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고대 이집트의 흑인 파라오

영지니 2011. 4. 4. 22:41

고대 이집트의 흑인 파라오

 

[아래의 지도와 글과 사진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2008년 2월호 특집 기사를 발췌한 것입니다.]


(글=로버트 드레이퍼, 사진=케네스 개릿)

 

 

오늘날의 수단에 위치한 누비아의 흑인 파라오들은 이집트를 재통일하여 75년 동안 고대 이집트 전역을 다스렸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그들의 역사가 최근에야 밝혀졌다.

 

 

기원전 730년 피예라는 이름의 한 사내는 혼란에 빠진 이집트를 구할 길은 이집트를 침략하는 것뿐이라고 결단했다. 그가 생각한 구원이 이뤄지기까지 피 흘리는 상황이 계속된다.

 

“모두 자신이 가진 말 중 최고의 말을 준비하라.” 그는 지휘관들에게 명했다. 거대한 피라미드들을 건설했던 위대한 문명은 군소 군주들에 의해 분열된 채 쇠퇴하고 있었다. 당시 피예(피앙키)는 20년 동안 아프리카 북동부의 누비아 왕국(오늘날 수단의 대부분 지역에 해당)을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또한 이집트의 진정한 통치자로 여겼다. 람세스 2세와 투트모세 3세 같은 위대한 파라오들의 영적 전통을 계승한 정통 후계자로 말이다. 피예가 하(下)이집트(나일 강 하류의 삼각주 유역)를 가본 적조차 없을 가능성이 높았던 만큼 일부에서는 그의 호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피예는 혼란기의 이집트를 정복한 인물이 된다.

 

그의 군사는 배를 타고 나일 강 북쪽으로 나아가 상(上)이집트(나일 강 상류 유역의 남부 이집트)의 수도 테베에 상륙했다. 피예는 성전(聖戰)을 수행하기 위한 절차로 병사들에게 전투에 앞서 나일 강에서 몸을 씻고 고운 모시옷을 입은 후, 카르나크 신전의 성수를 몸에 뿌려 몸을 정결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카르나크 신전은 피예 자신이 숭배한, 숫양의 머리를 가진 태양신 아몬을 기리는 성지다. 피예는 향연을 베풀고 아몬 신에게 제물을 바쳤다. 이렇게 정화 의식을 치른 후 그의 군대는 그들 앞을 가로막는 적을 물리치며 전진했다.

 

1년 동안 계속된 원정 끝에 나일 강 삼각주의 강력한 군주였던 테프나흐테를 비롯해 이집트의 모든 군소 군주들이 그에게 항복했다. 테프나흐테는 전령을 보내 피예에게 이렇게 전했다. “자비를 베푸소서! 이 치욕의 날에 감히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없고, 당신의 눈부신 광채 앞에 설 수도 없으니 이는 내가 당신의 위용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피정복자들은 목숨을 살려준 보답으로 피예에게 자신들의 신전에서 참배하고 가장 좋은 보석과 준마들을 가져가라고 간청하기까지 했다. 그는 기꺼이 그들의 청을 받아들였다. 피예의 속왕이 된 그들은 그의 앞에서 벌벌 떨었지만 누비아와 이집트, 두 왕국의 제왕으로 새로 등극한 피예는 다소 의외의 행보를 보였다. 군대와 전리품을 챙겨 남쪽에 있는 자신의 고향 누비아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그러고는 이집트로 다시 오지 않았다.

 

피예는 BC 715년 재위 35년 말에 죽었다. 신하들은 그의 바람대로 이집트식 피라미드에 시신을 안치했다. 그가 아끼던 말 네 필도 근처에 함께 묻었다. 그는 500여 년 만에 이집트식으로 매장된 최초의 파라오였다. 하지만 이런 위업을 이룩한 위대한 누비아의 왕, 피예가 우리에게 말 그대로 얼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교한 화강암 석비에 그의 이집트 정복을 기념하고자 새긴 피예의 모습은 이미 오래 전에 지워져 버렸다. 누비아의 수도 나파타에 있는 신전 부조에 피예의 다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외모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피부색이 어두웠다는 사실이다.

 

피예는 최초의 소위 흑인 파라오였다. 흑인 파라오는 75년 동안 이집트 전역을 통치한 이집트 제25왕조의 누비아 왕들을 일컫는다. 누비아인들과 그들의 적이 새겨놓은 비문으로 흑인 파라오들이 아프리카 대륙에 남긴 거대한 족적을 가늠할 수 있다. 흑인 파라오들은 분열된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장엄한 기념물들을 수없이 세우면서 오늘날의 하르툼 남쪽 국경에서 북쪽으로는 지중해까지 길게 뻗은 제국을 건설했다. 그들은 피에 굶주린 아시리아인들에 맞서 싸웠고 그 과정에서 아마 예루살렘도 구해주었던 듯하다.

