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할한국사

동방의 로마제국 百濟

영지니 2007. 12. 30. 22:37
고구려가 망한 뒤 30년 뒤인 698년 고구려의 옛 땅에 고구려의 유장인 대조영이 대진국(大震國:발해, 대진국은 스스로를 발해라 부르지 않았다. 발해는 당나라에서 대진국이 발해 건너 저편에 또는 발해 연안을 차지했기 때문에 발해라 불렀을 뿐이지, 대진국은 스스로를 발해라 부르지 않았다) 고구려의 뒤를 이어 건국한 만큼, 대진국의 국가정책은 고구려의 옛 영토를 다물(多勿)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잠깐,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계이고, 피지배층이 말갈족이라고 하며 발해를 한국사로 포함시키겠느냐는 말이 있다. 하지만 필자는 발해는 분명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 고구려 계승국이라 밝히고 싶다. 그 이유는 발해 임금이 스스로를 고려국왕이라 칭했을 뿐 아니라 당시 발해 주민 대부분이 고구려인이었기 때문이다.

 『속일본후기』를 보면 발해의 중대성에서 일본의 태정관에 보낸 문서에, "일본은 동쪽으로 멀리 있고, 요양은 서쪽의 장벽이니, 두 나라의 거리가 만 리가 넘는다"는 내용이 있다. 문서 내용으로 보아 발해의 서쪽 접경은 요양이며, 그 이동에 있는 요동은 발해의 영토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옛 고구려의 주민들은 요동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 점을 통해 발해의 주민 구성 대다수가 고구려계인점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고구려 멸망시 인구가 69만호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구려인 전부가 당으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없다. 기록을 보면 고구려인 중 4만호가 당나라 내륙으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을 뿐, 고구려인 전부를 당으로 이주시켰다고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머지 고구려인은 어디로 갔을까?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그들은 고구려의 옛 영토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진국의 건국으로 그들은 대진국의 일원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발해를 구성하고 있던 말갈은 고구려의 한 예속 종족이었다. 어쩌면 말갈족이라는 것도 한족이 일방적으로 갖다 붙인 명칭일 것이다. 대진국의 건국을 인정하지 않은 당과 신라가 고구려의 후예인 대진국을 말갈이라고 싸그리 잡아 불렀을 수도 있다. 이는 고대 한족들이 자기들 동쪽에 살던 고대 조선족, 동호족, 산융족, 숙신족을 싸그리 잡아 동이족으로 불렀듯이 말이다.

 

 흑수말갈의 지배권을 둘러싼 당과 발해의 대립이 심해지고 있는 가운데, 발해의 임금 무왕의 아우 대문예가 당에 망명함으로써 발해와 당은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전쟁에서 선수를 친 쪽은 발해였다. 732년 무왕은, 장문휴에게 수군을 주어 당의 등주를 치게 하였다. 신속하게 등주에 들이닥친 발해군은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고, 등주를 초토화시킨 후 바로 철수해 버렸다.

당시 발해수군의 상륙전이 당나라에 끼친 결과는 엄청났다. 『신당서』 「오승자전」을 보면 발해군의 침공으로, 성읍이 도륙되었고, 많은 유민과 실업사태를 일으켜 등주라는 항구도시를 완전히 파탄시켰다고 씌여 있다. 엉망이 된 등주를 재건하기 위해 전쟁으로 발생한 실업자들을 위해 운전금(運錢金)을 해마다 30만의 규모로 줄이는 긴축재정을 펴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등주의 복구를 위해 다른 데에 예정된 30만의 운전금 지출계획을 바꿔 , 용도를 변경하여 지출했다. 발해 수군의 성공을 통해 당시 발해에 적지 않은 수군과 육군이 있었으며, 수군작전에 따른 많은 인원과 군수물자, 병장기를 실어나르기 위한 거대한 군선이 존재했을 것이라 볼 수 있다. 발해 수군의 이러한 활약을 "등주 전투"라 한다.

 

 그런데 발해와 당과의 전쟁에 알려지지 않은 전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마도산 전투(마도산은 요서 지방에 있는 산)이다.

이는 장문휴 선단의 수군기동작전과는 별도로, 발해 무왕의 친정이라 할 수 있다. 『발해사연구론문집』을 보면 "발해의 무왕은 직접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요하, 대릉하를 건너 당나라의 영주, 평주지역의 성읍을 점령하고 장성계선으로 진출"했다고 못박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견해를 뒷받침하는 사료가 있으니 『신당서』의 「오승자전」을 들 수 있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발해의 대무예(무왕)가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馬都山에 이르러 성읍을 점령했다"고 한다. 이러한 때 당나라 조정은 발해의 침공에 정신이 없었다. 자치통감을 보면 "대문예를 유주로 보내, 군사들을 징발케 하여 싸우게 하는 한편, 유주절도사로 하여금 '하북채방처치사'를 겸하게 하고 상주, 낙주, 패주, 기주, 위주 등 16개주에 이르는 주와 안동도호부(평주)의 병력까지도 통솔케 했다"고 한다. 당시의 기사를 통해 당 조정이 발해군의 공격에 대해 얼마나 긴장했던가를 확인하게 한다. 즉 발해군이 당 조정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일종의 전면전과 같은 정벌전쟁을 펼친 셈이었다.

 

 발해군이 요서의 마도산에 진격한 것은 엄청나게 위협적인 기습작전으로 평가된다. 『신당서』 「오승자전」을 보면 발해군에 맞서고자 하던 오승자가 당군을 움직여 "요긴한 길목을 막고 큰 돌로 참호를 만들어 400리에 걸치게 했다"고 한다. 『통감고이』에도 오승자가 축조한 석축참호에 대해 "길을 막고 언덕을 파고 돌을 쌓아 400리 구간에 걸쳐 깊이와 높이가 각각 3길이나 되게 했다"는 규모였다고 씌여 있다.

당시 당이 400리에 걸친 참호를 만들 정도로 발해의 기습전 능력이 엄청났음을 가늠해볼 수 있다. 그리고 발해군의 지상전투 능력이 당나라 부대를 긴장시킬만큼 수준급이었음을 증명한다 볼 수 있다. 등주전투와 마도산 전투를 통해 당시 발해는 고구려에 견줄만한 군사강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겠다.  

 

 발해와 당의 숨겨진 전투인 마도산 전투.....

왜 이와 같은 기록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 전투가 당으로서는 매우 치욕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제대로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일까? 마도산 전투를 통해 우리는 발해가 고구려 못지 않은 군사 강국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한다.

발해는 스스로를 천손이라 하고, 연호를 정하고 황상이라 칭한 황제국이었다. 황제국이자 군사강국인 발해... 우리는 그러한 발해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이선생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