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 5. 16 쿠테타 거사후 3일째 되는날,
쿠테타의 성공가능성이 보이던 때 심신의 피로누적으로 다소 초췌한 모습
1961년 5월 22일 쿠테타 본부 에서 거사 6일후,
5.16 후 박정희 육군대장 탄생 [1961. 11. 04]
대장계급장을 달아주는 사람은 윤보선대통령과 송요찬 내각 수반
윤보선 하야 발표.(1962.03.22)
박정희 전 대통령 육영수 여사의 결혼식 모습
대통령선거 유세 중인 박정희 전 대통령 ,육영수 여사 부부 [1971]
투표장의 모습
근혜양의 운동회날 모습
김형욱과 이후락,점심식사라도 하고 나온듯 여유로운 모습
김종필,김형욱,김용태, 민간인으로 유일하게 5.16에 가담한 김용태 박정희대통령은 사석에서 그에게 '두목'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사석에서는 별명을 호칭하며 친근감을 표했다.
1974년 8월 15일 참극 직전의 광복절 행사장에 입장
유신말기 민방공훈련을 지휘하는 경호실장 차지철(가운데)
경호실 작전차장보 자리를 이어받는 노태우(좌측) 전두환(우측)
故 육영수 여사 묘소 참배(77.9.17)
선산 성묘(71.10.4)
故 육영수 여사 묘소 참배(79.8.14)
박정희 전 대통령 장례행렬 모습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때의 전두환 생도(앉은이)교복을 입은 단발머리 여학생이 이순자,
육사 11기 앨범에 실린 전두환 생도,
공수여단 시절 부인 이순자 여사에께 사격을 지도하는 전두환 준장
군인 가족의 안보의식 고취를 위한 행사때의 사진,
1958년 미국에서 유격교육 과정을 밟을때의 전두환 대위,사진에 40피트상공을 나르는용사
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국보위 상임위원장에 취임한 전두환,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 집앞에서,육군대위 였든 전두환은 이화여대 2학년을 중퇴한 이순자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1955년 육사 11기 졸업앨범에서,왼쪽부터김복동,이동남,전두환,이영학,
육사생도시절 노태우 생도와 전두환생도
월남전 당시 백마부대 연대장 전두환 대령과 부대를 순찰중이신 김종필국무총리 초대 중정부장 김종필국무총리와 마지막 중정부장 서리를 역임하게 될 전두환 대령
미국에서 유격교육 과정을 마치고 공수교육 고등과정을 밟을때의 전두환 대위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전두환 제1공수여단장이 정병주특전사령관(팔짱)과 함께 참모로부터 작전상황을 보고받고 있다.
전두환 제1공수여단장의 낙하훈련
정병주사령관 휘하지휘관접견 ; 74년12월 전두환 1공수여단장과 노태우 9공수여단장이 배석해 있다.
정병주는 12.12당시 휘하의 3공수여단 부하들에게 체포되는 불운을 맞는다.
전두환 대장 전역식
[ 보안사령관 김재규(金載圭) 중장 ]
1926년 3월 6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 출생 박정희와 같은 고향에서 태어난 김재규는 (박정희가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할 당시 제자)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교사생활(김천중고교 교사)을 접고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는데 박정희와는 9살의 나이차가 있지만 육사 2기 동기생이 된다.
보안사참모장 우국일준장의 합참2국 전출기념사진 [1979. 12. 18]
5,18 의 일부 모습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에게 대장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눈이 온다음에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의지조를 알고 일이 어려워진 다음에야 사나이 마음을 알수있다 는 뜻,으로 백담사에서 하산한 직후 안현태 전 경호실장에께 준것으로 당시의 심정을 솔직히 표현 하고 있다,
1991년 가을 연희동 사저에서 감을따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큰 며느리 정도경씨,
정권안보의 핵심책임자로, 자신과 동향이고 육사동기생이며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해온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가슴에 총탄을 쏘았던 사형수 김재규에게는 과연 어떤 할 말이 있었을까.
당시 교도소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재규는 유언을 한 5월23일에 자신의 사형집행이 바로 다음날로 다가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형집행일은 교도소 관리규정상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교도소 핵심관계자들도 하루 전날에야 겨우 사형집행 계획을 통보받았을 정도다.
