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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는 황제국이었다!!!

영지니 2007. 12. 30. 18:37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는 황제국이었다!!!

 

우리민족은 황제 칭호를 사용했을까?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선조 국가들은 황제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왕(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고 본다. 더군다나 고구려, 백제, 신라 임금 등이 요동개국공, 영평이주 고구려왕, 대방군공, 낙랑군공 등 중국 왕조로부터 봉작을 받았기 때문에 황제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가 중국 왕조에 책봉 받았다고 해서, 우리는 중국의 제후국, 종속국인 것인가?

그건 아니다. 현재 중국은 고구려가 중국 왕조에 책봉을 받았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사라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중국왕조에 봉작받은 신라를 중국의 역사라 하는가? 아니다. 당시 책봉-조공관계는 동아시아 외교의 한 관례이다. 필자가 예전에 고구려는 조공국이 아니라 제국이다는 글을 올린 바 있다. 거기서 필자는 고구려가 중국 왕조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은 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구려의 실리를 위한 것일 뿐 고구려가 정말로 중국 왕조에 종속했다는 것은 아니다고 밝힌 바 있다.

 

5호 16국 시대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동이東夷의 담덕공談德公이 감히 멋대로 황제皇帝를 칭하여... 연燕(후연) 황제가 구려拘驪(고구려)를 쳤지만 이기지 못하고 패하였다."

 

담덕은 고구려의 정복군주 광개토태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광개토태왕이 황제라 칭하자, 당시 북중국을 장악하던 후연이 이를 구실삼아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고구려에게 두들겨 맞았다는 기록이다. 근데 이 기록은 우리의 역사서가 아닌 중국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태왕비를 보면 광개토태왕이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연호는 아무나 사용할 수 없다. 오직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다. 만약 고구려가 왕국, 제후국이라면 감히 연호를 사용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광개토태왕비를 보면 "태왕의 위력은 사해에 떨쳤다"고 나와있는데 사해라는 표현 역시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연호의 사용, 사해라는 표현... 그것은 고구려가 황제국임을 뜻한다.

 

고구려 장수태왕 역시 건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문자명왕은 명치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연가7년명여래입상이라는 손바닥 크기의 조그만 불상이 있다. 이 불상의 연가는 고구려 안원왕의 연호라고 알려져 있다. 연호의 사용이 광개토태왕에 국한되지 않고 그 후대 임금들이 사용하였다는 건 고구려가 명실상부한 황제국임을 나타낸다.

 

고구려 임금은 스스로를 '천손(天孫)'으로 일컫고, 자신의 나라를 '천하사방 가장 성스러운 곳' 이라고 표현할 만큼, 당시 고구려는 고구려 천하를 이룩한 천자국이었다. 이런 고구려가 황제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고구려가 고구려 천하를 수립하여 번영을 구가할 때 당시 중국은 북쪽의 북위와 남쪽의 남조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기록이 있다. 장수태왕 23년(435년) 고구려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 북위 역대 황실 계보를 바치라고 요구한다. 역대 황실 계보를 바친다는 것은 그 나라의 역사를 바치는 것으로 신하의 나라가 임금의 나라에게만 행하는 행위이다. 그 예를 북위가 고구려에 행한 것이다.

 

더욱이 장수태왕이 죽자 북위의 고조는 소위모라는 흰색 모자와 포심의라는 상례 때 입는 옷을 입고 동쪽 교외에 나가 곡을 하며 "고구려 장수왕이 돌아가셨다. 내가 비록 생전에 그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름은 널리 퍼져서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왕이 죽으면 황제는 그냥 사신에게 "안됐구나. 슬퍼한다고 전해 주어라."고 말하며 형식적인 조문편지만 보낸다. 그런데 왕王이라고 적은 나라의 지배자에게 황제皇帝가 죽음을 슬퍼하며 몸소 울고 흰 옷을 입고 예를 갖추어서 정중히 애도한다? 그러면서 "이름이 널리 퍼졌기에 잘 알고 있다."고 하는가? 뿐만 아니라 519년 문자명왕이 죽었을 때 북위에서는 전왕 세종의 부인이자 숙종의 어머니인 영태후가 슬퍼하며 동쪽 사당에서 애도를 표시했다. 게다가 508년에는 당시 북위의 세종이 청주에 고구려 시조를 제사지내는 고려묘라는 사당을 세우기도 했다.

