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鷄龍山과 정감록

영지니 2010. 12. 9. 21:19

계룡산은 공주시 계룡면과 반포면, 그리고 논산시, 대전시와 이웃하고  있다. 총면적은 60.98㎢. 차령산맥의 중심으로 능선이 닭 벼슬을 쓴 용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천황봉’, ‘연천봉’, ‘쌀개봉’, ‘문필봉’, ‘만적봉’, ‘수정봉’ 등 20여개 봉우리를 형성, 동으로는 ‘동학사’, 서남쪽의 ‘신원사’, 서북에는 ‘갑사’, 동남쪽엔 ‘용화사’가 있다.  
 

 


닭 벼슬을 인 용의 형국

 

이태조 이성계는 위화도(威化島) 철군으로 고려조를 뒤엎고 나서 계룡산 천도를 결심, 무학대사와 공주에 내려와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려 했다.

 

천도 결심은 이런데 있었다. 당시 왕도 개성(開城)에는 고려충신과 반정세력이 득실거리고 많은 정적을 살육한 탓에 이태조는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천도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무학대사도 처음엔 공주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금계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형상)이라며 이곳을 권했다.

 

 

그러나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 작업은 중단되었다. 하륜(河崙) 등이 극구 반대를 해서 한양으로 천도, 오늘에 이른다. 반대 명분으로는 요즘말로 실용주의가 서슬을 세운 때문이었다.

 

 

첫째 공주는 너무 남쪽에 치우쳐 동쪽과 북쪽이 너무 멀고 둘째, 주변에 큰 강이 없어 물류집산에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하면 세금을 현물로 징수하던 그 시대에 큰 배가 드나들 강이 없다.

 

 

금강이 있다고는 하나 작은 강인데다 강안(江岸)이 퇴적되어 운행이 어렵고 셋째, 당나라 풍수대가 호순신(胡舜臣)이 말하는 유수(流水)에 의해 땅기운이 씻겨내려 쇠할 지형이라 내세웠다.

 

 

 그래서 한양에 천도를 했다. 하지만 세종 등 몇 임금을 제외하고는 500년간 민란, 폭정, 외세의 침공 등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 여기서 조정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며 또 다시 천도설, 정감록이 고개를 들었다.

 

 

더러는 비과학적인 무속(巫俗)류 파로 무책임한 ‘혹세무민’의 표본이라 몰아붙이는 걸 우리는 봐온다.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데 있어 과학적 잣대로 치소금[計量]하는 데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비록 정감록에 공리공론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 민중과 함께 해왔다면 더욱 연구 분석, 집대성(정리)할 필요가 있는 줄로 안다.

 

 

하지만 전문성 없는 일개 언론인이 그토록 엄청난 정감록을 말한다는 건 모험이다. 그것은 오를 수 없는 태산이며 건널 수 없는 강(江)이다. 사리가 그러함에도 접근하려는 건 뜨거운 향의(向意) 때문이라 한다면 용훼할 수 있을 것인가.

 

 

 60년대 문화부를 맡고 있을 당시 계룡산 무속에 관심을 갖고 신도안을 비롯 헌 책방과 학교도서관을 드나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민속학자도 만나봤으며 당시 주역(周易)의 1인자라는 충남대 이모 총장을 찾았다. “그게 어디 귀동냥으로 될 일인가?”하고 마주하길 꺼렸다.

 

그 바람에 계획했던 지면을 ‘재벌성쇠도’라는 토호 이야기로 메웠던 아픈 기억이 있다.   
 


 
 

   

 

정감록의 허와 실

 

계룡산과 정감록은 떨어질 수 없는 순치(脣齒)처럼 수백년 간 민중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며 계룡산하면 정감록을, 정감록하면 계룡산을 떠올릴 만큼 우리의 뇌리에 박혀 있는 게 사실이다.

 

 

계룡산의 천도설(예언)은 망언이 아니라 이태조이외에도 60년대 박정권이 이를 서둘다 중단한 바 있고 노무현 정권에 와서 행정수도로 정했다는 건 예삿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 산엔 그 어떤 매력이 있는 게 사실이다.

