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역사

5.16 전후의 인사들

영지니 2011. 2. 25. 20:07

 

 

1961. 5. 16 쿠테타 거사후 3일째 되는날,

처음으로 서울시청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소장 좌측은 박종규소령, 우측은 차지철대위 이들은 훗날 경호실장직을 이어받는다.



1961년 5월 22일
쿠테타 본부 에서
거사 6일후,

쿠테타의 성공가능성이 보이던 때 심신의 피로누적으로 다소 초췌한 모습




5.16 후 박정희 육군대장 탄생 [1961. 11. 04]

대장계급장을 달아주는 사람은 윤보선대통령과 송요찬 내각 수반 

 


윤보선 하야 발표.(1962.03.22)

 

 

 

 

 

박정희 전 대통령 육영수 여사의 결혼식 모습

 

 

 

 

 

대통령선거 유세 중인 박정희 전 대통령 ,육영수 여사 부부 [1971]

 

 

투표장의 모습

 

 

근혜양의 운동회날 모습

 

 

 

 

김형욱과 이후락,점심식사라도 하고 나온듯 여유로운 모습

 

 

김종필,김형욱,김용태, 민간인으로 유일하게 5.16에 가담한 김용태 박정희대통령은 사석에서 그에게 '두목'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사석에서는 별명을 호칭하며 친근감을 표했다.

 

 
1974년 8월 15일 참극 직전의 광복절 행사장에 입장

 

 


유신말기 민방공훈련을 지휘하는 경호실장 차지철(가운데) 

경호실 작전차장보 자리를 이어받는 노태우(좌측) 전두환(우측)


故 육영수 여사 묘소 참배(77.9.17)
 

추석 선산 성묘(77.10.8)

 


선산 성묘(71.10.4)

 


故 육영수 여사 묘소 참배(79.8.14)

 

 

 

박정희 전 대통령 장례행렬 모습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때의 전두환 생도(앉은이)교복을 입은 단발머리 여학생이 이순자,

 

 

육사 11기 앨범에 실린 전두환 생도,

 

 공수여단 시절 부인 이순자 여사에께 사격을 지도하는 전두환 준장
군인 가족의 안보의식 고취를 위한 행사때의 사진,

1958년 미국에서 유격교육 과정을 밟을때의 전두환 대위,사진에 40피트상공을 나르는용사
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국보위 상임위원장에 취임한 전두환,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 집앞에서,육군대위 였든 전두환은 이화여대 2학년을 중퇴한 이순자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1955년 육사 11기 졸업앨범에서,왼쪽부터김복동,이동남,전두환,이영학,

 

 

 육사생도시절 노태우 생도와 전두환생도

 

 

월남전 당시 백마부대 연대장 전두환 대령과 부대를 순찰중이신 김종필국무총리 초대 중정부장 김종필국무총리와 마지막 중정부장 서리를 역임하게 될 전두환 대령

 

 

 

 미국에서 유격교육 과정을 마치고 공수교육 고등과정을 밟을때의 전두환 대위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전두환 제1공수여단장이 정병주특전사령관(팔짱)과 함께 참모로부터 작전상황을 보고받고 있다.


전두환 제1공수여단장의 낙하훈련

 

 

정병주사령관 휘하지휘관접견 ; 74년12월 전두환 1공수여단장과 노태우 9공수여단장이 배석해 있다.

정병주는 12.12당시 휘하의 3공수여단 부하들에게 체포되는 불운을 맞는다.

  

전두환 대장 전역식

 

[ 보안사령관 김재규(金載圭) 중장 ] 

1926년 3월 6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 출생 박정희와 같은 고향에서 태어난 김재규는 (박정희가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할 당시 제자)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교사생활(김천중고교 교사)을 접고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는데 박정희와는 9살의 나이차가 있지만 육사 2기 동기생이 된다.

 

  

 

 

 

 

  

 

 

 

 

 

 

보안사참모장 우국일준장의 합참2국 전출기념사진 [1979. 12. 18] 

 

 

 

 


5,18 의 일부 모습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에게 대장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눈이 온다음에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의지조를 알고 일이 어려워진 다음에야 사나이 마음을 알수있다 는 뜻,으로 백담사에서 하산한 직후 안현태 전 경호실장에께 준것으로 당시의 심정을 솔직히 표현 하고 있다,

 

1991년 가을 연희동 사저에서 감을따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큰 며느리 정도경씨,

 

 

 

 

야수 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김재규(金載圭) 전중앙정보부장.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을까.

