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할한국사

해상 제국(帝國) 고구려

영지니 2007. 12. 30. 19:12

 

고구려에 있어 서해(황해)와 동해는 고구려의 내해(內海)에 불과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해상제국 하면 백제, 장보고의 청해진을 떠올릴 것이다. 물론 이는 맞는 말이다. 백제는 뛰어난 해상력을 바탕으로 중국과 일본에 식민지(백제군, 진평군, 요서군, 북평군, 광양군 청하군, 성양군, 광릉군)를 건설했고, 장보고의 청해진 또한 막강한 해상력으로 동아시아 일대의 해상권을 주름잡았으니 말이다. 우리는 고구려를 막강한 기마군단을 보유한 대륙국가라고 생각해왔으나 사실 고구려 또한 뛰어난 해상력을 갖춘 해상제국이었다. 고구려가 해상제국이라 하면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이제부터 필자가 왜 고구려가 해상제국인지를 조목조목 설명하고자 한다.
 

 고구려의 건국지인 만주지방에는 송화강, 눈강, 우수리강, 요하, 혼하, 태자하, 압록강과 두만강 등 내륙하천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일찍이 고구려는 물과 밀접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내륙하천을 통해 물자의 수송, 군대를 비롯한 사람들의 이동의 주요 통로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고구려가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긴 이유가 압록강을 통한 수상교통의 이점을 얻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고구려의 시조 추모성왕의 외할아버지인 하백은 강의 교통로를 장악한 세력으로, 이를 통해 고구려가 초기부터 해상교통에 깊은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해상활동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지』 「오주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233년 북쪽의 위魏)와 대립하던 손권의 오(吳)는 요서지방에서 맹위를 떨치던 공손씨와 연합을 꾀했으나, 위나라의 압력으로 오히려 공손씨 세력이 오나라 사신을 죽이게 되었다. 오나라 사신 중 일부가 공손씨를 피해 산 속을 방황하다가 고구려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때 고구려와 오나라는 국교를 맺게 되었고, 오나라 사신이 귀국할 수 있게 고구려가 도와주었다. 고구려는 조의(皁衣) 25명과 담비가죽 1,000장, 꿩과 닭의 가죽 10구를 갖추어 보냈다. 이는 고구려가 이미 3세기에 장거리 항해가 가능한 우수한 수군능력을 갖추었음을 말해준다 할 수 있다. 더욱이 5세기 장수왕 때는 송나라에 말 800필을 수출하였다. 이는 뛰어난 해상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주변국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수군(水軍)을 활용하기도 했다. 396년(영락 6년) 광개토태왕이 백제를 정벌하여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는데, 백제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고구려 수군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고구려가 번영을 누리던 5세기에는 중국과 동방제국들의 교류를 차단하기도 하였다. 영락 10년에는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5만 군대를 동원하여 가야와 왜를 공격하였고, 이 전쟁의 승리로 고구려는 동해와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구려는 울산 지역에 해군기지를 둔 것으로 보인다. 이 곳에서 고구려가 수군활동을 했던 흔적은 『삼국사기』 「박제상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제인들이 앞서 왜에 들어가 모함하기를 신라가 고구려와 더불어 왜를 침략하려 한다 하니, 왜는 군사를 보내어 신라 국경밖에서 순회 정찰을 하였다. 마침 고구려가 와서 왜의 정찰대(巡邏軍)를 모두 잡아죽이니, 왜왕은 백제인의 말을 믿었다.”

 

 위 내용은 420년경 신라 동남 해안가에서 고구려 수군이 작전을 펼쳐 왜군을 격퇴한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다.이는 고구려 수군기지를 울산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한 증거이다. 『송서』 「왜국전」에는 478년 왜가 송나라에 보낸 국서를 적고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 고구려의 해상활동능력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보여주는 내용이 있다.

 

“고구려는 무도하여 우리나라(왜국)를 삼키려하니, 변방을 침략하고 약탈하여 근심이 적지 않습니다. 송나라와의 교통도 수시로 막아서 통하지 못한 일이 많았습니다.”

 

 고구려가 송과 왜의 왕래를 막았다는 것은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까지도 일시 장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남해안 일대를 장악했던 가야 연맹이 고구려에 굴복하던 5세기에 충분히 가능했던 일이다. 이렇게 한반도 동 · 남해안까지 장악한 고구려의 해군력은 백제와 신라의 사신이 중국과 교류하는 것을 서해에서 통제하기에 이른다. 고구려는 백제와 북위, 북위와 백제의 교류를 중간에서 차단하였다. 5세기, 백제가 중국의 남조와 교류를 한 것은 이를 말한다.

 5세기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를 보면 당시 고구려가 북위와 백제의 교류를 끊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백제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고 싶어도 고구려가 길을 막아서 한동안 사신을 보내지 못했다.  (중략)  고구려는 남쪽으로는 송, 북쪽으로는 유연과 동맹을 맺어 북위를 견제하고 있으니, 북위가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으면 장차 후회하게 될 것이다. 고구려 수군이 북위의 사신을 죽인 흔적이 있다.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북쪽의 북조는 고구려가 길을 끊고 있으니, 부득이하게 백제는 고구려의 힘이 미치지 않는 먼 동지나해에 위치한 남조와 교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고구려가 중국과 동방제국(諸國)간의 교류를 막은 기록

 

472년(개로왕 18년): 고구려가 북위로 가는 백제 선단을 막음
472년: 북위가 파견한 백제 사신단을 고구려가 중간에서 길을 끊음
476년(문주왕 2년): 백제가 송에 사신을 파견했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아 사신 파견을 못함
484년(동성왕 6년): 남제로 파견된 내신좌평 사약사가 고구려군을 만나 가지 못함
626년(영류왕 9년): 백제와 신라가 당에게 고구려가 길을 막았다고 하소연 함
648년(진덕여왕 2년): 당에서 돌아오던 김춘추가 고구려 순라군에 의해 사로잡힐 뻔함

 

 위의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5세기 장수왕 시기와 고구려 말기인 7세기에 고구려 해군력은 최고 절정기에 이른다. 특히 648년 사건은 구체적으로 고구려 해상순찰함이 당에서 돌아오는 신라의 배를 검문한 기록이다. 해상제국 백제 뿐만 아니라 중국의 선단까지 막을 만큼 당시 서해에서 고구려 해군력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려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가 연이은 수와 당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해상권에 있다.

