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칠장사 명부전 벽화에 그려진 혜소국사와 칠인의 도적
안성에 있는 칠장사는 죽산면 칠장리 764에 소재한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이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칠장사는 신라 고승 자장율사가 진덕여왕 2년인 648년에 창건하였고, 고려시대 혜소국사가 크게 중창하였다고 한다. 고려 현종 5년(1014)에는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넓혀 세웠는데 ‘칠장사’와 ‘칠현산’이라는 이름도 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7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선하게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유래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인조 원년(1623)에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명복을 비는 절로 삼아서 불사를 크게 이룩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세도가들이 이곳을 장지(葬地)로 쓰기 위해 불태운 것을 초견대사가 다시 세웠으나, 숙종 20년(1694) 세도가들이 또 다시 절을 불태웠다. 숙종30년(1704)에 대법당과 대청루를 고쳐 짓고 영조 원년(1725)에 선지대사가 원통전을 세웠다.
칠장사는 중부고속도로 일죽 톨게이트를 나와 안성 시내를 향해 가다가 보면 죽산면 소재지가 나온다. 죽산면 소재지에서 승용차를 이용해 좌측으로 10여분을 가다가, 다시 우측으로 들어가 낮은 고개를 넘어가면 마을을 지나 칠장사의 일주문이 나타난다. 칠장사 주변으로는 온통 녹음이 짙푸르다.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에는 철당간지주와 칠장사 사적비가 먼저 오는 손들을 맞이한다.
칠장사 명부전
명부전 벽화에 그려진 활을 쏘는 5세때 궁예의 모습
몇 년 만에 칠장사에 들렸다. 넓지 않은 공간에 오밀조밀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경내는 그저 포근한 품을 연상케 한다. 대웅전 앞에는 탑을 빙 둘러 초파일 연등이 걸려있다. 대웅전에 들려 참례를 하고 명부전을 둘러본다. 색다른 벽화가 눈길을 끈다. 한눈을 가린 궁예의 모습이 보인다. 한편에는 임꺽정과 병해대사의 모습도 보인다. 요즈음 절집의 벽화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적나라한 모습을 보기는 쉽지가 않다. 그 모습을 연신 카메라에 담는다. 그러한 내가 신기했는지 일을 하던 사람들이 한참을 쳐다본다.
칠장사 명부전 벽화에 그려진 궁예
궁예는 후고구려의 왕(901~918 재위)이다.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궁녀이나 이름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신라 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 전해지기도 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왕실에서 버림받고 유모의 손에서 자라다가 세달사(世達寺)에 들어가 중이 되어 선종(善宗)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궁예는 이곳 칠장사에서 13세까지 활쏘기와 무예를 연마했다고 하는데, 아직도 그 활터가 있다. 궁예의 어릴 적 활 쏘는 모습이 이곳 칠장사 명부전의 벽화로 옛 기억을 더듬게 한다.
병해대사와 칠인의 도적 중 임꺽정
임꺽정은 대도로 유명하다. 힘이 장사인 임꺽정과 그 무리들이 칠장사에 몰려들었다. 백정의 아들로 천민이라 설움을 받던 임꺽정은 칠장사에 법력이 높은 고승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칠장사를 찾은 것이다. 여기서 임꺽정은 갖바치 출신인 병해대사를 만난다. 생불로 모든 사람들의 추앙을 받던 병해대사는 임꺽정과 함께 온 도적무리들을 제자로 받아들인다. 신분제도의 모순과 당시의 타락한 사회상에 분을 느낀 병해대사와 임꺽정은 아마 서로가 일맥상통한 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 의기가 투합 되어서인지 칠장사 아랫마을에서는 굶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어려운 시기에 서로 나눔의 미덕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절집의 본질을 일깨운 곳이기도 하다.
칠장사 명부전 벽화에 나타나는 임꺽정
칠장사에서 병해대사의 가르침을 받은 임꺽정은 스승인 병해대사의 부처를 만들기 위해 목수를 불러들여 목불을 만들게 하였다. 목수가 목불을 완성하자 임꺽정은 곰곰이 생각을 했다. 저 목수가 나가서 관군을 몰고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목수를 죽이려고 하다가 ‘나의 스승을 위해 목불을 만들었으니 하루의 말미를 주도록 하자’며 돈을 주고 떠나도록 놓아주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도록 목수는 고개를 넘지 못하였다. 목수는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임꺽정은 칠장사에서 병해대사에게 무술과 글을 배웠으며, 난을 일으켰을 때 관군으로부터 피하던 장소도 바로 이곳 칠장사였다. 벽에 그려진 병해대사와 임꺽정, 그리고 의형제를 맺은 이봉학 등의 모습이 칠장사의 옛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명부전을 뒤로하고 산으로 난 계단을 오른다. 혜소국사비와 부도가 있고, 뒤편에는 산신각이 보인다. 혜소국사비는 전각을 새로 짓고 비를 보수하느라 일꾼들이 분주한 모습이다. 나한전 앞에는 유리문을 만들어 놓았다. 한 칸 크기의 나한전은 나옹스님이 심었다는 수령 620년이 지난 소나무와 함께 자연 암반 사이에 어우러져 있다. 이곳이 유명한 7나한(혜소국사가 교화시킨 일곱도적)의 동자상을 모신 곳이다. 조선조 500년 동안 칠장사는 3번 전소되었으나 나한전만은 건재하고 있으며, 특히 조청으로 만든 과자(과즐:한과의 일종) 공양을 올리면 영지를 얻는다 하여 조선조 내내 과거시험에 장원을 꿈꾸던 선비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 유명한 박문수어사도 이곳에 와서 불공을 드린 후 장원급제를 했다고 전한다.
칠장사 나한전에는 일곱명의 도둑이 나한으로 모셔져 있다.
궁예와 임꺽정. 어찌 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대단한 사내들의 이야기가 이 칠장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칠장사 여기저기를 돌아보면, 그저 오래되고 작은 절집 안에 거대한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이 절집이 그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이리 꿋꿋이 오늘까지 이어져 온 것은 아닐까? 칠장사를 떠나면서 다시 한 번 명부전의 벽화를 바라본다. 처음 바라볼 때는 노여움에 찬 듯한 얼굴이, 어느덧 온화한 표정으로 바뀌어졌다. 절집을 한 바퀴 도는 사이에 벌써 나도 저 무리 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나한전의 뒤에 있는 수령 620여년의 소나무
출처 : | 누리의 취재노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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