정권안보의 핵심책임자로, 자신과 동향이고 육사동기생이며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해온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가슴에 총탄을 쏘았던 사형수 김재규에게는 과연 어떤 할 말이 있었을까.

 

「신동아」는 김재규가 사형집행되기 하루 전인 80년 5월23일 자신이 수감돼 있던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측에 남긴 육성유언 녹취록 전문을 입수했다.

당시 교도소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재규는 유언을 한 5월23일에 자신의 사형집행이 바로 다음날로 다가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형집행일은 교도소 관리규정상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교도소 핵심관계자들도 하루 전날에야 겨우 사형집행 계획을 통보받았을 정도다.

그런데 김재규는 이날 유학성(兪學聖)씨 등 신군부 인사들에 대해 이러저러한 「품평회」를 하다가 갑자기 『지금 녹음기를 갖고 있지 않느냐』고 교도소 관계자에게 물었다. 당시 교도소 관계자들이 주요 재소자 관리를 위해 비밀리에 녹음기를 품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황한 교도소 관계자가 무의식적으로 품속에 있던 녹음기를 만졌으나 김재규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얘기는 이 세상에서 내가 남기는 마지막 말이 될 것 같군. 잘 녹음했다가 역사에 전해주면 고맙겠소』
김재규는 이날 『내일이 토요일이어서 (사형)집행이 그 다음주로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다음날 오전 자신이 사형될 것임을 정확히 예측했다는 것이다. 김재규는 특히 74년 박정희 전대통령의 부인 육영수(陸英修)여사를 저격했던 문세광(文世光)의 기소날짜에서부터 사형집행일까지 일일이 기억하면서 자신의 집행일을 계산해냈다는 것.
 
 
『목숨 구걸하지 않고 끝까지 의연했다』
 
이렇게 자신의 운명을 내다본 김재규는 사형당하기 이틀 전인 5월22일 모친과 부인 등 가족들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면회를 했다.

김재규는 이날 부인 김영희씨 등에게 불경(금강경) 내용을 인용,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마음을 비운다는 뜻)이라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고 한다.

 

부하들 걱정과 함께 그 가족들을 잘 돌봐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가족들은 이날 면회시간이 끝나고 그가 뒤돌아서 들어간 교도소 문을 향해 10여분간 소리없는 합장을 올리며 자리를 뜨지 못했다.

관계자들의 기억에 따르면 김재규는 교도소 수감 이후 첫 면회를 온 모친이 『국부(國父)를 죽인 자가 살기를 원하느냐. 마음을 닦아라』고 말하자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김재규는 이어 교도소측이 제공한 모포를 깔고 모친을 앉힌 뒤 3차례 손등을 땅쪽으로 하여 큰 절을 올렸다.

 

불교도였던 모친은 품속에 준비해온 염주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한때 교도소측은 이 염주가 혹시 있을지 모를 자살기도에 이용될 것을 우려, 압수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까지 이 염주를 손에 쥐고 있었다.

마지막 날인 5월24일 새벽 4시쯤. 교도소측은 달걀과 사과 커피를 특별메뉴로 제공했으나 김재규는 손도 대지 않았다.

 

대신 쇠침대에서 뛰어내리면서 교도소 관계자들에게 손으로 권총 모양과 포승 모양을 지어 보이더니 『어느 쪽이냐』고 물었다.

교도소측이 아무 답변을 하지 않자 그는 『안개 피우지 마라. 사나이가 가는 길은 알고 가야 할 것 아니냐』고 말하고는 5분간 냉수마찰을 한 뒤 새옷으로 갈아 입고 길을 따라 나섰다. 식사를 하지 않고 냉수마찰을 한 것은 이승에 남기고 갈 마지막 흔적을 더럽히지 않기 위함이었을까.

 

철통 같은 호송속에 서울구치소로 호송된 김재규는 오전 6시쯤 교도소 당국이 법정에 나가는 수감자들을 보내고 자신을 반대편 대기실로 격리시키자 이미 허공에 혼을 날려보낸 듯 멍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형집행 직전 비굴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는 일각의 소문에 대해 당시 관계자들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증언했다. 한 관계자는 『김재규는 전혀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끝까지 의연한 태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형집행 직전 『남길 말이 있으면 하라』는 검사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훗날 전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전날 이미 자신의 유언을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오전 7시부터 시작된 사형집행 절차는 채 30분이 못 돼 끝났다. 부하 4명도 1시간 간격으로 잇따라 처형됐다. 다음은 23일 이루어진 김재규의 옥중유언 전문이다.
 