 

 

여기서 산세론이 나오는데 중국의 명산 곤륜(崑崙)의 맥이 백두산으로, 그것은 또 금강산으로, 그 기운은 태백산과 소백산에 와서 금계가 알을 품은 형국인 계룡에 머문다 했다. 그래서 도읍지로 또는 피난처로 딱 떨어지는 지형이라 했다. 그럼 정감록의 시원(始源)은 어디인가.

 

 

이 책자의 저자나 그 시기에 대해선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정씨의 선대 ‘정감’과 이씨의 선대 이심(李沁)이 금강산에서 대좌, 왕도의 장래와 흥망, 이 민족을 이끌 지도자(性氏) 그리고 닥쳐올 재앙(災禍)를 예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를 받아 쓴 인물이 누구인지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천도설의 근거는 이렇다.

 

 

이씨의 한양도읍 몇 백년 후엔 정씨의 계룡산 천도 그리고 조씨의 가야산 도읍이 있고 다음에는 범(范)씨의 완산(전북) 시대를 거쳐 왕씨가 다시 개성으로 입성한다는 예언이다. 민심이 계룡산에 쏠리는 데엔 까닭이 있었다.

 

 

조선왕조에 불만을 품은 고려유민들과 시달리는 민중은 다음에 올 계룡시대를 열망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정감록’을 자의해석(?)한 도선(道詵), 토정(이지함), 무학대사의 예언까지 고개를 들며 계룡산은 더욱 유명했다. 그것이 하나의 예언이라고는 하나 정쟁이나 민란[反政]때는 한 가닥 신앙처럼 작용 해왔다는 건 주목할 점이다.

 

 

그러니까 옛날엔 민중에겐 ‘정감록’은 한 가닥 희망이며 종교인 동시에 인화물질이기도 했다. 선조 때 ‘정여립’의 역모와 인조, 광해군 때의 혁명, 그 이후의 동학 역시 정감록과 무관치 않다는 게 전문가의 말이다. 이렇듯 암울했던 시대, 민중의 중심에는 정감록이 자리했다고 볼 수 있다.

 

 

일각에선 ‘鄭道傳’이 민심을 교란시키기 위해 가첨한 저서라고 보는 이도 있는 듯하다. 정감록의 서술형식은 매우 비약적이며 우화(寓話)적인 데다 난삽하기 이를 데 없어 함부로 접하기 어렵다.

 

 

표현방법이 직설을 피하고 은유(隱喩 - Metaphor)적이어서 갖가지 해설이 가능하도록 열어 놓고 있다. 그래서 ‘토정비결’이 그렇듯 반반의 확률이 있다. 바로 말하면 고도의 함축, 은유로 해서 유교의 주자학(朱子學), 주역(周易), 풍수지리, 토정비결, 사주관상 모든 것과 직·간접으로 연결고리를 짓고 있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대목이다.

 

 

더욱 ‘음양오행설’, ‘도교사상’과도 무관치 않으며 파자(破字)풀이에 이르면 ‘난수표’ 해득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파자풀이는 ‘정감록’의 경지가 아니더라도 길거리에 목판을 내놓고 토정비결을 보는 점쟁이도 그 흉내를 낸다. 예를 든다면 대전(大田)이 시끄러운 도시라는 걸 파자(破字)풀이를 할 땐 이렇게 나온다.

 

 

밭전(田)자는 입구(口) 넷이 합쳐져 구성된 글자다. 입이 넷, 동서남북에서 몰려와 사는 도시가 되다보니 그 얼마나 시끄러울 것인가. 그것은 도떼기 시장이며 솰라판이다. 입이 넷이 모인 것만 해도 요란한 데 머리에 큰 대자가 붙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라는 식의 풀이다.

 

 

 

日帝도 묵인한 정감록

 

계룡산은 이조말기 ~ 일제시대 ~ 해방정국 ~ 6 ·25동란 ~ 60년대까지도 신흥종교가 득실거리는 그런 소굴이었다. 그것이 1975년의 소탕령에 의해 암자들을 말끔히 철거해 버렸다.

 

그 이전 일제 총독부에선 정감록을 교묘하게 이용했다는 설이 있다. 이를 탄압한 게 아니라 되레 방관, 민심의 해이(解弛)를 조장, 우리 민족의 응집력을 은연 중 분산시키려했던 걸로 전해온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계룡산을 본토 후지산(富士山)의 시산(侍山) 취급을 하며 새로 이전한 충남도청과 계룡산 그리고 부여 신궁(神宮)을 연계, 구심점으로 삼았다.