 

최근까지도 흑인 파라오들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다 40년 전에야 고고학자들이 그들의 역사를 발굴해내면서 흑인 파라오들이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흑인 파라오들은 최소한 이집트 제1왕조로 거슬러 올라가 적어도 2500년 동안 나일 강 남쪽 유역에서 번성했던 강성한 아프리카 문명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오늘날 수단에 서 있는 피라미드는 이집트 전역의 피라미드보다 그 수가 훨씬 많다. 누비아 사막에서 기묘한 풍경을 연출하는 수단의 피라미드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달리 잡상인의 방해 없이, 심지어 홀로 그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 피라미드가 서 있는 이 지역은 수단 다르푸르의 집단 학살과 난민 사태, 또는 남부 내전의 여파가 전혀 미치지 않는 곳이다.

 

이 문명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다시 한 번 역사 소실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수단 정부가 아스완하이댐에서 나일 강 상류 쪽으로 1000km 지점에 수력발전댐 하나를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아스완하이댐은 1960년대에 이집트가 하(下)누비아(나일 강 제1폭포와 제2폭포 사이에 위치한 지방) 대부분 지역과 나세르 호(수단에서는 ‘누비아 호’로 불림) 저지대까지 침수시켜 건설한 댐이다. 대규모 메로우 댐은 2009년경 완공될 예정으로, 댐이 완공되면 나일 강 제4폭포 접경지대가 170km 폭의 호수 속에 잠겨 수천 점의 유적이 빛 한 번 보지 못한 채 수몰될 위기에 처해 있다. 그래서 지난 9년간 고고학자들이 이 지역으로 모여들어 누비아 역사의 또 다른 보고가 물에 잠기기 전에 전력을 다해 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웃이자 경쟁관계였던 이집트와 누비아  최소한 BC 2000년부터 누비아의 금을 착취해온 이집트는 신왕국 시대에 ‘쿠시’로 알려진 남쪽의 이웃나라를 정복했다. 이후 이집트가 정치적 혼란에 빠지자 누비아인들은 이집트로 진군해 BC 7세기 아시리아인들이 그들을 다시 남쪽으로 몰아내기 전까지 이집트를 통치했다.

 

 

 

BC 8~7세기에 이집트를 통치했던 누비아의 왕 중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타하르카는 북쪽에서 쳐들어온 아시리아인들을 물리치는 한편 나일 강변을 따라 웅장한 기념물들을 건립, 증축했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바니팔의 군대가 쳐들어와 타하르카는 결국 남쪽에 있는 그의 고국 누비아로 쫓겨난다. 타하르카는 그곳에서 BC 664년에 죽었다.

 

 

 

타하르카를 비롯해 누비아의 파라오들과 왕비들은 그들의 고국 누비아에서 당시 정치, 무역의 중심지 나파타(오늘날 수단에 위치함) 근처에 위치한 이집트식 피라미드 안에 안치되었다.

 

 

 

BC 730년 누비아의 왕 피예가 이끄는 군대는 나일 강을 따라 도시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복한 뒤,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수도 멤피스를 불화살로 맹공격한다. 피예는 람세스 2세(성벽의 조각상)와 같은 강력한 파라오들을 본보기로 삼으며 자신을 이집트의 정통 통치자라 주장했다. 그는 북쪽의 군소 족장들을 굴복시켜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75년 동안 누비아는 이집트 전역을 통치한다.

 

 

 

대오를 지어 행군하는 이 목제 누비아 궁수들은 이집트 제11왕조 때 아시우트의 지방 총독이었던 메세티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BC 2000년경이었던 이때는 이집트가 혼란에 빠졌던 시기로 많은 지방 군주들이 누비아인과 외국인들을 자신들의 군대로 끌어들였다.

 

 

 

이집트가 피예 왕에게 바친 선물로 보이는 황금 여신상 장식의 수정 부적은 쿠루에 있는 왕실 묘지에서 발굴되었다.

 

 

 

원래 높이로 복원한 기둥 하나를 비롯해 나란히 늘어선 돌기둥 잔해들은 타하르카 왕이 고대 이집트의 가장 성스러운 곳 중 하나인 카르나크의 아몬 대신전에 증축한 주랑 현관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최고 3m 높이에 이르는 누비아 왕들의 석상은 오늘날 수단에 위치한 누비아의 수도 카르마에 매장된 채 발견되었다. 석상들은 BC 593년경 이집트 왕 프삼티크 2세가 남쪽으로 쳐들어왔을 때 파손되었다가 최근 복원되었다.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 투트모세 1세는 누비아 정복 후 나일 강 제3폭포에 있던 바위에 자신의 이름과 칭호, 승리를 기념하는 글을 새겼다. 이집트의 누비아 점령을 상징하는 이 전승비는 나일 강 상류로 여행하는 이들이 이 험한 구간을 지나면서 속도를 늦출 때 바로 눈에 띈다.