 

결국 북위는 제후국으로서, 황제국인 고구려에게 예를 다했다고 봐야한다.

 

또 다른 기록에는 고구려의 제왕을 열제(烈帝)라고 부른다고 나와있다. 수서에는 광개토태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을 "소(昭)열제"라 하였다. 제후국이라면 과연 황제를 나타내는 帝를 사용할 수 있었을까? 이는 고구려가 칭제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열제라는 말을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열국烈國을 다스리는 황제"라는 뜻이다. 당시 고구려는 사방의 국가, 종족을 정복했기에 고구려 임금 칭호에 딱 맞는 표현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백제는 어떨까? 백제 무령왕릉에 출토된 묘지석에는 백제 사마왕(무령왕)의 죽음을 붕(崩)이라고 적고 있다. 붕(崩)은 황제가 죽었을 때 쓰는 말이다. 제후국, 왕국의 임금은 감히 쓰지 못하는 말이다. 만약 백제가 제국이 아닌 왕국이었다면 사마왕의 죽음을 훙(薨)이라 적어야 한다. (왕의 죽음을 가리킬 때 훙(薨)이라 한다. 

 

백제의 유물 중 칠지도가 있다. 그런데 칠지도 명문에는 "백제 대왕이 일본 후왕에게 하사한다"고 적혀있다. 이는 백제 임금이 황제, 일본왕이 제후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백제의 국색(國色)은 황색(黃色)이었다.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를 정벌하러 갈 때 황색 깃발을 사용한 바 있다. 황색은 동아시아 사회에서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색이었다. 음양오행사상에 의거하면 황색이 가운데(중앙:中央)를 상징한다. 그렇기에 역대 왕조의 황제들은 황색을 사용하였다. 일례로 명의 황제는 황색옷을, 명의 제후국이었던조선의 임금은 붉은 색 옷을 입었다. 이처럼 황색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색이었다. 이런 색을 국색으로 삼은 백제 역시 실질적으로는 황제국이었음을 뜻한다.

 

다른 증거는 남중국에 나타난 기록들이다. 북위의 침공을 막은 댓가로 백제왕이 부탁하여 '은상'으로 땅들을 내려 주었다고 적혀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세상에 제후국이 황제국을 지켜주고 댓가로 땅을 받는가? 임진왜란때도 나타났듯이 조공국은 조공을 바치고 대신 황제국은 조공국이 외침으로 위험에 빠졌을 때 군사를 파견해 도와주는 것이 원칙이다. 일례로 400년 왜가 신라에 쳐들어왔을 때 고구려는 군사를 파견하여 속국이었던 신라를 구했다. 게다가 명의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 역시 임진왜란으로 국난에 처하자 조선의 상국(上國)인 명나라가 조선에 군을 파견한 예도 있다. 이래도 땅을 쪼개주고 지배를 인정하며 외침에 살려달라고 아우성인 남조가 백제의 상국, 황제국이었단 말인가? 

 

 

신라 역시 황제국 체제를 지향하고 있었다. 신라의 법흥왕은 건원, 진흥왕은 개국 · 태창, 진평왕은 건복, 선덕여왕은 인평, 진덕여왕은 태화 등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만약 신라가 제후국, 왕국이라면 연호를 사용했을까? 더욱이 『화랑세기』에는 신라의 임금을 왕이 아닌 제(帝)라 표현하고 있다. 법흥제, 진흥제, 진평제 이런 식으로 말이다.

 

 

발해 역시 황제국이었다. 고구려가 연호를 사용하고 스스로를 태왕(太王)이라 칭한 황제국이었던 만큼, 발해 역시 연호를 사용하고 황제라 칭한 황제국가였다. 발해가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발해가 당시 중원을 지배한 당과 대등한 지위를 지닌 국가였다는 것을 말한다 볼 수 있다. 당시 동아시아를 보면 당 중심의 국제질서가 성립되었고 이런 당 중심의 국제질서에는 신라를 비롯하여 많은 국가들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발해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정한 것은 신라와 달리 발해와 당이 대등한 帝國임을 나타낸다 할 수 있다.