 
유신 이후 4차례 혁명 구상
 
김재규:오늘이 5월23일, 이른 아침이군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 남길 말을 남기고 갈 수 있는 최후의 날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내 소회에 있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나는 금번 1심 2심 3심, 즉 보통군법회의 고등군법회의 대법원 재판까지 3심까지를 거칠 예정이었는데 난 또 한차례의 재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제4심인데, 제4심은 바로 하늘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변호사도 필요없고 판사도 필요없어요.

 

사람이 하는 재판은 오판이 있을 수 있지만 하늘이 하는 재판은 절대 오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그러한 재판만이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명확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의 심판인 제4심에서 나는 이미 이겼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목격했던 민주혁명은 완전히 성공을 했다, 그렇게 해서 자유민주주의가 이 나라에 회복이 되고 그것이 보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들 이렇게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미 자유민주주의의 물결은 세차게 흐르기 시작해서 이 나라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있다, 이것은 천하 공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로막는 세력이 있어서 순조롭게 민주회복이 돼나가지 못하고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며 천하의 대세는 사람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기서 이런 비유를 하나 들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던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겠느냐. 오늘날 우리나라의 민주회복에 있어서도 나의 희생없이 이 나라의 민주회복이라고 하는 것은 「확실히 보장되었다」고 이야기하기 힘듭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자유민주주의의 고마움을 애절하게 느끼는 부류의 국민들도 있고 그것을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 부류도, (자유민주주의가) 필요하지만 (그 필요성을)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 부류도 없지 않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죽음, 즉 나의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동시에 자유민주주의가 절대 필요하고 자유민주주의는 절대 회복돼야 하겠구나 하는 것을 전체 국민이 아주 확실히 깨닫게 되고 또 그것을 확실히 자기 몸에다가, 목에, 자기 가슴에다가 못박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번에 나의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기 위한 민주주의 나무의 거름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시간이 된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고 또 보람으로 생각하고 매우 즐겁습니다. 나의 심정을 바로 이해해주는 사람은 바로 나의 뜻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그리고 내가 명확하게 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집권욕을 가지고 10·26혁명을 했다, 이러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조사를 담당했던 분들이라든가 혹은 재판을 담당했던 분들, 또 일부 유신체제의 중요한 위치에 밀착되어 있었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명확하게 이야기하지만 (내가) 집권욕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직 대통령을 희생시키는 일을 하면서 그 국가의 권력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그 집권이라는 문제는 내가 꿈에도 생각해본 일이 없습니다. 특히 나는 10·26혁명을 사실은 1973년 10월, 즉 10월유신이 반포되고 헌법이 반포된 직후에 그 헌법을 보고 그때부터 안 되겠다,

이 유신체제는 독재체제인데 이것을 깨야 되겠다고 이미 발상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 나는 네 차례에 걸쳐서 여러 번 이 혁명을 구상했었고, 또 이런 물리적인 혁명에 의한 방법이 아닌, 그야말로 박대통령 스스로가 이것을 시정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기 위해 수백번 건의를 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러나 그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나는 부득이 내 목숨 하나를 바치고 그렇게 해서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추호도 집권욕을 가지고, 집권을 하기 위해서 나의 가장 가까웠던 대통령을 희생시켜 가면서 (시해를)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나의 진의를 그대로 파악하지 못한 인간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백 번 죽어가도, 내가 집권을 하기 위해 대통령을 희생시키고 혁명을 했다는 것은, 내가 하늘에 맹세하고 말하건대, 그러한 일이 없습니다.
 
 
박대통령 설득했으나 소용없었다
 

김재규가 박정희대통령을 살해한 것이 당시 수사당국의 시각처럼 집권을 염두에 두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냐 하는 것은 아직도 많은 논란을 남기고 있다.

 

김재규의 구체적인 거사 동기와 관련해서는 당시에도 「우발적 확대설」 「내란음모설」「미(美) CIA 사주설」등이 분분했다. 보안사 주도로 합동수사본부에 의해 진행된 39일 동안의 수사과정에서나 79년 12월4일 첫 재판이 시작된 이래 이듬해 5월20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될 때까지 초고속으로 진행된 재판과정에서도 이 점은 명쾌하게 규명되지 못했다.

김재규는 이런 논란을 염두에 둔 듯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순수한 동기」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유언에 적극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여기서 김의 주장대로 과연 10·26이 「민주회복 혁명」으로 규정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있다. 이는 유신체제의 성격을 반민주적 정권으로 규정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민주혁명으로서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주권자인 국민의 주권회복을 위한 정치적 절차, 가령 선거라든가,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최소한 대중운동을 통한 국민의사 결집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정치학의 일반적 견해다. 그런데 김재규는 가장 극단적 형태의 폭력, 즉 개인적 살해행위를 통해 정권책임자를 제거했다는 것이다.

