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망한 지 97년 뒤 유민들은 중국 산동지역에 '고구려인의 왕국'을 세웠다.4대에 걸쳐 55년간 이 지역을 다스린 '한민족의 나라' 이름은 '제(齊)'. 제나라 왕실은 당 황제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력을 누리며 5차례 이상 낙양을 공략, 황제를 봉천(奉天)으로 쫓아버렸다. 이런 역사적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숨겨진 한인(韓人)의 나라 '제'의 전모와 그에 얽힌 역사적 비밀을 추적했다.
[고구려 유민의 왕국] 잊혀진 왕국 제(齊)
당 황제에 대항해 건설 4대에 걸쳐 55년간 산동반도 통치
고구려의 유민들이 당나라 조정에 대항, 지금의 산동반도에 독립국가 ‘제(齊)’를 세우고 55년 간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총 5회 이상 대군을 일으켜 당의 행정수도 ‘낙양’을 공략했었다는 주장이 제기돼 주목을 받고 있다.
연세대학교 사학과 지배선(池培善) 교수는 최근 ‘고구려인 이정기의 아들 이납의 발자취’라는 논문을 통해 “제나라는
▲독자적인 법령과 조세제도를 구비하고
▲문무백관을 임명한 뒤
▲자체적 지방행정 단위와 통치조직을 갖췄다는 점에서 당 황실에 의해 왕으로 책봉된 여타 번진(藩鎭) 세력들과 구별되는 엄연한 독립국가”라면서 “제를 세운 이씨 일가는 765년부터 819년까지 55년 간 산동반도를 다스리며 당의 행정수도 낙양을 공략했었다”고 말했다.
●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이납(李納)·이사고(李師古)·이사도(李師道)의 4대에 걸친 활약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본지가 단독 입수한 이 논문은 연세대학교에서 발간하는 논문집 ‘동방학지(東方學志)’ 3월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제나라의 탄생 배경을 연구해 온 지배선 교수는 “중국 역사책 신·구당서(新舊唐書)를 바탕으로 제나라의 시조 이납(李納)에 관한 기록을 파악했다”며 “이씨 4대에 관한 기록은 책부원구(冊府元龜)·자치통감(資治通鑑)·태평어람(太平御覽) 등 다른 사료에도 나와 있다”고 말했다.
‘신·구당서’는 618년 당을 세운 고조(高祖)에서부터 907년 나라를 잃은 애제(哀帝)에 이르기까지, 21제(帝) 290년 간의 일을 기록한 중국의 정사(正史)다. 이 책의 원래 이름은 당서(唐書). 송나라 인종 때 다시 편찬됐기 때문에, 두 가지를 구별하기 위해 먼저 것을 구당서(舊唐書), 나중 것을 신당서(新唐書)라 부른다.
●학자들 “정사(正史)로 인정할 수 있다”
당나라 역사를 연구하는 고려대학교의 김택민 교수는 “당서(唐書)는 당나라 역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자료”라며 “신당서와 구당서 모두에 나와 있는 기록이라면 정사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인 경희대 신용철 교수는 “중국에서는 고구려 유민의 업적을 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록이 당서에 나와 있다면 정사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나라의 기초를 닦은 ‘이정기’란 이름이 이번에 처음 알려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정기 사후, 제나라를 수립한 이납과 그 ‘왕통’에 관한 연구 논문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숭실대 김문경 교수는 “이정기에 관한 논문은 10여년 전에 내가 쓴 것과 지배선 교수가 쓴 것, 도합 2편이 있다”며 “하지만 이정기의 아들과 손자에 관한 본격적 연구는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고구려 유민들이 건국한 제나라의 면적은 약 18만㎢. 통일신라보다 약간 크고 한반도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지금의 산동(山東)반도 전역을 아우르고 있었다. 산동반도는 조선조를 거쳐 지금까지 우리와 가장 교류가 많은 곳으로 한국에 사는 화교 대부분이 그 지역 출신이다.
제나라가 등장했던 시기(765~819)는 당 전역에서 번진들이 활약하던 때였다. ‘한국의 칭기즈칸’ 고선지(?~755;주간조선 1월 16일자, 1737호 보도)와 해상왕 장보고(?~846) 등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던 시기도 바로 이 때다.
지배선 교수는 “제나라의 의미는 영토의 크기보다 국가의 자질”이라며 “이씨 일가가 지배했던 산동지역은 당시 가장 귀중한 재화였던 소금과 구리의 산지이자 농·수산물이 풍부했던 옥토”라며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 경제의 중심지를 장악했다는 사실에 무게를 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 교수는 “
▲제나라의 무대였던 하북과 산동지방에 고구려 유민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던 사실과
▲제나라를 일으킨 이씨 일가를 ‘고구려인’이라고 명기한 점
▲제나라 체제하에서 (오랑캐의 영향을 받아) 산동지역의 언어와 풍습이 달라졌다고 기록된 점
▲제나라가 망할 때 당이 고구려계 군인 1200명을 집단학살했다는 점 등으로 미뤄, 제나라의 지배층은 고구려의 후손이란 자부심을 강하게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복한 나라의 군인을 집단 사살한 것은 당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서강대 사학과의 김한규 교수는 “이정기 일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당나라가 처해 있던 특수상황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안녹산의 난(755년) 이후 번진과 비중국계 민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며 “이정기 4대의 활약도 이러한 큰 틀 속에서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대의 김택민 교수는 “당시엔 스스로 왕이라 칭했던 번진들이 많았다”면서 “절도사의 세력이 강해지다보니 군대를 양성하고 관리를 임명하게 된 것이지, 어떤 역사의식을 갖고 나라를 세웠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지배선 교수는 “제나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립국가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있는 것으로 안다”며 “그렇게 본다면 한동안 독자 연호없이 당의 연호를 사용한 신라는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지 교수는 “당 조정이 사신을 보내 신라왕을 책봉했던 것과 달리, 제나라 시조 이납은 스스로를 왕으로 칭한 뒤 독자적인 국호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신라보다 독립성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출처 : 주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