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할한국사

치우는 동이족의 조상일까? 묘족의 조상일까?

영지니 2007. 12. 30. 22:32

대한민국~~~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와 전국민이 외치던 함성이었다. 붉은악마....

붉은악마의 상징은 고대의 제왕이자 동방의 軍神인 치우천왕(蚩尤天王)이다.

치우천왕은 한단고기, 규원사화에 의하면 고대, 중국의 황제헌원과 싸운 옛 인물이다. 특히 그는 전쟁에서 무패의 신화를 창조한 인물로 죽은 후에 사람들에게 군신으로 떠받든 인물이었다.(한나라 유방은 항상 전쟁에 앞서 치우 사당에 제사를 드렸다고 함)

붉은 악마가 자신들의 마스코트로 삼은 치우.....그렇다면 치우는 우리의 조상일까?

 

치우는 묘족이었다는 설, 동이족(좁게는 배달국 14세 한웅)이었다는 설이 있다. 앞서 본인은 서언왕에 고찰한 바있다. 이번에는 치우천왕을 고찰하여 치우천왕의 귀속이 어디인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1. 치우천왕은 동이족인가? 묘족인가?

 

치우천왕이 동이족의 조상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알아보려면 동북아시아 상고시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상고시대 동북아시아에는 3개의 집단이 있었으니 화하족(華夏族:중국), 묘만족(苗蠻族:묘족), 그리고 동이족(東夷族)이 그것입니다. 중국사 연구가들에 따르면 화하족은 지금의 섬서성 황토고원을 중심으로 묘만족은 지금의 중국 남부를 중심으로, 그리고 동이족은 지금의 산동성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상고시대에 대한 중국 학자들의 견해 대부분은 치우=묘족의 지도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욱생 교수는 1940년대 이 견해가 틀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발간한 『중국고대사적 전통시대』란 책에 치우는 남방 묘만족의 영수가 아니라 동이족의 영수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산동성에 있던 제(齊)나라에서 치우가 팔신(八神) 중의 하나로 존숭되었다

치우총은 산동성 동평현에 있고, 치우의 견비총(어깨와 넓적다리 무덤)은 산동성 거야현에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황제는 치우를 죽인 후 시신을 이 두 지역에 나누어 분장했다는 것입니다. 서욱생 교수는 치우가 있는 이 지역을 과거 동이족이 살던 지역으로 보았습니다. 이 지역에 치우의 무덤이 있는 것이 사기의 기록대로 황제에게 패배한 결과인지, 아니면 규원사화에서 말하듯 스스로 물러난 결과인지는 더 연구해야 하지만, 동이족의 활동지역인 산동성에 치우의 무덤이 있다면 치우를 동이족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2. 치우는 구려족의 대표이다.

『서경』 「공전」을 보면 "구려족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고 씌여 있으며, 『사기』에도 "공안국이 말하기를 구려 임금의 호가 치우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구려족은 지금의 산동성, 하남성, 하북성에 거주했던 종족입니다. 그런데 구려족의 가주지가 동이족의 거주지와 일치하기 때문에 구려족의 임금 치우는 동이족이라는 것입니다.

 

3. 『일주서』 「상맥」 편에 "치우가 소호에게 주거를 명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소호족의 거주지는 산동성 곡부였고, 이 역시 동이족의 근거지였습니다.

 

4. 『염철론』 「결화」편에 "황제가 탁록 전투에서 양택과 소호를 죽이고, 황제가 되었다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양택은 양호(兩昊)의 오기라며 양호는 대호와 소호를 뜻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구절은 황제가 탁록전투에서 대호, 소호, 치우를 꺾고 염족(炎族)과 황족(黃族)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대호와 소호는 모두 동이족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렇다면 왜 치우가 남방 묘족의 우두머리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서욱생 교수는 과거에 화하족과 남방 묘만족 사이의 투쟁은 잘 알려졌지만 동이족과 화하족의 격렬한 전쟁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이래 출토된 금석이나 갑골문을 연구한 결과 동이족이 화하족과 크게 싸운 사실들이 드러났다며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이추를 동이족의 우두머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근래의 주목할 연구 결과로 치우는 동방 구려족의 우두머리이자 동이족의 우두머리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황제와 탁록대전을 벌인 후 치우 계열의 몇 개 씨족이 남하해 남방 삼묘족이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구려족의 후예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를 따르면 치우는 남방 묘족의 조상도 되는 것입니다. 묘족의 거주지인 귀주성에서 간행된 『낭대현방책』에는 "묘인은 옛날의 삼묘족이다. 탁록대전 후 점차 남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흥미로운 사실로, 탁록대전 후 치우 세력의 일부는 산동성 등 동이족 지역에 남아 있거나 만주와 한반도 지역으로 갔고 다른 일부는 중국 남방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국 남방의 묘족과 동이족인 우리 민족은 치우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같은 지류가 됩니다.