 

김재규는 이 점에 관해 79년 12월18일 군사재판의 비공개 최후진술(「신동아」 96년 10월호 보도)에서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대통령 한 사람을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 나라 전체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결국 이 혁명을 안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유신체제는 국민을 위한 체제가 아니라 박정희대통령 각하의 종신대통령 자리를 보장하기 위한 체제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 유신체제를 두고 정부와 국민간에 벌어질 공방전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게 돼 있다』

일체의 정치적 의사 결집이 봉쇄된 공포정치 하에서 결국 자유민주주의 회복과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개인적 차원에서라도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그는 관점에서 자신의 10·26 행위를 당시 유일하게 가능했던 「민주회복 혁명」으로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언에서 자신이 행한 「혁명」이 어디까지나 불완전한 시작에 불과하며 국민들이 이를 지키고 진전시키려는 노력을 다하지 않을 때는 더 큰 불행이 올 것이라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신군부가) 사심 못 버리면 불행 온다”
 
김재규:아무쪼록 모든 국민들이 민주주의의 고마움, 민주주의의 귀중함, 또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지켜야지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주셔야 합니다.

또 우리가 민주주의를 등한히 하면 꼭 민주주의는 우리 몸으로부터 멀어진다고 하는 것, 그런 경우에는 또다시 많은 희생을 치르지 않고는 민주주의가 회복되지 않는다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를 우리 국민들이 이해를 해주셔야 됩니다. 나는 국민들에게 이것을 간곡하게 부탁을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 이 대세가 어떤 일부세력에 의해 가로막힌다는 것, 이것은 국가적으로 볼 때, 국민 전체적으로 볼 때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이분(국민)들이 빨리 눈을 떠서 감정을 초월하고 정말로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을 생각을 해서 자기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어떤 길이 정도이고 어떤 길이 진리이고 어떤 것이 바른 길인가 하는 것을 빨리 깨달아서 국기가 흔들리지 않도록 빨리 바로 잡아줘야 합니다. 만일 이것이 흔들리게 되면 정치적으로 혼란이 오는 것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모든 발전이 저해가 되고, 또 국민의 마음은 결국 하나가 되지 못하고 나아가 어떤 불행한 결과를 자아낼는지 누구도 예측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자유민주회복을 위한 우리의 대혁명을 가로막는 이러한 세력들에 대해 진심으로, 마지막 진심으로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사사로운 마음을 버리고 개인의 감정을 초월하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더욱 튼튼한 국기(國基)를 위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는 것을 똑바로 파악을 하고 판단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안 되기를 희망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나의 희생이 후에 또다른 희생으로 파생될지 모릅니다. 그러한 불행이 제발 없어지기를 나는 진실로 바랍니다.
소위 민주회복을 하고 난 이후 이 나라의 민주회복이 무엇 때문에 이리 늦어졌느냐, 또 무엇 때문에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병들었느냐, 우리 국민들은 민주회복이 되고난 후에 이러한 여러 문제들을 심판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나는 바라마지 않습니다.
 
 
자랑스러운 부하들 선처해달라
 

김재규가 10·26 이후 발생한 12·12및 5·18로 이어지는 신군부의 움직임과, 이로 말미암은 장래의 「불행한 사태」들을 옥중에서 파악하고 예견했다는 점은 퍽 흥미롭다. 김재규는 자신이 유신체제를 타파하는 민주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했지만 이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국민일반의 노력과 연결되지 못함으로써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해들어가게 된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는 이 점을 「나의 희생에서 파생될 또다른 희생」으로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신군부 세력에 『민주회복 이후 국민들이 여러 문제들을 심판하려 할 것』이라면서 『대세를 가로막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가 이 말을 남긴 뒤 15년 남짓만에 실제 12·12, 5·18의 주역들은 「민주헌정을 파괴한 쿠데타 세력」으로 단죄됐다.

 

김재규는 유언 후반부에 향후 닥쳐올 정치적 혼란과 「민주주의의 겨울」을 염려하면서 이를 막기 위한 나름의 처방을 제시한 뒤, 자신의 부하들에 대한 선처를 당부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김재규:그 다음에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사회가 현재 매우 혼미한 상태에 있는데 지금과 같은 상태가 오래 계속되면 혼란이 오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계획했던 혁명에 있어서도 3개월 내지 5개월 이내에 완전히 민주회복을 끝마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정권이, 민주정권이 서서 완전히 국가에 대한 모든 대권을 장악해가지고 책임을 지고 우리나라 정치문제를 다뤄나가야 됩니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사 후) 7개월이 곧 넘어갑니다만, 아직까지도 그런 전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그래서 원컨대 빨리 민주회복을 해서 현재 사회적으로 혼란한 이런 문제를 빨리 극복해야 합니다.