 

『신당서』「발해전」를 보면

 발해 제2대 무왕은 인안

           3대 문왕은 대흥

           5대 성왕은 중흥 

           6대 강왕은 정력

           7대 정왕은 영덕

           8대 희왕은 주작

           9대 간왕은 태시

          10대 선왕은 건흥

          11대 이진왕은 함화

등의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협계태씨족보』를 보면 발해의 개국조인 대조영 역시 '천통'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한단고기』 「태백일사」 역시 발해의 역대 제왕들이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대수 묘호 연호 시호 이름
1 태조(太祖) 천통(天統)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 조영

2

광종(光宗) 인안(仁安) 무황제(武皇帝) 무예
3 세종(世宗) 대흥(大興)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 흠무
4 원의
5 인종(仁宗) 중흥(中興) 성황제(成皇帝) 화여
6 목종(穆宗) 정력(正歷) 강황제(康皇帝) 숭린
7 의종(毅宗) 영덕(永德) 정황제(定皇帝) 원유
8 강종(康宗) 주작(朱雀) 희황제(僖皇帝) 언의
9 철종(哲宗) 태시(太始) 간황제(簡皇帝) 명충
10 성종(聖宗) 건흥(建興) 선황제(宣皇帝) 인수
11 장종(莊宗) 함화(咸和) 장황제(莊皇帝) 이진
12 순종(順宗) 대정(大定) 안황제(安皇帝) 건황
13 명종(明宗) 천복(天福) 경황제(景皇帝) 현석
14 위해
15 청태(淸泰) 애제(哀帝) 인선

 

 

발해 문왕(3대 임금)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의 무덤에는 발해가 황제국임을 증명하는 증거 중의 하나이다. 무덤입구에 발견된 묘지석을 보면 문왕을 가리키는 말로 '황상(皇上)' 이라는 단어가 있다. 황상은 곧 황제로, 당시 발해인들이 자신들의 군주를 황상(황제)으로 부른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천하관을 계승한 것으로, 말갈 소수민족이나 북만주지역의 소수민족, 요동지역의 고려 후국에 대해 발해 중앙 정부를 황제국으로 예우하도록 요구하고 그에 대한 답례를 한 사실로 뒷받침 된다.

 

일본 구라시키시의 오오하라 미술관에는 발해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유물이 발해가 황제국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유물은 함화 4년명 비상(碑像)으로, 함화란 발해 11대 임금인 왕 이진(이름, 묘호는 전해지지 않음, 다만 한단고기에 의하면 이진왕의 묘호를 장종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그의 묘호는 장종, 또는 장왕이 된다)의 연호로 834년(함화 4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비상은 허왕부(許王府)의 관리였던 조문휴의 어머니가 모둔 불제자를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허왕부(許王府)'라는 관청의 이름이다. 이는 발해에 왕으로 봉해진 이가 있었다는 뜻이 된다. 당시 중국의 제도를 참조해보면 왕부는 황제국(정확히는 황제를 주장하는 국가나 황제의 위치에 있는 나라)에서 개설할 수 있다. 허왕부라는 명칭의 등장은 발해가 황제국임을 주장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고려는 어떤가? 고려 역시 황제국 체제를 지향한 국가였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4대 광종은 '광덕(光德)', '준풍'등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또 고려 사람들은 송악(개경)을 황도(皇都) · 황성(皇城)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의 역사책인 안정복 선생의『동사강목』에는, 고려 역사를 설명하면서 "왕건은 불의로써 나라를 얻고는 외람되이 천자(天子)라 칭한 부류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고려태조 왕건이 건국하면서부터 스스로를 '황제'로 일컬었음을 알려 준다고 할 수 있다.

 

『고려사』와『고려사절요』, 그리고 조선시대 쓰여진 여러 역사책들에 고려 임금을 '왕'이라 표현했기에 고려가 왕국이었다고 알고 있다. 『고려사』에는 고려 '왕'이 스스로를 '짐(朕)'이라고 부르고 있다. '짐(朕)'은 제국에서 황제가 스스로를 일컫는 말이고, 이론상 황제가 '임명'한 '제후'인 왕이 쓸 수 없는 말이다. 만약 고려 임금이 '제후'일 뿐이었다면 스스로를 '짐(朕)'이라고 일컬을 수 있었을까?