당황한 교도소 관계자가 무의식적으로 품속에 있던 녹음기를 만졌으나 김재규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김재규는 이날 부인 김영희씨 등에게 불경(금강경) 내용을 인용,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마음을 비운다는 뜻)이라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고 한다.
관계자들의 기억에 따르면 김재규는 교도소 수감 이후 첫 면회를 온 모친이 『국부(國父)를 죽인 자가 살기를 원하느냐. 마음을 닦아라』고 말하자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김재규는 이어 교도소측이 제공한 모포를 깔고 모친을 앉힌 뒤 3차례 손등을 땅쪽으로 하여 큰 절을 올렸다.
마지막 날인 5월24일 새벽 4시쯤. 교도소측은 달걀과 사과 커피를 특별메뉴로 제공했으나 김재규는 손도 대지 않았다.
대신 쇠침대에서 뛰어내리면서 교도소 관계자들에게 손으로 권총 모양과 포승 모양을 지어 보이더니 『어느 쪽이냐』고 물었다.
교도소측이 아무 답변을 하지 않자 그는 『안개 피우지 마라. 사나이가 가는 길은 알고 가야 할 것 아니냐』고 말하고는 5분간 냉수마찰을 한 뒤 새옷으로 갈아 입고 길을 따라 나섰다. 식사를 하지 않고 냉수마찰을 한 것은 이승에 남기고 갈 마지막 흔적을 더럽히지 않기 위함이었을까.
나는 금번 1심 2심 3심, 즉 보통군법회의 고등군법회의 대법원 재판까지 3심까지를 거칠 예정이었는데 난 또 한차례의 재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제4심인데, 제4심은 바로 하늘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변호사도 필요없고 판사도 필요없어요.
그런데 내가 여기서 명확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의 심판인 제4심에서 나는 이미 이겼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목격했던 민주혁명은 완전히 성공을 했다, 그렇게 해서 자유민주주의가 이 나라에 회복이 되고 그것이 보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들 이렇게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이런 비유를 하나 들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던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겠느냐. 오늘날 우리나라의 민주회복에 있어서도 나의 희생없이 이 나라의 민주회복이라고 하는 것은 「확실히 보장되었다」고 이야기하기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죽음, 즉 나의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동시에 자유민주주의가 절대 필요하고 자유민주주의는 절대 회복돼야 하겠구나 하는 것을 전체 국민이 아주 확실히 깨닫게 되고 또 그것을 확실히 자기 몸에다가, 목에, 자기 가슴에다가 못박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번에 나의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기 위한 민주주의 나무의 거름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명확하게 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집권욕을 가지고 10·26혁명을 했다, 이러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조사를 담당했던 분들이라든가 혹은 재판을 담당했던 분들, 또 일부 유신체제의 중요한 위치에 밀착되어 있었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 유신체제는 독재체제인데 이것을 깨야 되겠다고 이미 발상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김재규가 박정희대통령을 살해한 것이 당시 수사당국의 시각처럼 집권을 염두에 두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냐 하는 것은 아직도 많은 논란을 남기고 있다.
김재규는 이런 논란을 염두에 둔 듯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순수한 동기」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유언에 적극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민주혁명으로서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주권자인 국민의 주권회복을 위한 정치적 절차, 가령 선거라든가,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최소한 대중운동을 통한 국민의사 결집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정치학의 일반적 견해다. 그런데 김재규는 가장 극단적 형태의 폭력, 즉 개인적 살해행위를 통해 정권책임자를 제거했다는 것이다.
『이 나라 전체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결국 이 혁명을 안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체의 정치적 의사 결집이 봉쇄된 공포정치 하에서 결국 자유민주주의 회복과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개인적 차원에서라도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또 우리가 민주주의를 등한히 하면 꼭 민주주의는 우리 몸으로부터 멀어진다고 하는 것, 그런 경우에는 또다시 많은 희생을 치르지 않고는 민주주의가 회복되지 않는다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를 우리 국민들이 이해를 해주셔야 됩니다. 나는 국민들에게 이것을 간곡하게 부탁을 드리고 싶어요.
