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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무기 이야기] <2>자주국방의 신호탄 下

영지니 2010. 10. 30. 15:46

 

[한국의 무기 이야기] <2>자주국방의 신호탄 下

세계일보 | 입력 2010.10.12 17:57

 




1978년 발사 성공… '유도탄 시대' 활짝
개발 2년만에 이룬 기적
5共정부 외면으로 중단

1978년 4월1일부터 9월16일 사이에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주도한 8차례 자체 비행시험에서 국내 개발 유도탄이 목표비행에 성공한 것은 4차례에 그쳤다.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 유도탄은 그해 9월26일 정식 시험대에 오른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국내외 귀빈들과 언론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개 행사를 가진 것이다.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하는 동시에 방위산업 능력을 과시해 북의 전쟁 도발을 억지하려는 박 대통령의 의도가 깔린 행사였다.





◇안흥 비행시험장 발사대에서 힘차게 솟구쳐 오르는 백곰 유도탄.
ADD 제공

유도탄 이름은 '백곰'(NHI)으로 지어졌다. 겨울철 발사대에서 눈을 뒤집어쓴 모습이 마치 곰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1977년 9월 완공돼 첫 공개 행사를 가진 안흥 비행시험장은 그야말로 초비상 상태였다. 이윽고 통제소 건물(MCC)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10초, 9초, 8초…1초, 발사!"

굉음과 함께 백곰 유도탄이 불기둥을 뿜으며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백곰이 100여㎞ 떨어진 목표 상공에 도달해 표적을 향해 수직낙하 중이라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곧이어 표적지점에서 일으킨 물기둥이 탄착지점에 있던 카메라에 찍혀 모니터상에 나타났다. 시험책임통제원의 "탄착!" 외침 속에 박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참관인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연구원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마침내 대한민국이 '유도탄 시대'를 연 것이다.

1974년 5월 박 대통령의 최종 재가를 거쳐 76년부터 연구·시험 및 생산 시설을 갖추고 본격 개발에 착수한 지 2년여 만에 이룬 기적이었다.

이후 ADD에는 국방부로부터 새로 창설될 시험부대를 위한 실용개발 지시가 내려졌다. 군과 ADD는 1980년까지 총 8회에 걸친 운영비행시험을 통해 백곰 유도탄의 성능 및 실용성을 확인하고 생산에 착수했다. 1980년 말 창설된 시험부대에는 1개 포대분의 백곰 유도탄이 배치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백곰 유도탄의 국산화율은 추적 레이더를 제외하면 90%를 웃돌았다. 선진국 전유물로 여겼던 유도탄을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도 충만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는 박 대통령 서거 이후 5공 정부에 의해 빛을 잃고 말았다. 박 대통령의 '기술주권에 의한 자주국방 정책'도 송두리째 바뀌었다.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이 1978년 9월26일 안흥 비행시험장에서 백곰 유도탄 발사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ADD 제공

초대 대전기계창장으로 백곰 개발의 핵심 축이었던 이경서 단암시스템즈 회장은 "전두환 대통령은 보안사령관 시절부터 백곰 유도탄을 미제 나이키 허큘리스(NH) 유도탄에 페인트칠만 한 가짜라고 믿었다"면서 "이런 오해 때문에 백곰 연구·개발인력 대부분은 거리로 쫓겨났고, 추가 개발과 실전 배치는 모두 중단됐다"고 말했다. 그는 "백곰은 박 대통령이 국가의 운명을 걸고 베팅한 사업"이라면서 "나이키와 외형만 같을 뿐 유도용 소프트웨어, 유도조종장치, 기체, 추진기관 및 탄두 등은 모두 개량하거나 새로 개발한 것들로 국산 개발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40년 이상의 미사일 개발 역사를 지닌 북한에 비해 우리 군의 전력은 한참 뒤처진다. 만약 30년 전 개발된 백곰 유도탄이 실전 배치되고 이후 미사일 개발이 이어졌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미완의 꿈으로 끝났지만 한 세대 전 우리 과학자들의 용틀임은 오래도록 기억해둘 일이다.

박병진 기자, 공동기획 국방과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