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건때마다 동대문 기울어졌다” 전래/화기막으려고 남대문현판만 세로로 달아/“숙정문열면 부녀자 풍기문란해진다” 폐쇄 남대문은 그 규모나 건축양식면에서도 4대문 가운데 으뜸이지만 현판휘호 「숭례문」의 솔직하고 방담한 솜씨 또한 단연 돋보인다.
천하명필인 남대문의 현판 글씨는 과연 누구의 필적일까.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위창 오세창(서예가)은 자신의 저서 「근역서화징」에서 현판 뒤에 「유진동서」라는 낙관이 찍혀있다며 중종때 공조판서를 지낸 유진동의 글씨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6·25전쟁뒤 남대문을 보수하면서 현판 뒷면을 살펴보았지만 그런 낙관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일설에는 태종때의 명필이자 신숙주의 아버지인 신장의 글씨라고도 하나 많은 사람들은 태종의 맏아들이며 풍류공자였던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말한다.
「임진왜란」이후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추강냉화」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때 숭례문 현판이 행방불명된 적이 있었다.새로 써서 달았으나 다는 족족 떨어졌다.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던중 청파역 아래 배다리(주교)밑에서 밤이면 이상한 서광이 비춰 사람들이 내려가보니 흙탕물 속에 양녕대군이 쓴 숭례문 현판이 묻혀있었다』 지금도 상도동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에는 5백년이 넘어보이는 「숭례문」 현판 탁본이 남아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남대문의 특징 가운데 또 하나는 현판이 다른 도성문과 달리 세로로 돼있는 점이다. 이는 오행사상에 따른 것으로 오행의 불(화)에 해당하는 예자를 세워 불이 타오르는 형상을 나타냄으로써 남쪽 관악산의 화기를 막고자 했다.
맞불로써 관악산의 화기를 억누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동대문인 흥인문의 현판 글씨가 유독 흥인지문 넉자로 된 것은 풍수지리설 때문이다.동쪽의 지기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원래 동대문일대는 다른 곳에 비해 지대가 몹시 낮아 도성과 성문을 축조할 때 많은 애를 먹었다.이 때문에 땅기운을 돋워주자는 뜻으로 넉자 현판을 걸게됐다고 한다. 동대문은 역사적인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한쪽으로 기울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고 전해진다.
수양대군에 쫓긴 단종이 영월로 귀양간 뒤 단종비 송씨는 동대문밖 정업원에 기거하면서 멀리 영월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던 어느날 밖에 나갔던 상궁 한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들어와 『동대문이 기울었다』고 전했다.
『어느 쪽으로 기울었더냐』는 단종비의 물음에 상궁은 『동남쪽』이라고 대답했다.단종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단종이 유배돼있는 영월이 바로 동남쪽이었기 때문이다.동대문이 동남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얼마후 단종은 끝내 사약을 받았다.
동대문이 기울었다는 기록은 또 있다. 광해군의 난정이 극심했던 그의 말년 동대문이 북서쪽으로 기울더니 북서쪽인 홍제원에서 인조를 옹립하는 반정군이 궐기,광해군을 내쫓았다.
구한말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도 동대문이 동남쪽으로 기울었다고 한다. 민간에서 북문이라 불려온 숙정문은 창건 초기부터 풍수지리 학자들에 의해 폐문의 운명을 겪어야 했다. 헌종때 실학자 오주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이 성문을 열어두면 상중하간지풍이 불어댄다고 해서 폐쇄했다』고 적고 있다.
북문을 열어두면 음기가 번성하게 돼 그 문틈으로 상중하간지풍,즉 부녀자의 풍기가 문란해진다 하여 숙정문을 굳게 닫아버렸다는 것이다. 좀더 설득력있는 설도 있다.
태종 13년 풍수지리학자였던 최양선이 『북악의 동쪽 능선과 서쪽 능선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은 것인데 이들 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바로 지맥을 손상시키는 것과 같다』고 태종에게 간언,
곧 이 문을 폐쇄하고 일대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서대문인 돈의문은 이정의 난과 사연이 얽힌 문이다. 인조반정에 참여했다가 훈이등이란 대우에 불만을 품은 이정은 인조2년 1월22일 평안병사겸 부원수로 있게된 것을 기회삼아 반란을 일으켜 서울로 향했다.
2월10일 서대문에 입성했으나 도원수 장만과의 싸움에 패퇴,서대문으로 다시 도망하려 했으나 어느새 문이 잠겨 있었다.하는수 없이 서소문으로 갔으나 그 문 역시 닫혀있어 남대문을 거슬러 남소문인 광희문으로 빠져나간 이정은 경기도 이천에 이르렀을 즈음 부하의 칼에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돈의문은 불의의 반군을 단호히 배척한 의열의 문이었다.<김순우기자>
'풍수,지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대한민국 명당이 어디인지 알고 싶으신가요? (0) | 2010.12.09 |
---|---|
4대문의 흥망성쇄 (0) | 2010.12.08 |
「터」의 저자 손석우옹 (0) | 2010.12.08 |
어느 가문의 묘소관리 (0) | 2010.12.08 |
면암 최익현(崔益鉉)先生 墓所 (0) | 2010.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