 

 

그들의 황거(皇居)와 후지산, 명치신궁(明治神宮)을 3각으로 묶어 제국의 상징으로 삼아온 등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래서 계룡산을 찬양하는 노래까지 지어 도민의 개창을 강요했다.


錦江灣に 聳へ 立つ
鷄龍山の 主峰に
元日高く 仰ぎつつ
眞の心  鍛へなむ


금강 만에 우뚝이 솟은/ 계룡산의 주봉에/ 설날 드높이 우러르면서/ 참된 마음 가다듬노라./
의역(意譯)을 하자면 이런 내용이다.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며 안으로는 심리전이라 할 ‘문화정책’을 갖고 충남도민을 휘어잡으려 했다. 그러함에도 계룡산의 아름다움과 정감록의 매력에 이끌려 전국에서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 바람에 기행(奇行)과 웃지 못 할 사건들이 속출했다. 한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앞으로 왕이 될 ‘정 도령’이 계룡산에 입산해 천기를 누설하면 화를 입는다며 여인을 유인했다. 사기꾼 무속인에 걸려든 건 천석구니 토호 청춘과부였다.

 

 

요란하게 단장한 ‘정 도령’의 방을 틈 사이로 훔쳐보니 정 도령은 모시 옷차림으로 잠들어 있다. 헌데, ‘정 도령’ 복부에서 서기(瑞氣)가 발하는 게 아닌가. 그 여인은 이에 혼이 나갔다.

 

 

이후 여인은 몸을 맡기고 왕자생산 꿈에 들 떠 천석구니 논문서를 바쳤다는 이야기다. 몸에서 발산하는 서기는 다름 아닌 전지(電池)였다. 귀하신 몸이라는 걸 그렇게 부각시켰다.

 

 

그 여인은 또 한 가지 신통력을  봤다. 하루는 ‘정 도령’이 암자에 앉아 왈 “내 세상이 다가오는데 이 땅엔 사람 같은 놈이 있어야지…. 버릇을 고쳐야 해…. 우선 저 놈부터 혼을 내줄까?” 때마침 건너편 산기슭을 걸어가는 남자를 지목했다.

 

 

정 도령은 “네 이놈 거기 섰거라!”하고 외치자 그 남자가 우뚝 걸음을 멈춘다. 그 다음 또 소리쳤다. “안 되겠어 이놈! 아직도 심장에 먹물이 고여 있어! 요절을 내야지.” 뺨을 치는 흉내를 하자 그 행인은 몸을 비틀며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한 식경 지나서 “정신 차렸으면 일어나서 쉬이나 해라.” 이 말에 행인은 벌떡 일어나 오줌을 눈다. “이제 그만 가봐!” 소리에 그는 가던 길을 재촉했다.

 

 

이와 같은 신통력 앞에 여인은 정 도령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왕비 꿈을 꾸었다. 그것은 신통력이 아니고 사전 모의에 따라 몇 시 몇 분에 그렇게 행동하도록 서로 시계 바늘을 맞춘 것이다.

 

 

 이는 계룡산의 무속을 상징하는 토막이야기다. 전지와 시계로 사기를 쳤다면 그것은 개화기 100년 전쯤 일로 짐작된다.

 

 

계룡산자락엔 이미 오래 전에 3군 본부가 들어섰고 이젠 행정수도까지 터전을 잡았다. 정감록 예언이 적중한 것인가. 우리는 그 예언이 들어맞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것이 조상 때부터 동반관계를 이루어 왔다는 점을 중시한다.

 

 

오늘날엔 그것을 연구 분석하는 인사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군 수뇌부가 이전해 올 당시만 해도 부대와 군인가족 사이에 잦은 사고가 발생, 불안에 떨었으나 공군분부 군종감(대령)이 부흥회를 열어 이를 눌렀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또 정감록에 조예가 깊어 그 난삽한 내용을 강의해 왔다고 한다. 정감록이 남의 것이 아닌 이상 연구 분석, 하는 것도 미덕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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