 

고구려가 동방에서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천하관을 수립하자,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는 이를 참지 못하고 113만의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은 강력한 요동 방어선에 묶여 움직이자 못하자, 수 양제는 우문술, 우중문을 시켜 별동대 30만 5천명을 이끌고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함락시키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을지문덕의 전략에 걸려, 살수에서 대패한다. 이를 살수대첩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구려가 살수대첩의 승리를 이끌 수 있었던 요인에는 고구려 수군의 활동이 크다. 당시 수나라 해군 내호아는 수나라 별동대에게 식량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왕제(王弟) 건무의 계략에 의해 패강에서 크게 패한다. 이를 패강대첩이라고 한다. 즉 고구려의 수군이 패강에서 수나라 수군을 무력화 시켰기 때문에 수나라 별동대는 수군(水軍:수나라 수군)에게 식량을 공급받지 못해, 퇴각하다 을지문덕에 의해 크게 패배한 것이다.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단재 신채호 선생은 패강대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고구려가 이 때(건무가 내호아의 수군을 박살낸 패강대첩을 말하는 것) 이미 이길 지위를 차지하였으니 만일 전공의 차례를 따진다면 왕제 건무가 을지문덕보다 앞섰다고 할 것이다. 왕제 건무의 공이 이같이 컸지마는 역사를 읽는 사람들이 흔히 을지문덕만 아는 것은 무슨 연고인가? 사마온공(司馬溫公)의 통감고이(通鑑考異)에 내호아가 양식 배를 잃지 아니했더라면 우문술의 살수의 패전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옳은 말이다.”

 

 당시 고구려가 제해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고구려는 능히 수와 당의 엄청난 대군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고구려는 수와 당의 수군이 육군에 보급할 군량을 빼앗을 수 있었고, 게다가 수와 당의 수군기지를 위협함으로써,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대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해권을 장악하라!!!
 

 고구려가 백제, 신라, 왜와 중국의 나라들이 교류를 하는 것을 막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왜 고구려는 제해권을 장악하고자 노력을 했을까? 그것은 제해권 장악이 고구려의 안보와 더불어 엄청난 이익을 보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력한 대륙의 제국 고구려가 망할 수 밖에 없었던 요인 중의 하나가 제해권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5세기 고구려는 고구려 중심의 천하를 장악하며 번영을 누렸다. 그런데 6세기에 북쪽 물길의 발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남쪽의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고, 이에 따라 고구려의 제해권은 약해져갔다. 게다가 550년 돌궐의 침입으로 고구려가 돌궐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고구려는 제해권 장악의 중요지인 한강유역을 백제와 신라에게 빼앗기게 된다. 남쪽의 나라들이 고구려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고구려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천하에서 벗어나 중국 세력과 연합하여 보다 큰 위험세력이 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 사신이 서해를 건너 중국과 통교하는 것을 중간에서 막았던 것이다.
 

 중국세력이 고구려를 공격해올 때 배후에 동맹국이 있다는 것은 고구려에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렇기에 고구려는 남쪽의 나라들을 통제하여 고구려의 동맹국 내지는 중립국으로 만들 필요성이 있었다. 고구려가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주요 요인은 바로 신라가 당의 동맹국이 되었다는 것과 서해상의 제해권을 660년 무렵부터 당에게 빼앗겨 당나라 군대의 군량공급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막지 못했던 것이었다. 서해의 제해권 장악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세계의 안전을 보장하는 중요한 요소였는데, 이를 상실함으로써 고구려는 멸망에 이르렀던 것이다. 
 

 고구려가 제해권 장악에 큰 노력을 기울인 이유에는 중계무역의 이익을 얻고자 함도 있었다. 고구려는 북위의 표현대로 동방의 모든 나라를 제어하면서 동방의 맹주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북위와 엄청난 양의 무역을 했고, 그러한 무역품들은 발달된 도로와 수레를 이용한 국내상업망을 통해 전국으로 배급되었다. 게다가 중국과 교역이 자유롭지 못한 신라, 물길, 왜, 실위 등에 중계무역을 함으로써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이것이 고구려 번영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참고로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공격한 이유 중 하나도 위만조선이 동방의 여러 나라들이 중국과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간에서 엄청난 중계무역의 이득을 챙겼기 때문이다. 
 
 즉, 서해의 제해권은 고구려의 상업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송나라에 800필의 말을 수출할 정도의 엄청난 배를 갖고 있던 고구려는 기록되지 않은 민간의 교역 규모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한 이익을 바다를 통해 얻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당에서 신라로 돌아오는 김춘추 일행을 검문할만큼 고구려 해상순찰대의 활동이 대단히 활발하였을 것이다.
 

 제해권을 가지고 활발히 대외교역을 했던 고구려가 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해외무역에 소극적이었던 조선과 경제 활력도가 크게 달랐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구려를 제국으로 번성하게 만든 힘의 하나는 서해와 동해를 고구려의 내해로 삼을 정도로 강력한 해군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해상제국으로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참고: 김용만, 『고구려의 발견』

        김용만,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출처 : 이선생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