 

 

 

BC 1700년경 누비아의 고유 목축 문화는 머리 부분이 떨어져나간 이 여성 점토상을 만들어냈다.

 

 

 

권력의 절정기를 구가하던 타하르카 왕이 축제 기간 중 산 정상을 금으로 입힌 누비아의 바르칼 산 부근 신전 단지에서 아몬 신의 모습을 새긴 성스러운 배와 함께 왕비들을 대동하고 군중 사이를 지나고 있다. 그는 사제임을 뜻하는 표범 가죽을 걸치고 머리에는 코브라 두 마리가 장식된 왕관을 쓰고 있다. 두 마리의 코브라는 그가 누비아와 이집트, 두 왕국의 통치자임을 상징한다.

 

 

 

머리 손질을 받고 있는 카위트 왕비(석관에 새겨진 모습)는 이집트 제11왕조의 파라오 멘투호테프 2세와 정략 결혼한 누비아 출신의 귀족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바르칼 산 절벽 아래로 아문 대신전의 윤곽이 야자나무 숲 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누비아의 수도 나파타의 유적이 이 야자나무 숲 속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BC 1502년 투트모세 1세가 누비아를 정복했을 무렵 이집트인들이 이곳에 작은 신전 하나를 건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BC 8세기 중엽 아문 신 숭배를 되살리면서 거대한 신전을 세운 이들은 바로 누비아인들이었다. 지금은 사막의 모래가 대신전을 뒤덮고 있다.

 

 

 

타하르카는 바르칼 산에 아몬 신의 아내인 무트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세웠다. 이는 이집트 북부에서 누비아에 이르는 제국 전역에 걸쳐 타하르카가 벌인 대대적인 토목사업의 일환이었다.

 

 

 

바르칼 산의 초기 궁전으로 알려진 건물의 알현실 발굴 작업 첫날, 현장 책임자 파웰 울프가 아몬 신의 누비아 상징인 숫양 머리 장식의 기둥들을 발굴하고 있다. 이 구조물의 제작 연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가 맨 처음 궁전을 짓고 나중에 누비아 왕들이 최대 네 차례 증축한 것으로 믿고 있다.

 

 

 

파리채 손잡이로 보이는 이집트 제19왕조의 유물. 누비아인을 집어삼키는 사자 장식은 누비아인들을 정복해 나라를 보호하고 혼란을 막은 용맹한 이집트 통치자를 상징한다.

 

 

 

누비아는 고대 이집트의 주요 금 공급원이었다. 테베에 있는 투탕카멘 왕 시절 누비아 총독(‘후이’라는 이름의 남자)의 무덤에는 누비아 왕족이 군주에게 조공의 일부로 금 고리를 바치기 위해 행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누비아의 숙련된 금 세공사들은 이시스 여신 펜던트와 같은 걸작을 만들어냈다. 이 유물은 누리에 있는 한 누비아 왕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이집트에 대한 통치권을 잃고 수백 년이 지나서도 누비아는 메로에에 복원된 이 피라미드들처럼 왕릉을 피라미드로 짓는 이집트 전통을 고수했다. 오늘날 수단에는 이집트보다 더 많은 피라미드가 있다.

 

 

 

 

누비아 출신의 충실한 신하의 모습을 본떠 만든 이 목제 입상은 이집트 제6왕조 때 상이집트를 통치했던 페피와 함께 메이르에 있는 페피의 무덤에 안치되었다. 죽은 사람의 조각상 주위에는 생전에 그를 위해 일했을 술 빚는 사람, 빵 만드는 사람, 도자기 굽는 사람, 요리사, 농부, 선원, 음악인 등의 모습을 딴 이런 입상들이 많이 놓여 있는데, 이는 사후 세계에서도 그를 보좌하고 기쁘게 해주라는 의미였다.

 

 

 

투탕카멘 왕의 조모로 권력이 막강했던 왕비 티이는 과연 누비아 혈통이었을까? 세월과 함께 색이 짙어진 이 목제 흉상은 그녀가 누비아 혈통이었다는 주장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타하르카와 혈투를 벌이며 매일 끊임없이 싸웠노라. ... 모든 신들이여 그를 저주하소서.” 아시리아의 왕 에사르하돈(화강암 석비에 새겨진 모습)이 BC 674년 이집트의 누비아 왕을 물리쳐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해 이렇게 말했다. 에사르하돈은 그가 아시리아로 끌고 온 사람들과 재산의 목록을 기록했다. 그 중에는 누비아의 왕세자인 타하르카의 아들 우샨쿠루도 있었는데, 석비에서 목에 밧줄을 매고 에사르하돈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인물인 듯 보인다.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물낚시 상식  (0) 2011.09.06
사진으로 배우는 찌 맞춤법  (0) 2011.09.06
공부에 유용한 사이트   (0) 2010.11.21
여행관련 사이트 모음  (0) 2010.11.21
서울의 4대문과 4소문  (0) 2010.11.20