 

우선 정치적으로 안정이 돼야만 경제적으로 안정이 됩니다. 그리고 특히 우리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기업도 살리고 사용자들도 근로자들도 (다같이) 복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양쪽으로 보장을 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알기에는 큰 기업들이 자꾸 도산이 된다든지 혹은 중소기업들이 몰락이 된다든지 또 영세한 근로자들이 박봉에 허덕여가지고 결국은 난동을 부린다든지 이러한 여러 문제들이 자꾸 생기고 있습니다. 국가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 어떤 문제가 생길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이 결과를 신중하게 생각해주어야 되리라고 봅니다.

 

그 다음에 나는 내 동지들, 나를 포함해서 7명이 됩니다만, 이 동지들에 대해 여러분들에게 확실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와 이념을 같이 하고 이 혁명에 가담을 했던 나의 동지들입니다.

이 동지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김태훈이라고 하는 동지 한 사람은 와전옥쇄(瓦全玉碎)다, 기왓장으로 온전한 것보다는 옥이 돼서 그야말로 분쇄되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숭고한 이야기입니까. 이러한 이야기를 한 동지들이 참 귀중하고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나의 부하들입니다.

 

사실 부하들에 대한 김재규의 애정은 남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재규는 자신의 비서실장으로 먼저 형이 확정됐던 박흥주(朴興柱·육사 17기)대령이 80년 3월6일 전격적으로 총살형에 처해진 사실을 육감으로 알게 됐다. 당시 교도소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재규는 박대령이 사형집행되던 날 밤 그의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박대령이 벼랑에서 떨어지면서 손을 내밀어 김재규가 이를 잡으려고 급히 손을 뻗었으나 아래로 떨어져버리는 꿈이었다는 것.
김재규는 다음날 교도소 관계자들에게 박흥주가 죽은 것 아니냐고 물었으나 교도소측은 박의 사형집행에 관해 일체 함구했다.
 
 
자부와 확신 안고 간다
 
김재규:그런데 요번에 이 재판의 결과가 나왔습니다만, 참고적으로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뭐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일본에 과거 5·26사태니 2·26사태니 하는 사건들이 있었습니다만. 그때 그 사람들은 장교들만 책임을 지웠지 하사관과 병(兵)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사람들이 잘하고 잘못하고 하는 문제를 초월해서 군대라고 하는 조직이 유지되는 데 있어서는 그 역경에서 전쟁을 수행할 적에 부하들이 명령을 선택적으로 받아서 수행한다고 하면, 만일 이러한 기풍이 있다고 하면 군대는 존립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서 부하라고 하는 것은, 상관의 명령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 있는 이런 관계가 아니면, 군대의 명령계통이라는 것은 존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상관이 명령을 했을 때에 이것이 정당한 명령인가 아닌가 판단을 해서 정당할 적에만 내가 이행을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해봅시다.

 

전쟁에서 만일 어떠한 종교를 독실하게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적을 보고 총을 쏘라고 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정신에 입각을 하면 나는 총을 쏠 수가 없다고 해서 거절했다고 합시다.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조그마한 비유에 불과합니다만,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권을 가진 것이지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안 받아들여지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나는 요번에 이 혁명을 결행하기 위해 내 부하 6명에 대해 강력한 명령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나의 명령을 100%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가지고 아주 완전히 자기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나는 이것은 참으로 본받을 만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적어도 재판과정에 있어서는 이 문제에 대해 명령을 한 나와 명령을 받아 가지고 이행한 이 사람들의 관계는 충분히 정상참작이 돼 판결이 됐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금요일입니다만, 내 영감으로 마음에 잡히는 것은 내일 토요일, 내일이 오전밖에 일이 없으니까 내일 오전중에 나의 형을 집행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내 영감으로 잡히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염려없이 아주 유쾌하고 명예스럽게,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자부와, 내가 이렇게 감으로써 자유민주주의는 확실히 보장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즐겁게 갑니다.
아무쪼록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영원한 발전과 10·26민주회복 혁명, 이 정신이 영원히 빛날 것을 저는 믿고 또 빌면서 갑니다.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마음껏 만끽하십시오.

 

 

출처; 산골난초_송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