 

『고려사』는 주자학을 '국교'로 삼고 한족에 저자세를 취한 조선시대에 조선 사대부들이 적은 역사책이니만큼, 고려가 칭제건원(: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쓰는 일. 즉 제국임을 나타내는 일)한 사실을 적었을까?  

 

고려가 황제국이었다는 증거는 또 있다. 다름 아닌 고려시대 관료체제가 바로 그 증거이다.
3성(省) 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상서성(尙書省)
6부(部) 이부(吏部)·호부(戶部)·예부(禮部)·병부(兵部)·형부(刑部)·공부(工部)
왜 이들 부서(황실에 딸린 부서)의 이름이 중요한가 하면, " '성(省)'과 '부(部)'자는 천자국에서 쓰던 것으로 제후국은 함부로 쓸 수 없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중국의 '신하'임을 자처했던 조선시대에는(물론 형식상이지만) '부(部)'라는 말을 '외람되이' 쓸 수 없다고 하여 고려의 6부(部)와 같은 역할을 맡은 부서를 '조(曹)'라고 고쳐 불렀다. 이부·호부·예부·병부·형부·공부를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로 바꾼 것이 그것이다. 또 '성(省)'자는 발해(대진국)시대에도 '3성(省) 6부(部)'제 라는 이름으로 발해의 행정체제에도 쓰인바 있다.

 

게다가 고려 임금들이 명령을 내릴 때 사용한 용어로, '조서(詔書)'·'제서(制書)'·'칙서(勅書)'가 있다. 이들 용어는 천자국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용어로 제후국 왕은 쓸 수 없다. 제후국에서는 이들 대신 '교서'를 사용했다.

 

고려 문인이었던 이규보의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

'온 천하가 일가(一家 : 한 집안)되니 천자(天子)의 성스러우심이라.'

- 서기 1209년(단기 3542년, 고려 고종 5년), 이규보가 지은 연등회 의식을 축하하는 시(詩)에서
이규보는 고려의 연등회를 축하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 즉 이 시는 연등회를 열게 지시한 고려 임금을 '천자(天子)'라고 부르고 있고, 연등회에서 고려라는 이름으로 "온 천하가 한 집안이 되니" 이는 (고려) 천자의 성스러움 덕분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만약 고려가 제후국이었고 고려 임금이 단지 '왕'이었다면 일개 문인이고 고려의 녹을 먹는 관리였던 이규보가 '감히' 고려 임금을 '천자'라고 부를 수 없으며 고려의 깃발 아래 '온 천하가 일가(一家) 되니'라고 읊을 수도 없다.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는 책을 쓰면서 예전에 금(金)나라가 고려에게 보낸 조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대금(大金)황제가 고려국 황제(皇帝)에게 글을 보낸다.'(大金皇帝奇書于高麗國皇帝)
고려가 스스로를 일컬은 기록이 아니라 금(金)나라가 고려에 보낸 금(金) 황제의 조서에 이렇게 적혀 있다. 고려가 스스로를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라고 했고, 이를 대외적으로도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교산리에는 마애약사상(바위 벽에 약사여래불이 새겨져 있다)이 있는데, 그 옆에는 27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고려 경종의 만수무강을 비는 것이다. 그 금석문에는 '황제만세원(皇帝萬歲願 : 황제께서 만세토록 - 오래오래 - 사시길 빕니다. 라는 뜻)'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고려의 경종을 황제라고 불렀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송악의 궁궐에 딸려 있던 원구단(圓丘壇: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 에서 고려 황제가 제천(祭天 : 하늘에 제사지냄)도 '물적 증거'의 하나이다. 동아시아 질서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권한은 천자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역대왕조들은 제후국, 왕국이 아닌 황제국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역대왕조들이 중국에 번속한 제후국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역사교육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의 옛 국가들은 중국에 조공이나 바치며, 스스로를 제후라 낮춘 왕국이 아니라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이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할 때이다.

 

 

 

참고: 강기준, 다물 그 역사와의 약속

        김용만, 고구려의 발견

        박영규, 고구려본기

        서병국, 발해제국사

        네이버 오픈사전

        cafe.daum.net/hankookhistory 『趙光祖』靜庵-孝直《文正》 님 글

 

 

 

출처 : 이선생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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