 

참고문헌: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권, pp28~31

 

2. 치우천왕의 일대기

이 글은 한단고기, 규원사화를 바탕으로 읽기 쉽도록 극화(라기보다는 요약^^)한 것입니다.

 

 치우천황은 고조선 이전 존재했던 고대국가 배달국의 14대 한웅(또는 환웅)이었습니다.
치우천황은 기원전 2749년 배달국의 도읍지 신시에서 태어았습니다. 그는 명문가 치우의 자손으로 치우천황의 시조 치우는 초대 거발한 한웅 때 거발한 한웅이 배달국을 세운 일등공신이었습니다.
치우천황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도 어떤 이는 배달국의 고토수복정복활동으로 보고있습니다.


 

치우천황은 자부선인이라는 뛰어난 선인을 스승으로 모셔 그로부터 천문,지리,역사,무예 등을 배웠습니다.
그 후 기원전 2707년 치우천황은 42살의 나이로 배달국 한웅의 위에 올랐는데 이를 자오지 한웅 또는 치우천황이라 불렀습니다.

치우천황이 즉위했을 때 배달국의 힘은 약화되었고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즉위 후 치우천황은 군제 개혁을 단행하여 신병기 즉 철제무기(청동기 무기라는 주장도 있음)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형제,친적 중 뛰어난 인물 81명을 골라 장군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치우천황은 인류최초로 갑옷을 만들었고,  길로산에서 쇠를 캐내어 도개(칼),모극(창),대궁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갑옷으로 무장한 치우와 그의 부하장군을 보고 당시 미개인이었던 중국인들은 구리머리에 쇠이마를 가졌고 치우와 그의 부하장군을 81명의 형제로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군제개혁을 단행한 치우천황은 배달국의 제후국 염제국의 유망이 백성들의 신망을 잃고 배달국에 반기를 들려고 하자 군사를 일으켜 유망을 정벌하여 공상에 입성하여 유망을 멸망시켰습니다.

 

한편 치우천황이 공상에 입성했다는 소문을 들은 중국인들의 수장 공선헌원(황제헌원)은 자신도 치우천황처럼 천하를 호령하는 천자가 되고자 치우천황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그가 군사를 일으킬 때 마다 치우천황에게 패했습니다. 당시 치우천황의 배달군은 철제무기에 갑옷을 무장하여 헌원군을 크게 격파하였고 또한 염초와 유황을 태워 연기를 일으켜 헌원군을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자신의 패인이 배달군의 우수한 무기와 연막작전이라는 것을 안  헌원은 배달국에 첩자를 보내 배달군의 무기및 갑옷 제조기술을 빼내오고 연기에도 항상 남쪽만을 가리키는 지남거란 수레를 만들어 연기속에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헌원은 이런 무기들을 믿고 배달국에 도전하였으나 치우천황의 배달군에 패했습니다.

이 때 치우천황의 동생인 치우비가 공을 세우려다 전사했는데 중국인들이 이 사건을 보고 마치 치우를 죽였다 라고 사기라는 역사책에 기록했습니다.
한편 치우비의 전사소식을 들은 치우천황은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켰고 비석박격기라는 투석기를 발명하여 헌원군을 공격하여 탁록에서 마침내 헌원이 항복하였습니다. 이 전쟁을 탁록대전이라고 합니다.
치우천황은 109년간 배달국을 다스리다가 기원전 2599년 1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무덤은 산동성 수장현에 있다고 합니다.

 


 

출처 : 이선생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