이분(국민)들이 빨리 눈을 떠서 감정을 초월하고 정말로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을 생각을 해서 자기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어떤 길이 정도이고 어떤 길이 진리이고 어떤 것이 바른 길인가 하는 것을 빨리 깨달아서 국기가 흔들리지 않도록 빨리 바로 잡아줘야 합니다. 만일 이것이 흔들리게 되면 정치적으로 혼란이 오는 것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모든 발전이 저해가 되고, 또 국민의 마음은 결국 하나가 되지 못하고 나아가 어떤 불행한 결과를 자아낼는지 누구도 예측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자유민주회복을 위한 우리의 대혁명을 가로막는 이러한 세력들에 대해 진심으로, 마지막 진심으로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사사로운 마음을 버리고 개인의 감정을 초월하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더욱 튼튼한 국기(國基)를 위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는 것을 똑바로 파악을 하고 판단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김재규가 10·26 이후 발생한 12·12및 5·18로 이어지는 신군부의 움직임과, 이로 말미암은 장래의 「불행한 사태」들을 옥중에서 파악하고 예견했다는 점은 퍽 흥미롭다. 김재규는 자신이 유신체제를 타파하는 민주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했지만 이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국민일반의 노력과 연결되지 못함으로써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해들어가게 된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는 이 점을 「나의 희생에서 파생될 또다른 희생」으로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신군부 세력에 『민주회복 이후 국민들이 여러 문제들을 심판하려 할 것』이라면서 『대세를 가로막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가 이 말을 남긴 뒤 15년 남짓만에 실제 12·12, 5·18의 주역들은 「민주헌정을 파괴한 쿠데타 세력」으로 단죄됐다.
김재규:그 다음에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사회가 현재 매우 혼미한 상태에 있는데 지금과 같은 상태가 오래 계속되면 혼란이 오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계획했던 혁명에 있어서도 3개월 내지 5개월 이내에 완전히 민주회복을 끝마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컨대 빨리 민주회복을 해서 현재 사회적으로 혼란한 이런 문제를 빨리 극복해야 합니다.
우선 정치적으로 안정이 돼야만 경제적으로 안정이 됩니다. 그리고 특히 우리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기업도 살리고 사용자들도 근로자들도 (다같이) 복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양쪽으로 보장을 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알기에는 큰 기업들이 자꾸 도산이 된다든지 혹은 중소기업들이 몰락이 된다든지 또 영세한 근로자들이 박봉에 허덕여가지고 결국은 난동을 부린다든지 이러한 여러 문제들이 자꾸 생기고 있습니다. 국가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 어떤 문제가 생길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이 결과를 신중하게 생각해주어야 되리라고 봅니다.
이 동지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김태훈이라고 하는 동지 한 사람은 와전옥쇄(瓦全玉碎)다, 기왓장으로 온전한 것보다는 옥이 돼서 그야말로 분쇄되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숭고한 이야기입니까. 이러한 이야기를 한 동지들이 참 귀중하고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나의 부하들입니다.
뭐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일본에 과거 5·26사태니 2·26사태니 하는 사건들이 있었습니다만. 그때 그 사람들은 장교들만 책임을 지웠지 하사관과 병(兵)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사람들이 잘하고 잘못하고 하는 문제를 초월해서 군대라고 하는 조직이 유지되는 데 있어서는 그 역경에서 전쟁을 수행할 적에 부하들이 명령을 선택적으로 받아서 수행한다고 하면, 만일 이러한 기풍이 있다고 하면 군대는 존립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서 부하라고 하는 것은, 상관의 명령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 있는 이런 관계가 아니면, 군대의 명령계통이라는 것은 존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상관이 명령을 했을 때에 이것이 정당한 명령인가 아닌가 판단을 해서 정당할 적에만 내가 이행을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해봅시다.
전쟁에서 만일 어떠한 종교를 독실하게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적을 보고 총을 쏘라고 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정신에 입각을 하면 나는 총을 쏠 수가 없다고 해서 거절했다고 합시다.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조그마한 비유에 불과합니다만,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권을 가진 것이지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안 받아들여지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은 나의 명령을 100%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가지고 아주 완전히 자기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나는 이것은 참으로 본받을 만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오늘이 금요일입니다만, 내 영감으로 마음에 잡히는 것은 내일 토요일, 내일이 오전밖에 일이 없으니까 내일 오전중에 나의 형을 집행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내 영감으로 잡히는 것입니다.
출처; 산골난초_송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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