는 중국과 한국의 전통이 적용되기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발해가 요동에 기반을 두었다는 지역적 특수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