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상잔(6.25 & 5,18 )

6.25전쟁 사진전

영지니 2010. 11. 28. 21:10

 

▷1950.6.25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인민군은 38도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시작 하였다. 


▷1950.6.26 

한국의 사태를 보고 받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군의 불법 남침 중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 결의안을 찬성 9, 반대 0, 기권 1로써 가결하였다.

 

▷1950.8.1 
북한군의 계속되는 공세에 밀려 후퇴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선을 최후의 교두보로 선정하고 이 선에서 총반격을 실시한다는 작전을 계획하였다.


▷1950.8.5 
북한인민군은 8월 5일부터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하였다. 이에 맞서 국군 및 유엔군은 왜관·다부동, 창녕,·영산, 마산, 포항, 안강 등에서방어전을 전개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1950.8.16  

아군을 공격하기 위해 낙동강 건너편에 집결해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북한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으로 출격한 B-29폭격기 98대가 왜관 서북쪽 낙동강변 일대에 960톤의 폭탄을 투하 하였다. 이것은 6.25전쟁에서 전무후무한 대량의 융단폭격이었다.

 

▷1950.8.31  

8월 공세에서 성과를 얻지 못한 북한군은 다시 9월 공세를 시작하여 왜관·다부동,창녕·
영산, 마산, 포항 등을 공격하였다. 한때 영천과 경주가 위기에 빠지기도 했으나 국군 및 유엔군은 사투를 벌여 적을 물리쳤으며,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이곳에서 반격할 기반을 조성하였다.

 

▷1950.9.15 
맥아더 유엔사령관은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하고 전세를 역전시키기 인천으로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실시하였다. 
이 작전이 성공함으로써 북한군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전세는 반전되어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과 추격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50.9.28 
인천에서 상륙.. 낙동강전선에서 반격을 실시..
적을 추격하여 마침내 수도 서울을 탈환하였으며 
9월 29일에는 서울 수복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환도식이 중앙청에서 거행되었다.

 

▷1950.10.1 
반격을 실시한 국군 및 유엔군은 9월 30일 드디어 38도선에 도달하여 대망의 북진을 기다렸다.
그러나 유엔군사령부로부터는 정식 북진명령이 하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두명령에 의해 국군 제3사단 제 23연대와 수도사단의선두부대가 동부전선에서 38도선을 돌파함으로써 북진작전의 막이 올랐다.

 

▷1950.10.25 

유엔군의 항공정찰을 피하여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고 야간행군으로 북한지역의 산악지대에 잠입한 중공군이 처음으로 공세를 개시, 국경선에 접근한 국군 및 UN군 부대들을 포위, 격파하였다.

 

▷1950.10.26

한만국경선으로의 공격명령을 받은 국군 중에서 제6사단 제7연대의 선봉부대가 26일 최초로 압록강변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이 부대도 곧 중공군의공격을 받아 급히 철수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50.11.21

중공군의 공세를 받아 미 제8군이 청천강선으로 철수한 서부전선과 달리 동부전선에서는미 제10군단이 계속 북진을 실시하여  미 제7사단의 선두부대가 국경도시 혜산진을 무혈점령하였고, 국군 제3사단은 합수, 백암까지, 수도사단은 청진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들 부대들도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철수하게 되었다.

 

▷1951.3.15

거침없이 공격하던 중공군은 남으로 진출할수록 병참선이 길어지고 그 병참선이 유엔 공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한편, 워커 장군의 뒤를이은 리지웨이 제8군사령관은 위력수색 작전으로 적의 위치와 전투력을 확인토록 하면서 반격을 실시하여 전선을 북으로 밀어올리고, 3월 중순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탈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38도선까지 진격한 후 이 선을 돌파하여 재차 북진하였다.

 

▷1951.4.12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그 자신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지 않는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겸 미 극동군사령관을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미 제8군사령관인 리지웨이 장군을 임명하였다. 이로써 6.25 전쟁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1951.6.23,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

북진하여 한만 국경선 가까이 도달함으로써 남북 통일의 일보직전까지 이르렀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되자 미국은 군사적인 수단으로 한반도를 통일한다는 목적을 포기하고 정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소련과 중공도 이런 사태를 인식하였으며, 마침내 유엔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정전의사를 표시 하므로서

전쟁을 중지하기 위한 양측의 합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 자료

 

 

 

 

 

 

1943년 12월의 카이로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였고 다시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 재확인되었다. 다만, 그 독립은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미.소에 의하여 분할점령되었다. 분할된 상태로 미.영.소 3국 외상은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에 한국민은 맹렬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좌파세력이 소련의 지령에 의하여 찬탁으로 선회함으로써 정치적인혼란을 가져왔다. 한국문제가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직면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아무런 해결책도 강구하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1947년 9월에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뿌리치고 한국문제를 일방적으로 유엔에 제기하였다.
이로써, 38선을 경계로 한 남북한은 미소의 대립 속에서 이데올로기적인 갈등마저 겪으면서 국제무대에 노출되었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군사령관은 1948년 초에 활동을 개시한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하였다.


이에 유엔소총회에서는 선거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결의하여
그해 5월에는 남한에서만의 선거가 행하여 졌고, 8월에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그해 12월의 제3차 유엔총회는 한국을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선거를 실시하여  9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함에 소련을 비롯한 공산제국은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이로써, 한반도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분단을 공식화하였다. 정부수립을 마친 북한은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그해 10월부터 철병을 개시하였다. 남한에서는 공산세력의 준동에 대응하여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한 바 있고 이에 따라 미군의 주둔은 잠시 연기되긴 하였으나, 1949년 6월에 미국은 약 500명에 달하는 군사고문단 만을 남긴 채 남한으로부터 철병을 완료하였다.

 

미소에 의하여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은 이제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국경아닌 국경선이 되어버렸다. 그러한 분할독립 과정에서 북한은 소련에 의한 계획적인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여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이미 완전무장한 4개보병사단과 소련제 T-34중형전차로 장비한 제105기갑대대가 편성되었다. 1949년 3월 17일에는 소련과 북한간에 조소군사비밀협정이 체결되고 3월 18일에는 중공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중국공산군에 있던 조선군 2만5000명이 북한에 인도되어 10개사단 13만명이 38선에 배치되었고, 10만명의 예비군까지 후방조직이 완료되었다.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된 김일성은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고무되어 무력통일을 구상하게 되었다.남한에서는 1946년 1월에 미군정 산하의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는 1948년 8월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각각 육군.해군으로 국군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4월에는 해병대 그리고 10월에는 공군이 편성되어 그 병력은 약 10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비는 빈약하여 북한의 군사력에는 비할 수 없는 상태이었다. 더구나 예비군도 없이 8개사단 중 4개사단은 38도선으로부터 먼 후방에 배치되어 공산게릴라의 소탕에 여념이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남침을 개시하였다. 전쟁발발 소식을 접한 미국은 25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소집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라 선언하고 북한은 즉시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그 군대를 38선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6월 28일, 동경에 있던 미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MacArthur,D.S.)원수가 내한하여  전선을 시찰하고 미국방성에 지상군의 파견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7월 7일에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반도에서의 유엔의 군사활동을 위하여 미국에게 최고지휘권을 위임함으로써  미국의 맥아더가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의 군사지휘권은 미국의 맥아더 원수에게 주어졌으며,  한국을 원조하기 위하여 육군.해군.공군 및 지상군을 파견한 16개국의 군대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때 한국의 이승만대통령도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에게 이양한다는 각서를 썼고 이것이 이른바

대전각서로서 7월 14일에 수교되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