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발행된 모흥갑의 평양 능라도 소리광경. 옆에 명창 모흥갑이라고 적혀 있다.
‘평택이 판소리의 고장이다’라고 한다면 거개의 사람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판소리사에서 평택이란 곳은 그냥 지나 칠 수가 없는 곳이다. 평택이 판소리사에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을 하고 있는 사실이다. 더욱 이 곳은 판소리와 함께 예술적으로 뛰어난 경기시나위의 한 류파가 발생을 한 곳이며 풍물의 본거지였다는 점이다. 경기시나위 중 동령제는 평택 이충동의 방화준(대금)에 의해서 시작이 되었으나 지금은 단절이 되었다. 또한 평택을 근거지로 남사당패와 걸립패들이 활동을 하였으며 지금도 평택농악은 중요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렇게 우리 전통문화의 전승에 중요한 구심점이 되었던 평택이기에지금까지도 많은 민속이 전승이 되고 있기도 하다.
소리의 고장 평택. 일찍 우리는 조선 판소리사에서 평택 출신의 명창인 모흥갑을 만날 수 있다. 모흥갑(1822~1890)은 진위 출신으로 조선조 순조, 헌종, 철종 삼대에 걸쳐 전국의 소리판을 풍미한 명창이다. 우리는 판소리 초기명창을 이야기할 때 염,모,고,송이라고 표현을 한다. 이는 염계달(여주 출신), 모흥갑, 고수관(충남 해미 출신), 그리고 전라도의 가왕 송흥록을 말한다. 모흥갑의 소리는 흔히 통상성이라고 하여서 고음처리가 그 누구도 흉내를 낼 수 없을 정도였으며 강산제와 춘향가, 적벽가 등에 능하였다고 한다. 평양 모란정에서 덜미소리 한번을 내어 10리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하니 모흥갑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적벽가를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전하는 이야기로도 당시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다.
중고제(中高制)는 판소리에서, 조선 헌종 때의 명창 모흥갑(牟興甲)·염계달(廉季達)·김성옥(金成玉)의 법제(法制)를 이어받은 유파를 말한다. 동편제와 서편제의 중간적 성격을 띠며, 첫소리를 평평하게 시작하여 중간을 높이고 끝을 다시 낮추어 끊는 것이 특징이다. 선비가 달밤에 글을 읽는 것 같다는 중고제는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성행하였다. 이는 모흥갑과 염계달은 경기, 김성옥은 충청도 강경 일끗리 출신이기 때문에 중고재를 경기, 충청의 소리로 구분하는 기점이 되었을 것이다.
평택농악 중 오무동
이른 시기의 판소리 명창 중에서 모흥갑은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소리꾼 중의 한 사람이다. 신위의 『관극시』, 송만재의 『관우희』, 윤달선의 『고아한루악부』, 이유원의 『임하필기』, 이건창의 『이관잡지』, 신재효의 『광대가』 등에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그 외에도 ‘춘향가’나 ‘무숙이타령’ 등에도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한다.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모흥갑이라는 명창이 당대에 명성을 떨쳤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모흥갑은 소리하는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소리꾼이기도 하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여덟 폭 짜리 <평양감사부임도> 중에는 능라도에서 많은 구경꾼이 모인 가운데 소리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 있는데, 여기에 소리하는 광대가 모흥갑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그림은 하도 유명해서 판소리학회지인 『판소리연구』 표지를 위시해서 여러 판소리 관계 문헌의 표지 그림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 그림이 소리하는 광경을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른 시기에 명창들이 야외에서 소리를 할 때 어떻게 했는가를 알려주는 아주 귀중한 그림이다.
평택 진위천. 소리는 대개 강 등을 끼고 발달을 했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모흥갑이 어디 사람인지조차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경기도 진위출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전주 난전면 귀동(지금의 구이 부근)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 하나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모흥갑은 고음으로 이름을 날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모흥갑의 소리는 학이나 봉황의 울음소리에 비유되었다. 다만 모흥갑의 덜미소리나 그 청이 동, 서편제보다는 당대의 전해지는 중고제의 명창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서 모흥갑은 평택 진위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신재효는 그의 ‘광대가’에서 모흥갑의 소리를 ‘설상에 진저리친 듯’하다고 했다. 이런 표현은 모흥갑이 고음을 잘 내어 그것으로 이름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모흥갑은 ‘적벽가’를 잘했다고 하나, 그의 더늠으로는 ‘춘향가 중에서 “여보, 도련님. 날 다려가오”하는 이별가 한 대목이다. 지금도 조상현이나 성창순 등이 부르는 보성소리 ‘춘향가’에는 이 대목이 들어 있는데, “여보, 도련님. 날 다려가오”를 반복하면서 점점 음정을 높여, 마지막에는 거의 숨이 막힐 정도까지 이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욱 평택은 조선조 말 명창 이동백(충남 서천군 종천면 출생)이 이곳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다가 영면한 곳이다. 이동백은 판소리사에서 ‘전무후무한 명창’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록 광대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소리꾼이었다. 처가인 평택의 한 야산에 올라 소리를 한 후 ‘이제 소리를 알만하니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이동백명창. 이렇듯이 평택은 우리나라 판소리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경기 충청간의 소리인 중고제의 초기 대명창과 말기 대명창이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영면을 했다는 것은 평택이 우리소리에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 : | 누리의 취재노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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